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역겨움

소요유 : 2008. 7. 8. 10:10


이 글은 보나세란 사이트에 걸린 이독제독이란 글에 대한 또 하나의 감상이다.
사실 이전 글은 너무 점잖게 대한 측면이 있다.
이번 글도 하등 다를 것이 없지만,
이는 글 자체에 대한 내 자신의 감상이 중요하지,
글 주인에 대한 인격적 접근은 그의 글 단 2개의 글만으로는, 할래야 할 수도 없지만,
그게 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에 약간의 절제를 행하여, 멈춰 예를 취했었다.
하지만, 이번 글은 두번째이니 만큼, 점잖은 대접을 넘어,
조금 더 자유롭게, 썰 풀어 즐기고자 하는 것이다.
(이 전 글은 ☞ 2008/07/03 - [소요유] - 형 만한 아우는 없는가 ? )

이독제독(以毒制毒)이란 게 독으로서 독을 제압하다라는 뜻이오,
이이제이(以夷制夷)란 오랑캐를 오랑캐를 빌어 제압하겠다라는 뜻이다.
그러니 이는 속말로 “손 하나 대지 않고 코 풀다”라는 말에 비견된다.
자신은 손해 하나 보지 않고, 나의 적을 빌어 또 다른 적을 쳐낼 수 있으니,
여간 수지가 남지 않는 장사다.

그런데, 현실의 실패를 두고 “미래를 위한 아픈 투자”라든가,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한 형식 치고는
제법 그럴듯이 세련(?)되어 보여, 곁에서 지켜보는 이가 있다면,
“그 친구 참 딱한 처지지만 제법 용기를 내려 하고 있군” 하고 그냥 지나쳐줄 수는 있겠다.
뭐 인색하지 않은 자라면 등 두드려주고, 박수까지 치며 한껏 격려해줄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를 두고 이독제독이라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언어의 오용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독제독은 현실의 실패가 아니라 현실의 성공이 전제되어야 쓰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전이든 사후든 도모한 내내,
이 쪽에서 다친 것이 없을 때라야 이독제독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 않은데도, 이 말의 사용을 용인할 수 있다면 다음의 두가지 경우가 있겠다.
하나는 어차피 비유라는 것이 일전일리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닌즉,
얼추 그 뜻을 취할 수 있다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너그럽게 봐 주자는 태도가 있겠다.
실제 현실에선 이를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몽매한 축도 꽤 되겠지만.
나로서는 허용도(tolerancelimits)가 조금 엄격한 편이기도 하지만
‘현실의 실패’와 ‘현실의 성공’이란 전제가 틀린 만큼, 그렇지 않더라도 거저 용납하기는 힘들다.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
이게 중요한 것인데, 나는 사실 이것 때문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저으기 불쾌한 감정이 더해졌다.
분명 글 쓴 이도 지금의 정치현실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글 쓴 이는 “그래서 난 지난 대선에서 "그분"이 당선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다.”
이리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이를 이독제독이란 말을 빌어 꾸미고 있다.
만약 이 말이 잘못 된 것이 아니라면, 그리고 그가 국민의 한 사람이라면
자청하여 당신 자신도 제독의 희생이 되기를 기꺼이 청하는 이 용기란 얼마나 눈물 겨운가 말이다.

그런데, 이 순간 바로 의심이 들기 시작한다.
그가 책임 국민 중의 한 사람이 아니라든가,
또는 그가 국민 위에 있다든가, 아니면 그와 이해를 달리하는 위치에 있다면,
이독제독이라는 말은 이제 비로서 제 자리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로서는 이독제독이란 말이 이제 내가 오해하듯이 오용이 아니라, 선용을 한 것이 되고 만다.

말을 쉽게 해보자.
가령 이리 가정하자.
그가 지금은 변방에 밀려 손톱이나 썰고 있을 정치적 실패자라고 생각해보자.
지난 대선에서 자신의 과오로 국민 지지는 땅에 떨어지고,
정치적 기반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게다가 정적(政敵)은 반대급부로 엄청난 수혜를 입고 대권을 거머졌다.
이 참담한 현실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
처절한 회오 속에 자기반성을 하는 것일까 ?
아니면, 독우(毒雨) 맞아가며 촛불 켜는 이들을 지긋이 쳐다보며, 은근히 즐기는 것일까 ?

“그래 네들(국민)은 망가져야 돼. 자업자득이야.”
“그 분(명박)을 더욱 궁지에 몰아넣아라, 영치기 영차.”

