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High-Low catch phrase

소요유/묵은 글 : 2008. 2. 20. 11:45


오렌지(變別名)님이 던져주신
'High Thinking, Plain Living'

(※ 이글은 오렌지라는 분이 올려주신 글 가운데 다음과 같은 귀절을 보고 적은 것입니다.
....
....
어제밤 바라본 oo 달,
어둠을 배경으로 한 그 단아한 아름다움.

' High Thinking,  Plain Living '이란 말이 있단다.

'생각은 고상하게,  생활은 검소하게..'

아마 그런 말 일것이다.
)

catch phrase가 흔히 갖는 형식구조가 다 그러하듯이
전후 선명한 대립항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를 선양하곤 합니다.
이런 종류의 것을 저는 high-low 형식구조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저는 지금 오렌지님이 앞에서 올려주신 글 내용을 대상으로 얘기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글 중에 있는 'High Thinking, Plain Living'이라는 글귀를 접하고,
그런 형식을 빌어 말해지고 있는 catch phrase 일반의 형식에 대하여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이 글귀를 오렌지님이 직접 만드신 말은 아니란 짐작 끝에,
결례가 되지 않으리라 여겨져, 안심하고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실인즉, 오렌지님의 글 내용은 전폭 동감하며,
현재 미흡하지만, 그리 실천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방면의 아름다운 글들로 무딘 저를 많이 일깨워 주시길 바랍니다.

기왕에 거론한 것인즉, 'High Thinking, Plain Living'를 text 삼아
말씀을 이어가고자 합니다.
High <-> Plain(Low)이 만약 대립구조 속에서 제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이라면,
Thinking과 Living 역시 최소한 일정분 서로 겨누는 관계가 되어야,
'High Thinking, Plain Living'을 주창한 사람의 의도에
이 catch phrase가 일응 복무할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다면 Thinking과 Living은 설사 부분일지언정, 왜 대립되어야 하며,
그들이 걷는 길은 왜 달라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그들은 같은 길을 걸으면서 화해할 수 없는 사이인가 ?”
하는 물음을 던져 보고 싶습니다.

예컨대,
'High Thinking, High Living' 또는
'Plain Thinking, Plain Living'의 길은 왜 아니 되는가 ?
하는 것이지요.

나아가 2*2 순열의 변전태들 나머지는 가치가 없는 조합인가 하는 것입니다.

High가 우등의 가치를 수식하기 위해 동원된 단어라면,
Living은 무엇이관대 Plain이란 수식어를 동반할 때,
비로서 가치를 획득하느냐 하는 하는 것이지요.
반대 역시 마찬가지 의문을 일으킵니다.
이 지점에 서서,
Thinking과 Living이 가치 평가의 대상이 되는 순간 다른 노선을 걸어야 한다는
가치 주창자가 갖고 있는 의식의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에
저 역시 비일상적으로 비추어질 우려가 있지만
deformation된 시선을 던지고 싶어지는 장난기가 발동되고 맙니다.

이런 시선이 수식어와 피수식어의 관계에서
수식대상 그 자체가 아닌 곁두리 수식어에 주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수식어가 종국엔 수식 대상체의 내용을 한정하므로서
역으로 그 내용을 한껏 두드러지게 드러내고자 의욕하는 언명구조하에서는
도리어 더 선명한 도전적 물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물음의 근저에는 Thinking과 Living은
왜 노선을 굳이 달리해야 하는가 하는 저의 근원적인 의문이 담겨져 있습니다.

catch phrase 주창자는 비록 대립적 단어를 구사한 것에 불과한 것이지만,
암암리에 양자는 속성(attribute)상 노선을 달리 하므로서
궁극의 가치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물론 주창하는 함의는 십분 짐작이 갑니다.
검소함을 통해 고상함을 실천하게 된다는 것.
저는 지금 그 함의가 아니라, catch phrase 일반의 형식구조를 조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High와 Plain이란 가치 대립적 수식 장치가 동원되는 한,
Thinking과 Living 양자의 긴장, 갈등 관계는
부단히 시험 당할 수밖에 없다는 역학 구조 밑에 놓여지지 않을까요 ?

