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응보와 대속

소요유 : 2011.12.30 22:38


응보(應報)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죄(罪)에 대한 벌(罰)로 보갚음 받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죄뿐이 아니고 은혜에 대한 보갚음도 응보라 이른다.
죄복응보(罪福應報)라, 응보란 죄와 복, 양방향으로 작용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원인에 결과가 따르데 그에 상응하는 갚음이 있다는 뜻이다.
현세에서 갚지 못하면 내세에서라도 갚게 된다고 저들은 이르고 있다.

이러함인데도 세인들이 응보라 하면 유독 죄업을 갚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은,
아마도 우리네 삶이라는 것이 선업을 짓기보단 악업을 짓길 쉬이 하고 있음이 아닐까 싶다.
그러면서도 악업엔 그에 상응하는 보갚음이 따라야 한다고 여기고 있음이라니,
참으로 중생의 삶이란 뒤죽박죽 고단하기 짝이 없다.

불설죄업응보교화지옥경(佛說罪業應報教化地獄經)이란 불경이 있다.
미처 2400자도 되지 않는 짧은 경전이다.
지옥, 아귀, 축생, 노비, 빈부, 귀천 등으로 나뉘는 연유에 대하여,
신상보살(信相菩薩)이 부처에게 여쭙자,
부처는 20가지로 나누어 일일이 설하신다.

그 중 3번째 죄업을 여기 소개해둔다.

「第三,復有眾生身體長大,
聾騃無足宛轉腹行,唯食泥土以自活命,為諸小蟲之所唼食,
常受此苦不可堪處。何罪所致?」 佛言:
「以前世時坐為人自用、不信好言善語,不孝父母、
反戾時君;
或為帝主大臣四鎮方伯州郡令長吏禁督護,恃其威勢侵奪民物,
無有道理使民苦悴吁嗟而行。故獲斯罪。」

“세 번째, 또 중생이 키가 큰데,
귀머거리가 되거나 발이 없이 배로 기어 다니며 흙을 먹고 살아가며,
작은 벌레가 새에게 쪼아 먹히는 등,
이리 항시 고통스러워 견딜 수 없는 지경으로 사는 까닭은 무슨 죄업입니까?”
부처가 말씀하신다.
“그것은 전생에 바르고 착한 말씀을 불신하고, 불효, 불충하고,
벼슬을 하면서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고 무도하게 백성들을 고통에 몰아넣는 짓을 하는 등,
이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니라.”

내가 마침 지옥경의 이 3번째 장면을 상기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최근 모 재벌 기업의 총수 동생이 구속되었다.
그런데 기실 총수가 대규모 선물투자에 실패를 하여 세간에 이 일이 알려졌다 한다.
개인 자금이 아니라 공금을 부당히 전용하여 일을 꾸몄다고 하는데,
설혹 동생이 자금 조달에 관여하였다한들,
그 중심에 총수가 관련되어 있다는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다.

공적자금이란,
예전으로 되돌린다면 이게 곧 백성의 재물이 아니던가?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인 것,
경영자 及 대주주라한들 공적 자산을 제 마음대로 사적 이익을 위해 편취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주주란 옛 시대의 백성에 빗댈 수 있다.
해서 나는 지옥경의 이 장면을 떠올려보는 것이다.

만약 요즈음 전하는 이 뉴스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이는 응보(應報)가 아니라 대속(代贖)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바로 떠올랐다.
형 대신 아우가 죄를 거두어 모두 짊어지는 것이니 말이다.

대속(代贖)이 무엇인가?
남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는 다는 뜻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그 보혈(寶血)로 인간의 죄를 대신 씻어 구원한 일을 가리킨다.
내가 도무지 이해가 아니 되는 것은,
아니 왜 예수가 인간의 죄를 대속하시는가 말이다.
마땅히 인간이 잘못하였으면 인간이 죗값을 스스로 치루어야지 말이다.
제물이 되는 양의 피로서 사람을 구한다는 ‘언약의 피’ 역시 마찬가지이다.
불쌍한 양이 왜 아무런 죄도 없이 죽어 인간의 제물이 되어야 하는가?
예수가 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인간 대신 죄를 씻으시는가?

