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죽음
무슨 일이든,
그게 범죄사실이든, 피의사실이든, 혹 혐의사실이든 간에,
검찰이 나선다는 것은 무엇인가 끝을 보자는 것이다.
한쪽 끝을 보고는 다른 끝도 보자는 것이다.
즉 이쪽 끄나풀을 보자 저쪽 끝에 이르도록 낱낱이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beginning을 찾자 이내 end를 보고 싶다는 얘기다.
이게 한자로 맞추자면 단(端)에 해당된다.
端者,首也.
즉 단이란 머리란 말이다.
단서(端緖) 즉 실마리를 이쪽에서 보자면 머리지만,
저쪽 반대쪽에서 보자면 끄트머리 미(尾), 꼬리가 된다.
端者,尾也.
그러하니 단이란 머리이자 꼬리에 다름 아니다.
이쪽에서 보자니, 또는 저쪽에서 보자니 ...
머리와 꼬리가 달리 보이고, 그리 저마다 달리 불리울 뿐이다.
검찰은 머리부터 꼬리까지, 알파부터 오메가까지 다 보고 싶다고 했다.
곧 오장육부(五臟六腑) 오욕칠정(五慾七情) body&mind 전체를,
도마 위에 올려놓아라 이리 주문한 것이다.
저상육(俎上肉),
그야말로 도마 위에 오른 고기 신세가 된 것이다.
물론 이편, 저편을 함께 저울 위에 올려두면,
칼 든 놈이 실상은 한층 더 구린 처지에 그럴 자격이나 있을까 의심스러운 즉,
일응 야비한 구석이 어찌 없을 손가?
그렇다한들, 이를 빌미로 십분지일에 불과하니 덮자고 하는 것도 바르지 않다.
나는 그저 무색투명하니 오로지 사실 앞에 옳게나마 서고 싶다.
그들의 책임을 내가 나누어질 까닭이 없음이니라.
그렇지 않다면 내가 전면에 나서지 않았겠는가?
나는 다만 표로서 저들이 원하는 바, 또는 내세우는 바를 믿거나 내치거나 택하였을 뿐인 것을.
나머지는 그대들의 책임인 바라.
어쨋건,
하기사,
만약 정치적 의도하는 바가 있다면,
이를 빌미로 적당한 목표 수준까지 원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머리부터 꼬리까지이든, 허리까지이든,
보려고 덤비는 이에게 막 깎아 낸 발톱조차 보이고 싶지 않다는 사람이 있다 하자.
대개 검찰 같은 저승야차가 달려들며, 어떠한 이든 그러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감추려고 한들 어쩔 도리 없이 보여야 할 지경에 처한 사람이 있었다면,
어찌 할 것인가?
도리 없이 다 보여주고 감옥에 갈 것인가?
천라지망(天羅之網)이라.
성긴 것 같지만 하늘에 쳐진 그물엔 하루살이일지라도 다 걸리고 마는 것.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불실)라 하지 않던가?
살아 있는 한,
이런 투망(投網)질에 노출된 자신을 스스로는 절대 구제할 수 없다.
귀문둔갑술을 써서 몸뚱이를 감추기 전엔 이 구질스런 땅에선 기적을 일굴 수 없다.
이 때, 어찌 할 것인가?
자신이 살아 있지 않음을 증명하면,
자연 이 현세의 천망(天網)을 벗어날 수는 있음이다.
이처럼 더 빛나는 계책(計策)이 또 어디에 있음인가?
모두 살아 있음에,
혐의도 있고 범죄사실도 있음이라,
얼어붙은 동토, 죽음의 세계란,
여기 살아 있음의 세계에서 보자면 미지의 암흑인 것.
거기 숨어들면 그 누가 여기 살아 있는 자들이 감히 찾아낼 수 있으랴.
제 아무리 권세가 있고 재물이 만금이 있다한들,
그 누가 죽은 사람을 어찌 해 볼 도리가 있으리오.
그 이후는 인간사(人間事)가 아니라 저쪽 바깥 신령들의 일인 게라.
