Bongta      

방(方)과 원(圓)

소요유 : 2008. 7. 7. 09:04


방(方)과 원(圓) - 방원(方圓)

흔히 일컫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이란 말은 글자대로 풀자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가 나있다쯤 되겠다.
지구(地球)란 글자를 보면 球라고 하여 공같이 둥근 땅을 일컫고 있으니,
지방(地方)과는 아연 뜻이 갈려 어긋나고 있다.
물론 이는 지구란 글자가 훨씬 후대에 나온 것이니 그렇다치더라도,
고대인의 땅이 반듯하니 네모지다라는 사고는 사뭇 재미있다.

하늘은 넓고 넓어 가뭇없이 펼쳐져 있지만,
땅은, 벌 달려 달려, 산 넘고 또 넘으면 언젠가는 깊은 낭떨어지 절벽에 이르고 말 터,
허니 그 끝이 있은즉 네모를 빌어 그 한계가 있음을 추단한 게 아닐까 ?
나는 여기 깊은 두려움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한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인간의 반응 형식으로는 동경과 두려움이란 두 가지 상반되는 감정이
있을 법한데, 지방(地方)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의식의 근저엔,
두려움이란 감정이 동경과 모험의 감정을 앞질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두려운즉 땅은 한계가 있고, 또는 거꾸로 땅이 한계가 있은즉 두려웁고,
하니 자기가 사는 그 밖으로 더 나아가는 위험한 짓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두려움이 자기 강화과정을 거치게 되면 폐쇄적이고 자기 중심적이 되기 싶다.
나아가 자기 외의 것에 배타적이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게 된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사상이란 게 따지고 보면,
이런 깊은 두려움의 소산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하기에 남만(南蠻),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 등 중국 외 사방은
모두 오랑캐가 사는 나라로 치부하기도 했다.
밖을 낮춤으로서 스스로 중하고 귀하다라고 생각은 실은 두려움을 위장하고,
혹은 자신을 따스히 위로하기 위한 자기최면이라고 규정한다면 억탁(臆度)일까 ?
그런데, 실인즉 이런 태도가 문화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 것은 아닐까 ?
나는 이런 의문을 곧잘 갖는다.
실제 남북조 시대 소위 오호십육국이 발호할 때,
북쪽은 거지반 그들이 말하는 오랑캐들이 점령했지만,
그들 오랑캐들은 급속히 중국문화에 동화되어 버리고 만다.
내 식에 불과하지만, 두려움 속에 내팽개쳐진 까닭에 정작 문화가 발전한 것이라면,
지방(地方)이란 게 따지고 보면 그 결정적 증거가 되고 있음이 아닌가 ?

그런데, 이런 얘기는 더 밀고 나가지 말고, 여기서 접자.
내가 오늘 얘기하고 싶은 것은 실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하니, 자리를 쓸고 물 뿌려 땅을 골라 돋은 후, 이야기를 새로 이어본다.

“그 사람은 성격이 원만하여 참 좋다.”
“그 인간은 모가 나서 참 강퍅하다.”

圓은 곧 원만(圓滿)이니 둥글어 너그럽고,
方은 곧 방각(方角)져 귀퉁이가 각지듯 모난 모습인즉 강퍅하다.
이 말들을 중심으로, 이리 이분화된 개념의 세계가 아무런 고민도 없이 그저 널리 퍼져 있다.
이것으로 족한가 ?
하는 의문과 더불어, 나는 지금 圓과 方의 원래 고유의 뜻을 바로 새겨보고 싶은 게다.

지구 자전축이 23.5도 정도 기울여져 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그런데 만약 지구 자전축이 정위(正位)로 바로 서 있다면,
우리나라 같은 동위도의 나라에서 보이는 춘하추동 사계의 변화가 있겠는가 ? 
지축이 편위(偏位)하기에 춘하추동이 있음이니, 우리가 정상으로 생각하는
사계절의 변화라는 것은 실인즉 지축의 모난 모습의 실상인 게다.