이런 대속이 설혹 무지몽매한 인간을 위로할는지 모르지만,
외려 오만하고 나태한 인간을 양산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아는 기독교 신자 하나는,
제가 다니는 교회 신도들에겐 담배를 피우지 않는 양 위장하지만,
밖에선 몰래 잘도 담배를 핀다.
까짓 담배 피우는 것이야 뭐 큰 잘못도 아니다.
하지만,
자신은 절대 예수와 같은 삶을 살 수 없다며,
예수와 자신의 삶의 태도가 다른 것을 당연시한다.
남을 수단화하고, 교활하게 이용하는데 능숙한 그는,
내가 아는 한 단 한 번도 주일 예배에 불참한 적이 없다.

바로 이 지점에 ‘언약의 피’가 가진 안타까움이 있다.
예수는 인간을 위해 피를 흘리시는데,
신자들은 태연히 언약만 넙죽 받아먹고,
자신들의 죄는 씻기는커녕 더하여만 간다.
물론 저이들이 진정한 의미의 기독교신자인가 하는 의문이 있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예배당에 가서 연봇돈 바치고,
죄를 사하여주십사 열심히 기도를 하며 눈물을 흘리는 신자들이,
막상 평일엔 저잣거리에 나서 교활하게도 남을 등치고 간음을 일삼는다.
바로 이들이 예배당 크게 짓고, 목사 월급 주는데 일등 공신들 아닌가 말이다.
또한 저들을 찔러 충동하고, 부채 바람 부쳐 선동하는 데 교회가 앞장서진 않는가?

"하나님을 잘 믿어서, 카네기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는 그 (물질적) 소원을 다 내려주십니다."
"건축 헌금을 위해, 하늘의 것에 쏟아 붓는 자는 하늘이 모두 채워 주십니다."
(출처 : ☞ 뉴스엔조이)

이러할 땐,
역시 응보가 대속보단 백배는 바람직하다.

나는 꿈꾼다.

  동생의 대속 대신 형이 응보를 받는 세상.

  예수의 보혈을 피로회복 드링크제제(製劑)처럼 주일에 값싸게 사서,
  일주일 내내 일용할 양식으로 삼는 세상 대신,
  자신의 생혈(生血)로서 죗값을 치러가는 세상.

이런 응보의 세상이,
이 더렵혀진 진토(塵土)를 정화하는덴 일방적인 대속보단 조금이라도 나을 것이다.

만약 예수의 대속이 참되다면,
인간은 그 언약 앞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책임은 자신이 저지른 죗값을 자신이 짊어지는 것으로써만 구원의 증표가 된다.
대속은 면책을 절로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책임이란 부담’, ‘속죄란 행’으로써 예수의 대속을 영광으로 돌릴 수 있다.
그저 주일에 딱 한 번 예배당에 가서 통성기도하고, 연봇돈 바치는 것으로,
자신의 죄를 교회 앞마당에 버리고 대속을 구매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러할 때라야 대속은 참되고 성스로워진다.
그러하니 대속은 예수가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실인즉 인간의 책임으로써 거증되는 것이다.
이를 나는 응보(應報)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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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1.12.31 15:33 PERM. MOD/DEL REPLY

    이제 재벌이나 부자들도
    자신의 재산을 사회환원할 줄 알아야 살 수 있습니다.
    다 저놈 혼자 잘나서 떼돈 번 것으로 착각하는 오만한 무리들....
    사회환원할 줄 모르는 놈들은 언젠가 한번 씨끕할 날이 올겁니다.
    (군중들한테 몰매맞아 죽는 사태가 발생할 수도....)

