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죽음
꿈 하면, 장자의 胡蝶夢 이야기가 유명합니다.
“장자가 어느 날 낮잠을 자면서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 나비가 되어 신나게 날아다니며 자연을 만끽했는데, 잠시 쉬려 나뭇가지에 앉았다가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보니 인간 장자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때 莊子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본래 인간이 꿈속에서 나비가 되었던 것인지, 아니면 본래 나비가 꿈속에서 인간이 되어 이렇게 있는 것인지 구별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
죽음은 사랑처럼 자주 읊조리지는 않아도, 언젠가는 누구나 마주치고 말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가끔씩은 이야기를 꺼내놓습니다. 하지만, 지 아무리 떠들어댄들 죽음을 경험해본 사람이 없기에 종내 허공중에 산화해 버리고 말, 말의 포말을 만들어내고 맙니다. 그 말의 포말을 무연히 쳐다보면, 어느 덧, 모르긴 몰라도 차라리 죽음보다 더 허망한 모습으로 뒷 자리에 혼자 덩그란히 남겨져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떠든 게 아니라 실은 제 삶의 껍데기들을 안주 삼아 한참 거하게 먹고 마시던 잔치마당을 벌린 것인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게 됩니다. 나는 잔치 뒤끝 홀로 남겨져 달 빛이 쓸고 간 배반이 낭자한 그 현장을 우두망찰 앉아 있을 뿐, 움켜쥔 손을 펴본들 거기 손 안은 여전히 텅 비어 바람만 씽하니 지나고 있습니다. 굿 해먹고 흩어진 무당의 집 마당같이 을씨년스런 자리엔 낮엔 까마귀 밤엔 달빛만 넘실됩니다.
그 자리 삼태기로 쏟아지는 의문스런 문제 제기외에 단 한톨의 확증의 자료가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끝을 내려면 산 자 외에 죽은 자를 불러내 함께 참여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 한, 숙취처럼 뒤 끝에 남겨진 것은 아픔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죽은 자는 산 자의 모임에 나타나기를 원치 않는 것 같습니다. 송장은 그리하여 몸도 마음보도 뻣.뻣하니 산 자에겐 교만한만큼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招魂의식은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이 아니라, 산 자의 슬픔을 달래기 위한 자기 기만과 도취의식에 불과합니다. 그게 아무리 슬프고도 아름다운 상황을 펼쳐낸들, 교묘히 위장된, 그리고 의도된 망각의 기획, 연출형식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기다리는 형식은 제법 은근히 아름답습니다만, 그것이 산 자의 갈증나는 궁극의 해답을 들려주지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방문을 기대하느니, 조금 더 참았다가 차라리 내가 그리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가기 전까지는 초혼의식을 빌어 한껏 연극을 즐기는 것이 더 수지맞는 장사가 됩니다. 때문에 오늘 밤 사람들은 다시 모여 신나게 떠듭니다. 비록 내일의 숙취가 예정된 것이라도, 오늘의 그 현장엔 술과 미녀와 말씀들이 흥건해, 떠들만 합니다.
티벳 불교에서는 잠 잘 때의 현상과 죽었을 때의 현상이 차이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일 꾸는 꿈은 무수한 죽음의 파편이거나 그 흔적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자는 이를 두고 죽음을 준비하고, 연습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만, 도대체가 죽음 같은 거대한, 아니 거룩한 사건을 연습으로 대하고 있는 그 태도가 저는 제법 불결하게 느껴집니다. 죽음은 연습이 대상이 아니라 즉각적이며, 즉물적인 체험이다 저는 이리 생각합니다.
그 보다는 저는 차라리 파정(破精)후에 오는 숫컷들의 허무감이야말로 죽음의 흔적기능이 아닌가 의심합니다. 숫컷은 사실 이후엔 쓸모가 없거든요. 그 후의 일은 모두 암컷이 담당합니다. 하니 파정이란 곧 죽음의 절차행위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 하지만 암컷에겐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창조 작업의 출발입니다. 사마귀는 교미후 암컷이 숫컷을 잡아 먹습니다. 거미 역시 숫컷은 교미후 암컷의 양식이 됩니다. 숫컷 사람인 경우, 죽음은 은사(恩赦)됩니다만, 대신 밖에 나가서 우유값을 벌어와야 합니다. 죽음의 유보 댓가로 땀 흘리며 열심히 뛰고 있을 숫컷들이 못내 가엽습니다.
