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바이어스(bias)

소요유/묵은 글 : 2008.02.20 11:14


바이어스(bias)란 말은 제법 여러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옷의 가장자리에 다른 헝겊으로 덧댄 것을 이르기도 하며, 선입관, 편견, 편의(偏倚)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 어떤 글을 읽다가 언뜻 이 말이 떠올랐습니다. bias가 걸린 그런 글들은 조금만 주의를 기우리면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이리 bias가 걸렸다고 표현한 그 bias에 대하여는 평소 제 나름대로 갖고 있는 뜻풀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를 잠깐 소개드리고자 합니다.

전자회로 하나를 먼저 꺼내들었습니다. 느닷없을까요 ?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그리 무리한 시도는 아니란 생각에 용기를 내어봅니다. 관련분야에선 아주 기초적인 이론입니다만, 그렇지 않은 분들에겐 반대로 아주 생소한 것일 텐데,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재미있게 느끼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해서, 우선 제시한 그림을 따라 설명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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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1은 트랜지스터와 그를 중심으로 한 간단한 회로도입니다. 동그란 부분이 트랜지스터(transistor)고, 꼬불꼬불한 것이 저항(register)입니다. 지금 우리는 그림에서 보이는 입력(input)을 통해 무엇인가 신호를 인가하고, 출력(output)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자 합니다. 가령 레코드판에서 음원을 입력으로 하여 스피커를 통해 크게 키워 소리를 듣고자 하는 경우라 가정해보도록 하지요. 확보한 음원신호는 전기적으로 대단히 약한 전압 또는 전류 레벨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스피커를 통해 우리 귀로 듣기 위해서는 충분히 키워내야 합니다. 이 키워내는 작업을 우리는 증폭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기기를 증폭기(amplifier)라 부릅니다. 흔히 앰프라고도 합니다. 그림 1은 그 증폭기의 가장 기초적이며 전형적인 전자회로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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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는 트랜지스터의 characteristic curves라 부르는 것으로 재미있는 그림입니다. 그림 1에 보면 파란 글씨로 base, emitter, collector라고 적어넣은 것이 있습니다. 이를 참조 하시며 이어지는 설명을 따라 오시면 됩니다. 그림 2에서 나타내고 있는 것은 이렇습니다. base 전류가 10㎂에서 70㎂에서 변할 때, collector 전류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것을 그래프로 표시한 것입니다. Y축을 보면 단위가 ㎃로 되어 있습니다. ㎃는 ㎂에 비해 1000배 더 큰 단위입니다.

이로서 벌써 짐작하실 수 있듯이, 보통 base 전류에 비해 collector 전류는 수배에서 수백배 정도 큽니다. 그러하니 base에 미약한 전류를 통하면 collecor를 통해 전류를 크게 증폭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예전엔 덩치 큰 진공관으로 하였습니다만, 트랜지스터가 발명되고서부터는 대부분 대치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진공관은 아주 풍부하고 매력적인 재현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음악매니어들은 아직도 진공관 앰프를 사랑하고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인가 신호는 아주 미약하기 때문에 그냥 base에 흘리면 트랜지스터가 아예 동작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트랜지스터가 동작을 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그림 2에서 active region이라고 쓰여져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 트랜지스터의 동작상태가 놓여질 수 있도록 주변 회로를 구성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동작환경조건을 만들어 주는 일을 우리는 “biasing”한다고 말합니다. 바로 이 부분을 말씀드리기 위하여 이리 주절주절 번거로운 짓거리를 늘어놓았습니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기왕에 벌린 노릇이니 조금 더 부연하고 서둘러 이 부분을 마무리 짓고자 합니다.

전자기기(electronic device)가 어떤 소망하는 상태에서 동작하게 하기 위해서 조성되는 환경, 이는 곧 보통 전류 또는 전압이 되겠습니다만, 이를 bias point라고 합니다. 이외에도 Q-point, operating point, quiescent point 등등으로 부릅니다만 우리는 현재 bias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집중하여야 하기 때문에 여러 사정을 질러 지나가야 합니다. 그림 1은 이 bias point를 만들기 위한 회로입니다. 이를 biasing circuit라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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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2에서 동작영역에 해당하는 active region외에 saturation, breakdown 등의 영역은 보통의 경우에 피하도록 회로설계를 하여야 합니다. 그림 3을 보시면 input 신호가 이 동작영역에서 output 신호로 증폭되어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림 상으로는 input, output 크기가 비슷해보입니다만, 앞에서 지적하였듯이 양자의 단위가 ㎂와 ㎃로 상이하므로 실제는 output이 수십배~수백배 큽니다.