긴장 갈등관계에 놓인 사물, 사건은
훌륭한 조정자의 역할이 그 위에 작용할 때라야
균형된 가치가 획득됩니다.

만약 그런 조건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원하는 목표는 불안한 가운데, 변덕스럽고 의심스러운 도전을 부단히 받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 catch phrase가 목표로 하고 있는 도달 조건들은
앞으로 대단히 많은 비용과 고통을 준비하여야 한다고 예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 저 catch phrase가 의식하고 있는 가치 내용에
동조하며 박수를 보내기에 앞서 슬그머니 장래가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예컨대,
'High Thinking, High Living'을 구하는 사람들에겐
Living의 절제를
'Plain Thinking, Plain Living'의 길을 걷는 사람에겐
추가적인 Thinking의 고양을 위한 노력을 요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게 사람들에게 내심 마찰적인 스트레스를 안겨줄 개연성이 상당히 농후하다고 보는 것입니다.

현대인에게 이런 추가 비용 지불을 요청하면서,
미래에 획득될 만족을 약속하는 선전 구도가 과연 얼마만한 성과를 이룩할 것인가
저는 회의하는 것입니다.

장에 가서 닭을 사와 집에서 요리하느니,
치키집에 가서 통닭튀김을 사먹고 맙니다.
하지만 종내는 이도 번거로와,
전화 한통으로 배달 서비스를 요청합니다.
때로는 그도 충분치 못하여,
왜 배달을 늦게 왔느냐고 심술을 부리진 않았던가요 ?
나중엔 왜 찢어서 입에 넣어주지 않느냐고 투정을 부리게 되지는 않을까요 ?

이 인스턴트화된 종족들에게
High-Low 행색을 한 깃발은
순간적인 동원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을지언정,
지속적인 미래를 약속할 수 없다는 우려인 것입니다.

마치 송나라 저공(狙公)의 朝三暮四의 예처럼,
단순한 가치 移轉의 공허한 화법이라고 경원시 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숭이가 아니기에 조삼모사와 같은 단순한 수단에 유혹 당하지 않습니다.
이 편 High측 언덕을 깍아내어 저쪽의 골짜기를 메움으로서 종합적인 가치를 획득한다고 했지만,
그리고 그에 동조했던 사람이 출현했다고 한들,
어느 날, Low쪽의 상실을 회상하는 사람들의 원대복귀를 막아내기 어렵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작심삼일의 歸路 코스입니다.
때문에 catch phrase는 口頭禪으로 바꾸어 불러도 그리 하자가 없습니다.

이 때,
저는 'High Thinking, Plain Living'라는 말의 깃발에 대해 
우리가 초등학교 때 가슴팍에 달던 불조심 표어처럼
자기 현시에 그치고 말, 동원된 선전일 뿐이고,
종내 추구하는 가치를 만족스럽게 얻어내지 못할 것이라는 의심을 갖는 것입니다.
마치 코흘리개 가슴팍에 달린 불조심 리본은 가끔 핀에 살을 찔리기나 하지,
불조심이란 실천 가치를 현양하지는 못하였듯이 말입니다.
단 하나, 리본을 달도록 강요한 학교 당국자들은 위에서 내려온 규정대로
일을 해내었다라는 자기만족과 함께 봉급의 안전을 얻었을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저 catch phrase에 이끌리는 사람들이 출현했다면,
그것이 catch phrase가 가치 선양하는 내용에 주목하는 사람을 발굴했다라는
위안을 건져 올릴 지는 몰라도,
목표 달성을 위해 비용과 노력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겪는 긴장과 갈등,
그리고 바로 원대복귀하는 사람들의 발목을 끝까지 잡아두지는 못할 것이라는 전망인 것이지요.

그러하기에 현실에선 High-Low는 부단히 제 모습을 바꿔
새로 강화된 형식을 만들어내며 세상에 다시 등장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High-Low 문법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 한,
현란한 수식과 강렬한 자극만 도를 더해갈 뿐,
목표를 향한 쉼없는 도전과 질주는 여전할 것입니다.

결국 자극과 자각의 문제로 환원됩니다.
자각부재를 외부의 타격으로 도모하여야 하는 현실이 있기에,
High-Low의 catch phrase는 오늘도 세세 유전되어 전개됩니다.

