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울지 않는다.
프레시안이란 사이트를 보니 박동천이란 사람의 칼럼이 올라왔다.
故노무현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이 사뭇 절절하다.
그가 평소엔 고인의 정책을 그리 신랄하니 비판하더니만,
이번 가시는 길엔 마치 화해를 구하듯 애끓는 정이 넘친다.
독설 진중권 역시 평소와 다르게 노무현의 서거를 눈물을 흘리며 맞고 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은 내가 만나본 정치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인 분”이라며
“참으려고 하는데 눈물이 흐른다”며 고인을 추모했다.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앞두고 우리는 왜 이리 숙연해지는 것일까?
독설도 질타도 간 곳 없이 바로 후덕해지는,
우리네 인심이란 얼마나 철철 정이 넘치는가?
그런데 살아 있을 때는 그러하지 못하다가,
죽어서라야 그런 대접을 한다면 이 또한 괴이쩍은 노릇이다.
마치 죽음이 현생을 무화시키기라도 한다는 듯이,
모든 허물을 덮고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린다.
개시허망이라 허화(虛華)처럼 흩어지는 것이 삶이라면,
가시는 이에게 꽃 한줌 헌화(獻花)를 어찌 아끼랴.
우리네 풍속은 이리 한참 아름답기까지 하다.
혹, 나중에 귀신한테 잡혀가기라도 할까봐,
평소 그리 공격한 잘못을 빌며 한껏 아첨하는 것일까?
죄를 많이 지은 놈은 아닌게 아니라 마음 한 구석에 그리 싸늘한 기운이 지나리라.
단 한 순간의 죽음이란 사건은 이리 사람들의 태도를 확 바뀌게 한다.
물론 이게 인간 본연의 순수함의 발로일 수도 있겠고,
의식 현장에서 갖추어야 할 일회용의 예법에 그치는 경우라고 왜 아니 없겠는가?
일개 필부는 단 일억만 잘못 먹어 탈이 나도 인생이 결단난다.
故人의 혐의가 70억이든 100억이든 일억 보다는 사뭇 크다.
단순한 혐의로 제한하기엔 그의 죽음은 그 이상을 짐작케 한다.
대통령이기에 70억이 가볍다든가,
다른 대통령의 수천억에 비해서 조족지혈이라 이르는 이도 있지만,
거꾸로 대통령이기에 더 책임이 무거워야 한다든가,
청렴한 가치를 주창한 그 이기에 더욱 부끄럽다고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땡볕이 비추이는 대지,
지상에 있던 물기는 모두 수증기가 되어 허공중으로 증발된다.
‘한 사람의 죽음’ 앞에 시민들은 또한 슬픔을 한껏 길어 올려 눈물을 떨군다.
물이 수증기가 될 때 모든 불순물은 지상에 떨구어지고 남는 것은 순수(純水)가 된다.
마찬가지로 슬픔 역시 눈물로서 온갖 허물을 정화(淨化,purification)한다.
고인 앞에서 꽃다발을 바치며 추모하는 것은,
단지 고인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눈물을 떨구며 남아 있는 모두가 함께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 참고 글 : ☞ 2009/01/20 - [소요유/묵은 글] - 문조(問弔))
아마도 박동천, 진중권 같은 이도 역시 이런 의식에 동참한 것이리라.
그런데 나는 전일 ‘한 사람의 죽음’이란 글을 쓰며,
애써 의도적으로 그 추모의 현장을 일찍 빠져나왔다.
1억 먹은 서민들과 그의 70억,
개혁을 말아먹은 그와 태반이 그로부터 비롯된 이명박 정권의 등장.
이런 우울한 상념들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나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그를 보고 싶지,
‘만인의 주목을 받는 사람의 죽음’으로만 대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담담한 ‘한 사람의 죽음’인 것이다.
만약 ‘만인의 주목을 받는 사람의 죽음’이라야 한다면,
오히려 허물에 대하여 더욱 혹독한 질타가 따라야 하지 않을까?