하나 더 짚어보자.
동무 이제마의 사상체질론을 한번 생각해본다.
우리 고유의 것이라 널리 자랑하지만, 사상체질이 실인즉 그리 잘 맞지 않는다.
이론 자체야 감탄할 정도로 참신한 것이고 배우는 바 크지만 지금은 이는 논외로 하자.
현실적으로 인간 체질을 고작 4가지로 유형화한 것이니,
변별력이 떨어지는 소이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체질이 어느 것일까 궁금해한다든가,
한의사마다 감별하는 체질이 다르다고 심각히 고민할 까닭도 없다.
왜 그런가 ?
체질이란 다른 게 아니라 오장육부가 편급되어 있음을 징표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태음인(太陰人)이 간대폐소(肝大肺小)하다 할 때,
간대하고 폐소하다는 것이니, 이는 한쪽으로 넘치든 부족하든 - 太過, 不及
해당 장부가 적절한 균형을 잃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간이든 폐가 중정한 크기라면 도대체가 체질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제마의 체질 감별의 기준이 되는 肝, 肺, 脾, 腎 장부 모두에 걸쳐
대소를 가늠할 수 없는 상태면 이야말로 어느 한편으로 편급된 바 없음이니,
도리어 최고의 건강 상태를 뜻한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의 체질을 한의사마다 중구난방으로 제대로 짚어내지 못한다면,
이는 참으로 다행한 노릇이지, 자신의 체질이 아니 잡힌다고 한탄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있지도 않은 체질을 위해 곡학아세하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장부가 대소를 떠나 모두 알맞은 상태라면 모두 고르게 제 기능을 발휘할 테고,
그런즉, 혹 미치지 못한다든가, 혹 넘치는 일이 없을 것이니 최상의 건강 상태가 아니겠는가 말이다.

지인무몽(至人無夢) - 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는 꿈을 꾸지 않고,
무상무병(無象無病) - 사상체질을 벗어났은즉 병이 없다.

그런데, 과연 그런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
하다 못해 지구도 기우러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평기(平氣)하지 않은즉 사계절이 오고, 불측지변(不測之變)이 생기며,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따른다.

(※ 그럼 지축이 바로 선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하는 문제는
후천개벽을 말하는 사람들에겐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지축의 기우러짐을 선후천의 기준이라든가,
우주의 선악정위 원인으로 보는데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지축 기우러진 지금의 세상 그대로 불측지변, 길흉화복이 일어나는 세상일 뿐인 것이지,
지축의 경사에 따라 정위를 논하는 것은 견강부회라고 생각한다.
실제 지축이 바로서면 사계절은 없어지겠지만 극지방은 혹한으로, 적도는 혹서 일방으로
지금 보다 더욱 살기가 어려워질 것이다.
저들이 말하는 후천이 이런 세상이 아닐진대,
지축정립으로 도래하는 후천을 노래하는 저들의 주장은 너무 터무니 없다 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지축정립의 세상이 바르고, 지금의 지축사립(斜立)이 그르다라는 의미에서
지축을 거론하고자 함이 아니라,
그저 펼쳐진 지금의 세계의 적나라한 모습을 선악시비없이 대하되,
이어질 이야기 체질과 대비하여 지축사립을 우정 비틀어 견주며 희화화 한 것이다.)

사람 역시 그러지 못하기에 사람마다 체질이 있고, 갖은 병이 따라다닌다.
    (- 체질이 4개가 부족하다고 하여, 어떤 이는 팔상론을 펴기도 하였지만,
        나는 체질이 도대체 몇개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혹 있다면 사람 수만큼 많지 않을까 싶다.
        하기사 그리 되면 진단은 어떻게 하고, 처치는 어찌할까 문제가 되리라.
        주역처럼 64개 정도로 분류하면 그럴싸한 현실적응형 모델이 될까나 ? -)
그러하기에, 미쳐 여기 걸맞는 음식과 약이 처방되고 있는 것이다.
방금 나는 처방(處方)이란 말을 썼다.

처원(處圓)이 아니라 처방(處方)이다.

