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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기(有機) 考

농사 : 2014. 7. 21. 09:20


근자에 유기농(有機農)이란 말이 널리 쓰이고 있다.
그런데 이를 넘어서는 양,
자연재배, 무경운, 무투입농업, 탄소농법이니 하는 각종 농법이 덩달아 난무하고 있다.
주로 일본에서 들어온 형편이나,
국내에서도 몇몇 분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고 있다.
난, 이들 중 일부는 세상을 속이는 엉터리임을 확인한 적도 있다.

雷聲甚大。雨點全無。

천둥소리 요란하나,
빗방울 하나 내리지 않다.

선가(禪家)에서 흔히 쓰는 말이다.
꼭이나 말이 많다고 실속이 없다 할 수는 없지만,
세상 사람들은 긴 말, 큰 소리를 앞세워 곧잘 거짓을 감추곤 하는 법이다.

하여간,
이들을 두고,
챙기고, 알아 보려고 하였지만,
내가 워낙 둔한 이라,
이에 대한 공부가 충분히 다 되었다고 할 수도 없을 뿐더러,
논의하려고 한다 하더라도,
장시간의 말씀이 필요하다.

게다가 나는 어느 순간,
애초 일으켰던 마음을 바꾸고는,
남의 이야기에 휘달리며 마냥 그를 쫓던 짓을 그만두었다.

처음 농사를 짓는 바라,
무엇이든지 신기하고,
호기심이 일어,
무작정 챙기고 배우려고 열심이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 다 그러하듯,
시간이 흐르면,
마음의 술국이 절로 익게 되는 것.

어느 날,
이를 거울 들여다보듯,
가만히 들여다보니,
거긴 내 자신의 모습이 비추고 있더라.

吾道一以貫之。

내 마음 속에 이미 하나의 도가 있었음이라,
되돌아보니 거기 천연스레 그리 그렇게 갖춰져 있었던 바라.
마치 등에 업은 아기를 두고,
잃었다고 온 동네를 삼칠일 찾아 해맨 격이라고나 할까?

남은 날이 많으니 서두를 일이 아니다.
우선 오늘은 유기(有機)에서 機자 하나를 중심으로 두고 말씀을 나눠본다.

지난 토요일 이웃 군(郡)에서 블루베리를 재배하시는 부부가 농장을 찾아오셨다. 
그래 그 자리에서 드린 말씀이기도 한데,
미처 드리지 못한 것은 보태고,
어지러이 흩어진 것은 가지런히 다듬어,
이제 정리를 해보는 것이다.

여기 장자(莊子) 천운(天運)편을 잠시 들춰본다.

天其運乎?地其處乎?日月其爭於所乎?孰主張是?孰維綱是?孰居無事推而行是?意者其有機緘而不得已邪?意者其運轉而不能自止邪?雲者為雨乎?雨者為雲乎?孰隆施是?孰居無事淫樂而勸是?風起北方,一西一東,有上彷徨,孰噓吸是?孰居無事而披拂是?敢問何故?

하늘은 운행하고, 땅은 머물고, 
일월은 자신이 처할 자리를 다투고 있으니,
그 누가 계셔,
이를 주장(主張)하며,
누가 통할하며,
누가 절로 추진시키는 것인가?
그는 기관(기틀)이 있어 - 有機 - 말없이 필연의 형세로 그리 함인가?
그는 운행되어 구르기 시작하니 저절로 그칠 줄 모르는가?
구름이 비가 되고,
비가 구름이 되어 순환함은,
그 누가 일으키고 계심인가?
.....

여기 이 장면에 등장하는 有機는,
기계장치와 같은 어떤 기관이 있어서란 뜻이다.

마치 물레방아가 물을 받아 돌리며 방아를 찧는다 할 때,
機는 물레방아란 장치 기구, 그런 기틀, 곧 기관을 가리킨다.

그럼 이번엔 장자의 지락(至樂)편을 마저 점검해보자.

種有幾,得水則為㡭,得水土之際則為蛙蠙之衣,生於陵屯則為陵舄,陵舄得鬱棲則為烏足,烏足之根為蠐螬,其葉為蝴蝶。胡蝶,胥也化而為蟲,生於灶下,其狀若脫,其名為鴝掇。鴝掇千日為鳥,其名曰乾餘骨。乾餘骨之沬為斯彌,斯彌為食醯。頤輅生乎食醯,黃軦生乎九猷,瞀芮生乎腐蠸。羊奚比乎不筍,久竹生青寧,青寧生程,程生馬,馬生人,人又反入於機。萬物皆出於機,皆入於機。

여기 마지막 구절,
萬物皆出於機,皆入於機。
이를 풀면 이러하다.
만물은 모두 기(機)로 생기어 기로 돌아간다.

