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바이어스(bias)

소요유/묵은 글 : 2008. 2. 20. 11:14


바이어스(bias)란 말은 제법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옷의 가장자리에 다른 헝겊으로 덧댄 것을 이르기도 하며, 선입관, 편견, 편의(偏倚)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언뜻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bias가 걸린 그런 글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우리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리 bias가 걸렸다고 표현한 그 bias에 대하여는 평소 제 나름대로 갖고 있는 뜻풀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잠깐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전자회로 하나를 먼저 꺼내들었습니다. 느닷없을까요 ?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무리한 시도는 아니란 생각에 용기를 내어봅니다. 관련분야에선 아주 기초적인 이론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겐 반대로 아주 생소한 것일 텐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재미있게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우선 제시한 그림을 따라 설명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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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은 트랜지스터와 그를 중심으로 한 간단한 회로도입니다. 동그란 부분이 트랜지스터(transistor)고, 꼬불꼬불한 것이 저항(register)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림에서 보이는 입력(input)을 통해 무엇인가 신호를 인가하고, 출력(output)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자 합니다. 가령 레코드판에서 음원을 입력으로 하여 스피커를 통해 크게 키워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경우라 가정해보도록 하지요. 확보한 음원신호는 전기적으로 대단히 약한 전압 또는 전류 레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스피커를 통해 우리 귀로 듣기 위해서는 충분히 키워내야 합니다. 이 키워내는 작업을 우리는 증폭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기기를 증폭기(amplifier)라 부릅니다. 흔히 앰프라고도 합니다. 그림 1은 그 증폭기의 가장 기초적이며 전형적인 전자회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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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는 트랜지스터의 characteristic curves라 부르는 것으로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그림 1에 보면 파란 글씨로 base, emitter, collector라고 적어넣은 것이 있습니다. 이를 참조 하시며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 오시면 됩니다. 그림 2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base 전류가 10㎂에서 70㎂에서 변할 때, collector 전류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을 그래프로 표시한 것입니다. Y축을 보면 단위가 ㎃로 되어 있습니다. ㎃는 ㎂에 비해 1000배 더 큰 단위입니다.

이로서 벌써 짐작하실 수 있듯이, 보통 base 전류에 비해 collector 전류는 수배에서 수백배 정도 큽니다. 그러하니 base에 미약한 전류를 통하면 collecor를 통해 전류를 크게 증폭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전엔 덩치 큰 진공관으로 하였습니다만,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서부터는 대부분 대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진공관은 아주 풍부하고 매력적인 재현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악매니어들은 아직도 진공관 앰프를 사랑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인가 신호는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그냥 base에 흘리면 트랜지스터가 아예 동작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트랜지스터가 동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림 2에서 active region이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트랜지스터의 동작상태가 놓여질 수 있도록 주변 회로를 구성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동작환경조건을 만들어 주는 일을 우리는 “biasing”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리 주절주절 번거로운 짓거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기왕에 벌린 노릇이니 조금 더 부연하고 서둘러 이 부분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전자기기(electronic device)가 어떤 소망하는 상태에서 동작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되는 환경, 이는 곧 보통 전류 또는 전압이 되겠습니다만, 이를 bias point라고 합니다. 이외에도 Q-point, operating point, quiescent point 등등으로 부릅니다만 우리는 현재 bias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집중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정을 질러 지나가야 합니다. 그림 1은 이 bias point를 만들기 위한 회로입니다. 이를 biasing circuit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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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에서 동작영역에 해당하는 active region외에 saturation, breakdown 등의 영역은 보통의 경우에 피하도록 회로설계를 하여야 합니다. 그림 3을 보시면 input 신호가 이 동작영역에서 output 신호로 증폭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상으로는 input, output 크기가 비슷해보입니다만,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양자의 단위가 ㎂와 ㎃로 상이하므로 실제는 output이 수십배~수백배 큽니다.