저는 catch phrase를 들고 나타나는 사람들의 열정을 존중합니다.
하지만 이런 형식을 통한 그들 외침의 유효성은 회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

"High Risk, High Return"

이런 catch phrase는 외려 솔직하기에 의심이 덜 유발됩니다.
Risk와 Retun이라는 대립 내용이 둘 다 High라는 동일한 한정자로 수식되어
뚜렷하게 관계 구조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우리가 text로 사용해온

'High Thinking, Plain Living'

이 catch phrase는 Thinking과 Living이라는 서로 대립할 이유가 없는 차원에 있는 내용들이
High, Plain이라는 대립적 한정자의 세례를 받고 있지만,
의미상으로는 重意적으로 표현되기에 형식논리상 애매해 보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세상엔 이런 형식의 catch phrase가 대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때문에 죄송하게도 이런 글을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잘 따져 보면 실인즉, 이 양자들은 모두 같은 대립/동조 조합구조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후자는 High-Low라는 대칭적인 수식구가 리드미칼한 분위기를 조성하기에
전자의 강렬한 직선 구조에 비해서는 부드러운 호소력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利之中取大 害之中取小也”

묵경 大取篇에 보이는 墨子의 말로서
"High Risk, High Return"과 견주어 아주 인상적인 표현입니다.

「 팔을 보존하기 위해 손가락을 자르는 것은 이익 중에서 큰 것을
취하고 손해 중에서 작은 것을 취한 행위다.
( 利之中取大 害之中取小也 )
작은 손해를 취하는 것은 손해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을 취하는 것이다.
그가 취한 것은 인간의 所執이다.
도적을 만나 손가락을 잘리어 자신이 화를 면하였다면 그것은 이익이지만
그가 도적을 만난 것은 손해이다. ......
이익 중에서 큰 것을 취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은 어쩔 수 없어서 그렇다.
아직 없는 것에서 취하는 것은 이익 중 큰 것을 취하는 것이요,
이미 있는 것에서 버리는 것은 손해 중에서 적은 것을 취하는 것이다. 」

이 “利之中取大 害之中取小也” 구조에서는
대립내용들이 대립형식 구조안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利/害 -> 取大/取小
이는 내용/형식이 서로 크로스로 조합되어 있는 앞의 둘과는 양식이 다릅니다.
즉 내용/형식이 바로 1:1로 직결합되어 있습니다.

이 때문에 묵자의 이런 언명형식은 가지런히 정비된 중후한 무게감을 자아냅니다.
묵경 역시 경전이 갖는 전형적인 권위 형식을 여기 보이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

글을 마무리하고 보니, 그야말로 글놀이가 되고 만 것이 아닌가 싶군요.

하지만,
catch phrase란 동원의 형식이라 것,
자각이 부재하면 이 동원에 복무하여야 한다는 것,
그 복무가 주체적인 깨달음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동원은 동원의 주체/객체가 모두 불안한 현실에 놓여 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점,
catch phrase의 미결 구조, 격앙된 언성, 과장된 몸짓에 대한 회의,
이런 것들이 모두 나를 불편하게 하였다는 것,
......

그래서 catch phrase를 비딱한 시선으로 가볍게 꼰아 보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의도하시지 않으셨지만, 저에 의해 일방적으로 절취된 이런 자료를 제공하여 주셨고,
본문 글로서 좋은 깨달음의 주제 내용을 펴주신 오렌지님에겐 감사말씀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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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jjj :

영국 시인 William Wordsworth가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이라는 제목의 시를 썼지요.

........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 are no more:
........

(옛날에 들었던 강의 맨 첫 시간에 한 교수님이 언급하셨던.)
소박한 일상을 살면서도 사고는 깊게하라는 말로 알아듣고,
좋아했던 문귀입니다.


bongta :

jjj님/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곡선적 리듬감을 느꼈었는데, 그게 시인의 말이었군요.
하지만, catch phrase가 아무리 아름다운 운률로 살랑거려도
그것의 대중 계몽적인 동원 형식은 제겐 불편합니다.
그들이 의욕하곤 하는 일방통행식 전달 태도도 그러하지만,
계몽으로는 마지막 터널 끝에 채 이르기 전에 좌절되고 말 것이란 생각 때문입니다.
동원으로는 잠시 효과를 볼런지 몰라도 끝을 보증할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지요.

