쩍벌녀
재재작년 모 시민단체에서 지하철같은 대중교통 이용시 나타나는,
승객들의 몰지각한 행태를 모아 캠페인을 벌였던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당시 남성 승객이 자리에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있는 것을
일러 쩍벌남이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 역시 이런 인간들 보면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비좁은 통로를 앞에 두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것도 남녀를 불문하고,
아주 염치없는 작태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용어를 빌어 쩍벌녀에 대하여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 저는 아주 한가한 상태가 아니면 자리에 잘 앉지 않습니다.
좁아 터진 자리에 끼어 앉는 게 불편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인즉 아직은 자리를 탐낼 형편이 한참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작자들은 rr할배라고 저를 부릅니다.
(※. 한자 많이 쓰고, 고어투를 즐겨 부려내놓은즉,
그들은 이 새파란 젊은 오빠를 그리 부르며 농한다.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말인즉슨, 이게 장노(長老)를 이르는게 아닙니까 ?
기독교에서는 elder라 번역됩니다만,
불교에서도 ayusmant(阿瑜率滿)이니, 곧 존자(尊者)의 뜻입니다.
지혜와 덕이 높은 자를 지칭하는 것이지요.
한즉, 그 작자들은 겨운듯, 열패감을 그리 몰래 감추고자 하는 것이 아닐런지요 ?
하지만, 저는 이리도 씩씩한 사람입니다.
앞에 고운 처자가 앉아 있습니다.
얼굴도 어여쁘고, 맵시도 나는데,
다리가 벌려져 있으면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수컷은 가운데 달린 물건 때문에 아무래도 좀 다리가 벌려지게 될 터입니다.
하지만, 암컷은 그럴 형편이 아니기 때문에 다리를 오므린들,
숫컷같은 불편은 적을 것입니다.
음양의 이치를 이리 따지지 않더라도,
가운데를 벌려 공중에 드러내는 행위는 사뭇 헤퍼보입니다.
더욱이 여성의 가운데는 외부로부터의 수용을 예비하고 있는 상징처이기도 합니다.
한참 젊은 여자의 가운데 비처(秘處)가 열려져 있다면,
이는 자신의 가운데를 조신히 감춰 챙길 염량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자각의식의 부재,
무장해제된 모습은 결국 지켜야만 될 귀한 것을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음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외부로부터의 적극적인 도발을 꿈꿔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인은 몰라도 저는 압니다.
그것은 소리없는 욕망이기도 합니다.
열려진 문을 틈입(闖入)하려는 또 다른 욕망을 부르고 있는 있음이 아닐런지요 ?
색에 밭은 과부 엉덩이 둘러대듯,
젊은 처자 역시 허벅지 벌려 색향을 흩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적절한 긴장으로 자신의 가운데를 조무리는 정신이란 무엇입니까 ?
옛날 城에도 성지기가 있고,
대가집에는 청지기(守廳)가 있어 온갖 일을 지켜냅니다.
하찮은 창고라도 지켜야할 귀한 것이 있으면 창고지기를 내세웁니다.
항차, 시집도 가지 않은 처자라면 일러 무삼하리요 ?
사진기의 조리개(diaphragm)란 무엇입니까 ?
죄오무리고, 펼쳐 빛을 필요에 따라 차단하고 받아들이는 장치 아닙니까 ?
사진기에는 이 조리개가 있어 필름에 象을 제대로 맺히게 합니다.
계집 역시 가운데를 열고 닫아 사내를 받아들임에 자궁에 배태(胚胎)케 됩니다.
이러한즉, 계집의 허벅지 역시 조리개와 같은 조신(操身)의 덕이 있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
허벅지 쩍벌린 계집을 두고,
지킴(守)과 모심(侍)의 부덕(婦德)을 조리개에서 배워야 한다고 새삼 이르지 않을 수 없는
이 참람스런 세태가 못내 개탄스럽습니다.
(※ 계집이 낮춤말로 쓰여지기도 하나,
여기서는 사내 ↔ 계집의 그저 무색투명한 대향말로서 쓰이고 있으니,
혹여 노여워하시지 마시길 바랍니다.)
diaphragm이라는 게 장벽, 울타리란 어원을 갖고 있듯이,
여인네 역시 곧은 정절을 빗장 질러 아름답게 문지켜내었으면 싶은 것입니다.
이 조무리는 정신을 혹간 성적억압이라며,
해방을 부르짖고 있는 사람들도 있을까 저어되는군요.
과연 그게 계집에게만 소용이 닿는 일이런가요 ?
무엇을 옭아매는 줄을 “자리개”라고 합니다.
사내 역시 가운데 뿌리를 평소엔 잘 졸라매어두어야 합니다.
저는 계집한테 조리개가 필요하듯, 사내에겐 자리개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자리에 앉아 쩍벌린 사내녀석의 사타구니를 쳐다보면,
동아줄같은 굵은 자리개로 칭칭 동여매주고 싶은 충동이입니다.
도대체가, 예의 염치가 없는 불한당들을
장마철 뒤깐 구덩이에서 스믈스믈 기어나오는 구데기처럼
누가 그리도 많이 까내놓는지 모르겠습니다.
모름지기,
불두덩, 사추리는 감춤으로서 은은한 덕을 기르는 것이니,
사타구니에 물기 마를 날이 없는 창부가 아닌 다음이라야,
몸가축을 어이 함부로 내두를 수 있으리오.
近寺人家不重僧.(절 근처에 사는 사람은 중을 존경하지 않는다.)