티벳의 “사자의 서”에서 전하는 사자의 여행 길이라는 것이 너무 정교해 마치 물리학적 공간처럼 장력(場力)이 미만한 세계 같더군요. 거기엔 그 장력을 망자(중음신)의 의지로 교란할 수 있는 방법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업력(業力)도 기술적으로 통제할 수 있단 말인데, 중음(中陰)이 처한 그곳은 그리 불안정한 세계일런가요 ? 죽음의 세계를 탐험한 사람들의 보고서는 여럿이지만, 이 “사자의 서”처럼 체계적으로 기술된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 궁금하거나 걱정인 사람들은 한번 챙겨볼만 하겠군요. 그래도 그것을 다 외워야 효과를 볼 텐데, 저는 게을러서 다 외우질 못하고 있습니다. 대신 누군가 중음을 거닐고 있을 저를 위해 읽어줄 분은 없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만, 저처럼 게으른 자에게 49일간의 그런 복이 남아 있겠습니까 ? 이 찬란한 가을 볕이나 잔뜩 게으름 펴며 실컷 즐기겠습니다.
최근 열자란 책을 읽고 있습니다. 20대 한창인 시절, 대학교 때 읽었던 책인데 다시 읽어보니, 당시 그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동, 그리고 그 감동을 연료로 저의 인생향로가 조금은 영향을 받았을 터인데, 과연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하는 감상이 일렁입니다. 오늘 읽으며 느끼는 감동과 교차하며 쌍무지개를 그려냅니다. 마치 첫사랑의 연인과 해후인 양, 아련한 꿈결 길을 더듬으며 함께 가을을 마중하고 있습니다.
그곳에 冒頭에 적은 장자의 호접몽의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꿈에 대한 얘기들이 몇편 나옵니다. 그래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죽음은 비경험적인 것이지만 꿈은 만인이 직접 경험하는 것인즉 티벳 불교의 얘기를 믿는다면 차라리 이 편이 더 수월할런지 모르겠습니다.
“정나라에 어떤 사람이 들에서 나무를 하다가 놀란 사슴을 만나 이를 맞아(御) 때려서 그것을 잡았다. 그는 남이 그것을 볼까 두려워서 엉겁결에 구덩이 속에 감추어 놓고서 나무섶으로 덮었다. 그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가 갑자기 그가 감추어 둔 곳을 잊어 버렸다. 마침내 그는 꿈이었다고 생각하면서 길을 걸으면서 그 일을 중얼거렸다.
곁에 한 사람이 그것을 듣고서 그의 말을 따라 사슴을 찾아냈다. 그는 돌아와서 그의 집사람에게 말하였다. ‘조금 전에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꾸었는데 그 장소를 알지 못하겠다고 하였는데 나는 지금 그의 말을 따라 사슴을 주워왔오. 그는 바로 진실한 꿈을 꾸는 사람일 것이오.’
집사람이 말했다. ‘당신이 나무꾼이 사슴을 잡은 꿈을 꾼 것이 아닐까요 ? 어찌 그런 나무꾼이 있겠어요 ? 지금 정말로 사슴을 찾아왔으니 당신의 꿈이 진실된 것이지요.’
남편이 말했다. ‘내가 그것을 근거로 하여 사슴을 얻었는데, 그의 꿈이 나의 꿈임을 어떻게 알겠는가 ?’
나무꾼은 사슴을 잃은 것을 잊지 않고 있다가 그날 밤에 정말로 그것을 감추어 두었던 곳을 꿈꾸고 다시 그것을 가져간 주인공에 대하여 꿈꾸었다. 날이 밝자 꿈꾼 것을 따라 찾아가 그를 만났다. 마침내는 소송을 하여 사슴을 두고 다투게 되어 그 사건이 士師에게로 넘어갔다.
사사가 말했다. ‘그대는 처음에 정말로 사슴을 잡았으면서도 함부로 그것을 꿈이라 말하였었다. 정말로 사슴을 잡은 꿈을 꾸었을 때에는 함부로 그것을 사실이라고 여겼다. 저 사람은 정말로 그대의 사슴을 가졌으면서도 그대와 사슴을 두고 다투게 되었다. 집사람은 또 꿈에 남이 사슴을 잡아 놓은 것을 알게 되었으나 남이 사슴을 잡은 일이 없을 거라고 말하였다. 지금 이 사슴이 있다는 것에 의거하여 이것을 둘로 나누어 갖기로 하자.’