그럼, biasing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제시한 회로에서는 적당한 크기의 저항을 적절한 위치에 놓이도록 설계하므로서 달성합니다만, 여기서의 중요한 설계 착안 요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차후 그 동작 포인트가 변동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온도 변화에 따라 동작 포인트가 변동한다면 기기의 안정성이 떨어질 것입니다. 또한 트랜지스터가 고장나 교체 수리를 하였을 경우 동작 포인트가 변한다면 이 또한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도, 소자 변동에 민감하지 않도록 안정적인 회로 설계를 하여야 하는 것이지요.

마치 지렛대를 마련할 때, 지렛점을 제대로 확실히 거치해두어야 조그만 힘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biasing circuit란 base를 통해 들어간 조그만 신호를 collector에서 큰 신호로 증폭시키는 지렛대와 같은 것입니다.

***

앞에서 조금 전문적인 얘기를 꺼집어내어 가급적 빨리 이리로 넘어오고 싶었습니다. bias란 주제어를 정식으로 무대에 등장시키기 위하여 트랜지스터의 예를 앞세워 길닦음을 한 것입니다. 여성분들은 아실 것입니다만 bias를 가사시간에 배우실 것입니다. 헝겊 가장자리에 띠로 된 조각 천을 둘러 박습니다. 이는 헝겊의 형태를 고정시키고, 쉬이 헤지는 것도 방지할 수 있는 덕이 있습니다. 직각 부분이나 둥그런 부분에 바이어스 단을 달 때는 특히 어렵습니다.

증폭회로에서도 고주파, 고전력 증폭에선 설계가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느질에서의 bias든, 전자회로에서 고안하는 biasing도 따지고 보면 기능상 그다지 다르지 않습니다. 즉 어떠한 소망하는 상태(desired fashion)를 유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고안(design)을 하게 되는데, 두 경우 모두 상태, 즉 fashion을 적정 범위, 형태내에서 고정화하기를 기약하고 있는 것입니다.

***

우리가 흔히 저 친구는 xx 바이어스가 걸려 그 따위 말을 함부로 지껄인다라고 비난을 하는 등, bias란 말은 일상에서는 선입견, 편견 등의 뜻과 함께 주로 부정적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bias란 말은 제가 위에서 설명드린 바를 기초로 무색투명하게 해석, 수용한다면 반드시 부정적으로만 사용할 까닭은 없을 것입니다.

bias를 왜 거는가 ? 또는 피동적으로 말해서 왜 bias에 걸리는 것일까 ?
전자의 표현은 주체적으로 bias를 사물에 거는 상태를 묻고 있습니다. 건다는 것은 곧 biasing device(機器)를 고안하여 사물을 인식하거나 평가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biasing device라는 말은 앞에서 든 예에 입각하여 지칭한 것입니다만, 제대로 하자면 biasing circuit로 고안된 device인즉 실인즉 앞 선 예에서는 amplifier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야기 주제인 biasing에 주목하여 biasing device라 칭하여, 굳이 증폭기로 제한하지 않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공학이 아닌 분야에서 흔히 쓰는 reference frame, paradigm 등과 비교되어 재미있군요. 아 참 reference frame은 원래는 물리학 용어입니다. 하여간 전자는 이런 biasing을 의식적으로 자신이 직접 고안하여 사물에 가합니다. 하지만 후자는 남이 만들어 놓은 biasing에 알게 모르게 거미줄에 걸리듯 걸려 파드득 거립니다.

biasing을 능동적으로 가하거나 또는 피동적으로 걸리는 이유는 몇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이 세상 모든 것은 기호다.
이 세상 모든 것이 기호라는 명제가 옳다면, 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호해석 장치가 필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은 순결한 제 호흡만으로 자동기술되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이 출현함과 동시에 이 세상의 모든 기호는 의미망을 통해 걸러(filtering) 해석되므로서만 존재하게 됩니다. 또는 존재의 의의를 갖게 됩니다.

