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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Hydra)는 세상에 왜 존재하지 않는가?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9. 1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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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괴물이다.

“헤라크레스가 히드라를 퇴치하기 위하여 나섰으나,
몽둥이로 히드라 머리를 하나 떨어뜨릴 때마다 2개가 생겨났다.
조카인 이오라오스의 도움으로 잘린 히드라의 목을 불에 태우고,
떨어진 머리는 땅속에  묻은 뒤 큰 돌로 눌러 놓아 죽였다 한다.
헤라클레스는 히드라의 몸에서 얻은 독을 화살에 묻혀 사용했는데,
그 독화살을 맞은 부위의 상처는 不治였다고 한다.”

이게 대강 훑어본 히드라의 신화내용이다.
현실에서 히드라라는 동명의 강장동물이 있지만,
신화에 등장하는 히드라와 같은 다두일신(多頭一身)은 아니다.
머리처럼 보이는 것은 촉수이거나, 그 분화체들이 군체를 이루고 있을 뿐이다.

one body - multi heads
몸둥이는 하나이되 머리가 여럿인 생명 또는 조직에 착목하여,
생각의 끈을 어슬렁 따라가보고자 한다.

one body - multi faces
몸둥이 하나이되 얼굴만 여럿인 경우는 이와는 다르다.
이 경우 얼핏 생각나는 게 관음이다.
多面觀音
관음은 자유로이 몸을 바꿀 수 있다는 소위 관음33응신설에 따라
다양한 변화상들이 나타나, 이들이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특히 얼굴이 여럿인 관음상들이 창출되었는데, 이게 대단히 인상적이다.
십일면관음이 대표적이지만, 3면, 10면 등 여럿 모습들을 보이신다.
그런데, 이것을 보면 얼굴이라기보다 머리가 여럿인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니 이것을 multi-faces로 볼 것이냐 아니면, multi-heads로 볼 것이냐 ?
더 나아가 one body가 아니라 multi-body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혼란이 올 수 있다.

더욱이 관음은 얼굴뿐이 아니라 눈 또는 팔이 여럿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일면사비(一面四臂), 삼면사비(三面四臂), 삼면육비(三面六臂), 십면팔비(十面八臂),
십일면이십비(十一面二十臂), 천수천안관세음(千手千眼觀世音) 등이 그것이다.

千手든 多臂이든 게다가, 千眼을 갖춘 多面의 관음으로 나투시는 바,
이는 시방(十方)에 고통받고 있느 중생을 빠짐없이 살펴,
그들을 제도하기 위한 최승의 능력을 표출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런데, 관음을 지칭하는 표현에 多面은 있어도 多頭라는 지칭은 없는 것 같다.
이로 미루어 일두다면(一頭多面)으로서, 변신자재(變身自在)를 표현한 것으로 보고 싶다.

또한 변신하여 여러 모습으로 신형을 바꾸어 나타나기도 하나,
이는 머리 하나에 몸체가 여럿인 multi-body는 더욱 아니다.

정리하자면 관음은 일신다면(一身多面, one-body & multi-faces)이며,
일두다면(一頭多面, one-brain(head) & multi-faces)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겉보기에 여럿 얼굴을 내보이시되,
머리 즉 존재 또는 인식주체(brain)는 하나로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싶은 것이다.
한편, 상황에 따라 변신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나투시는 것은
또 다른 관음의 능력이다.

예컨대, 馬頭身으로 나투신다든가, 때로는 여인네로 변신하지만,
저마다의 그 변신한 현장에서 인격신 주체는 하나라는 것을
다음 이야기의 지속을 위해 특별히 지적하여 두고 싶다.

***


(KITTEN Born With Two Faces, @http://www.wftv.com/video/4268165/index.html)
* 이 고양이는 얼마전 확인하니 죽었다 한다.

샴쌍둥이의 경우 이중체(二重體)이니,
머리가 둘임과 동시에 몸체 역시 둘이다.
인격체 둘이되 몸체 일부가 공유되거나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중요 기관이 공유되었을 때다.
공유되었다라는 것은 특정 장기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경우를 말한다.
가령 심장이 둘이 아니고 하나라든가, 위가 하나인 경우이다.
심장이나 위같이 불수의근으로 작동되는 기관은 염려가 덜하나,

손이나 발을 두 인격 주체가 공유하고 있을 경우에는 문제가 심각하다.
가령 인격주체 A의 의지가 손을 좌로 움직이고자 하는 순간,
B는 우로 움직이고자 하였다면 어찌 될 것인가 ?

