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조는 날아가고, 가을물은 하늘가에 닿았어라
내가 달포 전 여기 시골에서 비교적 가까운 파주를 다녀왔다.
세칭 감악산 출렁다리라 하는 곳도 들렸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간 김에 건너기로 하였다.
계곡을 가로질러 설치되어 있기에 다리 자체의 접근이 쉽지 않다.
산자락에서 한참 산 위로 거슬러 올라가서야 한쪽 편 입구에 도착하였다.
사람이 제법 많았는데,
저들 하는 짓을 보고는 이내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들은 하나 같이 디카나 폰을 꼬나들고는 사진을 찍기 바빴다.
저 다리를 통과하려면 원치 않아도 수 십방은 거저 찍히고 말리라.
나는 일없이 사진 찍는 짓도 별로 하지 않지만,
내가 공연히 남의 피사체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입구부터 일단의 아줌마 무리가 다리 양변으로 나눠 서서,
사진을 찍느라 남의 길을 막는다.
사진 찍는 행위가 남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남의 통행을 방해할 권리는 없다.
저들은 이런 절제의 미덕조차 없는 여자 불한당들이다.
무례하다.
앞을 보니 저마다 사진을 찍기 분주하다.
풍광을 감상하려 올랐는지,
사진을 찍으려 왔는지 알 수 없는 지경이다.
지금, 이 순간은 내 눈이란 접점을 통해, 감각(感覺)되고,
머리로, 가슴으로 전해져 해석되고 감응하는 법이다.
디카를 겨누고 아무리 수 백방 찍는다 한들,
인간은 이를 통해서 직접적으로 감수(感受)할 능력은 당연 갖추지 못했다.
지금 현장을 가장 잘 감수할 수 있는,
아니 유일한 인체 기관은 육근(六根)이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를 통해 대경(對境)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을
감수하고 인식한다.
디카를 통해서는 지금 마주하고 있는 현장을 결코 바로 만날 수 없다.
다만 후에 2차원으로 변형된 이미지를 통해 재현해볼 수 있을 뿐이다.
일회적, 불가역적인 시공간 현실은 내 몸을 통해서야, 비로소 실재가 된다.
이미지를 통해서 얻어지는 가상현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은 디카 때문에,
내 몸을 통한 감수 작용이 배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디카질로 이것을 놓치고 있는 현실을 고발하고자 하는 것이다.
현실을 사랑하는 사람은,
내 눈의 정직함을 믿으며,
내 가슴이란 웅숭깊은 우물로부터,
아름다움을 정서란 두레박으로,
무지갯빛으로 길어 올린다.
이것은 결코 디카질로 획득될 수 없다.
어딜 가나 디카질은 차고 넘친다.
그 천박성으로 세상을 쉽게 쇼핑하고,
그 폭력성으로 현실을 가벼히 유린한다.
사람들은 이리,
소중한 진실을 버리고,
복제된 가짜를 소비하길 욕망한다.
시간은 영원으로 노 저어 흐른다.
이내 지나가고 말 순간은 얼마나 슬픈가?
지금 나는 내 가슴으로 운다.
공간은 먼 곳으로 우리 곁을 이내 떠나고 만다.
여기 마주친 저 풍광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거기 서서 나는 내 눈으로 환호한다.
다리 위에서 디카를 든 사람들.
마치 선불 맞은 멧도야지처럼 이리저리 날뛰며 혼비백산(魂飛魄散)이다.
말 그대로 저들 혼백이 이리저리 날리며 흩어지고 있다.
도대체 저들은 무엇을 쫓아 저리도 분주한가?
밤장터에서 몽당 빗자루 들고 귀신 잡겠다고 날뛰는 형용이다.
夢幻空花。
白鳥煙沒。秋水連天。
삼계가 몽환이고,
눈꽃인 게라.
가엽다.
나는 지난 시절에도,
이를 아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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