2. 무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무엇인가 만들어 의미를 구축하고, 해석하며, 그 안에서 제 안위를 돌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은 대단히 불안하고 위험한 곳입니다. 하지만 해석을 하는 이상, 그 해석이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 안에서 잠시 비바람을 피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의미가 나를 떠나거나(배척) 다시 다른 것으로 바뀌기전까지는 그 의미망이란 움집에서 추위를 면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호, 의미가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데 인간의 비극적 숙명이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시적 현상에 머무르고자 의욕합니다. 이를 무지, 무명이라고 저는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3. 실용성
biasing device가 한번 마련되면, 유사한 사물에 임하여 즉각 이를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러하니 사물의 이치를 해석하는데 상당히 편리하며 노력과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유사한 것이라도 같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이러한 省力은 자칫 일을 그리치게 되어, 나중에 곱으로 대가를 치르게 되기도 합니다.

***

기독교는 biasing을 오직 하나 겁니다. 하지만 그것은 크고도 커서 온 세상을 다 포섭합니다. 반면 불교는 biasing을 걸지 말라고 이릅니다. biasing을 거는 한 그것에 구속되는 즉, 모든 biasing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칩니다. 모든 biasing으로부터 자유로와질 때 萬法歸一, 즉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萬法歸一 다음에 一歸何處를 묻고자 한다면, 그는 아직 途上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들의 이런 상반된 태도로 인해 그들의 행동은 양극을 달립니다. 기독교는 기도할 때, “.....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하며 이름에 의지합니다. 그들은 유일한 구원 bias를 재촉하며 부릅니다. 이를 그들은 메시아라고도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bias를 지극히 꺼리기 때문에 교설의 주체인 부처란 bias조차도 죽이기를 주문합니다. 이게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의 문제를 바로 일으키고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논의 기술상 더 이상 진행시키지는 않고 예서 끊습니다.

***

biasing의 두가지 중요한 요소

입력 신호와 바이어스 고안장치(biasing device)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입력 신호없이 장치가 스스로 출력을 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에서 든 앰프의 경우 레코드판을 걸어놓지도 않았는데, 파워를 넣자마자 삑하는 잡음이 들릴 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의미 있는 신호도 없이 자가발전하며 목울대를 거세게 떨며 소란을 떠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경우를 보면 무정란같은 작자라고 말하곤 합니다. 이런 경우엔 신호도 장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성능 좋은 스피커만 있으면 됩니다. “대가리도 필요없이 다만 아구창만 필요합니다.”

생명도 biasing device의 일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료란 신호를 닭이란 device에 투여하면 달걀과 닭이 증폭되어 생산됩니다. 돼지란 device 역시 사료를 먹고 삼겹살이란 증폭물을 출력해냅니다. 요즘은 효율을 지상최대의 목표로 하기 때문에 이들에겐 못 쓰게 된 제 살을 되먹이는 등의 circuit design을 통해 조류독감, 구제역, 광우병 등에 걸린 output를 내놓는데 인색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이 갖는(또는 놓여진) 동물관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대단히 기능적이지만, 동물들에겐 더 없는 불행입니다.

사람도 생명입니다. 사람에겐 그 신호가 무엇일까요 ?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곧 빛이 이 세상에 전파처럼 날라왔다고 말합니다. 그 빛으로서 구원을 받아 온전한 사람이 됩니다. 불교에선 무명이란 때가 덕지덕지 말라 비틀어져 덮여 있습니다. 하니 그를 벗겨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증폭할 신호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당연 device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종교적 태도를 떠나, 제가 제안하는 인간이란 생명에 대한 생각은 이렇습니다. “인간은 겸손이란 신호를 입력 받아, 사랑의 증폭기를 통해 온 만물을 사랑하는, 아니 하여야 하는 device들이다.”

지금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자들은 돈이란 신호를 먹이로 하여 생존을 확보하자고 외쳐댑니다. 그리고 이런 소리들이 얼추 먹혀들어가고 있습니다. 인간을 경제 device로 전락시키고 있는 그 현장에서 love amplifier로서의 사람은 그림자 자취도 보이지 않습니다.

biasing device가 가짜인 경우 또는 확인불능인 경우는 주변에 널리 분포합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저는 占치는 것을 듭니다. 미아리 점집에 아낙네가 듭니다. 복자(卜者)는 슬쩍 곁눈질로 행색을 훑습니다. 어두운 미간, 기미낀 얼굴이 이미 3할은 사연을 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슬쩍 곡지통을 건드리면 제풀로 하소연이 울음 섞여 토해집니다. 복자는 다만 사태를 적절히 수습하며, 누를 것은 누르고 펼곳은 펴며 그럴 듯이 어르고, 누지르며, 반지르 엮어내기만 하면 됩니다.
 