그것을 정나라 임금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아아 ! 사사는 다시 꿈에 남에게 사슴을 나누어 준 것일 게다.’
이에 대하여 재상에게 묻자 재상이 아뢰었다. ‘꿈을 꾸었는지 꾸지 않았는지 저로서는 분별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생시의 일이었는지 꿈속의 일이었는지 분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黃帝나 공자 같은 분이나 알 것입니다. 지금은 황제도 공자도 없는데 누가 그것을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 그러니 사사의 말을 따르는 것이 좋을 줄로 압니다.’”
어떻습니까 ? 죽음보다는 꿈 이야기는 조금 쉽습니까 ? 아니면 더 혼란스럽습니까 ?
이 얘기를 전하는 저의 별난 꿈은 또 어떠한 것입니까 ?
***
마지막으로 죽음을 어찌 사(買)는가 하는 그 전형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연나라 태자 丹은 후일 진시황이 된 政과 조나라에서 같이 인질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후일 다시 단은 진나라에서 볼모로 지냅니다. 정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야심이 컸습니다.
조나라에서의 정분을 앞세워 가까이 구는 단을 냉정히 대하지요. 단은 결국 진나라를 탈출하여 연나라로 도망을 갑니다. 이즈음 번어기라는 진나라 장수 역시 죄를 짓고 연나라로 도망을 갑니다. 이 통에 번어기 가족들은 전부 참살을 당합니다.
진나라는 날로 강해져 천하를 무참히 병탄합니다. 연나라 역시 그 위험 앞에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진시황에 대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연나라 태자 단은 나라를 구하는 길은 진시황을 암살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 동원된 암살자가 유명한 형가(荊軻)입니다. 이 얘기는 실은 지난번 “무문인”이란 글제로 한번 소개한 적도 있습니다. 진시황을 암살하려면 진시황을 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형가는 태자 단에게 두가지가 필요하다고 청합니다. 독항이란 지역의 지도와 번어기의 목입니다. 지도를 받친다는 것은 곧 그 지역을 할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태자는 지도는 내줄 수 있지만 번어기는 내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쫓기어 내 집에 숨은 궁조(窮鳥)를 내칠 수는 없다는 것이지요.
형가는 잠자코 번어기를 찾아갑니다.
“무기를 숨기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진왕 면회 허락을 받는냐 하는 것입니다.”
“좋은 방법이 있소?”
“진왕이 가장 기뻐할 물건을 헌상한다면 면회가 허락되어 진왕 가까이 접근할 수 있지요. 그 때 왕의 소매를 잡고 숨겨두었던 단도로 찌르는 것입니다.”
“진왕이 가장 기뻐할 물건이란 ?”
“무엇인지 모르시겠습니까 ? 장군이라면 아실 것으로 믿습니다만...”
“글세....”
“진왕이 가지고 싶어 애를 쓰는 것. 그것을 얻기 위해 황금 천근과 만호의 식읍을 현상으로 걸고 있는 것...”
“앗...”
“음 내 머리를 바치면 진왕은 기뻐서 누구라도 만나려 하겠지. .... 아니 형가님은 잘도 그것을 생각해 내어주었소. 고맙소. 이것으로 원한을 풀 수 있게 되었소. 죽어도 여한이 없소. 참으로 고맙소.”
-이것은 내가 밤낮 절치부심(切齒腐心)하던 일이다. 이제 간신히 가르침을 얻었다.-
(* 여기 절치부심이란 말은 사기에 나오는 말입니다만 전국책에서는 부심(손수변+付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슴을 두들기다란 뜻입니다.)
번어기는 기뻐하며 자신의 목을 잘랐습니다.
죽음 앞으로 달려가면서 기뻐하는 번어기 !
죽음을 알고 싶다면 번어기처럼 그리 내달으면 조금 빨리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이 얘기되고 있는 지금 소개를 해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이 그리 바쁘지 않다면, 그저 이승에서 이리저리 산보하며 더 둘러보다, 한가해질 때쯤 다가가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 것입니다.
