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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포파립(敝袍破笠)

생명 : 2022. 3. 31. 11:17


폐포파립(敝袍破笠)

이십여 일 전 농장에 조그마한 동물 하나가 들어왔다.

그야말로 폐포파립이라, 
털은 뽑히고, 피부는 허물고, 머리는 산발을 하고 있다.
제 몸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여 비틀 거리고 있다.
돌연 그저 얼굴만 겨우 알아볼 정도의 조그마한 아이 하나가 내 앞에 나타난 거였다.

급히 사료와 물을 한 그릇 떠주었다.
이리 숨을 돌리고 자세히 관찰하니,
거의 강아지 형용이다.

하지만, 등털이 이층이라, 겉 털은 진하고 드세 보였다.
얼핏 강아지인 양 보이지만, 
강아지 특유의 살가움이 보이지 않고,
야생의 거칠고 날카로운 기운이 흐르고 있다.

잔뜩 긴장하고 있으니 건드리지 말고 물러나 있을 일이다.
우선 밥을 챙겨먹고 기운을 차린 후 예후(豫後)를 지켜보기로 한다.

그런데, 이젠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마는 것이다.
저 아이가 강아지라면 이를 어찌 할 것인가?
여기 시골 동네, 
그저 구름 따라 시간이 여유롭게 흐르는 양 싶은가?
어림없는 소리다.
문제 하나가 생겨 이를 처리하면,
어느 새 새로운 일이 돌발적으로 일어나,
입 딱 벌리고 나를 기다린다.
결코, 한가로이 쉴 틈이 없다.

3년 전에도 농장 앞에 버려진 강아지로 인해,
한 동안 마음을 끓였던 적이 있다.
(※ 참고 글 : ☞ 강아지 둘)

天地不仁,以萬物為芻狗;聖人不仁,以百姓為芻狗。天地之間,其猶橐籥乎?虛而不屈,動而愈出。多言數窮,不如守中。
(道德經)

“천지는 어질지 않아, 모든 것을 풀강아지처럼 다룬다. 
성인은 어질지 않아, 백성을 풀강아지로 다룬다.
천지 사이는 풀무와 같은 것인가? 
비어있으나 굴하지 않고, 움직일수록 더욱 세진다. 
말이 많으면 자주 궁해지니, 
허와 같은 본래의 속심을 지키는 것만 못하다”

여기 추구(芻狗)는 풀로 만든 강아지로서,
제사 지낼 때 쓰고는 버리게 된다.
추령(芻靈)의 하나인데, 동물이나 사람 모양으로 만들어,
재해를 없애려고 만든다.

우리나라 세시 풍속에서도 제웅이라고 짚으로 만든 인형이 있다.
정월 대보름에 액막이 하려고 만들곤 하였다.
이것에다 동전이나 지폐를 끼우면 동네 개구쟁이들이 이를 업고 나간다.
동전은 취하고 제웅은 버린다.
이 돈으로 저들은 그날 신나게 즐기며 논다.

액막이를 이런 식으로 하는데,
내 소싯적에는 이런 액막이 행사가 있었다.
제웅을 다리 밑이나 길거리에 미리 버려둔다고 책엔 쓰여 있지만,
우리 동네에선 형뻘 되는 큰 아이들이 그 집으로 찾아와,
액막이 할 당해자에게 절을 하고는 업고 나갔다.
그러지 않고 길바닥에 버리면 액이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확인할 수 없다.
우리 동네 사람들이 훨씬 현명하였다 하겠다.

천지불인(天地不仁)

그러니까, 천지는 유위(有爲)가 아니라, 무위(無爲)로써,
만물을 한번 쓰고 버리는 제사 때의 풀강아지(芻狗) 정도로 여긴다는 말이다.
만약 특별히 하나만을 택해 아끼고 위해진다면 어찌 되겠음인가?

