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李斯)
간단치 않은 한비자(韓非子)의 인생엔,
이사(李斯)가 등장하여, 더욱 극적으로 전개된다.
오늘, 이사에 대하여 생각한다.
먼저 사기의 구절 하나를 앞세우며 이야기를 해보기로 한다.
李斯者,楚上蔡人也。年少時,為郡小吏,見吏舍廁中鼠食不絜,近人犬,數驚恐之。斯入倉,觀倉中鼠,食積粟,居大廡之下,不見人犬之憂。於是李斯乃嘆曰:「人之賢不肖譬如鼠矣,在所自處耳!」
(史記)
“이사는 초나라 상채 사람이다.
소년 시절 군에 조그마한 벼슬을 하였는데,
관청 측간에서 쥐가 더러운 것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근처에 개가 있었는데, 쥐는 번번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창고에 들어가서도 쥐를 보았는데,
쌓인 곡식을 먹고, 큰 곁채에 아래 살았으되,
개의 습격을 염려할 일이 없었다.
이에 이사는 탄식을 하며 말하다.
‘사람의 현명하고 아니고는 쥐와 같아,
자기가 처한 곳에 따를 뿐이고뇨.’”
이에 이사는 발분하여,
상류사회의 진입을 꾀하게 된다.
똑같은 쥐인데,
그가 처한 존재 구속 조건에 따라,
존귀(尊貴)와 재부(財富)가 달리 따라옴이라,
그는 이 때부터 강렬하니 출세지향주의에 몸을 싣는다.
하지만 그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급 관리에 불과하니,
측간의 쥐가 창고의 쥐로 신분 상승을 하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그는 순자의 제왕지술 (帝王之術)을 배우기로 한다.
순자는 전국시대 말기 유학의 대학자였다.
그제나 지금이나 공부는 출세하는데 유력한 수단이 된다.
지금은 뜻만으로 부족하고, 공부를 하는데 돈이 없으면 어렵다.
대개 해외로 유학을 가면, 천금을 써야 한다.
오늘 날, 만약 이사처럼 빈한한 이라면 아무리 영민해도 공부를 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당시엔 뜻만 세우면, 공부하는데 돈이 없는 것은 큰 장애가 아니 된다.
自行束脩以上,吾未嘗無誨焉。
(論語)
“속수 이상 예를 행한 자는 내가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적이 없다.”
(※ 속수(束脩)란 묶은 고기 포를 말하는 것으로,
스승을 뵐 때 드리던 예물을 일컫는다.)
예를 차릴 줄 알고, 뜻이 굳다면,
돈이 없어도 이는 공부를 하는데 큰 장애가 아니 되었다.
이사는 제왕지술을 배워, 이로써 출사하여, 성공하는 것을 인생 목표로 세웠다.
나는 이 장면에 이르면 이사의 보수성(保守性)을 여실히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창고 쥐는 호의호식하고, 측간 쥐는 빈궁한 생활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
측간 쥐일지라도 생활이 보장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그리고 창고 쥐로 태어났다는 사실 하나로 미래가 보장되는 사회를 보고
이를 개선하여야 한다고 느낀다면,
그는 ‘자신 혼자’만 창고 쥐가 되기를 결코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비극성은 여기서부터 잉태되고 있었다 하겠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후에 그는 진(秦)나라로 들어가,
기존 질서를 뒤집어엎는 개혁 인사가 된다.
그의 보수적 성격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를 혁신 진보주의자로 보아도 되는가?
이에 대하여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하를 더 지켜보라.
그는 초나라에서 순자를 모시고 공부를 마친 후,
초나라에선 제 능력을 십분 발휘하기 어렵다 느낀다.
기타 육국 역시 너무 쇠약하여 제왕지술을 펴기엔 마땅치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당시 초강국인 진(秦)나라를 택한다.
게서 공을 세워 입신하길 작정한다.
당시 진나라를 6국을 병합하여 천하를 병탄(倂呑)하려고,
세력이 날로 강성해지고 있었다.
이사가 진나라로 들어가니,
바로 이 때, 장양왕(莊襄王)이 죽고, 영정(嬴政)이 즉위하였다.
(※영(嬴)은 진나라 왕의 성씨이다. 영정은 후에 진시황이 되는 그이다.)
영정은 나이 불과 10여세라, 대권은 여불위(呂不韋) 수중에 떨어졌다.
이사가 가만히 세력 판도를 관찰하니,
모든 나라 권세가 다 여불위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이에 이사는 여불위에게 일신을 의탁하고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오래지 않아 그의 재능이 여불위 눈에 띄게 되었다.
이는 후에 영정에게 유세(遊說)할 기회를 얻게 되는 계기가 된다.