***
저는 죽음에 대한 글제로선 아뢰야식, 자살과 자결이 떠오릅니다. 또한 금년 들어 소란할 정도로 부쩍 늘은 앞산 사찰에서 들려오는 천도제 경 읽는 소리에 덧붙여 여름내 얼핏 종교와 종교업태는 다르다라는 생각도 가져보았습니다. 이름하여 죽음사업, 장례산업. 이들을 주제 글로 엮어내고 싶었습니다만, 워낙 그릇 깊이가 밭은 형편이기에 삼가,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대신, jjj님과 kkk님의 천장에 매달린 휘황찬란한 샹들리에 같은 말씀의 조명을 받아가는 행운과 함께 기껏 제 발등만 비추는 족하등(足下燈)을 켜서 열자의 꿈 얘기에 빠져들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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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 참고 자료
예전 서프 hhh님의 본글에 대하여 jjj님과 저 bongta의 댓글이 마침 참고가 될런가 싶었습니다.
기억을 더듬어, 용케 찾아내었습니다.
이에 덧붙여 봅니다.
전부 배껴오니까 줄이 엉망이라, 다시 댓글만 옮겨 싣습니다.
jjj/
인간의 sex 는 정신적인 부분이 육체적인 부분만큼이나
크다고 생각합니다. 동물은 육체적 sex 에 비해
인간의 sex 는 정신적인 sex 인데,
어느 순간에는 sex 그 자체보다, 그 sex 를 매개로 한
정신적인 expectation game 으로 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가장 완벽한 sex 란,,,
가장 오래 expectation 을 유지시킬 수 상황에서 입니다.
결국,,,인간이 바라는 것은 3초간의 organism 이 아니라
그 3 초에 대한 기대감을 통한 delay 된 정신적인 희롱이지요
예를 하나 들지요.
사랑하는 여자를 잃고,
20년이라도 기다려
결국 그 여자를 차지하려고 할때,,,
그 일편단심 사랑은
결국 delayed sex, 극대화된 ,,expectation game,,,
이라고 해석할 수 잇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인간들이 먹을 수 없는 떡만을 그리는 이유도
결국,,,,이 sex 라는 순수한 육체적 행위 자체보다는
정신적인 게임으로 변환을 시켰다는 소리이지요.
sex 의 taboo 화도 그런 문맥에서 해석을 할 수 잇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성 어거스틴,,,,나이가 중년이 되도록 질펀한 sex 를 즐기고
갑자기 기독교에 귀의해 금욕을 선언한 사나이...
sex 자체보다,,,오히려 sex 를 스스로 금지함으로서
밤낯으로 sex 를 억누르려는,,,,일종의 왜곡된 sex 집착증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성 어거스틴 같은 탕자가 성자가 되는 이유는
이 놈들이 오히려 3초간의 오가즘이라는sex 의 본질을 잘 알기 때문에
sex 를 더욱 정신적으로 즐기기 위하여
결국 금욕이라는 길을 택하게 되는것이 아닐까.....
지나가는 생각입니다.
bongta/
jjj님의 인식틀에 늘 등장하는 그 이중 복선의 구조.
학창시절, 코를 비틀어 쥐는 것으로 벌을 대신하는 선생이 계셨다.
벌이 매로서 직선적으로 가해지는 세계가 아니라,
코를 비틀음로서 벌이 아니라는 위무가 동시병발적으로 존재하는 그 복선 구조.
그 구조 위에 서면, 선생 말씀대로 사이다 먹을래, 콜라 먹을래 이리 주문하며,
무차별로 서빙되어 지는 것은 결국 쏴 코끝이 져려오는 탄산까스.
그 탄산까스의 환각속엔 내가 부끄러운 벌을 받고 있지 않다는 달콤한 자기위안이 있다.
선생님도 그를 알았을까 ?
delayed sex란 말씀에 이르러,
sex는 되풀이 되는 자살(연습)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든다.
파정(破精)후 맥이 빠짐은 그 증거가 아닌가 ?
모든 의욕이 休에 들고, 나른한 침묵의 순간이 몰려든다.
이게 죽음 같은 것, 아니 죽음이 아닐까 ?
한참 후 깨어나 이내 情이 되그리운 것은
다시 파정을 예비함이니, 이는 살아 생전에 가져보는 죽음에로의 경험이 아니겠는가.
그래 거기엔 시지프스처럼 끊임없이 영원의 바다에 자맥질하는 숙명, 그 슬픔이 있다.
달콤한 제례(ritual).
가혹한 형벌.
그 형벌을 자각하여 다른 길을 찾아 든 이가 사문(沙門)이 아닐런가 ?