이 때 동원되는 device는 속이 텅 비었습니다. 다만 거기 최영장군의 혼이 들어 있거나, 잘린 아기 손가락 명두(明斗)가 계실 뿐입니다. 하니 복화술무(腹話術巫)는 책임이 없습니다. 영험스런 복화(腹話) 또는 공창(空唱)은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곧 神의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양식적인 언술구조를 가지는 biasing device는 대단히 혼란스런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누구도 명두를 본 적은 없습니다만, 복화술무가 내지르는 휘파람 소리에 묻어 공중에서 들리어오는 명두 소리는 사람들을 신묘한 세계로 안내합니다. 그 자리, 제 몸통 device box가 동조되어 공명하는 자가 있는 반면, 허무맹랑한 미신이라고 치부하는 사람들로 나뉘어질 터인데, 저로서는 제 눈에 안경이라고 할 뿐, 평하는 바, 수고를 굳이 지불하고 싶지 않군요.

무인(巫人)이 제시하는 device가 가짜인지 진짜인지 저로서는 확인불능입니다. 하지만, 당골무도 아닌 평상인이 아무런 논거도 없이 확신에 찬 소리를 지를 때는 정말 황당합니다.

최근에 목격한 사례들을 들어보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기회가 주어져서 모두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취지였을 뿐, 일부 매체에서 암시하는 특정 직종을 언급한 것이 아니다.”
- 이명박의 팬텀機(phantom device)는 구름을 가르며 허공을 날아갑니다. 飛行雲은 이내 “얼굴이 덜 예쁜 여자”로 화합니다. 참 재주도 좋군요.

“누구는 사주팔자가 어떠하여 이번에 대선에 승리한다.”
- 장안의 갖은 술사들이 3년 공방살 낀 과부댁 속곳 털 제, 서캐 쏟아지듯 우수수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다산 정약용은 18년인가요 근 20여년 동안 유배중에 수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그 중 주역에 대해서도 깊은 해석을 해낼 정도로 밝았습니다만, 邪學으로서 이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즉 점을 친 적이 없다는 말씀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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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를 보면 input 일부가 잘리고 반만 증폭되어 출력됩니다. 제시된 그림은 B급 증폭기라 하여 의도적으로 반만 걸리도록 동작점을 옮겨 맞춘 것입니다. 나머지 반은 극성을 반대로 한 다른 device로 걸러내어 짝을 맞춰 둘을 합쳐냅니다. 이 예의 경우에는 정교하게 고안된 설계 목표가 있습니다만, 우리네 일상에선 기히 준비된 device의 동작점에 제대로 신호를 맞춰 인가하지 못하고 어긋나게 입력시키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뱁새가 황새를 따라하다 가랑이가 찢어진다.”와 같은 예와 유사합니다.

권위에 빌붙어 제 분수도 모르고 우쭐대며 대드는 꼬락서니들의 행진을 보면 뱁새와 함께 동작점 어긋난 TR이 줄지어 생각납니다. 제 것이 아닌즉 겨냥이 틀릴 수밖에 없지요. 남의 옥그릇은 제 질그릇보다 못하니, 함부로 제 것 아닌 것을 넘볼 일이 아닌 겝니다.

앞에서 device를 설계할 때, 온도 변화에 민감하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주위에서 이를 고려하지 못하는 예를 또한 보게 됩니다. 즉 이미 마련된 device를 천편일률적으로 어떠한 경우에도 그대로 차용하여 대입하는 경우입니다. 사정이 다른 형편인데도 자기가 가진 고정된 reference frame에 비추어 사물을 재단하는 것이지요.

예컨대 빠돌이의 행동이 보통 이렇습니다. 빠돌이의 경배 대상이 어떠한 엉뚱한 짓을 하여도 심오한 뜻이 있을 것이라며 눙치며 받드는 것이지요. 온도보상회로도 장착되지 않았으면서 바뀐 조건환경하에서 기히 마련된 device가 지고지선으로 바른 것이라고 휘갑칠을 해댑니다. 빠돌 집단내에서는 마스터베이션의 황홀감을 서로 교환할 수는 있을런지는 몰라도, 그로서 외부의 멀쩡한 사람들을 유혹할 수는 없습니다.