천지는 만물을 차별하지 않는다.
인은(仁恩)이 아니라, 다만 자연에 맡길 뿐이다.
만약 차별을 하였다면,
진작에 천지는 결딴이 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가령 착한 것, 예쁜 것만 택하여 길렀다면,
종국엔 만물 가운데 단 하나만 남고 말았을 것이다.
허나, 하나가 만물에 의지하여만 살 수 있을 터인데,
그 때에 이르러서는 자신 말고는 이미 만물은 사라지고 없을 터.
그러하니 어찌 천장지구(天長地久), 천지가 장구할 수 있으랴?

인위(人爲)는 언제나 패(牌거리)를 짓고,
사적 이익을 위해, 상대를 핍박하고, 욕심의 성을 쌓는다.
그런즉, 천지와는 정반대다.
그러하니 천장지구하려면,
이를 천지자연을 닮게 고쳐나가야 한다.
결국 인위(人爲)는 유의(有爲)로 인해 끊임없이 갈등과 문제를 야기한다.
때론, 다시 유의(有爲)를 동원하여 이를 고치려 하는 세력이 나타나곤 한다. 
정치란 현실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차별을 고쳐,
천하를 고르게 평안케 하려는 것이어야 한다.

언제나 정치하는 이들은,
표를 구걸할 때는 이를 고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권력을 잡으면,
이 약속을 어기고,
제들 편의와 잇속을 챙기기에 급급할 뿐이다.
당금 오늘의 현실에서도 우리는 이를 목도하고 있다.

聖人不仁,聖人愛養萬民,不以仁恩,法天地行自然。

헌데, 여기 보면,
성인 역시 불인(不仁)하다 하였다.
만민을 애양(愛養)하고,
인은(仁恩)이 아니라, 다만 천지자연을 본받는다 하였다.

여기 서양 철학과 완연히 다른 경계가 드러나고 있다.
종말론은 그래서 동양에선 잘 나타나지 않는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成 → 住 → 壞 → 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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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혹 우주가 다하여도 다시 순환하여 되풀이 된다.

창조신을 설정한 기독교는 물론이거니와,
신을 죽인 니체의 영원회귀와도 또 다르다.

코로나19와 더불어 노출된 기독교 계열의 이단들은,
종말론을 좌판에 벌려놓고 영업을 뛴다.
그래도 이게 그리 쉬이 망하지 않는다.

저들은 힘에의 의지를 차용하여 설명하든, 신을 설정하든,
삶과 죽음과의 갈등, 긴장 관계 속에서 세계를 구성한다.
따라서 사이비 교주의 언설은 주문(呪文)이 되고,
지시는 거역할 수 없는 주술(呪術)이 되어,
어린 영혼들은 주박(呪縛, enchanted)되고 만다.
아니 스스로 주박되길 자청한다.
그 가운데 저들의 불안은 망각 형식을 통해 구원된다.
기실 이것은 구원이 아니라,
오도된 해소, 거대한 착각, 미망일지라.

나는 성인이 아닌지라,
버려진 강아지를 보면 어쩌지 못하고,
저들로 인해 마음이 아파온다.
그리고는 이내 걱정이 서린다.
결국은 저 아이가 아니라,
내 문제를 어찌 풀어낼 것인가 애를 끓이고 만다.

실로 성인의 길은 멀고도 험하다.

다만, 블루베리를 기를 때,
천지를 본받아, 최대한으로 인위적 행위를 자제하고,
무투입 농법으로 임하며,
도법자연(道法自然)이라,
자연을 본 받자 겨우 흉내를 낼 뿐이다.
(※ 참고 글 : ☞ 도법자연(道法自然))

저 아이는 너구리로 밝혀졌다.
군청의 협조로 야생동물 치료센터로 보내졌다.
치료 후 방사한다고 한다.

풀강아지 하나가 어느 날 내 앞에 나타나는 거였다.

그리고 그는 어디론가 떠나가는 거였다.

나도 언젠가 그럴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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