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象)과 형(形)
상(象)과 형(形)
이를 주제로 언제 글을 한번 써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것을 밖으로 표현하자니 내가 제대로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
일변 귀찮기도 하여, 그냥 차일피일 미루고 이제껏 실제 글로 쓰지는 않았다.
그러던 차, 며칠전 우연히 글 하나를 보았다.
우선 그 글을 먼저 소개한다.
나는 지금 상(象)과 형(形)에 대하여만 말하고자 하였는데,
이 글은 변화(變化)까지 곁두리로 말하고 있다.
물(物)은 외형상 일정한 꼴을 갖추고 있다.
사람은 몸통에 팔다리, 머리가 달려 있다.
새는 몸통에 날개가 달리고 머리가 붙어 있다.
이렇듯 사물은 저마다 고유의 외형상의 모습을 갖고 있다.
이렇듯 외양상 드러난 형태를 形이라 부른다.
여담이지만, 태권도 같은데 보면 형, 품세라는 것이 있다.
이런 것은 형틀로서, 마치 동전을 주조(鑄造)하는 틀과도 비슷하다.
만들어진 틀에 쇳물을 붓거나, 내 몸의 자세를 맞추어 늘 같은 형상을 지어낸다.
이런 것을 모(模)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은 나무로 만든 것을 의미하며,
대나무로 만든 것은 범(范)이라고 하며,
흙으로 만들 경우에는 형(型)이라고 달리 부른다.
후에 대나무로 만든 것을 이르는 범(范)은 범(範)으로 바뀌기도 하였다.
우리가 흔히 쓰는 모범(模範)이란 말은 모(模)와 범(範)의 합성이니,
이는 형틀로 같은 것을 찍어내듯 본으로 삼아 배울 만한 대상을 이르는 것이니
그 유래를 좇아보면 그럴 싸 하다.
상(象)이란 것은 조금 설명이 어렵다.
음양오행설을 보자.
남 - 녀, 수컷 - 암컷, 뾰족한 것 - 오목한 것 등 구체적인 물형을 보고
이를 추상화 하여 각기 양 - 음으로 배대(配對)한다든가,
동.서.남.북.중앙, 춘.하.추.동.장하, 청.백.홍.흑.황 .... 등등을
각기 木金火水土 등의 오행에 배대한다고 할 때,
음양 또는 오행을 상(象)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상(象)이란 구체적인 물형의 이면에 숨어 있는 원리를 찾아 이를 추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를 숫자로 표시하기도 하는데 이를 수(數)라고 한다.
이 둘을 합하여 상수(象數)라고 하며, 이를 바탕으로 한 이론을 상수론(象數論)이라고 한다.
(※ 원래 상(象)은 귀갑(龜甲)에 나타난 모양을 취하여 점을 칠 때, 그를 이르는 말이며,
수(數)는 복서(卜筮)의 점괘를 이르는 말이니 순서를 따지자면 상(象)이후 수(數)가 따른다.)
이렇게 사물을 보고 합당한 상(象)을 찾아내게 되면,
직접적인 물형(物形)을 보고 사물을 판단하는 게 아니고
상(象)만을 들고서도 바른 판단을 행할 수 있다.
이는 복잡다기한 구체적인 사물을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공덕이 있을 뿐만 아니라,
상(象)만으로 구축된 이론 체계, 예컨대, 주역 괘상(卦象), 음양오행설에 의지하여,
숨겨진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유익함이 있다.
그러하니 범인들은 물형에 갇혀 사물의 내밀한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고,
그저 피상적인 이해에 머무르고 만다.
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물형(物形)을 뛰어 넘고, 상(象)을 통하여,
사물의 깊숙한 이치를 정순(貞純)히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가 고등학교 때 배우는 물상(物象)이란 교과과목 이름은 아주 썩 잘 지어낸 경우다.
물리(物理), 즉 물의 이치를 따지는 학문이니,
이는 곧 물의 상(象)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
사람에 따라서는 형(形)에 치중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상(象)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부류가 있다.