샴쌍둥이의 해부학적 지식이 없어 추정에 불과하지만,
양 주체로부터 뻗어나온 명령전달체계의 신경말단이 손 근육에 동시에
연결되어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 손은 간질처럼 떨다가 종국엔 마비되고 말 것이다.

이들을 분리수술하고자 할 때,
분리후 생명유지가 가장 중요한 판단 요소자료이겠지만,
공유부분의 분리내지는 할당의 문제가
원활한 생물학적 기능 작동 여부의 평가는 물론이거니와
당사자인 인격주체의 동의를 전제로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는 의학적 문제를 떠나, 윤리적 판단 그리고 법률적 인격권의 문제까지 번지고 만다.

***

그렇다한들, 샴쌍둥이가 이중체라면,
이런 문제가 여하간 해결되리란 전망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이중체가 아닌 단일체(單一體)라면 어찌 할 것인가 ?
즉 머리는 둘이되 몸둥이는 온전히 하나라면 말이다.

冒頭에서 거론한 히드라는, 사실 이 경우를 두고 말을 이끌어내고자
동원한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분리수술은 불가능하다.

현실에서 이중체인 샴쌍둥이 분리수술이 가끔 성공하지만,
분리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명을 잃는 경우도 많다.

그렇지만, 지금 지적한 이두일신(異頭一身) 또는 다두일신(多頭一身)은
분리수술도 불가능하지만, 설혹 분리수술을 하지 않았다고한들
생명을 오래 유지하지 못하고 이내 죽고 만다.

설혹 동체(胴體)가 제 가능을 발휘하고 있다고 하여도
多頭들로 인한 신호체계의 혼란은 조직생명체의 장래를 위험에 빠뜨리며,
그 위험은 쉽사리 제거되지 못하고 끝내 不和인즉 곧 사망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런 생명체를 현실에선 보기 어렵다.
태어나는 사례가 드문 것도 이유이지만,
실인즉 오래 살아남을 수 없는 까닭 때문에
더욱 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다두일신(多頭一身)은 없다.”

서론이 길었지만, 이게 사실은 내가 오늘 말하고 싶은 주제어다.

생명이든, 조직이든 유기적 결합관계란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들은
신경전달체계의 복잡 수준이 여하하든,
최종 통제 또는 조정의 중추가 단일화 되어 있지 않으면
필경은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되고 만다.

이것은 나의 가설에 불과하다.

검증되지 않은 이런 가설에 대해 이리 저리 산만한 생각의 실마리들을
쫓아가며 그저 한가롭게 소일하고자 하는 것이다.

***

“동업은 내가 도시락 싸고 다니면서 말리겠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을 보았는가 ?

동업이란 무엇인가 사업 조직은 하나이되 수뇌부는 둘 이상인
다두일신(多頭一身)의 전형이다.

동업은 대체로 깨지고 만다.
처음엔 핑크빛 꿈을 함께 나누며 거창하게 시작되지만,
얼마가지 못해 사고가 터지고 불화가 팽배하여 끝내 쪼개지고 만다.

사사건건 난마처럼 얽혀 충돌되기 일쑤이니,
의사결정이 고단한 경로를 지나야 하고,
업적에 대한 평가가 어려우며,
과실에 대한 분배엔 다툼이 일상이다.

부부가 일심동체라고 누가 말했는가 ?
요즘 젊은 이들은 주머니도 따로 찬다.
성씨도 부모 양씨를 함께 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프레시안엔 “전홍기혜”라는 기자가 있다.
“고은광순”이라는 사람도 인터넷에서 가끔 접한다.
예식장 들어갈 때 발깔개를 누가 먼저 밟느냐에 따라
향후 주도권의 향배가 결정된다는 서양 풍속이 있다.

여담이지만,
나는 姓氏로 유전하는 그 씨 고유의 identity를 믿지 않는다.
성씨라는 것이 남성 위주로 대표성의 지위를 형식 편의상 부여하였을 뿐이지,
피의 내막인즉 여타 다른 성씨들이 함께 누천년 두루 섞이고 섞인 것인즉,
그 성씨란 이름하에 표상되는 가치의 무게는 한톨도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성씨라는 것도 주어 사다 맞춘 것이 태반이라고들 하지 않은가 말이다.
하니 “전홍”이든, “고은”이든 양성씨의 조합으로서 성씨의 背理에 항거하는
모습은 외려 애뜻하니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하지만, 그들 첫발걸음엔 고루한 인식을 깨고자 하는 조각(片) 의지가 담겨져 있으니
크게 나무랄 일은 아니리라.