여기서 기(機)자를 기(氣)로 바꾸어도 얼추 뜻은 새길 수 있다.
동양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기(氣)란 말을 골백번은 더 듣고 사니,
잘은 몰라도 어쨌거나 그 뜻을 제나름껏 짐작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등장하는 기(機)는 이와는 전혀 다른 뜻을 갖고 있다.
앞의 문장들을 번역하지 않았는데,
이는 미물 - 이끼 - 차전자 - 벌레 - 나비 .... - 말 - 사람 ....
따위로 만물이 전변하는 사태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차서(次序)로 순변(順變)할 때 각 존재는 나름 각자의 틀을 갖고 있는데,
이게 어떤 조건이 맞고, 계기가 왔을 때 다음 차 존재로 변전되어 넘어갈 수 있다.
이 때 각 존재들이 그리 할 수 있는 미리 갖춘 구조적 틀이 있음인데,
이를 기(機)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발동(發動)될 수 있는 존재 성립 조건,
이를 기(機)라 하는 것이다.

主發謂之機。

지금 가능태로 있던 것이 어떠한 계기를 맞아,
펴지어(發) 구체적 이름을 갖고, 존재태로 바뀌는 것은,
그것이 그럴 만한 기틀이 있기 때문이다.

투기(投機)라는 게 요즘 아주 고약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원래 投機라는 말은 불교의 禪용어이다.
누구라도 부처가 될 수 있다라는 그 바탕 자리를 機, 틀이라고 한다.
바로 제자의 機와 스승의 機가 상통하는 것을 禪家에서는 투기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은 꼭이나 스님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깨진 기왓장도, 구름도, 그림자도 투기의 계기가 되면 모두 스승이 된다.

그러하기에, 
향엄은 무심이 던진 기왓장이 대나무에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깨우치고,
동산은 다리를 건너다 물위에 비친 자신의 그림자 보고 깨쳤으며,
의현은 옆방 사람의 중얼거림에 깨우쳤으며,
백장은 코를 잡아 비틀려 깨우쳤으며,
원효는 해골바가지에 든 물을 먹고 깨우치기도 한다.

해골이든, 기왓장이든,
원효이든, 향엄이든,
모두 다 그럴 만한,
기틀을 갖고 있음이니,
이게 어느 날, 어떠한 계기에 서로 만나,
한 바탕 번갯불을 일으키고, 
천둥소리를 내게 된다.

근기(根機)

불교에선 이 말도 곧잘 쓰는데,
사전식이라면, 불법을 받아들일 수 있는 근본 능력 정도로 새겨 볼 수 있겠다.
여기에도 機자가 등장하는데,
이 글자를 단순히 철로 만든 기계 따위로 이해하는 한,
도대체가 그 참다운 뜻을 결코 알아먹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여기 왜 機자가 등장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런지들.

그럼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

유기(有機)란 무엇인가?

유기농 한다는 사람들도 기실 유기가 무슨 뜻인지 모르는 사람이 태반이다.
그들에게 물어보면, 기껏 한다는 말이,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든가, 농약을 치지 않는 농법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내가 다시 묻기를, 
그럼 당신은 어떠한 방법이라도 달리 쓰고 있는 것이 있는가?
이러면 천편일률적으로 돌아오는 답이 있다.
자신은 3년 전에 만들어든 비장(秘藏)의 액비가 있고,
2년 묵힌 특수 효소니,
1년 된 발효액이 있다고 자랑스럽게 뻐기며 말한다.
그러면서 나는 일체의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다고,
기염을 토한다.

하지만,
난 저들과 관행농 하는 분과 그리 큰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모두들 욕심꾸러기엔 아무런 차별이 없다.

화학비료 N, P, K를 양껏 처넣어 소출을 왕창 늘릴 궁리를 트는 이들과,
각종 자가 발효 조제액으로 무장하고, 이를 년년세세 밭에 처넣으며,
생산량을 광주리가 찢어지게 늘리려고 획책(劃策)하는 이나,
본질적으로 그 무슨 다름이 있음인가?

재료만 달라졌지,
그 시뻘건 마음보는 하나도 다름이 없다.

말이 그렇지 자가 발효액비 만드는 것이 그리 수월한가?
비지땀을 흘리며 일 년에 너댓 가지 넘는 발효액을 만들려면,
비상한 인내와 수고가 따르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자부심은 차고 넘치지만,
막상 시장에 내놓으면 자신의 수고와 고생한 보람은 찾을 수 없다.
도대체가 여항(閭巷)의 인심이라는 것은,
거죽에 묶여있지,
저 안짝에 숨겨져 있는 진실을 돌볼 정도로 진지하지 않은 것이다.
세상에 흔히 돌아다니는 인심이란 천박함을 그 본령으로 하는 것임이라.