이 모두 어떤 것이 옳다는 등 선악을 논할 수는 없다.
다만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폐단이 생길 수 있으므로 경계하여야 하리라.
형(形)에 치우치다 보면 현실적이며, 이해타산을 너무 밝히는 폐가 생긴다.
반면 상(象)에 집중하다 보면, 이상에 치우쳐 공허한 관념에 빠질 우려가 있다.
형(形)에 치우치면 사람이 부박(浮薄)스럽게 되거나, 깊이 있는 성찰을 등한히 하기 쉽다.
반면 상(象)에 머무르면 사람이 부화(浮華)하여 실(實)을 소홀히 할 우려가 있다.
이 양자 마땅히 경계하여야 하리라.
내 이야기가 되어 재미없는데, 고등학교 시절 나는 수학 공부를 이렇게 하였다.
수학의 정석 ⅱ를 나는 매 항목마다 첫 소개문외 유제 정도만 풀고는 문제 풀이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다른 친구들은 문제 풀이에 집중하며, 서로 경쟁하듯 몇 문제 풀었다고 자랑하듯 힘써 노력하였다.
하지만 나는 기본 원리만 터득하는데 집중하였지,
성가시게 일일히 문제를 따라 다니면서 풀지를 않았다.
대신 기본 원리는 몇 번이고 반복하여 익혔다. 내겐 오히려 시험칠 때가 문제 풀이 연습시간이었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문제는 매번 요리조리 꽈배기 꽈듯 새롭게 제시된다.
그러니 아무리 많은 문제를 푼다한들 늘 새로운 문제 유형과 만나게 된다.
이런 것을 모두 쫓아 다닐 수도 없지만, 쫓아 다닌다고 모두 해결될 이치도 없다.
삼각함수면 삼각함수, 미적분이면 미적분의 기본 원리만 꿰고 있으면,
시험 문제가 아무리 어렵게 나와도 원리란 거울에 비추어 바로 절개할 수 있었음이니,
천변만변 그 어떠한 유형에 대하여도 대응할 수 있었음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게 바로 낱낱의 개별 형(形)이 아니라,
상(象)을 올바로 찾아내 대응하는 방식이었지 않은가 싶다.
수학 뿐이 아니라 물리, 화학 등 역시 문제 풀이가 아니라,
기본 원리를 장악하여 시험에 임하였으니,
나로서는 상당히 경제적으로 공부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공부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이런 접근 방식은 나의 개성이니,
나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려서부터 성향이 상(象) 지향성이었던 것 같다.
대신 형(形)을 소홀히 하는 폐단이 있으니 나로서는 이를 극력 주의하여야 할 노릇이다.
천수상(天垂象) 물수형(物受形)
천수상(天垂象)이란 상(象)은 하늘이 밖으로 드리어 내었다라는 것이니,
이는 법칙, 이치를 하늘이 스스로 상(象)으로 드러내었다라는 뜻이다.
그런즉 예컨대, 음양오행은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은밀한 드러냄을 사람이 다만 좇아 취해 가르침으로 삼았다 할 것이다.
물수형(物受形)이란 물(物)은 형(形)을 받아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나타낸다라는 뜻이다.
즉 사물이란 외형상 일정한 꼴을 갖는다는 의미이다.
그러하니, 형(形)은 눈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볼 수 있다.
하지만 상(象)이란 하늘의 가르침이니 심안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찾아낼 수 없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형(形)에 머물러 안주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보통 심안을 가진 이는 드므니, 나 홀로 깨우쳐 상을 배우기는 어렵다.
한즉, 스승이 필요한 소이가 이러하다.
먼저 배운 이, 선생은 그래서 귀하디 귀하다.
내가 모시고 배울 선생을 구하기도 어렵지만,
거꾸로 선생 입장에선 제자를 가려 두어야 할 필요도 있다.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 사람이 아니면 전하지 않는다.
요즘은 카페다 블로그다 하여 정보의 홍수 시대다.