그저 슬픔으로만 그의 죽음을 조상하고 말면,
그의 죽음은 차라리 역사 앞에서 더 초라한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한 사람’으로 제한하여 그를 객관적으로 대하고자 하는 것이다.
얼마나 예의 바른가 말이다.
우우 몰려들어 만인의 그, 마치 교주처럼 추앙하는 것도 볼썽사납지만,
그러다가 헌신짝처럼 버리고는 경제 올인 하자며 대척점에 선 상대에게 풀썩 무릎 꿇는
이 염량세태에서 나야말로 공평무사 올곧은 인사가 아니랴?
(※ http://bongta.tistory.com/593#comment2090001 댓글 對文)
추모의식이야말로 얼마나 슬프도록 아름다운가?
하지만 추모의식이란 커다란 천막으로 모든 허물이 혹 덮여지지나 않을까?
나는 조심스럽게 이를 의심한다.
혹여 이 슬픔이 분노로 치달으며 이명박 정권의 실정을 질타하는 에너지가 되거나,
혹여 이를 그 지렛대로 삼으려는 불순분자들의 기도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것은 고인을 두 번 모욕하는 짓거리다.
남의 죽음을 거래의 도구로 동원하는 자들,
그게 혹 제 아무리 지지자라일지라도,
고인인들 자랑스럽게 보이랴?
하지만,
나는 더러운 기억을 잊고 싶지 않다.
바로 엊그제 그런 국민들 손으로 이명박을 대표로 뽑지 않았던가?
노무현을 못 믿겠다며 등 돌리고 바로 이명박 앞에 무릎 꿇은 이들이,
지금은 슬프다고 울고 있는 그들 자신은 아니던가?
다음엔 또 누구를 위해 울 것인가?
닦은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소매 끝으로,
다음엔 이명박의 죽음 앞에서도 또 다른 슬픔을 훔치고들 있지나 않을까?
그리고 다음 또 다음 꽃상여 타고 다가올 차례를 기다리며,
지금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감상도 내가 추도 현장을 일찍 빠져나온 까닭 중 하나이다.
한 때 노빠가 나라를 망친다는 말이 있었지 않은가?
이제는 노무현은 기실 노빠가 죽인 것이다라는 말인들 나오지 않으랴?
지금 그 누가 읊고 있는가?
이명박 정권이 노무현을 죽였다고.
가증스럽고 부끄러운 변명이다.
최소한 이들에게는, 즉
노무현이 자살이 아니고 타살이라면,
정작 그를 죽인 것은 그를 채찍으로 사랑하지 못한 맹목적 순정파들,
바로 이들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노빠들의 맹목적 경도(傾倒)도 문제지만,
시민들의 누선(淚腺)에 머무르고 있는 슬픔도 나는 경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하다면,
진작 눈물을 거두워들인,
나야말로 노빠 보다 곱절은 더 노무현을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
어느 날 韓나라 昭候가 술이 잔뜩 취해서 그만 선잠이 들어 버렸다.
마침 소후의 관계(冠係:머리에 쓰는 冠을 관리하는 일)를 맡은 신하가
추울 것을 염려하여 옷을 가져다가 임금에게 덮어주었다.
얼마 후 소후가 눈을 떴다.
소후는 자기에게 옷을 덮어 준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어 보았다.
‘내게 옷을 덮어준 사람이 누구인가 ?’
‘관계를 담당한 사람입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대답했다.
그러자 소후는 의복계(衣服係)와 관계(冠係)를 함께 처벌했다.
(※ 참고 글 : ☞ 2008/02/12 - [소요유] - 소통(疏通)과 변비(便秘))
한비자에 나오는 말이다.
일국의 대통령이라면 의복계(衣服係)와 관계(冠係) 보다 그 소임과 책임이 더 막중하다.
소후가 고 노무현 대통령을 평가한다면 어찌 하였을 터인가?
나는 잔인하지만 이 물음을 그의 영전에 던져 보는 것이다.
왜?
그만은 믿었고,
한 때 열렬히 응원하였던 연고가 있기에.