돌려잡아 바로 이야기를 잇는다.
부부관계를 일심동체로 아우르며,
한데 결속하기엔 양 인격체의 주체적 독립성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것이다.

이게 시대상의 반영이라기보다는
원천적으로 생명이든 조직이든
유기적 조직체는 일두일체(一頭一體)의 속성을 벗어나지 않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일두일체가 아닌 多頭體인 경우는 그 결속을 위해 특별한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다두일체(多頭一體)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비상한 약속과 다짐이 있어야 하는 게다.

“그것은 자기희생이다.”

관포지교의 주인공들 관중과 포숙아의 이야기를 잠깐 되새겨본다.

“제나라, 포숙아는 자본을 대고 관중은 경영을 담당하여 동업하였으나,
관중이 이익금을 혼자 독차지하였다.
그런데도, 포숙은 관중의 집안이 가난한 탓이라고 너그럽게 이해하였고,
함께 전쟁에 나아가서는 관중이 3번이나 도망을 하였는데도,
포숙은 그를 비겁자라 생각하지 않고 그에게는 늙으신 어머님이
계시기 때문이라고 그를 변명하였다.
이와 같이 포숙은 관중을 끝까지 믿어 그를 밀어 주었고, 관중도 일찍이 포숙을 가리켜
"나를 낳은 것은 부모이지만 나를 아는 것은 오직 포숙뿐이다(生我者父母 知我者鮑子也)"
라고 말하였다.”

희생, 사양(辭讓)의 정신이 없다면, 多頭체계에선 다툼을 피할 수 없다.
때로는 경쟁과 견제가 도입된 경우가 있지만,
이는 차선지책이거나 보조기능으로 차인되었을 뿐이다.

기여와 업적에 대한 평가는 대단히 어렵다.
사소한 틈이라도 이를 비집고 불만이 싹트면 장래가 불안해진다.
이 평가시스템을 희생의 구조없이 구축하려면,
의사결정, 업적 평가, 분배에 대한 정교한 규정과 매뉴얼화가 필요하다.
하지만 구축이 쉽지도 않지만, 마련되었다한들
자칫 조직의 경직화와 창의적 풍토 조성을 가로막을 수 있다.
이는 종내는 조직의 자기부정을 초래하곤 한다.

가끔 말씀드리는 한비자는 바로 이 점에 착안하여,
모든 것을 法과 術로 限定하고자 하였다.

“떡은 혼자 먹어야 맛있다.”

일은 함께 도모하지만,
사후 창업공신들에게 떡 나누어줄 때,
인색해지기 쉬운 게 창업주들의 마음이다.

범려도, 개자추도 이 이치를 알아 공을 이루고는 스스로 물러나 명을 보존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자추는 불에 타죽었긴 했다.
한신은 일세의 지장이었으나 이를 거슬러 가다, 결국 토사구팽 당하고 만다.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꼬리는 되지말라(寧爲鷄口無爲牛後).”
연횡술의 장본인 소진이 韓王을 설득하고자 인용한 고사다.
나는 인간만이 아니라 여늬 생명 일반, 나아가 조직일지라도,
주체적 각성이랄까,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를 보지 못했다.

부처는 이를 경계하여 無我를 교시했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이게도 무아를 들어
중생들의 존재조건으로서의 有我를 까발렸음이 아닐까 ?
그리하여 唯我임,
즉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을 고고히 홀로 외치셨음이리라.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 할 때
이는 곧 지렁이가 아닌 인간의 말이지만, 그 사정을 잘 드러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하에 왕은 오로지 하나인 이치가 이러하다.

***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대한민국 국군은 인민군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미 해주를 탈환했습니다."

6.27 이승만은 이미 대전으로 떠났다.
그날 방송으로는 이리 선전해대고,
바로 이튿날 6.28, 한편으로는 한강인도교를 폭파했다.
다리 건너던 사람은 풍비박산되었고,
순진히 믿고 남은 사람도 속고 말았다.

그가 한 유명한 말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이 무색해지고 만다.