賣道漢 - 도를 파는 사람들
매도한들 역시 이와 유사합니다. 양식화된 틀 속에 약간의 변형된 소재를 넣고 동작시키면 매번 유사한 구조물들이 양산되곤 합니다. 그릇에 담긴 깨끗한 물도 오래 머무르면 썩습니다. 때문에 틀이란 고정된 시간 속에서 영원의 안식을 기약할 그릇이 되지 못합니다. 이 얘기는 곧 우리는 시간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것은 공간 제약적일 뿐만 아니라, 시간 구속적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기히 마련된 device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심하는 순간 우리는 성실하게 다음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는 자격을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device는 현재에서 미래로 건너는 뗏목에 불과합니다. 지금을 건너는 순간 이제 타고 있던 뗏목에 대해 품고  있던 연정은 거두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빠돌이는 영원무궁토록 뗏목에 대한 미련을 거두지 못합니다. 썩어 악취가 나도 그지없이 순정을 바칩니다. 아 그 열광인들 휴거를 바라는 종말론자의 간절한 희구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 하지만, 종말도 휴거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모두 途上에 있는 길손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 저믄녘 지친 몸을 뉘이고 허갈진 배를 채울 주막만이 오늘을 길마중합니다. 길 위에 선 자신을 내일 다시 목격하는 것은 내일의 몫입니다.

때문에 성실한 사람은 다만 현재만을 사랑합니다. 내일 내가 누구를 사랑하게 될런지 자신도 모릅니다. 영원을 시간축에서 축차적으로 유보하는 태도야말로 지금 현재에 성실하지 않을 수 없는 사연의 바탕이 됩니다. 그러하니 지금만을 순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실인즉 영원을 순결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bias는 하나도 갖지 않는 것이 저의 소망입니다만,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기에 원만구족하니 둥구런히 떠오르신 달님을 보고 가지런히 마음을 모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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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kkk님/

외롭습니다.
주위에 사람이 있고 없어서가 아니라, 늘 외롭습니다.
수절 과부 허벅지 속처럼 뼈가 시리도록 아픕니다.
특히 만월이 뜨면 늑대처럼 바위에 올라 달 보고 꺼이꺼이 울기도 합니다.

하지만 고독외에 또 무엇을 구할 바가 있단 말인지요.
이외에 아직도 사랑할 것이 남아 있는 한,
외롭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bongta :

ooo님/

大圓鏡智
ooo님이야 큰 거울 닦아, 두루 비추어 이치를 밝히시려 하니,
저의 얕은 공부 자락에 큰 바람을 일으켜서 맞춤 깨우침을 주시곤 합니다.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마지막 말씀이 인상 깊습니다.
“우리의 삶을 휩싸고 있는 신비는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아닌가....”

도가에서 신선술을 배워 경지에 오른 도인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바로 인간의 탈을 바로 벗어 버리고 羽化登仙해버립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하나는 이 진진한 인간 세상의 즐거움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고
신선이 되는 것을 유보하고 수명만 800세, 1000세 연장하면서 인간세상에 머무릅니다.

불교에서는 지장이니 유마는 중생이 고해에서 허덕이는 한,
부처가 될 수 없다는 대자대비 서원을 세웁니다만,
이에 비해서 도가는 사뭇 자귀로 나무 옹이 쳐내듯 行脚이 간출하군요.

이렇듯 유보의 철학이 깃든 대승불교이기에
관음조차 二手二眼으로 부족해 千手千眼으로 그려냅니다.
이럴 때는 차라리 禿頭獨眼 소승이 담백해보이기도 합니다.

“지리한 천국”, “즐거운 지옥”
이민을 간 사람이 그곳과 한국을 비교하는 말이지요.
확실히 한국은 “즐거운 지옥”이란 측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다만 돈이 많아야 “지옥”을 즐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한국은 “지리한 지옥”일 것입니다.

거기는 돈이 있으면 “즐거운 천국”이라도 된답니까 ?

한국은 지금 나만은 “지리한 지옥”의 당사자가 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찬
신념의 전사들이 콩나물 시루에 들어찬 나물대가리처럼 아우성들입니다.
하여 나만은 “즐거운 지옥”의 주인공이 되리란 희망과 기대 속에 모두 들떠있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이하여 한 사람에게 50-60%의 열망을 퍼부어댈 수 있겠는지요 ?
銅臭에 취한 것일까요 ?
그가 땅도 많고, 돈도 많으니 아닌게 아니라 그럴 상 싶습니다.
로또 사놓고 달뜬 사람들도 아마 이런 심정이 아닐런가요 ?