그럼, biasing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제시한 회로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저항을 적절한 위치에 놓이도록 설계하므로서 달성합니다만, 여기서의 중요한 설계 착안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차후 그 동작 포인트가 변동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온도 변화에 따라 동작 포인트가 변동한다면 기기의 안정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또한 트랜지스터가 고장나 교체 수리를 하였을 경우 동작 포인트가 변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도, 소자 변동에 민감하지 않도록 안정적인 회로 설계를 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지렛대를 마련할 때, 지렛점을 제대로 확실히 거치해두어야 조그만 힘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biasing circuit란 base를 통해 들어간 조그만 신호를 collector에서 큰 신호로 증폭시키는 지렛대와 같은 것입니다.

***

앞에서 조금 전문적인 얘기를 꺼집어내어 가급적 빨리 이리로 넘어오고 싶었습니다. bias란 주제어를 정식으로 무대에 등장시키기 위하여 트랜지스터의 예를 앞세워 길닦음을 한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아실 것입니다만 bias를 가사시간에 배우실 것입니다. 헝겊 가장자리에 띠로 된 조각 천을 둘러 박습니다. 이는 헝겊의 형태를 고정시키고, 쉬이 헤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는 덕이 있습니다. 직각 부분이나 둥그런 부분에 바이어스 단을 달 때는 특히 어렵습니다.

증폭회로에서도 고주파, 고전력 증폭에선 설계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느질에서의 bias든, 전자회로에서 고안하는 biasing도 따지고 보면 기능상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어떠한 소망하는 상태(desired fashion)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고안(design)을 하게 되는데, 두 경우 모두 상태, 즉 fashion을 적정 범위, 형태내에서 고정화하기를 기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흔히 저 친구는 xx 바이어스가 걸려 그 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라고 비난을 하는 등, bias란 말은 일상에서는 선입견, 편견 등의 뜻과 함께 주로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bias란 말은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바를 기초로 무색투명하게 해석, 수용한다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사용할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bias를 왜 거는가 ? 또는 피동적으로 말해서 왜 bias에 걸리는 것일까 ?
전자의 표현은 주체적으로 bias를 사물에 거는 상태를 묻고 있습니다. 건다는 것은 곧 biasing device(機器)를 고안하여 사물을 인식하거나 평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biasing device라는 말은 앞에서 든 예에 입각하여 지칭한 것입니다만, 제대로 하자면 biasing circuit로 고안된 device인즉 실인즉 앞 선 예에서는 amplifier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 주제인 biasing에 주목하여 biasing device라 칭하여, 굳이 증폭기로 제한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공학이 아닌 분야에서 흔히 쓰는 reference frame, paradigm 등과 비교되어 재미있군요. 아 참 reference frame은 원래는 물리학 용어입니다. 하여간 전자는 이런 biasing을 의식적으로 자신이 직접 고안하여 사물에 가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남이 만들어 놓은 biasing에 알게 모르게 거미줄에 걸리듯 걸려 파드득 거립니다.

biasing을 능동적으로 가하거나 또는 피동적으로 걸리는 이유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세상 모든 것은 기호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기호라는 명제가 옳다면,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호해석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순결한 제 호흡만으로 자동기술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출현함과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기호는 의미망을 통해 걸러(filtering) 해석되므로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또는 존재의 의의를 갖게 됩니다.

2. 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만들어 의미를 구축하고, 해석하며, 그 안에서 제 안위를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대단히 불안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하지만 해석을 하는 이상, 그 해석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 안에서 잠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미가 나를 떠나거나(배척) 다시 다른 것으로 바뀌기전까지는 그 의미망이란 움집에서 추위를 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호,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데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시적 현상에 머무르고자 의욕합니다. 이를 무지, 무명이라고 저는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3. 실용성
biasing device가 한번 마련되면, 유사한 사물에 임하여 즉각 이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사물의 이치를 해석하는데 상당히 편리하며 노력과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유사한 것이라도 같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러한 省力은 자칫 일을 그리치게 되어, 나중에 곱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기도 합니다.

