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공부 못하는 사람의 특징.

소요유 : 2013. 4. 23. 10:55


내가 고안한 두더지 퇴치기 설치법을 배우러 한 사람이 어제 찾아왔다.
거래를 튼 적도 없는 이지만 어찌 사정을 알고는 연락을 해온 것이다.
내가 아는 한 모든 것을 이제까지 숨기고 아껴 남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다.
 
전날 전화상으로 한참 통화를 하였는데,
전기 장치 설치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염려가 되었다.
해서 묻기를 전기에 대하여 좀 아는 바가 있는가 하였더니,
배터리를 다루어 보았기 때문에 잘 안다고 한다.
그럼 전화상으로도 설명이 가능하겠다 하며,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직렬, 병렬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때 다 배운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 대개는 다 까먹고들 만다.
잊는 게 뭐 그리 대수로운 문제는 아니다.
필요하면 다시 배우면 되니까.
내가 설명을 마치자 그는 잘 알았다고 전화를 끊었다.

얼마 후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어찌 저찌 연결하였는데 소리가 잘 들린다고 한다.

‘그럼 다행이다. 하지만 잘못 연결하면 얼마가지 않아 기기가 터진다.’

이 소리를 듣더니만 걱정이 되었음일까?
그는 내일 당장 방문하겠단다.

그리고 온 것이 어제다.
그가 장비 일습을 손수 가져왔는데, 직렬로 연결하였단다.
내가 쓱 살펴보니 직렬이 아니라 병렬로 연결을 하였음이니,
이리 되면 조만간 탈이 나고 말 것이다.
순간 이 분이 전기에 대하여 별반 아는 바가 없었구나 싶다.

우선 자리에 앉히고는 직렬(serial), 병렬(parallel)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기본적인 설명을 해나갔다.
그러자니 이 분이 중간에 말허리를 끊고는,
바로 전격 자신이 가진 장비를 어찌 저찌 연결하면 되느냐 이리 묻는다.
아,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분의 본 모습을.

당장 필요한 부분만 알려주면,
일시 해결은 될 터이지만,
만약 장비가 4개였다가 6개로 늘어나면 어찌 할 것인가?
그 때는 또 다시 내게 찾아와서 해결해 달라고 할 터인가?
내가 남의 문제를 매번 해결해 줄 도리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하지만 원리를 가르쳐줄 때 제대로 익히면,
4개뿐이런가?
8, 16 ..... 1024 얼마든지 혼자서 해결할 수 있게 된다.
그 뿐인가 고장이 나도 무엇이 문제인가 추적할 수 있고,
이를 기초로 좀 더 나은 창조적인 아이디어, 설계 능력 수준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언젠가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인터넷 옥션에 물건을 판매하려는데 포토샵을 가르쳐 달라는 사람 하나가 있었다.
내가 기본적인 원리에 대하여 설명을 해나가자,
이 자가 대뜸 말허리를 끊더니만 그런 것 다 소용이 없고,
요 부분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만 가르쳐 달라고 한다.
아, 나는 바로 알아차리고 말았다.
이 분의 한계를.

내가 고등학교 때 수학의 정석을 가지고 공부를 하는데,
나는 문제 풀이를 별로 하지 않았다.
다만 기본 원리만 열심히 익혔다.
하지만 친구들은 대개 문제 풀이에 분주하였다.
그들은 몇 문제를 풀었다느니, 몇 백 개 씩 문제를 풀었다며 경쟁적으로 자랑하기 바빴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원리를 터득하는데 힘을 경주(傾注)했다.
내겐 시험 시간이 외려 문제풀이 연습시간이었던 폭이었는데 말이다.

격물치지(格物致知)임이라,
사물의 이치를 궁구하여 앎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길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나아가 마주칠 수도 있겠음이다.

허나, 말단은 가지가 기백, 기천이나,
근원은 하나일 뿐이라,
하나를 꿰면 어찌 백, 천에 이르랴 종국엔 만, 억을 통하는데 거침이 없을 터.

도대체가 천변만화하는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어찌 일일이 다 겪어가며,
앎을, 뜻을 풀어 갈 수 있겠음인가?

그런데 기실 문제는 순역(順逆)이 같고 다름이 아니다.

‘성(誠)’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저들의 행위 양식은 빤히 그 유형이 정해져 있다.
시험 문제에 행이나 잘 나올 문제를 찾기 바쁘다던가,
당장의 닥친 문제만 해결하고 나면 그 뿐이라든가,
‘진리 탐구욕’의 부재 따위가 아닐까 싶은 것이다.

한 마디로 ‘誠欲’,
도대체가 성실하고자 하는 욕구가 없는 것이다.
간절한 정성, 모심, 신뢰가 부재하고, 
오로지 결과 획득만이 중요한 것이다. 

저자가 돌아가고 난 후에 그가 무엇인가를 가져간 것을 알아챘다.
해서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알고는 돌아갈 때 돌려주고 가라고 일렀다.
그러겠다고 확인한 이가 한참 있다가 오지는 않고 대신 전화를 주었다.
'오늘은 못가고 내일 가져다 주겠다.'
엎어지면 코가 닿을 곳인데 내일로 미루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만,
그 사정이야 내 알 바 아니고, 내일 가져다 주겠다는데 기다려주지 못할 바가 없다.
그런데 내가 진작 예상했듯이 그는 오지도 않았고, 아무런 연락을 주지도 않았다.
여기 시골엔 저런 예의 염치 저버린 인간들이 뒷골목 개똥처럼 지천으로 널브러져 있다.