뭉치면 산다라는 말이 그럴싸 하지만,
이 말이 누구에게서 나왔느냐가 중요하다.
보통 그럴싸 한 말이 정치인을 통해서 전해질 때,
그것이 동원된 수사와 거짓이 아닌가 의심해보아야 한다.
정치인은 이제나 그제나
분홍빛 희망처럼 다가와 검은 절망밖으로 사라진다.

하지만, 이승만 입장에서야 제가 대가리인즉,
까짓 몸둥이들 박살 나는 것이 대수랴.

일두다신(一頭多身)이니
하나, 둘 아니 수천 몸둥이가 죽어나간들
대가리 하나 건사함에 비하랴.

그들 정권은
“다두일신(多頭一身)은 없다.”라는 이치를 알았음인가 ?
하지만,
국민 개개인이 모두들 일두다신(一頭多身)이라고 생각한다면 어찌될까 ?
모두 자신의 대가리 하나를 위해 뭇 타인을 수단화 하는 순간,
이젠 일두다신(多頭多身) 즉 리바이던 상태가 되고 말 노릇이 아니겠는가 ?

하니 모두 사는 길은 각자는 모두 함께 일두일신(一頭一身)을 자각하는 일이리라.

***

cpu가 얼마전부터 core가 2개 또는 4개씩 들어 있는 것이 등장했다.
듀얼코어니, 코어2듀오, 코어2쿼드란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다.
한즉 곧 머리가 2개내지는 4개짜리인 히드라 cpu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multi core든 multi cpu든 본질적으로 같다.
현재로선 cpu 여러 개를 하나로 packaging화한 게 multi core일 뿐이다.
소위 병렬처리방식의 컴퓨터가 수십년전부터 서버급에서는 널리 쓰이던 기술이었으나,
이제 일반화되고 있는 것이다.

병렬로 일을 처리한다면 당연 속도가 빨라질 터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 기술적 내용이 아니라,
多頭와 관련된 문제들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core가 여러 개일지라도,
그들을 함께 아우르는 역할을 무엇인가 하나가 담당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하드웨어가 되었든 os가 되었든 무엇인가는 나서야 한다.
당연한 것이 일(task, thread)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할당하고, 통제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각각의 core들이 성능이 아무리 뛰어난들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실제 일들을 쪼개 분배하고, task간 자료 교환을 위한 communication,
우선순위를 정하는 등의 총체적 통제 주체가 별도로 존재한다.

하니 多頭는 분명하되,
두목급 一頭가 system내에 채비되어 있는 것이다.

***

다중인격(identity disorder)
집단지성

마무리하려고 하니 이 말들이 떠오른다.
다중인격이란 한 인격체 내부에 여러 인격들이 내재하는 것을 이른다.
하지만 이는 심리적 외상으로 인한 장애 때문이니 논외로 하자.

집단지성은 내가 깊이 알지는 못하므로 함부로 평할 입장은 아니다.
허나, 그 폐해에 대하여는 겪은 바 있기에 그 점에 대하여 언급을 할 수는 있겠다.
황우석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 사이트 운영자가 집단지성을 앞세우며,
그들 황빠들을 부추기며 은근히 사이트 이익을 도모하던 더러운 작태를 기억하고 있다.

온라인 백과사전 위키피디아(wikipedia.org)의 경우,
부정확한 정보나 의도적인 악의의 정보가 실렸을 경우,
이를 집단지성의 이름만으로 교정되리란 보장을 장담할 수 있을까 ?

언젠가 얘기 하였듯이 인터넷은 인류사 이래 최초로 탄생한 절대평등공간이다.
하지만, 그 공간을 끈임없이 침탈하고 교란하는 세력이 없다라는 말이 아니다.
각종 virus, adware, spyware가 난무하고,
타인의 인격을 훼손하는 작태가 벌어진다.

일각에선 통제불능 상태로 놔두어서는 아니되니,
인테넷 실명제를 하자는 등, 경찰노릇 하자는 이들이 대두되고 있다.

多頭 히드라들의 향연장,
메두사가 날뛰는 현장에
一頭가 나타나 천하를 제패할까나 ? 

나는 집단지성을 믿지 않지만,
이곳 인터넷만큼은 多頭 히드라가
자신의 운명을 맘껏 농락(?)할 수 있었으면 하는
소박한 소망을 갖고 있다.

행인지, 불행인지 현실세계에서 나는 一頭가 아닌가 말이다.
한즉, 저 세계의 多頭와 무엇이 두려와 함께 하지 못할손가 ?