한즉,
현세에 두고 있는 자질구레한 미련보다 무엇인가 지킬 것이 있는 이는,
죽음처럼 그럴듯한 유혹이 없다.
혹은 지킬 것이 있다기보다, 차라리 지킬 것이 없기에,
기꺼이 죽음 택하는 이도 있기는 있으리라.
어쨌건 망자가 남겨진 살아 있는 것들에게 “숙제나 열심히들 해” 하며,
어느 날 보따리처럼 툭 던져두고 떠나가 버린 그 잿빛 주검 앞에,
시시비비를 가른들, 혹은 애증을 따진들,
그게 무슨 가치가 있으랴.
개시허망(皆是虛妄)인 게라.
옳고 그름을 따지건,
믿음과 배신을 알곡에 섞인 돌 고르듯 낱낱이 솎아 탓하든,
당사자 부재의 자리에 다 맥 빠진 짓거리가 되고 마는 것.
게다가,
죽음 앞에서 늘 겸손해지고,
후덕해지는 인심인 게, 우리네 풍속임이랴.
망자는 허공중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홀로 씩 하니 웃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제 놈들이 설치고 난리를 친다한들,
목숨을 버리고 예까지 쫓아들 배짱들은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가?
그게 개인사 내지는 가족사 또는 친지간에 벌어지는,
즉 사적 영역에 그친 것이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내 알 바도 없다.
하지만,
공무담임자로서 국민의 신망을 등에 업고,
일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사람이라면,
또 다른 물음에 답해야 한다.
망자가 죽음으로서 자신의 명예를 지키려했든, 가족을 지키려했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이야 그의 사적 자치의 영역에 전속된 것.
국외자 감히 어찌 끼어들 수 있으랴.
하지만, 그가 훌쩍 떠나간 자리에 망연히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들려줄 마지막 말씀 한 마디는 어디에 있는가?
그가 남긴 유서엔,
이 마지막이 남겨져 있지 않다.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여기 유서엔
저 극성스런 노사모 또는 국민들은 객체가 아니다.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가족 또는 친지들을 벗어나지 않고 있음이다.
전 민주당 의원인 김경재는 말했다.
“노무현은 영혼이 순수한 사람이다.”
나도 그가 여느 대통령보다는 사뭇 위인이 순수한 사람이라는 것을 믿는다.
하지만,
그가 대선 당시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개혁을 외치고 새 세상을 부르짖을 때,
기꺼이 동참한 사람들을 향한 그의 마지막 인사는 어디매에 있는가?
나처럼,
다시는 투표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까지,
투표장에 가게 만든 그의 그 뜨거운 말씀들은 지금 어디에 흩어져 사라져 있음인가?
대통령이나 된 사람을 그 누가 필부라 이를 터인가?
항차 노태우든, 전두환이든 왕후장상격(王侯將相格)을 타고 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될 수 없다.
그는 일개 한 우부(愚夫)에 불과한 나의 마음을 한 때 훔치지 않았는가?
하지만 재임 시 그런 내 마음에 얼마나 상처를 주었는가?
이라크 파병, 한미FTA, 부동산 폭등 방조, 대연정, 시장 즉 재벌에 대한 권력의 굴복 선언 ...
그는 사실 이런 가치들을 수호하겠다는 정치적 신념을 팔아 대통령이 되지 않았던가?
게다가 참담한 것은,
그의 실패, 아니 의도인지도 모르는 것이, 엉뚱한 이를 불러들이는 역사 현실을 만들어내지 않았는가?
나는 그의 죽음 앞이지만 감히 말한다.
그를 사랑한 만큼, 아니 그가 내세운 정치적 가치를 믿는 만큼,
그의 실체가 까발려졌을 때 나는 그를 더욱 미워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저 끔찍스런 대운하 파고,
지리산에 케이블카 설치하자고 천박하게 서슴없이 대드는 것만으로도,
도저히 인간적으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보다 나는 그를 곱절은 더 미워한다고 평소 말하곤 한다.
믿음을 배신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면 달리 그 누구를 미워하리.