결국 영정에게 발탁되어 장사(長史)가 되는데,
지금으로 치면 비서장(秘書長) 격이다.
나중엔 더욱 승진하여 객경(客卿)에 이른다.
이제 원대로, 식량을 충분히 갖춘 창고에 사는 쥐가 된 것이다.
허나, 천하에 풍운이 몰아치고 있으니,
이사에게도 시련이 다가왔다.
한(韓)나라에서 파견된 정(鄭)나라 수리(水利) 전문가가 진나라에 들어왔는데,
이 자가 역사(役事)를 일으켜 진나라 국력을 피폐시키려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에 진나라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려야 한다는 의론이 분분했다.
축객령이란 외국인을 추방하는 명령을 뜻한다.
지금 우리나라도 외국인이 많아지자,
외국인을 몰아내야 한다는 의론을 일으키는 자들이 나타나곤 한다.
초나라 출신인 이사에게도 불똥이 떨어졌다.
이에 이사는 진왕에게 간축객서(諫逐客書)를 바친다.
축객의 부당함을 절절히 써올린 것인데,
예로부터 명문으로 일컬어진다.
지금은 이를 모두 소개할 자리가 아니다.
다만 거기 등장하는 명문 하나를 꺼내들고 잠시 음미하는 것으로 대신한다.
是以太山不讓土壤,故能成其大;河海不擇細流,故能就其深;
(史記)
“... 이는 태산이 흙 한 줌인들 사양하지 않은즉 그 커다람을 이루고,
바다가 작은 흐름을 가리지 않은즉, 그 깊음을 이룰 수 있는 겝니다.”
사해동포(四海同胞)인 바라,
다 같은 사람일진대,
백인, 흑인, 황인을 가릴 일이 아니며,
내 집 아들, 딸만 잘 되고,
남은 모른 척 하여야 하겠음인가?
그대가 마침 한국사람이었을 뿐,
필리핀인, 베트남인과 달리 무엇이 그리 대단히 뛰어나게 잘났는가?
엇그제 우리 동포들은 연해주로 뿔뿔히 흩어져 갔음이며,
파독 간호원, 탄광부로 팔려나갔음을 기억하라.
이하에서 다루겠지만,
아래 등장하는 몽염은 원래 진나라 사람이 아니다.
원래 제나라 출신인데, 부소의 심임을 받았으며,
진시황 시절엔 북방 흉노족을 막아내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
太山不讓土壤
태산은 한 줌의 흙도 마다하지 않음으로써,
높고 큰 산이 된다.
한편, 이날 기자회견 중 길을 가던 한 중년 여성이 이재명 시장을 향해 “노란리본 좀 안 달면 안 되냐”고 하자, 이 시장이 격노하는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이 시민이 거듭 “노란리본 좀 안 달면 안 되냐, 지겹다”고 말하자 이재명 시장은 “어머니 자식이 죽어도 그러실 거냐”고 호통을 쳤다.
이어 이 시민이 “자식하고는 또 다르죠”라고 맞받자, 이 시장은 “내 자식과 남의 자식이 왜 다르나. 같은 사람이다. 어머니 같은 사람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이라고 강하게 질타했다.
(출처 : http://www.goba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40)
슬픔과 분노의 단식 현장에서,
태연히 폭식투쟁을 하는 자들과 동일 선상에서 만날 이라 할 터.
내 일이 아닐 때,
사람들은 쉬이 피로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그만하자고 외친다.
진국과 아닌 이를 가르는 시금석이 여기 있다.
내 일이 아닌데도, 피로감을 느끼지 않고,
아픈 이의 손을 꽉 잡고 함께 가는 이라면 틀림없이 진국이다.
피로하다고 그만하자고 외치는 이를 경계하라.
평소엔 웃고 떠들며 권커니 잣커니 하지만,
위험에 들 때, 이런 사람은 반드시,
그대 등 뒤에 비수를 꽂고 달아날 사람이다.
이사가 올린 간축객서를 본 영정은 축객령을 거두고, 그를 복직시킨다.
간축객서도 대단하지만,
이를 보고서는 바로 축객령을 거둔 영정도 결코 녹록한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축객령이 거두어지자,
천하 각국으로부터 진으로 인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이사, 그는 비록 측간 쥐가 되지 않으려 발분하였지만,
범용한 인물이 아니었다.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현제(郡縣制)를 채택하여,
중앙집권제를 강화하였으며,
문자를 통일하고, 도량형을 통일하였다.
기실 오늘날 쓰는 한자는 이사에 의해 확립된 것이다.