평범한 사물 뒤에 숨어 있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직감적으로 잡아내는
직관이야말로 짜릿한 망아(忘我), 엑스타시스(ekstasis)의 길에 이르르는
유일한 형식이 아닐까 한다.
사문은 말은 모두 그럴듯이 뱉어 내지만,
그 길을 영원히 가고 싶어하는 욕망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bongta :
살아 있으면서 죽지 않으려고 애쓰고 괴로워하는 존재(苦存).
그러니, 그들이 머무르고 있는 세계, 땅인즉 忍土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산다는 것이 고통스러운 일인 까닭은 살고 있으면서도 죽어야 하기 때문이며,
행복을 추구하면서도 못내 괴로운 일들에 둘러 싸여 있기 때문입니다.
하니 이들이 살고 있는 땅은 忍土 곧 사바세계라 불리웁니다.
인도에 쨔아르와아까(Carvaka)라 불리우는 유물론학파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쾌락주의자인 동시에 회의론자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주장을 한번 들어보고자 합니다.
“살아 있는 동안만이라도 즐겁게 살며 밀크를 많이 마시되
남의 돈을 꾸어서 사 마시고 그 꾼 돈은 갚지 말아야 한다.
한번 죽어 화장터에 재가 되면 다시 이 세상에 돌아올 이치도 만무하니
그 꾼돈을 죽을 때까지만 갚지 않으면 영원히 갚지 않아도 된다.”
단 한번만의 생사로 끝난다면 이들의 태도는 참으로 남는 장사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윤회전생하는 게 인생이라면 이젠 새로운 장사법을 만들어야 합니다.
윤회를 믿지 않는다 하여도, 나중에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면 역시 마찬가지로
새로운 대처방법을 마련하여야 하겠지요.
이에 대한 처방전을 들고 나타난 게 종교가 아니겠습니까 ?
고통이라든가 죽음이 무엇인가를 釋明해내는 일을 철학이 앞장서 왔습니다만,
이들이 고통, 죽음을 없애주지는 않았습니다.
종교는 세계의 구조를 규명하기보다는,
苦海의 바다를 건너기 위한 처방전을 갖고 있기에 믿음을 삽니다.
그렇다면 좀체로 밀크조차 먹지 않으려 하고,
종교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무엇입니까 ?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은
이 고통스런 세상을 한번에 끝장내기를 원치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자신이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고한들 죽음만큼은 고통인 것입니다.
하물며 대부분의 삶은 행복보다도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니,
그냥 죽고 말면 너무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니 죽음이후의 세계를 새로 설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현생에 고통스럽게 살았던 사람은 재차 도전할 기회를 얻기 위해,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도 영원히 복토에서 누리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제 주변엔 밀크도, 종교도 없습니다.
하지만 소마(Soma)酒는 넉넉합니다.
소마神은 지상의 감로이자, 천상의 감로이고,
하늘에 걸려 있는 달로도 여겨집니다.
실제 리그베다엔 태양신 수리야와 소마(달)의 결혼을 찬양하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태백이가 술과 함께 달을 사랑하였듯이,
소마는 모든 것을 여읜 자의 영원한 벗인 겝니다.
실제 이태백은 서역인이라는 설도 있지요.
신분상승의 한계를 이미 안고 출발한 까닭이었을까요 ?
정치적 성공이 좌절된 그는 본디 여읜 자였습니다.
달은 강에 젖어 은빛 전설을 서리서리 빚어냅니다.
우리네 인생은 술에 젖어 또한 꿈을 잣습니다.
하니 술은 곧 달이며,
달은 곧 술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산속에서 야밤에 달보며 술을 마시는 정취는 남다릅니다.
죽음보다 더 달콤하며 은은한 유혹
달의 눈물(月淚)과 함께
bongta의 가슴에 이슬(月露)이 듣습니다.
오늘은 자청비(紫靑妃)
그 보랏빛 환상의 세계로 들어갈까나.
제가 낯가림이 심한 편이지만,
인터넷을 통해 J&J, kkk님을 만난 것을 늘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하여, 오늘밤 소마를 달빛 젖은 안개비로 불러내喚雨 전합니다.
bongta :
성철스님이 자신은 다섯수레 책을 읽었으면서도,
남 보고는 책을 읽지 말라고 이릅니다.
초저녁부터 갖은 술과 교태로 홀리던 계집은
첫닭이 울자,
돈지갑 빼앗고, 저고리 벗기고,
기껏 빤쓰 하나 챙겨주고는
찬바람 부는 겨울 거리로 나가라고 등을 떼밉니다.
