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만남

소요유 : 2017. 8. 29. 09:32


엊그제 한국에선 살충제 달걀 파동이 일어났다.

어느 곳에선가 전문가란 사람들이 나와서 토론을 하는데,

이들 말들이 도무지 탐탁지 않았다.


관련 학과 교수란 이는 살충제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을 하고 있는 양 싶다.

그저 드라이하게 수치만 제시하고 있다.

그는 가슴이 없다.


기자 하나는 살충제 파동이 났지만 여전히 달걀을 먹고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하니 자신은 농촌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약이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시방(十方) 온 천지가 농약이 뿌려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자신은 살아왔고,

지금도 죽지 않고 잘 살고 있다는 말이다.


옴살 피지 말라.


그는 이리 말하고 싶은가 보다고 느꼈다.


국회의원이란 이는 축산 농민을 걱정하며,

진드기가 있다면 도리 없이 살충제를 뿌릴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식이다.

머리가 달렸고, 가슴이 있는 이라면,

누구라도 밀폐, 초밀식 사육환경이 문제라는 것을 안다.

약간 이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는 있으나,

그 개선에 대하여는 그리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수많은 닭들을 모두 방목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식이다.


나는 저들의 문제의식이 너무 안일하다고 생각한다.

이 파동 이전에도 이미 문제는 다 알려졌으나,

전문가, 관리 당국 모두들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떤 한학자의 블로그를 하나 안다.

지난 날, 이 사람이 키우는 동물을 소홀히 하기에,

이를 비판하는 댓글을 올린 적이 있다.

이에 따라 그를 따르던 이웃들과 마찰이 생기고 다소간 분쟁이 일어났다.


당시도 팬, 빠라 불리우는 이들의 한계를 다시금 보았다.

시시비비에 입각한 정론이 아니라,

저들은 대개 빨아주고, 햝으며,

무작정 인물에, 진영에 복무한다.


며칠 논쟁이 일어났는데,

블로그 주인이 나서 나머지를 타이르고 자리를 정돈하였다.

그는 외려 별도의 카테고리를 새로 마련코는 내 글들을 모아 올렸다.

역시 공부를 하는 사람은 다르구나 싶었다.


그런 사정이 있는 이가 이번 사태를 두고 감상을 하나 올렸다.

그는 그 글에서 살충제에 대한 사람들의 염려를 탓하며,

외려, 축산 농가를 걱정하지 않는 사회를 개탄하고 있었다. 


아, 사람의 본성은 이리도 쉬이 바뀌지 않는 것인가?


축산 농가를 걱정하고 있는 것을 탓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지옥과 다름없는 고통 속에 사는 닭에 대하여 그는 왜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시간이 한참 흘렀지만,

내가 그에게 지적한 동물에 대한 박약한 의식은 여전히 바뀌지 않고 있는 것이다.


공장식, 초밀식 사육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책 당국의 구체적 실천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단위 케이지 면적을 넓히고, 방목을 하는 등의,

시설 개선을 하는 양계 농가에, 인센티브를 주는 유인책을 세워야 한다.

혹자는 말한다.

그러면 달걀 값이 오르지 않겠느냐?

당연히 올라야 한다.

지금 달걀 값이 싸다면,

이는 닭들의 고통과 희생을 댓가로 얻고 있음이다.

이를 바른 상태로 돌릴 수 있다면,

그에 대한 부담을 당연히 져야 한다.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모두 바꾼다면,

생산비가 올라 물가가 오르지 않겠느냐?

이리 묻고 있다면,

나는 당연히 답하리라.

물건 값이 싼 만큼,

비정규직의 희생이 전제되고 있다.

그 차이만큼 비정규직의 피와 땀의 노고, 그 정당한 댓가를,

나머지 사람들이 절취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자리로 돌려놓아야 한다.


방목을 하자면,

당장 그 많은 닭들을 다 수용할 공간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리 묻는 이도 있다.

나는 지금의 우리네 식육 생활은 과하다고 생각한다.

채식이나 소식(素食)내지는 소식(小食)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하지만 이런 제도의 개선은 차선책에 불과하다.

제도화된,

가령 동물 또는 인간 복지 시스템이라든가,

노동 인권의 법률적 보장 따위를 넘어서야 한다.


보편적인 인간성에 대한 신뢰에 기반한 자유, 평화 의식이 고양되길 바란다.

나아가 동물 복지나 동물보호법 따위의 제도화된 접근을 넘어,

동물을 대하는 사람들의 근원적 의식 각성이 일어나야 한다.

생명에 대한 바른 의식을 지니지 못하면,

제 아무리 제도나 법이 많이 채비가 되더라도,

인간은 결코 자유로운 영혼이 될 수 없다.


인격적 만남,

생명의 만남,

우주적 만남을 바라며.


(내가 여기서,

우주적이라 할 때,

이는 곧,

인격, 생명을 넘어,

무생물까지 아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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