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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낮춰라.

소요유 : 2008. 7. 12. 14:57


허리를 낮춰라.

산에서 내려오는데,
급경사지에서 앞 서 가는 꼬마 아이가 제대로 내려가지 못하고 어쩔줄을 모른다.
할아버지와 함께 왔는데, 할아버지는 이미 저 앞에 내려가 있고,
홀로 쳐진 아이는 기어히 불안스럽게 허리를 엉거주춤 굽힌다.
뒤에 가던 나는

“허리를 낮춰 봐라.”

이리 일러준다.

내가 외치는 소리를 듣고 할아버지가 멈춰서서는 꼬마가 다 내려오길 기다린다.
할아버지는 꼬마에게 “고맙습니다.”라고 내게 인사하라고 시킨다.

허리를 낮추라고 허리를 꺾으라는 얘기가 아니다.
허리를 곧추 세운 상태에서도 다리를 구부리면 허리가 낮춰질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서 허리를 꺾을 필요가 있을 수 있으나,
다리를 굽히든, 허리를 꺾든 중요한 것은 몸 전체의 중심을 가급적 지면에 가깝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무게 중심이 내려가면,
지면과 가까이 몸이 낮춰지기 때문에 우선 두려움이 한결 완화되며,
시야가 충분히 확보된다.
무술에서 기마자세라는 것 역시 무게 중심을 아래로 하고,
낮은 자세에서 위로 쳐다보는 시야각에서 상대를 대하면,
안정적으로 상대를 내 시선 안에 가둘 수 있다.
이 말은 타격할 수 있는 가능 영역이 넓어진다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여간 이런 자세로 내려오게 되면 설혹 실수하여 넘어진다고 하여도,
이미 자세가 낮춰져 몸이 충분히 지면과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에,
다친다한들 덜 다치게 된다.

허리를 낮추는 것과 함께 몸을 옆으로 빗겨 틀어 옆걸음질을 치는 것도 좋다.
이리 옆걸음질을 치면 정면으로 내려올 경우 발 끝으로 지면에 닿는 것에 비해,
족도(足刀)로 지면을 버티게 되므로 한결 접지면이 넓어지고 그 만큼 안전해진다.
이 역시 정면으로 내리막길을 상대하는 것에 비해,
사선으로 하산 길이 장악되므로 두려움도 한결 적어진다.

경우에 따라서는 옆걸음질을 좌우 번갈아 갈지자로 하여 꺾어 내려오면,
동선은 길어지지만, 등행 경로 경사각이 작아지므로 위험이 저감된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읽은 동화책 내용 중 기억나는 것이 있다.
육지에서 배까지 걸쳐진 널판을 통해 짐꾼이 짐을 배로 나르는 장면이다.
어느 초보 짐꾼이 둥그런 물건이라 굴려가며 배로 올리고 있는데,
자꾸 미끄러져 내려 당황하고 있었다.
그 때, 고참 선원이 그를 향해 외친다.

“발 뒤꿈치를 들어라.”

뒤꿈치를 들면 결국 발 끝으로 버티어 서게 된다.
발판은 위로 경사져 있기에 발 끝으로 서는 순간 몸통은 하늘을 향해 곧추 서게 된다.
이제까지는 발 전체가 발판을 밟고 있던 상태라 몸은 뒤로 기우려지게 되어 있다.
그러니 넘어지지 않으려면 허리를 잔뜩 웅크리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상태로는 힘을 쓸래야 도대체 쓸 수 없다.
이제 몸이 바로 서니, 발 끝을 축 삼아,
굴러내리려는 짐을 향해 몸을 앞으로 재량껏 버텨 기우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비로서 힘을 한껏 쓸 수 있게 된다.

“허리를 낮춰 봐라.”
“발 뒤꿈치를 들어라.”

이런 간단한 말 하나로 바로 이치가 서는 것도,
막상 자신이 처한 환경에선 꽉 막혀, 장기로 치면 stalemate - 수막힘 상태에 빠져,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럴 때, 옆에서 누가 한 마디 건네준다면 얼마나 다행일까 ?
돌아 보아, 그대 옆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

또는 독고다이의 삶이라,
그대는 그저 한 마리 외로운 늑대의 길을 걷고 있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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