오죽하면 블로그 - 즉 개인 일지까지 천하에 드러내놓고 손님을 맞이하려고 난리일까 ?
비인부전은커녕 오지 않을까 노심초사 안달이다.
천하에 모두 기다리다 지쳐 눈깔 빠진 자칭 블로그 선생들만 가득하다.
상(象)이라,
그게 진짜배기 천수상(天垂象)이라면 그리 헤프게 웹에 흩뿌릴 수 있을까 ?
그게 대수가 아니련가 ?
저들은 모두 외로운 늑대라, 간절히 다른 사람을 구하려는 목마름 때문일까 ?
한편으로는 치고 받고 싸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소통을 기하고자 애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일까 ?
하기사, 저들이 웹에 뿌리는 것은 상(象)이 아니라, 거개가 형(形)에 불과하다.
내겐 형(形)으로 눈에 뻔히 보이는 것을 굳이 글로 다시 기술하는 것은 도대체가 너무 싱겁다.
동어반복(同語反復)과 다름없는 이 따위 싱거운 글을 주고 받으며,
소통한다든가, 공감한다는 등 하며 놀라는 모습은,
그 또한 내겐 여간 싱거워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주로 상(象)에 한정하여 글을 쓴다.
이런 모습이 글 읽는 저들에게 혹 오해를 불러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글로 그저 소요유할 뿐인 것이니,
不識廬山眞面目
只綠身在此山中
(廬山-蘇東坡)
진면목은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다.
그러하니 내가 늘 말하지 않던가 ?
글, 말, 얼굴이란 것들은 결코 그리 믿을 만한 것이 아니다라고.
(※ 참고 글 : ☞ 2008/02/22 - [소요유/묵은 글] - 링컨의 얼굴)
그 잘나 빠진, 소통이 아니라 내가 말하는 소요유라면
마치 장날 박보장기 판 벌이던 꾼들처럼,
한 판 거하게 놀다가, 파장 무렵에는 싹 판을 걷고는,
이내 골목길 접어 들어 기명(器皿) 정갈한 주막에 몸을 풀리라.
운빈화용(雲鬢花容)이라 구름같이 탐스런 귀밑머리, 꽃같은 얼굴을 대하면
삼혼칠백(三魂七魄) 넋이 냅다 뜨리니,
낯에 내 암수(暗手)에 걸려 결단 난 핫바지 저고리 촌놈을 걱정하리,
전대 풀어 오늘 벌이 셈을 헤아리리,
혹은 다음에 건너 뛰놀 대화장, 진부장을 부질없이 앞 서 걱정할 까닭이 있겠는가 ?
두어라,
도량(道場)에도 술은 있어야 한다지 않던가 ?
지난 초파일 내가 사는 집 앞에 있는 절에는 막걸리가 몇 짝씩 도량 뜨락에 쌓여 있더라.
내사 워낙 위인이 바른 터일지니,
복전함에 땡전 하나 넣지 않은 터수인지라,
목구멍이 쩍쩍 소리를 내며 마른 논처럼 갈라져도,
내색하지 않고 일절 한모금도 청해 먹지를 않았음이라.
이제서라한들 어떠하리,
투병향(透甁香)이라던가 ?
향기가 술병을 뚫고 나온다는 그 술에 함빡 취하고 말리.
초아흐레 달님이 으스럼 으스럼 지켜보시는데, 이내 무엇을 더 구하리.
인연이 다하면 헤진 짚신짝처럼
하나는 두엄밭으로, 하나는 마루밑 강아지가 물어가지 않으리.
무엇 대단한다고, 당혜(唐鞋)라도 된다든, 옥 깍아 만든 옥혜(玉鞋)라도 된다든 ?
껴안고 걱정할 노릇이 있으랴.
하지만, 아직도 댓돌 위에 혼자 놓인 신발,
툇마루에 놓인 섣달 그믐 자리끼 물처럼 서리서리 차갑기 비수같고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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