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in a name

소요유 : 2016. 4. 11. 20:56


우리는 정치인이 툭하면 내뱉는,

'국민의 이름으로'이란 언명(言明)을 자주 접하게 된다.

내가 보기엔 이것은 오늘날의 정치인이 발하는 수사(修辭)내지는 허사(虛辭)에 불과하다.

오늘 날, 정치력(政治力)이란 정치인의 수완이나 능력으로 대개는 그리 이해한다.

하지만 본디 그 힘의 실질 원천은 국민이다.

하니까, 그것은 개인의 재주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뜻과 소망을 어찌 충족시킬까 하는 과제를 대상으로,

구체적 현실 처리 과정상에 역동적으로 실천 전개되는 공적 힘을 뜻해야 한다.


헌데 정치인은 이를 ‘국민의 이름’이라는 국민을 호출하는 형식을 빌려,

실인즉, 자기가 소속한 당, 때로는 특정 개인의 의지를 관철하려 든다.

이 때 ‘국민의 이름’의 쓰임은 가치 오용의 대표적 실례(實例)가 된다.


'국민의 이름으로'

‘당의 이름으로’,

‘조직의 이름으로’


대개 ‘... 이름으로’ 따위는,

화자(話者)의 기획, 의도에 복무하게 된다.


그 내용 대상이 되는 개개인 각자의 이름으로가 아닌 한,

거긴 집단 이해, 조직 권익에 헌신을 강요하게 된다.

때론 그 이해가 조직의 장(長)이나 소수의 권력자에게 한정되기 일쑤다.


And I will do whatever you ask in my name, so that the Son may bring glory to the Father.

You may ask me for anything in my name, and I will do it.

(요한복음)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여기 보면 'in my name'이 등장한다.

그러니까 ‘예수의 이름’을 거치지 않고는 하느님 아버지에 다가갈 수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러한가?


본디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는 권한은 제사장에게만 있다.

일반인은 단독자로서는 감히 신에게 제사를 지낼 수 없다. 


샤먼(shaman, 巫)은 신과 인간 사이에 끼어 있다.

본디 인간은 신과 직거래를 할 수 없다.

오로지 무당을 통해서야 신을 만나볼 수 있다.


이 때 무당은 신을 매개로 특수한 계급을 차지하고,

때로는 신의 대행자, 또는 신 그 자체로 등귀(騰貴)한다.

이리 되면 그는 외양상 인간이지만,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샤먼은 이리 종교 역학적 특수 지위를 획득함으로써,

신권(神權)을 배타적, 독점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이거 현실적으로 누릴 수 있는 이익이 무궁무진한 것이다.


우선은 현실 노동을 할 필요가 없어진다.

기독교의 십일조라는 것도 바로 이러한 위치에 있는 레위 지파를 위한 것이다.

살아가면서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이란 특권 중의 특권인 것이다.


신의 대행자로서 인간세 넘어 저쪽의 모든 일을 장악하게 된다.

저이가 말하는 것이 진정한 신의 뜻인지, 

아니면 대행자내지는 집행자 개인의 사적 이해에 충실한 의지를 이야기 하는지,

국외자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예수교에선,

일반 신도들도 예수로 인해 구원을 받았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는 제사장으로서의 권한을 일반인들에게도 할양하였다.

신을 대리하는 이로써 이러한 권한 이양을 한 자는 인류 역사상 하나도 없었다.

그런 의미에선 예수는 특별히 위대하고도, 아름다운 이라 하겠다.


물론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여느 샤먼과는 다르다며,

나와 같은 해석을 하는 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그것대로 겸허히 인용(認容)하겠다.

하지만, 국외자인 나의 생각을 거둬 사양하지는 않겠다.


국회의원 등의 정치인이 국민 이름을 팔 때,

과연 저들이 국민 이름을 팔 자격이 있는가?

또는 이름을 팔아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해 복무하였는가?

이 양자의 문제가 대두된다.


국회의원이란 국민을 대표하는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런즉 국민의 이름을 들어 국민의 의사를 받들고, 

그 뜻을 펴겠다는 대행자의 의지, 다짐을 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가 이를 핑계로 사익을 꾀하지는 않겠는가?

이런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정치인 불신이 어느 사회에나 팽배해 있다.

이는 저들이 국민 이름을 팔아 제 사익을 챙기고 있다는 반증이다.


경영학에선 대리인(agency)의 역할에 대하여 주의를 기우려왔다.

본래 기업의 경영을 위임받은 전문경영인은 주주의 이익을 위해 헌신하여야 한다.

하지만 이 대리인이 자신의 이익을 좇아 행동한 결과,

정작 기업의 이익에 해가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 대리인 문제(agency problem)라 한다.

대리인을 고용하게 됨으로서 기업은 기대에 반하는 비용을 치르게 된다.

(agency cost)


오늘날 대의(代議)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나라에선,

부득불 위임한 정치 대표, 그들 대다수로 인해 적지 않은 사회적 손실을 보게 된다.


요사이 선거철이라,

후보마다 국민 이름을 팔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 한 생각 떠올라 이리 감상을 적어 둔다.


그러함인데,

이어 또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즉,

그도 마저 하련다.


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莊子)


“지인(지극한 경지에 이른 이)은 자기를 잊고,

신인은 공을 내세우지 않고,

성인은 이름을 탐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사뭇 의역을 한 폭인데,

기실 이런 류의 해석을 나는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無己, 無功, 無名

자기가 없다, 공이 없다, 이름이 없다.

