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통곡

소요유 : 2020. 8. 21. 16:03


통곡


나는 소싯적에, 우리 대학 도서관에 있는

무속 관련 서적을 거지반 다 읽었다.

게다가 불교 관련 서적도 얼추 80~90%는 다 읽은 폭이다.

한문 원서만 접근하지 못하였지,

한글로 된 것은 누에가 뽕잎을 갉아먹듯,

자고 일어나면 허갈진 배를 마구 채워넣듯 잔뜩 우겨넣었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당시엔 드물게도 개가식(開架式)이라,

나는 손에 잡히는 대로 게걸스럽게 탐식하는데,

별다른 장애가 없었다.


다만 기독교 관련 서적은 의욕은 일었으나,

막상 달겨들면, 이내 식어, 미처 다 읽어내지 못하고 덮은 적이 많다.

나로선 생경한 야훼의 문법에 익숙해지는데,

적지 않은 인내와 고통이 따랐다.

이는 저들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생래적 한계라 생각한다.


우리 학교 도서관은 당시 여느 흉내만 낸 학교와는 다르게,

갖춰 쟁여진 서적이 수십만 권이라,

밤마다 저 서적을 훔쳐오는 꿈을 꿀 지경이었다.

과시 학해(學海)라,

저것은 거대한 학의 바다였다.


허나, 아무리 그렇다한들,

워낙 근기가 미천(微賤)하고, 두뇌가 아둔하여,

의욕만큼 큰 성과를 얻지는 못하였다.

가련타.


아아,

다시는 내생에 결코 태워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다시 태어날 것이라면,

두뇌가 총명하지 않을 것일진대,

차라리, 노방(路傍)에 핀 이름 없는 잡초가 되거나,

돛 없는 거룻배가 되고 말지어라. 


내 이리 한(恨)을 새기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거니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기독교는 결정적인 전기를 얻고 말리란,

선언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내가 그저 한 때의 기분에 젖어,

뱉어내고 말만한 허랑한 인간은 아니고 싶었다.

하여, 이리 나를 점검해본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서방 세계엔 기독교가 설 자리를 잃고,

지는 석양빛에 빈 의자가 쓸쓸히 긴 그림자만 남기고 있다.


교회 자리가 임대 시장에 나와 있고,

이름이 제법 나서, 

관광객이 붐비지 않으면,

성당이 물 빠진 뻘밭이 되어,

한낱 바겐세일 시장터로 전용되고 있는 실정이다.

썰물처럼 신자들이 빠져나갔기에,

이러하지 않으면, 저들이 명을 잇지 못하게 된 소이(所以)다.


이리 태생의 본 고장이 변하고 있는데,

한국에선 아직도 기독교가 명맥을 태연히 잇고 있다.

게다가, 신천지, 빤쓰교가 백주 대낮에,

막걸리 먹고 게트름하며, 갈짓자 걸음을 하듯,

그 거드럭거림에 한 치의 사림이 없다.


하지만, 이들의 본색이 천하에 아낌없이 다 까발려졌다.

코로나19는 이들의 실력, 감춰진 내막을,

공개리에 모든 이에게 아낌없이 들춰낸 것이다.


종교엔 관심이 없는 이조차,

저들의 황막(荒漠)한 본 모습을 기어이 보고 만 것이다.

아무 쓸모없이 거칠고 을씨년스러운 저 가을 들판 같은 모습이란,

도대체가 얼마나, 우리를, 아니 저들을 초라하게 하는가 말이다.


이제, 제 정신을 가진 이라면,

새로 기독교에 접근하는 것에 커다란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것은 도덕적 거부감(moral objections)을 넘어,

마치 충돌 방지 중앙 분리대(crash barrier)처럼,

저기를 넘보기엔 도저히 어쩔 수 없는,

심리적 장벽으로 기능하게 돼버린 것이다.


저것을 넘으려면,

나의 생명을 위협하였던, 저들, 

코로나19를 두고 마음껏 농(弄)하였던,

저 패악의 무리들을 넘어서야 하는,

그 거대한 부담을 지고 대들어야 한다.

이것 보통 배짱이 아니면, 

감히 지불하기 어려운 도전이다.


저들은 예수의 가르침, 사랑을 전파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아니다.

그저 일신의 안위와 금전적 탐식(貪食)에,

제 욕망을 불태운 속물들의 전형으로,

까발겨진 것이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

어찌 나약하기 짝이 없는 영혼을,

저들의 거친 황야(荒野)에 초대할 수 있으랴?


저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기독교 교단, 그리고 세칭 원로 목사들은, 입을 봉하고,

절체절명 오늘의 사태를,

소 닭보듯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지 않은가?


저들은 이미 노쇠한 늙은이가 되고 만 것이다.

안락의자에 앉아, 

그저 앞뒤로 흔들리며,

햇살에 눈을 지그시 감으며,

팔뚝에 이는 감미로운 바람에,

일신의 안일을 즐겼을 뿐임이라. 


내 가까이에 있다면,

저들 목에 걸린 십자가 목걸이를 냅다 빼앗아 동댕이치고 말 것이다.

거짓 위선자들.

저들은 예수를 장터에 팔아 재끼는 도적들임이라.

가증스럽기 짝이 없다.


那試探人的進前來、對他說、你若是 神的兒子、可以吩咐這些石頭變成食物。

耶穌卻回答說、經上記著說、『人活著、不是單靠食物、乃是靠 神口裡所出的一切話。』

(太)


그런데 시험하는 자가 와서, 예수께 말하였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하였다."


예수가 악마에게 시험을 당하셨을 때,

사람은 빵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다.


헌데,

요즘 목사들은,


빵이 아니라,

잠자리채로,


말씀이 아니라,

돈으로,


제,

입의 양식으로,

몸의 옷으로,

삼더라.


이러하고서야,

어찌 저들을 두고,

예수의 제자라 할 것인가?


실로,

기독교는 저들 양아치 목사로 인하여 망하고 말았다.

게다가 어린 양이 아니라,

욕망으로 찌든 신자들로 인하여,

예수는 또 다시 십자가에 양 어깻죽지가 찢겨 발겨지고 있다.


오죽하면,

기독교가 아니고,

개독교라 부름에,

아무런 꺼림이 없어졌음인가?


기독교 신자가 아니지만,

예수를 사랑하는,

나는, 

오늘을 통곡한다.


ps)

오늘의 기독교 현실의 한 단면을 다음 사이트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에 소개한다.


☞ 뉴스앤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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