그 전에는 전서(篆書)체 였으니,
도대체 이런 복잡한 자형으로 실용 문자 생활을 지속하긴 어려웠다.
그의 업적은 누구라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가 진정 백성을 위하여 그리 하였는가?
아니면 창고 쥐가 되기 위해 온 힘을 기우렸을 뿐인가?
一鼠得道,群鼠升天
“ 쥐 하나가 도를 이루자,
무리 쥐들이 하늘로 오르다.”
그의 업적이 크게 빛을 발하고,
지위는 인신의 극에 오르자,
그의 식구들도 덩달아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었다.
일테면 장자인 이유(李由)는 삼천군수(三川郡守)가 되었고,
여아들은 공자의 처가 되고, 남아는 공주의 남편이 되었다.
하지만,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
사물은 끝에 다다르면 필경은 거꾸로 떨어지는 법.
이사의 운명은 바야흐로 그 끝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다.
진시황 37년 시황이 사구(沙丘)에서 죽었다.
이사는 이 죽음을 숨기고는 시체를 차 안에 방치하였다.
그리고는 죽지 않은 척 예전과 다름없이 밥과 물을 차 안으로 넣었다.
백관들도 상주를 전처럼 하였다.
이리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가렸다.
이 일은 오직 조고(趙高)만 알고 있었다.
조고는 호해(胡亥)와 밀모(密謀)를 꾸며,
형(扶蘇)을 폐하고 대신 자기가 제위를 찬탈하고자 하였다.
조고는 이 일이 성공하자면 이사를 끌어들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장자 부소(扶蘇)는 몽염(蒙恬)을 신임하였다.
만약 부소가 황제가 되면 몽염이 재상이 될 것이고,
그러면 이사는 자리에 쫓겨날 판이다.
진나라 법에 따르면, 승상이 파면되면, 봉지가 몰수되고, 최종적으로는 삼족이 멸하여진다.
결국 이사는 굴복하여 조고와 함께 공모하여 형인 부소를 폐하고 호해를 황제로 올린다.
이사는 초기 제법 개혁 정책을 펴며 일을 하는 양 싶었지만,
창고 쥐가 되자, 일신의 안락에 머무르고 진나라 사직강산을 돌보는데 태만했다.
결국 명철보신(明哲保身)하는데 급급했다.
그가 측간 쥐에게서 얻은 깨우침에 있어, 한계가 있었음이 여실하다.
측간 쥐의 곤궁함에 비추어 자신만 돌 볼 것이 아니라,
천하 백성들의 처지를 헤아렸다면,
그는 진정 참된 개혁가가 되었을 것이며,
만고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을 것이다.
아울러 비참한 최후를 맞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는 조고에 의해 적과 내통했다는 모함을 받고,
허리가 잘리는 요참(腰斬)형을 받고, 삼족이 멸하여졌다.
이사는 쥐를 보고 뜻을 세웠다.
하지만 종국엔 쥐 때문에 비참한 생을 마감하였다.
측간 쥐를 보고 발분하였으되,
창고 쥐가 되자,
보신하기에 급급하여 나라와 임금을 져버렸다.
亡秦者胡也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호(胡) 때문이다.”
(※ 참고 글 : ☞ 2016/02/22 - [소요유] - 망진자호야(亡秦者胡也))
진나라를 망하게 한 것은 호(胡) 즉 오랑캐이든 호해(胡亥)이든 간에,
그 근본으로 되돌아가면, 조고에게 죄를 물어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조고를 사전에 경계하지 못하고,
가까이 둔 진시황에게 최종적으로 물어야 할 것이다.
허나 이사가 以鼠爲志 쥐를 보고 제대로 된 넓은 뜻을 얻었다면,
어찌 진시황이 위업을 하루아침에 잃었을 것이며,
부소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였으리오?
그가 얻은 뜻은 개인에 국한된 것이니,
빈궁함에 빠진 백성들을 광제(廣濟)라 널리 건져낼 포부로 승화되었다면,
어찌 그리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할 수 있었으랴?
한즉 그는 결코 개혁가가 아니라,
일신의 안위만을 돌본 편협한 보수(保守)주의자라 하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그리고,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자 한다면,
약자를 위해, 사회 정의를 져버리지 않으며,
충의(忠義)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였을 것이다.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륜탄조(囫圇吞棗) (0) | 2016.09.19 |
---|---|
군수가 되고 싶다. (0) | 2016.09.14 |
지진과 묘음(妙音) (0) | 2016.09.13 |
충신이 옹색해지면, 간언이 나오지 못한다. (0) | 2016.09.10 |
어느 날의 꿈 (0) | 2016.09.10 |
ORAC과 거문고 (0) | 2016.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