그저 이리 놔두는 것이 낫다.

허나 이해를 돕기 위해 잔뜩 억지를 부려 풀어 보았다.


그런데 왜 無名인가?


故無名。無名故無為,無為而無不為。

(莊子)


“고로 무명이다.

무명인 고로 무위다.

무위인즉 하지 않음이 없다.”


이름에 구속되면 한정된다.

그 이름 밖으로 나아갈 길이 없다.

때문에 유의(有爲)에 매몰된다.

유의한즉 작위적(作爲的)이 된다.


장자는 언제나 다시 읽어도 향기롭다.

책을 대하면 청신(淸新)한 기운이 흐른다.

道常無名

(道德經)


“도는 이름이 없는 법이다.”


大象無形;道隱無名。

(道德經)


“대상(大象)은 형태가 없고,

도는 이름 없이 숨겨져 있다.”

(※ 象에 대하여는 나의 다른 글을 참고할 것.)


空可空非真空。色可色非真色。真色無形。真空無名。無名名之父。無色色之母。為萬物之根源。

(寶藏論)


보장론은 위경이라고들 하지만,

공부들을 많이 하는 중요한 경이다.

경의 처음에 등장하는 이 글귀는 도덕경을 빼다 박은 듯 거의 같다.


“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無名天地之始;有名萬物之母”

(道德經)


이름을 붙일 때,

만물의 어미로서 그 본 모습이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


정치인이 ‘국민의 이름으로’ 이리 부를 때,

비로소 그 가치 내용이 명확해진다.


따라서,

이 때 국민을 불러내어, 

자신의 이름에 도장을 찍게 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이름을 걸었다 하여,

그게 곧 그의 실천 내용이 될지는 미지수다. 

실제 우리의 정치 현실을 보면,

약속은 깨지고,

신뢰는 허물어지기 일쑤였다.


故常無欲,以觀其妙;常有欲,以觀其徼。此兩者,同出而異名,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道德經)

(※ 요(徼) : 徼,塞也。以木柵水,爲蠻夷界。徼,要也。)


이름에 의지 하지 않을 때,

도의 묘(妙)함을 보게 되고,

이름에 의지할 때,

도의 요(徼)를 볼 수 있게 된다.


신의 이름이든, 사물의 이름이든,

이름을 붙이는 순간 萬物之母의 요(徼)를 관(觀)하게 된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天地之始의 묘(妙)를 관(觀)하게 된다.


同謂之玄。玄之又玄,衆妙之門。


그런데, 이 양자는 현(玄)하다 하였다.

현은 검다라는 뜻인데,

그저 빛이 들어오지 않는 칠흑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신묘(神妙)한 근원적 우주적 모태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이 모두는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그러니까 이름을 붙이든, 아니 하든,

그것은 모든 묘한 것이 나오는 문이다.


또한 도라는 이름을 붙이든, 똥이란 이름을 붙이든,

그 무엇이든 상관이 없으나,

이름을 붙일 때, 만물의 모태가 된다.


정치인이 국민의 이름을 팔아, 정책을 내거는 순간,

앞으로 이 땅에 구현할 요(徼) 즉 귀취(歸趣), 추구 목적이 드러난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天地之始의 묘(妙), 근본 이치, 도리에 합하는가?

아니면 정치인 사익을 위한 위사(僞辭) 즉 거짓 선전에 불과한가?

여기에 있음이다.


衆妙之門이라 하였지 않은가?


요(徼)나 묘(妙)는 모두 玄之又玄하다 하였다.

모두 묘한 것이 나오는 문임이라,

도나 이름이나 모두는 천지자연내지는 국리민복이 나오는 문이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할 때는,

애오라지 그의 이름에 합하듯 간절함으로, 구할 노릇이다.


하지만, 정치인은 국민의 이름으로 약속을 할 때,

그것이 국민의 이름을 팔든, 아니 하든 간에,

天地之始, 萬物之母임을 알아야 한다.

한 마디로 삿된 마음으로 국민의 마음을 훔치려 들지 말라는 소리다.


따라서, 나는 정치인이 선거철마다 확성기를 틀고 소리를 지를 때,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만 평소에 하던 그들의 모습으로,

그들이 현문(玄門)에 들었는지 아닌지를 이미 다 알고 있을 뿐이다.


선거철이 끝나자마자,

저들이 떠난 뒷자리를 보라.

마치 무당년 굿해먹고 떠난 마당처럼 어수선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저들은 4년이 지나야 다시 돌아온다.

고샅길까지 훑으며 90도 가까이 허리를 굽히며 나타난다.

그리고는 휑하니 떠나가고 말리라.

하오니, 선거철에 읊어대는 저들의 소리가,

하나에 세 푼 하는 엿가락보다 더 나을 것이 무엇이 있으랴?


Juliet:

"What's in a name? That which we call a rose

By any other name would smell as sweet."

(Romeo and Juliet, Shakespeare)


장미는, 

다른 어떠한 이름으로 불리우든,

사랑스런 향기를 뿜을 것이다.


줄리엣은 로미오에게 이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름이란 인위적인 것이다.

의미 없는 관습에 불과할 뿐이다.

그녀는 로미오라 불리우는 사람을 사랑하지,

로미오란 이름 또는 그의 가문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실 비극의 탄생을 예고 하고 있다.

역시나 우리네 정치 현실이라는 것도,

'국민의 이름'을 거는 순간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


왜냐면?

현실은 견고한 이름의 성에 갇혀 있고,

정치적 수사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청하며 그 차꼬를 차고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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