학창시절에 불조심 등 각종 리본의 핀으로 찔린 기억이
아직도 심리적 외상으로 남아 있는 탓일까요 ?

Thinking과 Living이 High, Low로 달리 대접 받을 까닭이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 중의적으로 접근하는 순간 영원히 긴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老莊식의 자연스런 삶이 아니더라도, 관리, 통제되어야 획득되는 가치는
불안을 예비하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이는 물론 제가 워즈워드 전체의 시적 인격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당연히 catch phrase에
한정됩니다.
불행하게도 제가 이 시인에 대하여는 무지하기에 저의 얘기들은 이 시인에 대한 것이 아니고,
똑 떼어낸 catch phrase 그 자체에 묶여 있습니다.
때문에 혹여 그 시인에게 누가 된다면 이는 전적으로 저의 불찰입니다.
하지만, 그럴 의도가 없었음을 앞세워,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겠습니다.

이런 형식은 내부적으로는 자기확신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외적으로는 동원을 이끌어내기에 충분히 자극적인 역할을 해내곤합니다.
게중엔 불행한 일이지만, 구체적인 실천과 깨달음은 없고,
단지 그 동원의 일원이 된다는 감정상의 착오내지는 위안에
스스로를 받쳐 겨워하는 사람들도 나타납니다.
저는 이를 한발 더 나아가 감정의 사치쯤으로 해석합니다.
빠돌이들도 이런 형식에 매몰되어 있는 게 십중팔구입니다.

저는 자각이란 내적 혁명의 길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구하는 바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차갑지만 한편 그래서 더 당당한 자기 점검과 책임이란 길을 통과하지 않으면,
진정한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리란 생각이지요.
하지만, 이것은 저만의 고백입니다.
세상엔 catch phrase가 필요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본글에서 글놀이 되고 말것이라고 예언(?)한 까닭이 예에 있습니다.
때문에 독백에 그쳤어야 하는데,
얼결에 고백의 형식을 빌어 자리를 어지렵혔습니다.

***

덕분에 시가 때로는 catch phrase 문법을 동원할 수 있다는 깨침을 얻었습니다.
실은 지난 여름내 의도적으로 산에선 시집만을 읽었습니다.
그 시인들이 한국 사람들이어서 그랬었는가 ?
그들에게서 그 혐의를 눈치채지 못하였습니다.
이제는 그만 읽고 산문으로 돌아오려고 했는데,
다음 번에는 유심히 체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혹 제 글에 불편하시지 않았을까 염려가 됩니다.
하지만, 제 마음을 구부리는 것이 오히려 예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에
그저 천방지축 나대었습니다.
jjj님의 글을 몇 편 대하였습니다만,
외람되지만 貞淑, 高雅하신 인품임을 직감적으로 느꼈습니다.
JJJ님은 참으로 복받은 분이시구나 이리 감탄을 하였더랬습니다.


jjj :

죄송하지만, bongta님, 제가 정숙이나 고아같은 애들하고
못 놀고 삽니다. 그저 바라기는 좀 괜찮게 늙어갔으면 하는
평범한 사람인데요, 제 남편은 개성(?), 지성(?)이 너무 강하다고
투덜댈지도 모른다는...ㅎㅎ
암튼 좋은 말씀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죠~
'You made my day'입니다.

--W. Wordsworth: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

O Friend! I know not which way I must look
For comfort, being, as I am, oppresed,
To think that now our life is only dressed
For show; mean handiwork of craftsman, cook,
Or groom!--We must run glittering like a brook
In the open sunshine, or we are unblessed:
The wealthiest man among us is the best:
No grandeur now in nature or in book
Delights us. Rapine, avarice, expense,
This is idolatry; and these we adore: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 are no more:
The homely beauty of the good old cause
Is gone; our peace, our fearful innocence,
And pure religion breathing household laws.

(이 시 전문을 보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있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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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20. 11: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