***

p2p(peer to peer)

p2p는 서버 중심으로 파일같은 정보를 공유하는 전통적인 시스템이 아니라,
참여자 모두가 동시에 server가 되기도 하고 client되기도 하며
정보를 합동으로 공유하는 network를 말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A peer-to-peer based network. @wikipedia.org)

사용자 삽입 이미지

(A server based network. (not peer-to-peer) @wikipedia.org)

edonkey는 특히 대용량 파일을 분할하여 공유하는 시스템으로
p2p 세계에 기념비적인 족적을 남겼다.
이들은 프로그램 소스를 공개하지는 않았지만,
참여자들 모두가 공평하게 정보(자료)를 공유하는 방식을 취했다.

emule이라는 프로그램은 edonkey network에 편승하여 새롭게 등장한다.
이들은 프로그램 소스는 공개하였지만,
client들에게 비대칭적 접근권을 부여하는 방식을 가능하게 하였다.
예컨대, 유료회원 또는 자신들만의 회원들에겐 차별적인 접근 우선권을
부여하여 정보 공유의 차등화를 시도하였다.

(* edonkey=e+donkey, emule=e+mule
donkey=당나귀, mule=노새)

역설적이게도, 소스의 상업적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던 edonkey는
정보 공유에 있어서 공평성을 우선 철학으로 保持하였고,
반면 소스의 자유로운 공개와 유통을 모토로 한 emule 진영은
실제 상업적 이익을 꾀하고, 정보 유통의 불공평을 조장했다.
이게 오히려 사용자들을 자극하여 상당한 성공을 가져왔다.
참여자는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고서라도 차별적 지위를 획득하기를 원했던 것이다.

현실에선,
edonkey는 emule측에게 날로 사용자들을 빼앗끼고,
프로그램에 대한 저작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오히려 법적 제재에 취약했다.
이런 와중에 개발 요원의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 등 불행한 일이 겹친다. 
종내 그들은 개발의욕을 접고 얼마전 사이트를 폐쇄하고 말았다.

그들의 사이트 http://edonkey.com/에 접근해보면
다음과 같은 문구가 나타난다.

The eDonkey2000 Network is no longer available.

If you steal music or movies, you are breaking the law.

Courts around the world -- including the United States Supreme Court --
have ruled that businesses and individuals can be prosecuted for illegal
downloading.

You are not anonymous when you illegally download copyrighted material.

Your IP address is 2xx.2xx.1xx.1xx and has been logged.

Respect the music,  download legally.


묘지명치고는 너무 차갑고, 드라이하다.
edonkey를 사랑했던 사람의 하나로서
묘지 앞에 서서 옷깃을 여미며 그들을 삼가 조상한다.

edonkey의 사망은 결정적으로는 법적 공격에 있지만,
나는 多頭 체계의 허망한 자기부정에 주목하고 싶은 것이다.
즉 emule은 절대평등의 고고한 철학에 기초한 edonkey를 향해
욕망이란 숫돌에 예리하게 벼린 私益이란 비수를 들고
멱을 무참하게 따버린 게 아닌가 싶은 게다.

평등한 client만으로 구축된 세계에 힘센 강자가 등장하자,
급속히 평등한 역학관계가 깨져버리면서 세상은 칼잽이들에게 굴복하게 된다.
나약한 client들 역시 자진하여 그들 殺手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재낀다.
의식하든 아니든 그들은 강고한 힘이 일으키는 소용돌이를 거부할 역할을 맡지 않는다.

일반 현실의 세계에서도 善인 양 우러러 널리 선전되는 바,
대부분은 역시 그러한 양식을 따르고 있다.
힘센 강자에게 몰아주자는 게 그게 아닌가 말이다.
선수들에게 빵을 만들게 하고, 나중에 나누어 먹자라는 논리 말이다.
그들이 빵을 만들게 하기 위해선 지금 약자들은 찌그러져 있으리란 선전 말이다.
빵이 효모에 부풀고 익기까지 약자들의 배고픔은 인내되어야 하며,
그후 빵이 제대로 배급되리란 약속은 아직 발행되지도 않은 어음으로 移書된다.

이렇듯, 이 세상의 구조는 多頭가 一頭에 수렴되게 경사져있다.
一頭가 넘보는 세계는 그래서 나중은 보증되지 않고, 현재는 아픔을 동반한다.
난 그 아픔을 오늘 히드라의 얘기를 들어 맨 나중에 이리 기억해두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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