저는 이게 저들만의 책임이 결코 아니라,
현 정권, 과오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구원해줄 수 있는 타인은 없습니다.
특히나 정치인에게 그런 전망을 구하는 것은 緣木求魚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業에 충실할 뿐,
그들의 작업에 내가 자진하여 동원될 까닭이 없다는 생각입니다.
저는 그래서 부끄럽습니다만, 영영 정치적 허무론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그 과업을 쟁취했을 때,
과실을 저 열망의 당사자들에게 고루게 전할까요 ?
저는 그들만이 아니라, 저 자리를 노린 그 어떤 자라도 그리 하리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業에 바쁠 뿐,
나는 내 業을 닦을 뿐.
이 비정치적 태도가 저의 정치적 결단의 내용입니다.

여름 내내 행락객 때문에 산을 혼자 대하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처서 지나 모가지 비뚤어진 모기인 양
그들 각다귀같은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더군요.
그들은 산을 거의 유린하려고 찾아오는가도 싶습니다.
아랫 동네에서도 다하지 못하여 예서까지 온갖 허물을 분주히 흘려냅니다.

하여, 쉬이 곧, 조촐하니 夜行을 하려고 합니다.
거기 달 보며 ooo 내외분께 조각 안부를 띄워보내겠습니다.


bongta :

ccc님/

이 좁은 국토,
게다가 서울권역에 인구의 태반이 삽니다.

서울에 있는 산은 그래서 축복입니다.
마지막 남은 공간.
숨막히는 저 아랫동네에서
죄 짓고 숨어들 수 있는
유일한 공간,
곧 소도(蘇塗)입니다.

게에 들면,
은원(恩怨)도, 애증도
좁다란 숲길 따라
청사(靑蛇)처럼 이내 사라집니다.

산이 도시에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은
그래서 위대한 축복입니다.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허여(許與)된
은총의 손길이며,
자비의 숨결입니다.

내가 죄인이기에
산은 내게 곧 신령님입니다.

풀꽃, 나뭇잎은
바람에 반짝거리는 요정입니다.
그들 옷깃에 달린 짤랑거리는
방울 소리는 이내 빛으로 튕겨
녹색 향연을 베풉니다.

그런즉, 축복이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산에 든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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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떨이 2010.10.29 15:34 PERM. MOD/DEL REPLY

    이 글은 여기 방장님이 쓰신 건가요? 음..

    제 생각에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바이어스는 '신념' 같은 데요.

    그리고 신념이란 바이어스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고

    자기 상황에 맞는 신념만 갖는 다면 좋다라고 해석 되겠죠.

    방장님은 무슨 바이어스를 걸고 사십니까?

    bongta 2010.10.29 20:59 신고 PERM MOD/DEL

    신념이라 이르셨습니까?
    http://bongta.com/157
    이 글을 떠올리게 되는군요.
    대신근(大信根), 대의단(大疑團), 대분지(大憤志) ...

    저의 bias를 물으셨음입니까?
    진즉 여의어야 했음이나,
    죄많은 중생이라 ...
    저는 분노와 슬픔이라고 말씀드립니다.
    http://bongta.com/331#comment3490942
    http://bongta.com/273

  2. 머떨이 2010.10.30 09:01 PERM. MOD/DEL REPLY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신념이 있어야 이 어려운 세상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섣부르게 신념을 정하고 좁은 시야로 사는 사람도 있겠지만
    저마다 중히 여기는 신념이야 말로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요.

    음. 저는 종종 방장님처럼 글을 쓰는 분들에게 관심을 갖는데
    그 첫째 이유는 과연 직업이 무엇인가가 궁금해서구요.
    둘째 이유는 그런 철학적 마인드로 직업 또는 회사를 운영한다고 할 때(또는 프리랜서)
    그런 철학적 마인드가 현실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좀 이질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텐데
    어떻게 그런 것을 극복하는지 궁금하네요.

  3. bongta 2010.10.30 21:39 신고 PERM. MOD/DEL REPLY

    대학 일학년 때 철학 개론시간에 철학을 애지(愛知)의 학문이라는 것을 배웁니다.
    이게 소크라테스든 플라톤에 의해서든 누구에 의해서 유래된 것이든,
    저는 철학(哲學)을 이리 바라보길 즐깁니다.
    철학이 필경은 일본 사람들에 의해 번역된 것일 터이지만,
    哲이 밝을 철자 아닙니까?
    밝히 보는 것 그런 학문을 저는 철학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묘한 것은,
    밝히 보는 것 이는 곧 명(明)에 통하고 ‘明作哲’, ‘哲知也’, ‘知之曰明哲’
    따위의 문장들은 옛글에 즐비하게 등장합니다.
    그러하니 동서를 불문 知 또는 智는 곧 明, 哲에 바로 맞닿아 있습니다.