파리 날리는 자신의 지역구 사무실에 앉아,
이리 비역질 하고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 비역 : 사내끼리 성교하듯이 하는 짓)

그리고는 넥타이 매고 대중 앞에 나서서는
시침 뚝 떼고는 “이독제독”이라는 말로 의뭉을 떨며,
적당히 자기비하의 몸짓을 섞어가며 세상을 탓한다.
제법 연출이 멋지지 않은가 말이다.

태반(太半)의 책임을 져도 모자를 위인이,
이제 독우중(毒雨中) 촛불 뒤에 숨어 자신의 과오를 덮고는
점잖게 그들을 나무라는 저 음흉스런 작태라니 나는 기어히 헛구역질이 나고 만다.

만약 그가 실패한 전직 정치인이 아니라,
노빠라고 하여도 하등 다를 것이 없다.
노빠 역시 그 글을 읽고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리라.
몰락한 자신들은 누구처럼 한가하니 봉하마을로 가서 사치스런[1] 정치2.0을 꾸밀만 한,
여력도 없을 터니, 그저 이런 글 따위나 소비하며
정각(井閣) 돌틈에 낀 두꺼비처럼 허벌나게 용두질이나 치며,
장마 뒤끝 웅덩이처럼 움푹 파인 눈깔 속에 허물어진 자신을 위로할 뿐인 것을.
   ([1]사치 : 사치가 아니라면 오로지 조중동 탓으로 나라가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
   조중동 탓하기 전에 자신의 과오를 돌보지 않는다면 사치를 넘어 무례오만이라고 한들
   무엇이 지나치리.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이번의 실패가 조중동 때문이라면,
   5년전 저번의 성공은 그럼 누구 때문이란 말인가 ?
   정녕 저번의 성공이 조중동 때문이 아니라면,
   이번의 실패 역시 조중동이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이치가 그러하다면, 이독제독이란 수사는 얼마나 허황되며,
   세상을 속이는 짓거리가 아니냐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왜 이리 고백하고 있는가 ?

"그래서 난 지난 대선에서 '그분'이 당선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했었다."

이런 이야기는 낯이 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어디선가 들었다.
그래, 바로 노무현도 진작 그리 고백하지 않았던가 ?

"딴나라와 연정하자."

안팎으로 연정을 외치고, 적들의 당선을 기원이나 한 무리들이,
이제 와서 왜 이독제독을 점잖은듯이 떨구어내고 있는가 말이다.
철면피들이 아닌 한, 그 누가 이 따위 뻔히 보이는 자가당착, 이율배반적인 말을
대명천지 밝디 밝은 한길 가운데 서서 감히 뱉어낼 수 있겠는가 ?
난 이 백주대낮 벌거벗고 나대는 시뻘건 추태가 심히 역겨운 것이다.

여기 이 자리에 자기 책임은 하나도 없다.
글 쓴 이 표현을 빈다면 “그 분”을 찍은 모두 미련한 자들의 책임이다.
그렇다. 진심이든, 거짓으로든, 그가  원하고 있듯이,
백번 당해도 하나도 아깝지 않은 위대한 교훈으로 작동되어야 할 것이니까.
그가 보기에,
저들 국민들은 밀가루 푸대 뒤집어 쓰듯 독을 뒤집어 써도 하나도 안타깝지 않은 미련한 족속들인 게다.
거기다 마음보도 하해와 같이 넓어 자신도 "그 분"을 찍는 적선도 마다하지 않았단다.
이쯤 되면 그의 넘치는 부조(扶助)가 너무 눈물 겹다.
얼마나 가증스러운 노릇인가 ?

그렇다면 이제 이독제독이란 말의 채용은 그들에겐 대단히 성공적인 선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게 역겹지 않을 도리가 없음이다.

국민이 봉인가 ?
열쳤다고 독우씩이나 맞아가며,
제놈의 값 싼 감상, 잇속을 위해 부역해야 하는가 ?
지옥이나 가라지, 썩을 인간같으니라고.

"김구선생은 실패한 정치인이므로 더이상 존경하지 않는다."

노무현의 이 말과 그의 이독제독이란 말은 얼마나 유사한가 ?
옛말에 이르기를 막장성패론영웅(莫將成敗論英雄)라 하지 않았던가 ?
"성공과 실패로써 영웅을 논하지 마라"
삼천만 동포와 함께 삼팔선을 넘자고 외치다, 못내 쓰러지신 분을 실패한 사람이라고 조롱하는 짓이나,
명박의 성공이 국민의 실패라고 이죽거리는 저 뻔뻔한 이독제독이란 문법이 도대체 다른 게 무엇인가 ?
김구 앞에 서서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망정,
감히 국민을 썩어빠졌다고 말할 수 있음인가 ?
조중동, 국민을 탓하기 이전에,
정작 그가 시급히 복원해야 할 것은 '염치'가 아닐까 ?
부끄러움을 아는 것 말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한 일이기나 할까 ?