좌측 깜빡이 키고 우측으로 달려갔다는 질타는,
의복계(衣服係)와 관계(冠係)를 한데 아우른 고인의 말,
‘좌파 신자유주의’에서 극명하게 정당성이 확인된다.
고인의 뛰어난 감성, 순수한 열정은 귀한 가치이지만,
한나라를 통치하는데 는 국민들에게 스트레스를 안겨주고,
지지자를 모두 떠나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음이라.
한비자의 법술을 진즉 통달했음이 여실한 소후의 ‘추위’를
나는 지금 되새겨 보는 것이다.
***
역시 한비자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노(魯)나라의 맹손(孟孫)이 사냥을 나가 사슴 새끼를 산 채로 잡았다.
가신인 진서파(秦西巴)에게 이를 마차에 싣고 돌아가게 했다.
하지만 어미 사슴이 눈물을 흘리며 쫓아오자 진서파는 불쌍히 여기고,
새끼 사슴을 놓아주었다.
집에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된 맹손은 크게 노하고 진서파를 쫓아내버렸다.
맹손은 이제 석달이 지나자 진서파를 다시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자기 아들을 맡겼다.
사슴 새끼에게도 착한 마음을 내는 사람이므로,
자기의 아들에게도 그 착한 마음을 끼치리란 생각 때문에,
그를 다시 중용한 것이다.
한비자는 이어 악양(樂羊)의 예를 든다.
악양은 당시로서는 현군(賢君)에 속하는 위문후(魏文候)의 부름을 받고,
중산국(中山國)을 토벌하러 나갔다.
그런데 중산국에 자기의 아들인 악서(樂舒)가 벼슬을 살고 있었다.
힘이 약한 중산국은 악서를 내세워 악양의 공격을 저지하려고 하지만,
악양은 단호히 이를 거부한다.
그러자 중산국은 악서를 죽여 그 시신으로 국을 끓여 악양에게 보냈다.
악양을 협박하여 적군의 의기를 저상시키고
이를 빌미로 위기를 벗어나려는 계책인 것이다.
하지만 악양은 태연히 그 국을 마시고 공격을 늦추지 않았다.
마침내 중산국 왕 희굴(姬窟)은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고 만다.
악양이 위나라에 돌아와 전승을 고하자,
위문후는 그의 공을 치하하지만,
병권을 다시 회수해버리고 만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지 아니 한 사람인즉,
타인에겐 무슨 짓인들 못하겠는가?
“교사(巧詐)는 졸성(拙誠)만 못하다.”
흔히 피도 눈물도 없는 한비자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10만 여자에 이르는 대작 한비자란 책을 남긴 한비자의 법술이 그리 녹록하리.
그 역시 때로는 서투나마 성실한 것이,
교묘한 사술보다는 오히려 낫다고 이르고 있는 것이다.
한비자 역시,
맹목적 선의,
의도적 사술 보다,
차라리 서투나마 순수한 성실성을 높이 사고 있음이다.
그런데 고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졸성인가? 아니면 교사인가?
이것을 가르는 길은 역사 앞에선 진실이 기준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맹목적 슬픔에 가리면 진실은 잊혀지고,
교묘한 꾸밈에 밝은 누군가는 추모식장에서도 거짓 애도와 함께,
다음을 예비하기 위한 계산에 바쁠 것이니,
나는 진작 그 추모식장을 빠져 나왔던 것일 뿐인 것을.
설마하니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어찌 눈물을 아낄 까닭이 있으리요.
하지만, 추도식장에서 모두가 눈물을 흘려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울지 않으면 천하의 고약한 인사라도 되는 것일까?
우르르 몰려 우는 것이 미덕이고 능사가 아닌 것이,
울려면 오늘만이 아니라 5년을 한결같이 접동새처럼 피를 토하며 울어재껴야 한다.
오늘 운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마 삼우제도 지나기 전에 눈물이 마를 것이다.
독설 진중권도, 신랄 박동천도 기어이 눈물을 짓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으나,
나는 울지 않는다.
운다면 매양 365일 5년간 울고 있으니까.
새삼 따로 울 이치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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