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레기 별곡
내가 다니는 북한산 등산로를 거닐며,
나는 수시로 쓰레기를 주어왔다.
수년간 빠짐없이 이 노릇을 해왔다.
그러다가,
금년 봄 국립공원직원을 접촉하고 나서부터는 시나브로 맥이 빠지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달포를 넘겨 부러 쓰레기를 줍지 않았다.
저들의 안일한 쓰레기 처리 태도를 확인하고는,
나는 갑자기 외로움을 탔다.
몰지각한 등산객들의 의식은 어쩔 수 없다 하여도,
최후의 보루라고 여겼던 저들 직원의 나태한 의식을 엿보고는,
나는 한기(寒氣)를 느꼈다.
더 이상 누구로부터도 응원을 받을 수 없거니 ...,
아니 응원이야 애시당초 기대한 것이 아니었다 하여도,
책임관리주체조차 백년하청인 이 땅의 현실이 슬펐기 때문이리라.
이제껏 직원들의 성향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지만,
금년 봄 공원사무소장을 만나고는
나는 저들을 만나는 것조차 피하고 싶을 정도로 저들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접었다.
(※ 참고 글 : ☞ 2009/03/22 - [소요유] - 생강나무)
저 안일함, 구태의연함을,
지금의 이런 방식으로는 해결하기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다른 방식을 모색하기로 한다.
선의는 기껏 슬픔을 연장시킬 뿐이다.
악의만이 무엇인가를 도모하여 결과를 내놓는다.
나는 악의에 기대기로 한다.
악의는 선의를 실현하기 위한 추동력으로서,
지금의 여기 이곳에서 요청되고 있다.
그 악의를 천천히 불러 볼 것을 고려 중이다.
내가 짐짓 심드렁히 쓰레기를 대하자 ...
그러자,
여기저기 쓰레기가 계속 버려져 쌓이는데도
누구 하나 줍는 이가 없다.
어떤 것은 일주일이 가도 요지부동 그대로이고,
달을 넘겨도 그 자리에 그냥 부려져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하여 치워졌다는 보장도 없다.
필경, 개중에 일부는 물에 떠내려가거나,
땅속에 묻혀가고 있음이라.
나도 주말농사를 짓고 나면 며칠 간,
근육이 당겨 허리 구부리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동안 일이거니 하며 쓰레기 줍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나는 산에 들면 사람을 상대하지 않기로 한다.
다만 산이, 계곡물이 더렵혀지는 것이 안쓰럽고 딱하여,
이를 외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후대를 위한다든가, 물이 땅이 오염되어 사람에게 해가 될까 염려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산, 물 그 자체를 위해 이 짓을 해왔다.
저들이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몹쓸 인간 때문에 땅이 더렵혀지고, 물이 썩어가고 있다.
나는 인간을 의식하거나, 도모하지 않기로 한지 한참 오래 전이다.
청수폭포라고 여기서는 가장 그럴듯한 랜드마크가 하나 있다.
거기 다리 위에 서서, 중인환시리에 물속으로 침을 탁 뱉고 돌을 던져 넣는 이가 있다.
제 처를 데리고 나와 저 짓을 태연히 하고 있는 50대 남자.
도대체 저 인간은 그동안 무슨 물을 먹고 자라왔기에,
저리 멀쩡하니 명을 보태온 것인가?
중인(衆人)은 둘째고,
나 같으면 우선은 옆에 선 처에게 영 체면이 서지 않아,
본바탕이 저러하더라도 꾹 참아내었으리라.
사진에 보이는 빗자루는 약수터에 오시는 노인 한 분이 가져다 놓은 것이다.
그동안 나는 저것을 몰래 치워 버리곤 하였다.
왜?
약수터 옆 공터에 버려진 쓰레기를,
저 빗자루로, 노인 어른은 좌측 계곡으로 쓸어버린다.
언젠가 그 노인을 만나 간곡히 부탁드렸다.
“제가 주울 테니 버려진 쓰레기는 그냥 위에 내버려 두세요.