***

동진(東晋)의 대사마에 오른 환온(桓溫)은 동진을 날로 해쳐먹으려 했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백세(百世)에 방명(芳名)을 떨치지 못하면,
마땅히 악명(惡名)이라도 만년(萬年)에 남겨야 할 것이다.”

그가 한 이 유명한 말은 제법 인상적이다.
일세(一世)를 보통 60년으로 보지만, 넉넉히 잡아 100년으로 보면
백세란 곧 만년에 해당된다.
(※ 1世代는 60년을 반으로 나눈 30년으로 본다.
그렇지만, 여기서는 그저 一世를 사람 한 평생 정도로 보았다.)
그러니 그는 외로든 바로든 하여간 청죽(靑竹)에 만년을 이을 붉은 이름을 새겨 떨치고 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의 꿈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 의기(意氣) 만큼은 1600여년을 넘어 아직도 시퍼렇다.

또 하나 이런 얘기는 어떠한가 ?

후한(後漢)의 시조인 광무제(光武帝)가 읊조렸다는 말이다.

“황제가 되고 싶어서 된 것이 아니다.
목숨이 아깝다고 생각하니 황제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망에 의해 漢이 끝장 났을 때, 천하는 어지러웠다.
이 때 후에 광무제가 된 유수(劉秀)는 원래 나서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오히려 죽겠기에, 살아남기 위해 움직이다 보니,
어느덧 황제의 위에 이르렀다는 얘기다.

이 얘기를 왜 나는 상기하고 있는가 ?

이독제독이라는 말이 역시 거슬렀기 때문이다.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사람이란 안전의 욕구, 향상의 욕구가 있는 것이다.
인간 탈을 쓰고 있는 이상 아무리 이를 속이려한들 속일 수 없다.
그런데, 어느 미친 놈이 있어 독인줄 번연히 알며 독을 뒤집어 쓰겠는가 ?
무엇을 모르는 작자라면 도리없겠지만,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이 와중에 덤으로 독을 뒤집어 쓸 자는 없는 것이다.
얼마나 사람을 허술히 생각하기에, 옥석구분없이 몰아서 독의 시험대에 올리는가 말이다.
게다가 무엇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규정이란 또한 얼마나 자의적인가 말이다.
대부분은 무엇을 모르는 게 아니라, 기꺼이 저들을 택한 것일 뿐이다.
저와 다르다고, 자신만은 쏙 제껴놓고 남들을 무작정 무지하다고 규정하는 것은
저들을 인정하고 아니 하고를 떠나 우선은 그리 떳떳한 태도가 아니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엉터리 미국 쇠고기 수입은 국민의 80% 이상의 반대를 기록하면서도,
동시에 딴나라당에 대한 지지는 50%를 넘나들고 있는 게, 조중동 따위의 탓으로 설명이 되는가 ?

"이독제독"이란 글 쓴 이는 또한 이리 말하고 있다.
"과거 5년간의 무책임한 저주와 마타도어에 세뇌된 대한민국의 국민들의 썩어빠진 가치관을
바꾸기 위해서는 이독제독, 독으로 독을 치료하는 방법 밖에 없기 때문이다."

5년간의 독의 시험속에 방치하면 새사람이 된다는 저 따위 무책임한 발상이야말로
무엇인가를 은폐하려는 신종 마타도어가 아닌가 나는 이리 의심한다.
그럼 5년전의 노무현의 당선은 무엇이란 말인가 ?
그 때는 썩어빠진 가치관이 잠깐 출타라도 하였단 말인가 ?
조중동 탓하다 지치면, 어리석은 국민 탓하고,
썩은 국민 탓하다가 흥이 다하면, 조중동 탓하다 해가 저문다.
그동안 그럼 그리 잘난 댁은 무엇했는가 ?
그대 탓은 없는가 ?
노무현, 노빠는 지고지순한가 ?
나는 이리 묻고자 하는 것이다.

거죽으로는 자기비하로 포장된 자기겸손의 문법이지만,
얼핏 속아넘어갈 오독의 위험을 다만 조금이라도 경계하며,
제대로 살펴 보면 이내 자기독선에 빠진 것이 여실한,
글 “이독제독”이 나는 그.래.서. 심히 역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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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08. 7. 8. 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