    그러함이라면 어째서 철학이라는 것이 현실과는 괴리된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분이
    머떨이님이 아니더라도 적지 아니 나타나는 것일까요?
    아마도 짐작하건대,
    그들은 현실에선 밝아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밝을 수 없다면 당연 앎도 왜곡되고 말테지요.
    적당히 구부러진 현실에 타협하고,
    利를 위해 양심을 저버리고,
    제 욕망에 부역하고 ...

    이 시대에 이의 실증적인 증거로,
    저는 ‘사대강 죽이기 사업’을 듭니다.
    맑은 간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어 바위 위에 널어놓고,
    햇빛 앞에 서면,
    이는 욕망의 변용에 다름 아님을 그 누구라도 알 수 있습니다.
    사뭇 부끄러운 일이지요.

    만약 철학함이 이질적인 것이라며,
    현실은 아연 더렵혀진 것일 터이고,
    이런 현실에 기꺼이 야합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런 사람들끼리는 동질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소속감은 기실 일시적이나마 안도감을 줄 수는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도 일주일에 한 번씩 꼬박 예배당에는 나갑니다.
    거기 십자가에 못 박힌 이질적인 예수를 보며 그들은 잠시 이질적인 인간들이 됩니다.
    연봇돈을 받치며 한껏 애지자(愛知者)씩이나 됩니다.
    철학 또는 신학을 돈으로 구매하는 것이지요.
    이보다 더 편리한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말씀대로 철학하고는 아주 먼 아주 현실적인 것이지요.
    철학은 바로 행으로 입증되지 않으면 거짓이지요.
    그리고는 나머지 요일엔,
    다시 언필칭 현실적인 그리고 깃털 부비며 동질적인 인간이 됩니다.
    이쯤이면 예배당은 그저 장터와 다름없지요.
    돈과 시간만 소비하면 애지자란 신분을 자유롭게 교환, 소비할 수 있습니다.

    듣건대,
    거기 목사는 신도들을 성폭행하였다고 하더군요.
    그 목사는 이리 말하였다고 합니다.

    “나는 삼대가 모태신앙이라,
    아무리 죄를 지어도 끄떡없다.”

    제가 만약 거기 신자라면,
    저 목사를 당장에 신전 앞에 패대기를 쳐버렸을 것입니다.
    예수 역시 성전정화 사건에서 환전상들을 휩쓸어버리지 않습니까?

    어느 신자가 있어,
    그런 목사가 있는 교회 신축성금으로 몇 푼을 투척하고는,
    거룩한 성도가 되어 뭇 신자들 앞에 나아가 박수 세례를 받고는.
    한껏 우쭐거리곤 합니다.

    저와 그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저는 예배당에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그는 예배당에 빠짐없이 나간다는 것이지요.

    또한 저는 일 년 내내 서투나마 철학하고자 하는 것이고,
    그는 요령 있게 한 주일에 한번 럭셔리하게(그들의 문법을 빌리건대),
    철학(신학)하는 흉내를 돈을 주고 구매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뱀들이 가을 지나 겨울에 동질(同質) 동혈(同穴)에 모여 한 철을 나지요.
    하지만 용들이 한 구덩이에 모여 제 삶을 도모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군요.

  4. 머떨이 2010.10.31 21:30 PERM. MOD/DEL REPLY

    직업에 대한 얘기는 없네요;;;
    무슨 일을 하시는지 여쭌건데.

  5. bongta 2010.11.01 00:12 신고 PERM. MOD/DEL REPLY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호기심 역시 다른 사람에 대해 무엇인가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의 편향일 터이니,
    이 역시 bias가 걸린 모습일 것입니다.

    스님네들이 속세를 떠나 출가한 사연이 좀 많겠습니까?
    그들 간에 불문율 같은 것이 있으니,
    다른 스님들의 속세의 일을 묻지 않는 것이지요.
    헌데 실인즉 묻지 않는 규칙이 있어서가 아니라,
    물을 이유가 없기에 묻지 않을 뿐입니다.