계곡 밑으로 버리면 그것 다시 주어 올리려면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제가 저 밑으로 수시로 들락날락하는 것도,
이젠 젊지 않아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군요.
그리고 버려진 쓰레기는 줍지 않으려면 그냥 그 자리에 놔두는 것이 옳아요.
모든 사람들이 저것을 상처처럼, 흉터인 양 직시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좋든 싫든 겪는 것이 차라리 나아요.
마치 제 업보처럼 말입니다.
그러면 혹간 줍는 이도 나타나지요.
그러한 것을 보기 싫다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쓸어 넣으면,
영영 쓰레기는 치워질 틈이 없어요.”
“허허, 그렇기는 해.”
“위에 있는 쓰레기 밑으로 흩어내면 당장은 눈에 보기에 깨끗하지만,
저 밑에서 썩어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공연히 마음에 위로가 될 뿐,
실상은 그리 떳떳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손으로 줍는 것이 도리지요.
그리고 이 산 위에 빗자루로 쓸 것이 뭣이 있단 말입니까?
낙엽은 낙엽대로 쌓이도록 내버려 두면 그저 넉넉하니 한가로운 것임을,
여기까지 와서 싹싹 훑어 내버릴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버리는 인간에 비하면,
그나마 빗자루로 깨끗이 하고자 하는 마음을 지니신,
저 노인 분은 그래도 한결 지순(至純)하다.
하지만, 위는 깨끗하여지지만 바로 이웃 계곡 밑은 도대체 무슨 죄가 있다고,
그 더러움을 받아 인고(忍苦)하여야 하는가?
조금만 마음을 돌려 잡으면,
이내 이게 바른 도리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터인데도,
내가 짐짓 없애버리곤 하는 빗자루를 다시 가져다 놓고는,
저 일을 되풀이 하시는 것일까?
빗자루로 쓰레기를 저 밑으로 쓸어버리면서,
그가 얻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청소하고 있다.”라는 자존 의식을 기꺼워하고 있음일까?
아니면 그저 운동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루,
작정하고,
쓰레기를 모처럼 주어 보았다.
약수터 주변에서만 주은 것을 모아 사진에 담아보았다.
전부터 보아두었던 비닐뭉치가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물결에 휩쓸려 떠내려갔나 보다.
달포 지나 저 정도면 일 년이면,
저 약수터 계곡은 어찌 될 것인가?
용케 비가 와서 한 번씩 쓸어 내가지 않는다면,
차마 인내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바위 틈에 꽂힌 신문지. 내 콧구멍이 막힌 듯 답답하다.) (흔히 보게 되는 사탕껍질이다. 그외 병마개, 머리띠, 비닐봉지, 폐건전지, 약캡슐, 휴지 ... 사진 생략)
여기 산에 들면 별별 사람이 다 있다.
버리는 놈,
숨기는 사람,
줍는 이.
하지만 내가 가장 혐오하는 인간군은 이들이 아니다.
제 몸 하나 챙겨 건사하며,
빤지르르 그저 지나치는,
이기적인 무관심족.
이들은 위험하다.
세상이 뒤집히면,
손바닥 뒤집듯 처신을 바꿀 위인들인 고로.
늘 그러하듯이 정작 무서운 것은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
이 글은, 그리고 이곳 북한산의 실태는, 또한 여기 매인 내 자신이,
원래 쓰레기처럼 구질스러워 적지 않으려다가,
다음의 기사를 보고 기록으로 남기고자 적어둔다.
이즈음, 나는 이 쓰레기 가득한 세상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주고 싶은 욕망,
그래 그 안일한 그리고도 추한 욕망이 일곤 한다.
그러다가는 산, 그리고 강아지의 눈을 생각해내고는 다시 힘을 낸다.
☞ 태평양에 한반도 몇 배 쓰레기 섬
여기 북한산도 이런 상태로 지나다보면,
언젠가는 쓰레기 섬이 아니라, 쓰레기 동산으로 바뀔 것이 충분히 예견되고도 남는다고,
나는 감히 이리 증언하길 꺼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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