이쯤에서 뜬금없이 체질론을 꺼낸 이유를 혹 눈치 채었을까 싶다.
내 말대로 과연 체질이 정위를 벗어나 편급된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면,
이를 바로 잡으려면 역시 모난 것으로 다스려야 하지 않겠는가 ?
큰 것은 깍아 덜어내고, 작은 것은 보태 더하여야 한다.
넘치고 미치지 못하는 것 - 太過, 不及
이를 바로 잡자니 역시 圓이 아니라 方, 즉 모난 것으로서 대처(對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 참고로 설문해자에서는 方을 배(舟)를 둘 합쳐 놓은 것이라고 했지만,
갑골문자로 거슬러 올라가면 쟁기를 의미하고 있다.
쟁기로 밭을 갈면 흙이 갈라지면서 고랑이 생기고 이내 두둑이 만들어진다.
이로부터 여러 갈래 의미가 파생되는데, 대체로 흙과 관련된 글자들이 많다.
이 글에서는 제번(除煩)하고 “모나다”라는 중심 어의를 취하여
제 흥껏 설렁설렁 거닐어 보았다.)

그러하니 약방문(藥方文), 약방전(藥方箋)이라 할 때,
方이란 글자가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藥은 곧 毒과 다를 바 없다.
왜 그런가 ?
태과(太過), 불급(不及)인 상태가 곧 병(病)이요, 체질인 것이 맞다면,
이를 바로 잡자면 필연코 그와 반대편으로 치우친 것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그것을 藥이라 점잖게 부르고 있지만,
내막을 알고 보면 그게 곧 毒이요, 모진 것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 
실로 약(藥)은 독(毒)이요 곧 방(方)인 게다.

그 이면의 진실을 헤아리자면,
방(方)이란 모진 것이되 실인즉 원(圓)을 지향하고 있는 사연이 있음인 것이다.
(원(圓) - 원만구족, 더 이상 구할 바 없이 가득 충족된 理想 상태)
이 슬프면서도 사무치는 사연은 도대체가 얼마나 가을바람처럼 추연(惆然)한가 말이다.
 
모름지기 원(圓)을 구하는 이는 마땅히 방(方)에서 찾아야 하는 도리를 나는 말하고 있음이다.
그렇다면, 거꾸로 원(圓)으로 도모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
지축이 23.5도 기우려져 있듯이 천하가 이그러져 있는 게 실상이라면,
도대체 원(圓)으로 바로 잡을 수 있는 게 무엇일까 ?
이 의문에 대한 답은 이 글을 대하는 이, 각자에게 남겨두고자 한다.

방책(方策), 방략(方略)이란 말에서
책(策), 략(略)이란 뜻은 자전을 찾아 뜻을 헤아릴 수 있다 한들,
도대체 方이란 글자는 왜 들어갔는가 이해를 못하던 이가 있다면,
이제 대충 까닭을 아실런가 ?
무엇을 도모하려고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내가 현재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이 외부에 존재하고 있음이 첫째요.
이를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둘째일 때,
내가 꾸며 도모하고자 하는 수단은 필연적으로 모난 것임이어야 한다.
하기에 원책(圓策), 원략(圓略)이 아니고 방책(方策), 방략(方略)인 것이다.
흔히 말하는 방법(方法) 역시 법(法)은 법이되, 무엇인가 모나게 두드러지게 꾀하는 것인즉,
방(方)으로 뜻을 명확히 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와서 바로 잡거니와,
나는 앞에서
“方은 곧 방각(方角)져 귀퉁이가 각지듯 모난 모습인즉 강퍅하다.”이리 말했다.
언설을 펴서 이끌고자 부득이 우선 방각(方角)이라고 그저 표면적인 풀이를 했지만,
실은 방정(方正)이라고 해야 적실(的實)하리라.

“方한즉 정(正)하다.”
“모난 것이 바르다”

이 말을 나는 새롭게 덧새긴다.
실제로 방지(方志)라 쓰고 이를 "바른 뜻"으로 새김이니,
이는 곧 모난 것이 바르다는 이치를 꿰고 있기에 그러함이다.
방지만 그러하겠는가 ? 이외도 숱한 용례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으리니,
이는 그 바름(正)이란 뜻에 부절부합(符節符合)하기 때문인 것이다.