대명천지, 빛 받은 사금파리처럼 반짝이는 이 찬란한 당대의 현실에서조차,
다시는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자괴감을 화인(火印)처럼 새겨둔
그를 나는 지금도 결코 용서할 수 없다.
그는 이제 죽음으로서 그가 살아 있음으로서,
당대의 현실 안에서 끊임없이 물어질 그 질문에 대한 책임 있는 답을 영영 회피하고 말았다.
상당히 안타깝다.
그는 무책임하다, 비겁하다.
그는 끝까지 살아남아 대답할 위치에 있었어야 한다.
그게 대통령이란 타이틀에 값하는 책임 있는 자세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국민들에게 봉사할 책무는 그나마 그 위치라도 지켰어야 한다.
대답을 회피한 그를,
일개 자연인의 자격을 앞에 두고서는 인간적으로 얼마든지 이해하고 기꺼이 추모하지만,
공인인 한에 있어서는 남겨진 이들에게 빚을 갚지는 못했음이라,
그의 죽음이 적지 아니 안타까운 까닭 중에 하나는 바로 이것이라,
나는 이리 특별히 이 자리, 이 슬픈 자리에 감히 되새겨놓고자 한다.
그는 신뢰를 저버렸음이다.
언제나,
역사와 국민 앞에 책임을 질 그런 공무담임자를 찾을 수 있을런가?
떠나간 그를 조상하는 것도 착잡하지만,
정작은 남겨진 이들(국민)의 불쌍한 처지가 나는 가엽단 생각이 든다.
도대체 살아 있으면서도, 당대, 나아가 펼쳐질 미래의 현실을 더이상 믿지 못한다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이 어디에 더 있으랴.
노무현은 그 믿음이 어긋난 데 대하여, 역사 앞에서 핏물 흘리며 솔직히 증언했어야 한다.
끝까지 살아남아 성실히 참회하고, 진실을 고백하며 조국에 마지막으로 봉사했어야 했다.
그가 시도한 민주주의 2.0이 한갖 은퇴한 이의 도락이 아니라면,
마지막까지 버텨, 그가 내세운 가치가 일개 정치인의 누추한 노욕이 아니란 것을 증명했어야 한다.
그의 죽음은 최소한 이를 방증할 근거를 스스로 배반하고 있다.
명색이 대통령인데,
자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더 급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수치심을 이겨내기 그리 어려웠던 것일까?
만약 이게 아니라면,
그는 살아 있음으로서 이를 반증해야 했다.
왜냐?
그는 사인이 아니라 공인임이라.
별 것도 아닌 연예인들이 자신들이 자칭 공인이라고 나서는 참람스런 작태들이야,
(무릇 공인이라 함은 공적인 책임이 따르는 것임이라.
저들 연예인들이 어찌 공적인 책임이 있으랴.
누가 물을 수도 없고, 물어서도 아니 되지만,
그들은 스스로 공인이라 나발분다.
정작 그들은 사회적 책임을 지고 있음인가?
그저 허공중에 나풀거리는 허화(虛華) 그 이름 말고는 무엇이 이를 증거하고 있음인가?)
참으로 가증스러운 노릇이지만 대통령은 저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왜냐?
그들은 내가, 국민들이 제 손으로 직접 택하여 선출하였음이라.
그와 국민들은 bargain, contract 즉 공적 장소에서 엄히 거래했고, 계약했음이라.
모든 인간 나아가 생명의 죽음 중 어찌 안타깝지 않은 것이 어디에 있으랴,
하지만, 죽음 앞에 그저 숙연히 슬퍼하는 것으로 지금을 잊고,
다시 다음을 되풀이 맞기엔 우리들은 너무 많은 시험을 치루고 있다.
그의 죽음은 이 물음에 책임있는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난 그저 북받치는 눈물, 그 샘에 가까이 있다는 사실 하나로,
슬픔이란 것을 드러내는 것을 결코 신뢰하지 않는다.
채 사흘도 지나지 않아 그 눈물은 마르고 말 것임을 알고 있음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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