***

기독교는 biasing을 오직 하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고도 커서 온 세상을 다 포섭합니다. 반면 불교는 biasing을 걸지 말라고 이릅니다. biasing을 거는 한 그것에 구속되는 즉, 모든 biasing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biasing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萬法歸一,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萬法歸一 다음에 一歸何處를 묻고자 한다면, 그는 아직 途上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이런 상반된 태도로 인해 그들의 행동은 양극을 달립니다. 기독교는 기도할 때, “.....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하며 이름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원 bias를 재촉하며 부릅니다. 이를 그들은 메시아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bias를 지극히 꺼리기 때문에 교설의 주체인 부처란 bias조차도 죽이기를 주문합니다. 이게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문제를 바로 일으키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논의 기술상 더 이상 진행시키지는 않고 예서 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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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asing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

입력 신호와 바이어스 고안장치(biasing device)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입력 신호없이 장치가 스스로 출력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든 앰프의 경우 레코드판을 걸어놓지도 않았는데, 파워를 넣자마자 삑하는 잡음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신호도 없이 자가발전하며 목울대를 거세게 떨며 소란을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보면 무정란같은 작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런 경우엔 신호도 장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능 좋은 스피커만 있으면 됩니다. “대가리도 필요없이 다만 아구창만 필요합니다.”

생명도 biasing device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료란 신호를 닭이란 device에 투여하면 달걀과 닭이 증폭되어 생산됩니다. 돼지란 device 역시 사료를 먹고 삼겹살이란 증폭물을 출력해냅니다. 요즘은 효율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들에겐 못 쓰게 된 제 살을 되먹이는 등의 circuit design을 통해 조류독감, 구제역, 광우병 등에 걸린 output를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갖는(또는 놓여진) 동물관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대단히 기능적이지만, 동물들에겐 더 없는 불행입니다.

사람도 생명입니다. 사람에겐 그 신호가 무엇일까요 ?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곧 빛이 이 세상에 전파처럼 날라왔다고 말합니다. 그 빛으로서 구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불교에선 무명이란 때가 덕지덕지 말라 비틀어져 덮여 있습니다. 하니 그를 벗겨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폭할 신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당연 device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태도를 떠나, 제가 제안하는 인간이란 생명에 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겸손이란 신호를 입력 받아, 사랑의 증폭기를 통해 온 만물을 사랑하는, 아니 하여야 하는 device들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자들은 돈이란 신호를 먹이로 하여 생존을 확보하자고 외쳐댑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이 얼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경제 device로 전락시키고 있는 그 현장에서 love amplifier로서의 사람은 그림자 자취도 보이지 않습니다.

biasing device가 가짜인 경우 또는 확인불능인 경우는 주변에 널리 분포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저는 占치는 것을 듭니다. 미아리 점집에 아낙네가 듭니다. 복자(卜者)는 슬쩍 곁눈질로 행색을 훑습니다. 어두운 미간, 기미낀 얼굴이 이미 3할은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슬쩍 곡지통을 건드리면 제풀로 하소연이 울음 섞여 토해집니다. 복자는 다만 사태를 적절히 수습하며, 누를 것은 누르고 펼곳은 펴며 그럴 듯이 어르고, 누지르며, 반지르 엮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동원되는 device는 속이 텅 비었습니다. 다만 거기 최영장군의 혼이 들어 있거나, 잘린 아기 손가락 명두(明斗)가 계실 뿐입니다. 하니 복화술무(腹話術巫)는 책임이 없습니다. 영험스런 복화(腹話) 또는 공창(空唱)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곧 神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양식적인 언술구조를 가지는 biasing device는 대단히 혼란스런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누구도 명두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복화술무가 내지르는 휘파람 소리에 묻어 공중에서 들리어오는 명두 소리는 사람들을 신묘한 세계로 안내합니다. 그 자리, 제 몸통 device box가 동조되어 공명하는 자가 있는 반면, 허무맹랑한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질 터인데, 저로서는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할 뿐, 평하는 바, 수고를 굳이 지불하고 싶지 않군요.

무인(巫人)이 제시하는 device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저로서는 확인불능입니다. 하지만, 당골무도 아닌 평상인이 아무런 논거도 없이 확신에 찬 소리를 지를 때는 정말 황당합니다.

최근에 목격한 사례들을 들어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서 모두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을 뿐, 일부 매체에서 암시하는 특정 직종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 이명박의 팬텀機(phantom device)는 구름을 가르며 허공을 날아갑니다. 飛行雲은 이내 “얼굴이 덜 예쁜 여자”로 화합니다. 참 재주도 좋군요.