저들은 서서히 지쳐가고,
밤마다 전전반측 뒤척이며 갈등 속에 빠져든다.

다만 기적의 사과 그 주인공 기무라 같은 이 하나 있어,
목에 걸던 줄을 거두고 요행 세상으로 복귀할 뿐.
대개는 매양 꿈속을 해매며,
잠자리에 한 말들이 땀을 쏟으며 헤엄을 치게 된다.

유기(有機)란 말이 있으면 당연 무기(無機)란 말도 있겠음이다.

내가 앞에서 기(機)를 두고,
유정물(有情物)이나 무정물(無情物)을 가리지 않고 썼다.
즉 기(機)가 발하여짐에 있어,
이를 차별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구름이 비가 된다고 할 때,
이게 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하고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는가?
거기 기가 이쪽에서 저쪽으로 변함에 있어,
그 극적 변환의 그 ‘아름다움’, 그 ‘경이로움’에
무슨 층하가 있음이겠는가?

그러함인데,
오늘 날 쓰이는 유기(有機)란 말은,
극히 인색하여 사뭇 제한적이라,
무정물은 제하고 오로지 유정물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돌, 구름 따위의 생명이 없는 것을 두고는,
기(機)의 창발(創發)성을 제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이 때까지만 하여도,
문학과 철학과는 가는 길이 영 달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리 치닫던 과학은,
참으로 요상한 짓거리를 하고 있었음이니.

원래 유기물이란,
유기체(有機體,생물) 밖에서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유기물은 유기체가 만들어낸 그 산물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생명 현상을 여의고는 유기물을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이다.

有機這歷史性名詞,可追溯至19世紀,當時生機論者認為有機化合物只能以生物(life-force,vis vitalis)合成。此理論基於有機物與「無機」的基本分別,有機物是不能被非生命力合成的。

유기(有機)란 말은 19세기까지만 하여도,
생기론의 영향을 받아 단지 생물만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였다.
여기 기초하여 유기와 무기를 분별하였던 것이다.
생명이 아닌 것은 유기물을 만들어 낼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機라는 것,
그리고 그게 있다라는 有機란 무엇인가?
‘생명’ 현상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란 뜻이 아니겠음인가 말이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無機란 생명의 근본 내재 기관이 없으니 죽어 있다는 말이다.

앞의 예에서,
나는 구름, 천둥, 번개, 무지개까지 그 외연을 넓혀,
생기(生氣)를 불어넣고 저들 역시 有機로 보았음이니,
천지지간 모든 만물은 기실 有機 아닌 것이 없다 하겠다.

다만,
오늘 이 자리에선,
차별적 현상계에 처한 우리네 좁은 안목 안으로,
이야기를 제한하여 논의를 펴고 있음이다.

자, 그런데,
화학공업 특히 석유화합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자,
이를 인공적으로 합성해낼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유기 화합물이라 부른다.
요즘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유기물과 유기화합물은,
마구잡이로 혼용되어 쓰이기 때문에 그 경계가 허물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니까 원래는 우리가 지금 유기농이라 칭할 때,
여긴 아련한 향수가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것이다.
순수한 생명, 그리고 그의 소산을 상대하고 있다는,
자족감이랄까, 그리고 이로서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명감 같은 것.
이런 가치는 소중한 것이다.

공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무지막지한 반생명적 물질이 아니라,
태고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순수함, 그 원초적인 숭고함에,
우리를 데려다 주려함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가령 화학비료를 사용한다고 할 때,
거긴 N, P, K 이런 따위의 저들이 일컫는 필수 원소를,
공급하면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게 거죽으론 일정분 성과를 내고 있지만,
양적인 달성 그 마지막 선에서,
문득 회의와 반성을 하게 된다.
이런 작법 체계는,
각종 부작용에 노출되게 되는데,
가령 아질산 과다 축적에 따른 발암 논란,
아토피와 같은 치료 불가능한 병의 유발,
맛과 향 따위의 제 3차적 욕구 ...
이런 문제의식이 친환경, 자연보호 지향 이데올로기와,
맞부딪히자 유기농이란 농법이 사회적 조명을 받기 시작하게 된다.

유기농을 제대로 하고자 하면,
단순한 N, P, K와 같은 원소 투입 차원을 넘어,
이젠 미생물 그리고 필경은 땅에 관심의 적(的)이 이동을 하게 된다.
땅 속의 미생물이 유기물에 작용한다 함은,
곧 고분자의 유기물을 잘게 부수어 저분자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런데 유기농 하는 사람들이 액비니 효소를 만든다 함은,
이 과정을 밭에 자연스럽게 일어나게 하는 게 아니라,
미리 사전에 댕겨 만들어 놓고서는 이를 밭에 투입하여 효과를 보고자 하겠음이다.