하니, 산중(山僧)은 깊은 골에 숨어 도가 절로 높아 지는 것이며,
계집은 사려 지켜, 꽃다운 향을 은은히 풍겨내는 것입니다.
중년여인이라고 달라질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조무리므로서 아직도 지킬 것이 있다라는 자존의 소식을 품위있게 전해야 합니다.
아직 자신이 여성성을 지닌 사람임을 자신에게 확인하는 형식을 저는 기품이라고 부릅니다.
흔한 이야기입니다만,
붕어는 성질이 급하여, 잡은지 얼마 되지 않어 바로 죽고 만다지요.
하지만, 함께 메기를 넣어두며 잘 죽지 않는다는군요.
메기한테 해꼬지 당하지 않으려고 잔뜩 긴장하여 결국은 오래도록 명을 부지한다는 것이지요.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는게 다소 근육의 긴장을 필요로 하겠지만,
이를 빌려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있다면,
이 또한 아름답고 귀한 노릇이 아닐런지요 ?
실제로 다리를 가지런히 모으면,
절로 등골이 바로 서고,
어깨도 펴지며,
기품이 온몸에 서리게 됩니다.
중년 여인네의 가슴에 품은 메기 한 마리야말로,
늦도록 젊음을 정갈히 지켜내는 향낭(香囊)같은 게 아닐런지요 ?
나이가 들면 살이 찝니다.
여인네는 특히 무른 살이 더 불어오릅니다.
허벅지에 살이 오르면 오므리는 것은 더욱 힘이 듭니다.
삼국지에 보면 비육지탄(脾肉之嘆)의 고사가 있습니다.
유비가 늦도록 뜻을 펴지 못하고 이리저리 전전할 때, 유포에게 한 때 몸을 의탁합니다.
어느 날, 유포와 함께 술자리를 하던 중, 도중에 소피를 보러 나갑니다.
이 때 유비는 자신의 허벅지에 살이 오른 것을 보고 비탄에 잠깁니다.
이를 보고 유포가 묻자 이리 대답합니다.
"제가 젊어서 전쟁터를 누비며 다닐 때는 말을 타느라
넓적다리에 살이 오를 겨를이 없었습니다.
이제 어지러운 나라를 구한답시고 몸을 일으킨 지 벌써 20년이 지난 지금,
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르러 이렇게 할 일이 없이 놀고만 있어
허벅지에 살만 찌고 있으니 이를 탄식할 뿐입니다."
중년 아주머니 여러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는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습니까 ?
허벅지에 무른 살이 쓸려 제 살이 닿는 것조차 성가신 형편인지요 ?
유비는 비육(脾肉)을 아파하는 마음을 잃지 않아,
후에 천하를 삼분하며 뜻을 폅니다.
그대들 역시 허벅지를 색종이 접듯 곱게 모아,
분홍빛 추억을 지금 앉은 그 자리에서 지피어 올리십시오.
Now and here.
순간 당신은 아직도 아.리.따.운 여인입니다.
할머니라 한들 뭣이 다르겠습니까 ?
가지런히 다리를 모아 고아(高雅)하니 앉아 계신 할머니를 보면,
불현듯 다가가 꾸벅 인사를 드리고 싶어집니다.
어느 날 산길을 헤매다가,
골짜기에 숨어 갓 피어난 하얀 꽃을 홀로 만난 듯
그 단아한 기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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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ooo :
벌린 여자와 벌린 남자.........양성의 태생적/본능적 차이와 사회적/도덕적 차이를 혼동하면 안됩니다. 여자는 벌리면 아기를 낳을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남자는 벌리면 기분이 좋아질 뿐이기 때분에,,,,,,벌린여자 나쁜여자의 등식은 사회적 필요와 일치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bongta :
사회적 필요라고 말씀하시니,
여권신장론자가 들으면 또 그를 일러 성적억압이라 반발할 빌미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벌림을 경계함의 이유를 그것이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위험에서가 아니라,
저는 1차적으로 그 당사자에게 구하고 싶습니다.
여성의 지킴이 아름다운 것은 아무한테나 욕망을 초대하지 않고,
사려 깊게 자존을 지켜, (남성을) 살펴 택하야 하기 때문이 아닐런지요.
이게 곧 간택(揀擇)이니, 예전 궁궐에서 행하던 것이지만,
이젠 이게 천하인의 것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모든 여성 나아가 남성 역시 “가려 택함”의 의식 앞에선
선행적으로 “조무림”이란 형식을 거쳐야 한다
저는 이리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여성의 조무림은 외적 표상으로서 존재 의의가 있는 게 아니라,
실인즉 내적 수양이어야 하기에 긴(緊)한 노릇이란 생각입니다.
사회적 책무라기보다,
개인적 修身인 것이고,
修身은 본원적으로 사적 이해에 귀착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국엔 사회적 건전함을 창출하는데 기여하겠지만,
일차적으로는 개인적인 아름다움이라는 의미에서
여성의 조무림을 생각해보았던 것입니다.
즉 수정(守貞)인즉 수미(守美)인 것이지요.
그렇지만 과부의 수절(守節)은 말씀대로 사회적 또는 가문의 이해에 복무하는
공적 장치였으니, 이야말로 필요의 소산이라 할만하겠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가지런히 무릎을 모아 붙인 정갈한 여성에게서
저는 더한 성적 충동을 느낍니다.
그 충동의 색깔은 싯벌겋지 않고, 고은 은빛이기에
저는 부끄럽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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