아,
무릇 바르고자 하는 이는 모름지기 方으로 本을 삼아야 할지니,
역으로, 圓이야말로 굽음이니, 삼가 살필지라.

도대체가 둥근 것으로 굽고 휜 것을 가늠할 수 있겠는가 ?
척(尺, ruler) - 자는 그런즉 모가 난즉 천하를 바르게 재단한다.
너른 땅처럼 반듯하니 네모진 것이야말로 땅이 바르고 곧은 덕성을 가졌기 때문이 아닌가 ?
이 덕을 빌어 천하의 굽고 어두운 것을 바로 펼 수 있음이니,
실로 方, 즉 모남은 광정(匡正)의 지어미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즉 평화와 사랑은 실인즉 원(圓)이 아니라 방(方)으로 오는 것.
方이야말로 측은지심(惻隱之心)의 발로요, 대자대비(大慈大悲) 원력(願力)의 추동력이다.

방외인(方外人)이란 무엇인가 ?
방외(方外) 곧 속세를 여윈 자를 뜻하니 도사쯤 되겠다.
방내(方內)란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오탁악세(五濁惡世)의 예토(穢土)인 것이니,
일언(一言)으로 모난 곳이란 뜻이다.
천하인은 모두 방내인(方內人)인즉 한(恨)이 서려 간절히 원(圓)을 지향하되,
이리 모질게 모난 짓을 하고 살 수 밖에 없는 이치가 이러한 것이리라.

대자대비(大慈大悲)
자(慈), 비(悲) 앞에 대(大)자를 붙여 대자대비(大慈大悲)라 함은
그게 한가하게 그저 크다는 뜻을 더하고자 함인가 ?
원(圓) 앞에 대(大)자를 붙여 대원(大圓)이라고 하며,
아(我) 앞에 대(大)자를 붙여 대아(大我)라고 함은 무엇인가 ?
원(圓), 아(我)를 대(大)로 덮어 극(克)하고자 함이니,
이로서, 원(圓)은 ‘원’이되 ‘원’ 아닌 ‘원’이요,
아(我)는 ‘아’이되 ‘아’ 아닌 ‘아’가 됨이다. - 초극(超克)

자(慈), 비(悲)든,
원(圓), 아(我) 또는 방(方)이란 모두 비릿한 몸짓이요, 영원을 향한 몸부림일지니,
문득 대(大)의 세례를 받아 초극되지 않으면 순간에 머물다 사라질 위기의 미아들인 것임이라.
그것이 어떠한 것이 되었든 간에,
무엇을 구하는 한, 또는 무엇을 지향하는 한,
아직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러하기에 힘써 도모하려는 의지와 욕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태를 이제껏 나는 "모난" 것이라 개념화하였다.
대(大)라는 prefix는 그 부족한 상태가 해결된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구하되 보상을 바라지 않으며,
지향하되 거기 집착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행위자 자신이 그 행위의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매이지 않은),
그런즉 도리 없이 외부 세계엔 은휘(隱諱)돼 자신을 드러낼 바 없다.
그러므로 오히려 떳떳이 현재화하고 있는 과정을 말할 뿐이다.
그것은 도통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따위의 결과를 말하고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진행되고 있는 과정을 소박하니 담담히 그리고 있다는데 더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지금 방(方) 역시 구아(救兒)코저, 대(大)를 앞에 두어 대방(大方)이라 칭코자 하니,
이는 진실로 말하거니와 모난 것이 거듭나 모나지 않게 되는 도리를 말하고자 함이라.
그러한즉, 대방즉무방(大方卽無方)이기도 한 바라,
이 때에 이르러야 대원(大圓)을 알리니, - 大方, 大圓, 無方, 無圓이 한 끗도 다름이 없음이다.
이런 경지를 일러 대원경지(大圓鏡智), 구경각(究竟覺)이라 할지니.

끝으로 요한복음 한 구절을 인용해두며 그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In reply Jesus declared,
"I tell you the truth, no one can see the kingdom of God unless he is bor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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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7. 7. 09: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