그러자니 욕심이 승하게 되어,
옆의 농장이 한 통을 만들면 자신은 두 통, 세 통을 만들고,
저이가 어떤 풀로 만들면,
자신은 심산묘처(深山妙處)에 가서 캐온 것으로 만든다든가,
바닷가로 달려가 각종 해초류를 구하기 위해 갖은 고초를 마다하지 않는다.
이리 숭어 뜀뛰기 경주를 하며 여일(餘日)이 없다.
해마다 이 짓을 하려니 심신은 지쳐가고,
그렇다고 시장에서 이를 알아 대접을 해주지지도 않는다.

이러함이니 내가 옆에서 저들을 지켜보자하니,
화학비료를 치는 농부와 그 욕심 부림에 있어서는 하등 차이가 없다 하는 것이다.
외려 화학비료를 쓰는 이들은 이젠 훈련이 곧잘 되어,
적량의 비료만 쓰고자 애를 쓰고 과비를 경계한다.
극성스런 유기농 농부에 비해,
관행농 농부가 한결 점잖고 여유롭다.

왜 유기농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이런 병폐가 생기는 것이다.

난 여기서 우선 두 가지 문제를 환기하고자 한다.

효소니 발효된 유기 액비를 넣는다 할 때,
그게 N, P, K를 처넣는 화학비료 투입 농법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점이다.
거긴 단순히 N, P, K를 넣는 것을 넘어,
미생물이 관여하여 만들어낸 각종 호르몬, 비타민, 효소 따위의 생성.
바로 이에 주목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화학비료 투입으로서는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우리가 아직까지는 충분히 알지 못하는 이러한 물질들은,
작물 생육과 소출의 양과 질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다. 
난 유기농 농부들이 이런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저 양적으로 증산하겠다는 욕심을 넘어,
그리고 유기농이란 타이틀을 과시하고자 하는 속물근성을 버리고,
그 근본 뜻과 소망,
그리고 그리 생심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내면의 소박한 철학을 돌이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 째는,
이러한 것을 자가 제조든 외부 지원이든 간에,
미리 준비하여 토양에 넣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발효를 시킨다는 하는 작업은,
내가 지켜보자 하니 우선은 자연스럽지 않다.
빠른 시간 내에 만들려 하다 보니,
각종 설비와 경비가 투여되고, 무리가 노정되곤 한다.
여긴 필연적으로 욕심이 촉발되고,
농부는 감당키 수월치 않은 중노동에 시달리고,
화학농에 비하여 과도한 생산비 증가가 따른다.

나는 이리 조급하게 무엇을 투입하려는 짓을 처음부터 좀 부정적으로 대하였다.
내 천성이 게으른 구석이 있기도 하였겠지만,
매년 저 짓을 하는 것도 만만치 않아 보였다.
게다가 저리 허갈진 아귀처럼 마구 대드는 모습도,
내 농철학으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좀 시간이 걸리더라도,
서서히 토양을 저런 모습으로 바꿔 가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매년 발효, 효소, 천연 액비를 넣는 이 하고, 화학비료를 넣는 이들 간,
저 ‘인스턴트화’된 태도에선 본질적으로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가,
이즈음 자연농이니 유기농이란 것이,
화학농과 다른 바가 무엇인가?
모두들 많은 소출, 많은 소득을 구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이러고 있는 한,
애초 세운 뜻은 시들고,
몸은 고단하고,
마음은 지치고들 만다.

자연농이든 유기농을 하려고 하는 한,
우선 욕심을 거두는 것부터 시작하여야 한다.
많이 남기고 벌어 화학농을 이기겠다는 발상 자체가,
자연농의 근본 철학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많이 벌겠다는 뜻이 있다면,
공연히 폼만 잡는 이 짓거리 하지 말고,
화학농, 공장농으로 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령 1차 년도에 맨 땅 속으로 직접 유기물이 넣어졌다면,
거기 미생물이 서서히 자리 잡으며 활동을 하게 될 터인데,
이리 농부가 십 년을 두고 곁에서 부축해주면,
다음부터는 제풀로 토양, 미생물, 식물이 서로 교호작용을 하며,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지 않겠는가?

그쯤에선 농부는 한가로이 밭가를 걸으며,
저들과 함께 하며,
대지의 영광을 노래하고,
태양의 은덕을 찬양할 수 있게 되리라.

을밀농철은 이런 소박함으로부터 출발한다.
내 수명이 모자라건 넘치든 이와 무관하게, 
난 최소 30년을 보고 길을 떠나려는 것이다.

중국인들을 보면,
거죽으론 꾀죄죄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慢慢悠悠
탄복할 만한 훌륭한 정신을 갖고 있다.
(※ 참고 글 : ☞ 우공이산(愚公移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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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 2014. 7. 21. 09: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