그러하듯이 어떤 그.들은
혼불 피어 넋 지피우던 그것을
이제사 피안을 건넌 뗏목인즉 버려야 한다고 점잖게 타이릅니다.
도대체 책도, 계집도, 뗏목도 버려야 하는 것이라면,
부처는 어이하여 長廣舌 그리 길고 넓적한 혓바닥으로
뭇 푸르디 푸른 청춘을 弄하여
배코치고, 멀쩡한 부랄 끝동을
삼베실로 칭칭 동여매게 하였는가 ?
아니라면,
마지막에 어이하여 一說도 한 바 없다고 이르렀단 말입니까 ?
凡所有相 皆是虛妄.
박상륭은 또 이리도 말하였습니다.
“계집 하나 잘못 잡아먹고 목에 비녀가 걸린 채 고독히 배회하는 그런 어떤 야윈 들개처럼,
왠지 내 목구멍에도 그런 비녀가 걸려 있었다.
그것은 울음은 아니었을까도 모른다...”
박상륭이야말로 가시 비녀 때문에 그런 난해한 소설을 썼던 게 아닐런가 ?
하지만...
박상륭은 울음으로 소설을 써내지 않으면 아니 될 사연을 가진 것일 텐데,
그게 실인즉 늑대의 울음처럼 외로움일 것이로되,
아직은 철저하지 못한 게 아닌가 그리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니라면 그런 독백을 늑대처럼 달보고 짖지 않고,
왜 소설이란 만인을 향한 형식을 빌어야 했는가 싶은 것이지요.
그는 외롭데,
세상 사람을 그리워할 딱 그만큼은,
아직 덜 외로왔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
하니, 외로우려면 천하인은 늑대한테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배워야 할, 또는 배울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골수까지 외롭지도 않은데,
외로운 척 흉내만 내고 있는 부끄러움만큼은 적어도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야반삼경 그 부끄러움을 배우고 있습니다.
kkk님이 말씀하신 “삶과 죽음의 관성법칙”이 아주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관성법칙은 갖은 마찰요소 때문에 현실에선 부단히 방해받습니다.
관성법칙이란 예하건데 움직이는 물체는 영원히 등속운동을 한다는 것인데,
우리 현실계에선 바람도 불고, 표면마찰력도 작용하고 해서,
구르던 쇠구슬은 가다가 끝내 정지하고 말지요.
마찬가지로 “삶과 죽음의 관성법칙”도
자살, 타살, 단죄, 老病, 慾 등등에 의해 삶이란 관성이 중단되곤 합니다.
아무리 삶의 의지, 욕망이 금강석처럼 단단해도
삶의 관성력은 부단히 좌절당하고 맙니다.
죽음의 관성법칙도 윤회환생으로 인해 침해받습니다.
관성법칙이 물리학법칙이든, 생사의 법칙이든
그 법칙이 제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한들,
세상엔 또한 바람이 불고 있어 쇠구슬의 운동방향을 바꿉니다.
두려움은 그러하므로,
결코 관성법칙을 이 땅에 생생한 현실로 완결하지 못합니다.
두려움의 좌절.
그 좌절의 극복형식 중에 종교가 있겠습니다만.
저는 종교 역시 두려움의 변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곤 합니다.
저의 야삼경 등행이 두려움의 극복훈련이 아니 듯,
종교 역시 두려움의 극복형식이 아닐 때라야,
비로서 종교인은 비굴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의 관성법칙은 지구밖 우주공간으로 나가야 온전히 펴집니다.
한번 연료 태워 분사시키면, 엔진을 꺼도 로켓은 영원히 나아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
거기엔 바람(風)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상엔 바람(願望,慾)이 끈끈하니 음욕처럼 넘실댑니다.
하기에 생이란 관성은 종내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때문에 바람(風), 바람(願望)은 관성법칙의 레지스탕스(resistance)입니다.
마찰(resistance)이 없어야 쇠구슬은 영원을 향해 미끌어져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하니 박상륭의
"나거든 죽지 말지닙,
죽거든 나지 말지닙"
이 관성의 法海로 들려면
바람을 잠재워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열반(涅槃, Nirvana)이 자의상으로 불어 끈다는 것이니,
吹消吹滅.
바람은 바람으로 끄는 것이런가...
客說滿場.
한가로운 휴일 저녁입니다.
편히 즐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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