  2. 사용자 bongta 2012.01.02 12:20 신고 PERM. MOD/DEL REPLY

    저는 부자가 재산을 환원하든 하지 않든 그것은 저들에게 맡겨두고 싶습니다.
    다만 재산 형성 과정에 공정한 게임의 룰이 적용되었는가?
    심판은 제대로 역할을 하였는가?
    하는 점을 점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러하지 않다면,
    사회적, 법적 강제력으로,
    사전에 분배 정의를 실현하고,
    사후엔 잘못을 회복할 수 있는 믿음직한 작동 체계가 마련될 수 있도록,
    주의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실 우리가 돈을 남보다 잘 벌면 양심 한 구석엔 무엇인가 불안감이 생기곤 합니다.
    이게 혹시 정당한 것이 아닌 것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제가 소싯적에 업무상 남한테 촌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길을 가다 보니 쓰레기 줍는 이의 리어카가 초라하니 길가에 홀로 놓여져 있더군요,
    순간 저 리어카의 주인의 하루벌이도 훨씬 넘는 돈을 순간 받아든 제가 송구스러워졌습니다.
    담배 한 보루를 사서 거기 리어카 안에도 넣어드리고 돌아섰지요.
    이게 어줍지 않은 속죄의식인지, 값싼 동정심인지 모르지만,
    제가 놓여 있는 위치에 따라 상응하는 수고를 벗어난 대가가 수수되는 강고한 사회 구조.
    저는 이런 불공평한 구조를 바르게 인식하는 감수성, 바로 잡는 정치력 따위가 반성적으로
    작동하길 기대하는 것입니다.

    혹간 내가 능력이 뛰어나서 돈을 잘 벌 순 있지만,
    대개는 사회경제 제도의 왜곡이라든가, 불평등한 사회 구조,
    때로는 개인의 위계, 사술 따위로 인해 그리 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오죽하면 성경이,
    부자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고 이르겠습니까?

    이 땅에 살아가면서,
    장삼이사 가리지 않고 기를 쓰고 대학을 가려고 하는 것은,
    그리고 비정규직이 아니고 정규직이 되려고 하는 것은,
    기실 거기엔 수고에 따른 대가 수수관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지요.
    수고한만큼 대가가 지불되어야 하지만,
    다만 그가 처한 처지, 지위, 직분 따위의 조건, 기득권에 따라,
    불공평하게, 불공정하게 자원이 분배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정권만 하여도 외려 부자에게 감세해주며,
    엉터리 적하이론이나 되뇌이고 있는 실정입니다.

    천하가 도둑 아니면 도적질 당한 이로 양분 된 세상,
    피해자 아니면 가해자로 나뉘는 세상.
    이게 작금의 어지로운 세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자가 스스로 자각하여 사회환원, 봉사에 힘쓴다면 말릴 일은 아니겠습니다만,
    그러하지 않는다고 내놓으라고 말하는 것도 저로선 썩 유쾌하진 않습니다.
    모든 부자가 정당한 부를 일구지 않았다고 단정할 이유도 없을뿐더러,
    그를 나무랄 정도로 제가 도덕적으로 순결치도 못하니까요.

    그런데,
    은유시인님처럼 재물의 사회환원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진작부터 있습니다.
    그것은 부처와 그를 따르는 승가 일단입니다.
    육바라밀 중의 하나인 ‘보시(布施)’를 주창하는 그들의 문법은,
    은근하고도 교묘하지요.
    보시하면 지혜에 이르고, 종국엔 열반구경 해탈에 이른다고 외칩니다.

    예배당에 가면,

    "하나님을 잘 믿어서, 카네기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믿는 자는 그 (물질적) 소원을 다 내려주십니다."
    "건축 헌금을 위해, 하늘의 것에 쏟아 붓는 자는 하늘이 모두 채워 주십니다."

    여기 이 동네에선,
    이리 보다 직설적으로,
    성금임을 빙자하여,
    겁박하기까지 하는 현실에 우리는 직면해 있습니다.

    이쯤 되면 종교 집단이 얼마나 영악하니 야무지고 옹골찹니까?
    합법적으로, 아니 신을 팔아 초법적으로 우중(愚衆)의 주머니를 훑어갑니다.
    그런데 한편 보자하면,
    기실 우중은 강탈당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천국행을 위해 보험을 드는 것이며,
    제 안전과 물질적 풍요를 위해 티켓을 구매하는 것이지요.
    어리석은게 아니라 도리어 아주 영악하다고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언필칭 진정한 보시는 무상보시를 으뜸으로 치는 것입니다.
    아무런 보상을 기대하지 않는 보시 말입니다.
    그러하다면,
    굳이 남에게 보시하라고 우격다짐할 이유는 없지요.
    몰래하는 보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참되게 복될 것인즉,
    나와서 하라며 복을 지우며 권청할 노릇은 아니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는,

    "건축 헌금을 위해, 하늘의 것에 쏟아 붓는 자는 하늘이 모두 채워 주십니다."

    이 따위 야바위꾼을 방불하는 말을,
    하늘을 빙자하며,
    내깔겨대고 있는,
    저들을 용서하기 힘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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