“누구는 사주팔자가 어떠하여 이번에 대선에 승리한다.”
- 장안의 갖은 술사들이 3년 공방살 낀 과부댁 속곳 털 제, 서캐 쏟아지듯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인가요 근 20여년 동안 유배중에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중 주역에 대해서도 깊은 해석을 해낼 정도로 밝았습니다만, 邪學으로서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즉 점을 친 적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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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를 보면 input 일부가 잘리고 반만 증폭되어 출력됩니다. 제시된 그림은 B급 증폭기라 하여 의도적으로 반만 걸리도록 동작점을 옮겨 맞춘 것입니다. 나머지 반은 극성을 반대로 한 다른 device로 걸러내어 짝을 맞춰 둘을 합쳐냅니다. 이 예의 경우에는 정교하게 고안된 설계 목표가 있습니다만, 우리네 일상에선 기히 준비된 device의 동작점에 제대로 신호를 맞춰 인가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입력시키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 가랑이가 찢어진다.”와 같은 예와 유사합니다.

권위에 빌붙어 제 분수도 모르고 우쭐대며 대드는 꼬락서니들의 행진을 보면 뱁새와 함께 동작점 어긋난 TR이 줄지어 생각납니다. 제 것이 아닌즉 겨냥이 틀릴 수밖에 없지요. 남의 옥그릇은 제 질그릇보다 못하니, 함부로 제 것 아닌 것을 넘볼 일이 아닌 겝니다.

앞에서 device를 설계할 때, 온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위에서 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예를 또한 보게 됩니다. 즉 이미 마련된 device를 천편일률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대로 차용하여 대입하는 경우입니다. 사정이 다른 형편인데도 자기가 가진 고정된 reference frame에 비추어 사물을 재단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빠돌이의 행동이 보통 이렇습니다. 빠돌이의 경배 대상이 어떠한 엉뚱한 짓을 하여도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며 눙치며 받드는 것이지요. 온도보상회로도 장착되지 않았으면서 바뀐 조건환경하에서 기히 마련된 device가 지고지선으로 바른 것이라고 휘갑칠을 해댑니다. 빠돌 집단내에서는 마스터베이션의 황홀감을 서로 교환할 수는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로서 외부의 멀쩡한 사람들을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賣道漢 - 도를 파는 사람들
매도한들 역시 이와 유사합니다. 양식화된 틀 속에 약간의 변형된 소재를 넣고 동작시키면 매번 유사한 구조물들이 양산되곤 합니다. 그릇에 담긴 깨끗한 물도 오래 머무르면 썩습니다. 때문에 틀이란 고정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안식을 기약할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이 얘기는 곧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공간 제약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 구속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히 마련된 device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성실하게 다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device는 현재에서 미래로 건너는 뗏목에 불과합니다. 지금을 건너는 순간 이제 타고 있던 뗏목에 대해 품고  있던 연정은 거두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빠돌이는 영원무궁토록 뗏목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합니다. 썩어 악취가 나도 그지없이 순정을 바칩니다. 아 그 열광인들 휴거를 바라는 종말론자의 간절한 희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하지만, 종말도 휴거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途上에 있는 길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 저믄녘 지친 몸을 뉘이고 허갈진 배를 채울 주막만이 오늘을 길마중합니다. 길 위에 선 자신을 내일 다시 목격하는 것은 내일의 몫입니다.

때문에 성실한 사람은 다만 현재만을 사랑합니다. 내일 내가 누구를 사랑하게 될런지 자신도 모릅니다. 영원을 시간축에서 축차적으로 유보하는 태도야말로 지금 현재에 성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하니 지금만을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인즉 영원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bias는 하나도 갖지 않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기에 원만구족하니 둥구런히 떠오르신 달님을 보고 가지런히 마음을 모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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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kkk님/

외롭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있고 없어서가 아니라, 늘 외롭습니다.
수절 과부 허벅지 속처럼 뼈가 시리도록 아픕니다.
특히 만월이 뜨면 늑대처럼 바위에 올라 달 보고 꺼이꺼이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독외에 또 무엇을 구할 바가 있단 말인지요.
이외에 아직도 사랑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외롭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bongta :

ooo님/

大圓鏡智
ooo님이야 큰 거울 닦아, 두루 비추어 이치를 밝히시려 하니,
저의 얕은 공부 자락에 큰 바람을 일으켜서 맞춤 깨우침을 주시곤 합니다.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우리의 삶을 휩싸고 있는 신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닌가....”