한겨울 내내 궁리를 트며 고심참담 끝에 고안해낸 두더지 퇴치하는 기술을,
아무런 친분도 없는 이에게 아낌없이 그것도 아주 세밀히, 친절하게도 전수해주었는데,
저리 염치가 없을 수 있겠음인가?
저들은 얼굴이 없는 사람들이다.
신뢰를 저버린다는 것은 곧 제 자존심을 내팽겨치고 살아가겠다는 것인데,
어찌 제 챙길 얼굴이 있단 말인가?

한 인간의 선의를 저버리는 이런 파렴치한 인간들 때문에,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는 길로 나아가게 되질 않겠는가?
참으로 뻔뻔하니 부끄러움을 모르는 무지렁이들은 어찌하려야 할 도리가 없다. 


내가 가끔 만나는 여호와증인도 매 한가지다.
늘 그이는 말한다.

“도대체가 사람이 만물의 영장인데 왜 이대로 죽어야 하는가?”
“영생의 길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가,
‘나는 영생에 관심이 없다.’
이리 말하자 바르르 떨며 화를 낸다.

지금의 삶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음인데,
죽은 다음의 일까지 걱정할 정도로 오지랖이 넓지 않은 까닭이다.
그렇기도 하지만 도대체가 이런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문제에,
계박(繫縛)될 정도로 어리석지 않기 때문이다. 
(※ 참고 글 : ☞ 2008/10/08 - [소요유/묵은 글] - 물음을 물을 수 없는 물음

그는 근원으로 돌아가고자 ‘영생’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로또 복권 사서 당첨 되듯,
영생이란 티켓 그 자체에 몰두하고 있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죽는 것이 마냥 두려운 것이다.
천하의 겁쟁이, 비겁자 같으니라고.

하마, 겁쟁이는 용서를 할 수 있어도,
비겁자는 용서하기 힘들다.

영생하고자 현생을 저버리며 전일(專一)하는 저 모습은,
상당히 욕심 사납기도 하거니와 비겁해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영생이 설혹 있다한들,
현생에서 지은 선업의 결과로써 영생이 주어져도 주어지는 것이지,
(혹은 영생은커녕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최상의 경지로 여기는 이도 있을 터이다.)
그 과정은 제각된 채 그저 믿으면 영생할 수 있다는 생각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게도 욕심 사납고 비열한가 말이다.

비바람을 무릅쓰고,
일 년 내내 종일,
머리 털이 벗겨지도록,
정강이가 헐도록,
전도여행에 분주하지만, 
이게 일견 가상키는 하여도,
내 주견으론 결코 성실하다고 보아 줄 수 없음이다.
사실 처음에 잘 모를 때에는 저들의 변함없는 모습을 보고는,
참으로 근실하구나 하고 오해를 하기도 하였다.

난 저들이 저리 전도에 열심인 것이,
널리 사람을 구하여 함께 영생하자는 것이라기보다도,
내가 한 사람이라도 더 끌여 들이면 신에게 점수를 많이 따고,
그러면 영생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을 품곤 한다.

마찬가지로,
공부(功夫)는 하나도 하지 않고,
사물의 이치는 하나도 밝히려 들지 않으면서,
다만 그 결과만 취하여 당장의 이익만 취하려는 태도는 얼마나 나태한가 말이다.

나야말로 말이다.
공부(功夫)는커녕 공부(工夫)도 잘 하지 못하였으면서,
이리 공부 얘기를 꺼내든 것은,
공부를 제대로 잘하지 못한 회한이 남다르기 때문이다.

外不著相 內不動心

선불교에서 하는 말씀이어듯,
외물의 상에 착(著)하지 말고,
안으로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이,
곧 수행인의 공부(功夫)가 지향하여야 할 경지가 아니겠는가?

머리가 아무리 나빠도,
성(誠)하면,
공부를 잘 할 수 있음인 것을.

그리하기에 방아만 찧던,
일자무식 혜능도 의발을 전수 받지 않았음인가?

세상 사람들은 그저 결과만 취하기 바쁘구나.

최근 모 카페에 카펫으로 만든 백(bag)이 등장했다.
블루베리 재배하는 사람들 중에 커다란 백을 분으로 이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제까지는 천이라든가, 차광막, 부직포 따위로 만들어 왔는데,
이번 경우엔 카펫 소재였던 것이다.
내가 카펫의 경우 염색물질인 벤젠 때문에 발암의 위험이 있다고 의견을 개진하였다.

그러함인데 누군가 단 하나도,
그러한가? 자세히 알아보야겠다든가, 조심하여야겠다는 의견은 없다.
빗겨간 변명, 궁색한 핑계에다 다만 질기고 좋다라는 반응 일색이었다.

카펫 재질이니 얼마나 질기고 오래 쓰겠는가?
외물에 착(着)하고 혹(惑)하여 다른 것은 돌아볼 여지도 없는 것이다.

과연, 저것이 우려대로 나중에 발암 위험이 있음이 판명된다면 어찌 할런가?
그러면 저이들뿐이 아니고 블루베리 농가 전체가 타격을 입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조사를 해보면 좋으련만,
내가 의견을 내놓자마자 어깃장 부리듯 바로 다음날 공구(共購) 공고를 내보낸다.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저리 서두르는가?

이치가 이러함인데,
근원은 돌보지 않고,
당장의 제 이해만 돌보며 나아가고들 있다.
순간 여기도 공부(功夫)가 한참 모자란 이들이 참으로 많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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