도가에서 신선술을 배워 경지에 오른 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탈을 바로 벗어 버리고 羽化登仙해버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이 진진한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신선이 되는 것을 유보하고 수명만 800세, 1000세 연장하면서 인간세상에 머무릅니다.

불교에서는 지장이니 유마는 중생이 고해에서 허덕이는 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대자대비 서원을 세웁니다만,
이에 비해서 도가는 사뭇 자귀로 나무 옹이 쳐내듯 行脚이 간출하군요.

이렇듯 유보의 철학이 깃든 대승불교이기에
관음조차 二手二眼으로 부족해 千手千眼으로 그려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禿頭獨眼 소승이 담백해보이기도 합니다.

“지리한 천국”, “즐거운 지옥”
이민을 간 사람이 그곳과 한국을 비교하는 말이지요.
확실히 한국은 “즐거운 지옥”이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돈이 많아야 “지옥”을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한국은 “지리한 지옥”일 것입니다.

거기는 돈이 있으면 “즐거운 천국”이라도 된답니까 ?

한국은 지금 나만은 “지리한 지옥”의 당사자가 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신념의 전사들이 콩나물 시루에 들어찬 나물대가리처럼 아우성들입니다.
하여 나만은 “즐거운 지옥”의 주인공이 되리란 희망과 기대 속에 모두 들떠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이하여 한 사람에게 50-60%의 열망을 퍼부어댈 수 있겠는지요 ?
銅臭에 취한 것일까요 ?
그가 땅도 많고, 돈도 많으니 아닌게 아니라 그럴 상 싶습니다.
로또 사놓고 달뜬 사람들도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닐런가요 ?

저는 이게 저들만의 책임이 결코 아니라,
현 정권, 과오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타인은 없습니다.
특히나 정치인에게 그런 전망을 구하는 것은 緣木求魚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業에 충실할 뿐,
그들의 작업에 내가 자진하여 동원될 까닭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래서 부끄럽습니다만, 영영 정치적 허무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과업을 쟁취했을 때,
과실을 저 열망의 당사자들에게 고루게 전할까요 ?
저는 그들만이 아니라, 저 자리를 노린 그 어떤 자라도 그리 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業에 바쁠 뿐,
나는 내 業을 닦을 뿐.
이 비정치적 태도가 저의 정치적 결단의 내용입니다.

여름 내내 행락객 때문에 산을 혼자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처서 지나 모가지 비뚤어진 모기인 양
그들 각다귀같은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더군요.
그들은 산을 거의 유린하려고 찾아오는가도 싶습니다.
아랫 동네에서도 다하지 못하여 예서까지 온갖 허물을 분주히 흘려냅니다.

하여, 쉬이 곧, 조촐하니 夜行을 하려고 합니다.
거기 달 보며 ooo 내외분께 조각 안부를 띄워보내겠습니다.


bongta :

ccc님/

이 좁은 국토,
게다가 서울권역에 인구의 태반이 삽니다.

서울에 있는 산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마지막 남은 공간.
숨막히는 저 아랫동네에서
죄 짓고 숨어들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곧 소도(蘇塗)입니다.

게에 들면,
은원(恩怨)도, 애증도
좁다란 숲길 따라
청사(靑蛇)처럼 이내 사라집니다.

산이 도시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그래서 위대한 축복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허여(許與)된
은총의 손길이며,
자비의 숨결입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산은 내게 곧 신령님입니다.

풀꽃, 나뭇잎은
바람에 반짝거리는 요정입니다.
그들 옷깃에 달린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는 이내 빛으로 튕겨
녹색 향연을 베풉니다.

그런즉, 축복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산에 든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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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20. 11: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