    그대의 크리스털 잔은 그대를 위해.
    내가 가진 것은 질그릇.
    나는 내 질그릇으로 술과 국을 먹을 뿐인 것을,
    그대의 유리잔은 내겐 아무 소용이 없음이니.

    조고각하(照顧脚下).
    ‘여기 지금(here & now)’을 집중하여 비추어 볼 뿐인 것을.
    제 다리 놔두고 남의 다리 아래를 볼 까닭이 없지요.

  6. 머떨이 2010.11.01 19:49 PERM. MOD/DEL REPLY

    음.
    남의 속 사정까지 자세히 아는 것은 봉타님 말씀처럼 큰 의미도 없고,
    또 예의 바른 모습은 아니겠죠.
    허나 제가 직업을 물은 이유는 이런 것입니다.
    대체로 이런 철학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치고
    현실 세계에서 역량있게 사는 사람을 별로 못 봐서요.

    행동 보다는 생각에 바이어스가 더 걸려있으니
    현실 세계에 영향을 줄 수 있을까란 잡생각이 들어서요.
    물론 저같은 부류는 아니시겠지만요.

  7. 머떨이 2010.11.01 19:51 PERM. MOD/DEL REPLY

    직업을 자꾸 묻는 것도 고집이요.
    단순히 전 이런 쪽 일을 합니다라고 말하면 될 일을
    말씀 안하시는 것도 마찬가지로 고집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봉타님의 마음 평화를 깰려고 글을 쓴 것은 아니니
    그만 사라지겠습니다.

  8. 머떨이 2010.11.04 13:26 PERM. MOD/DEL REPLY

    제가 봉타님 사이트에 무례하게 글을 쓴 것 같습니다.
    죄송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고. 좋은 하루 되세요.

  9. bongta 2010.11.06 19:32 신고 PERM. MOD/DEL REPLY

    ‘바람처럼 살고 싶다.’

    어느 한 사람이 바람처럼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졌다.
    오라고 부르지도 않았으나 이리 왔음이며,
    가라고 내치지 않았으나 절로 사라졌으니 가히 바람과 같다.

    그러나 얼핏 바람과 같되,
    이것을 바람이라 부르기엔,
    바람을 모욕하는 양 싶어 적당한 다른 비유를 찾고 싶다.
    바람은 그리 상(常)스럽기는커녕 성(聖)스러운 것이 아니더냐?
    그래 차라리 미주알에 똥 달고 숭어뜀을 하는 격이라고나 할까?
    아직 대가리에 탯물도 미처 씻기지 않은 몰골로,
    휑하니 신작로를 달려가고 있는 모습이라니,
    나는 순간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뼈만 남은 돈키호테를 연상한다.

    물음이 있다.
    천하에 이 물음에 답해야 할 것도 있지만,
    이 물음에 답할 가치 없는 물음도 있음이다.
    나는 진작 이런 문제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본 적이 있다.
    http://bongta.com/357

    제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고 감정이 상할 수 있다.
    허나, 그가 어린 아이가 아니라면,
    그 다음을 예비하여야 했다.
    그게 채비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어른이라도 어른이 아니다.

    뜬금없이 초면에 남의 직업을 왜 묻는가?
    게다가 나는 직업을 숨긴 것도 없음이니,
    블로그를 보면 얼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을 터.
    그런데 이게 도대체 무슨 정보가 되나?
    항차 직업이란 것이 고정된 것도 아니오,
    어제의 직업이 오늘과 같으란 법도 없지 않은가?

    사람을 직업, 인종, 고향 따위 등으로 칼금을 긋고,
    차별하고, 비교하고, 짐작하려는 모습을 보고,
    나는 그 사람의 됨됨을 외려 전격 가늠할 수 있다.
    예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한참 부실한 사람으로 봐도 그리 잘못이 없을 터.

    그 물음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그 마음은 얼마나 나약하고 협소한 것인가?
    게다가 이미 제 스스로 답을 예상하고 묻는 물음이란,
    실인즉 타자를 상대하고 있음이 아니라 바로 자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임이니.
    나는 이런 태도를 불안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제가 스스로 문제내고 제 스스로 답을 고안해 준비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 얼마나 용렬한가?
    그럴 양이면, 차라리 정각(井閣) 모퉁이 쌍겹으로 흘레질 하는 두꺼비 보고,
    허벌나게 용두질이나 하는 게 얼추 수지가 맞지 않을까?

    자신의 내면에 자신이 없으니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질문을 따발총처럼 던져야 한다.
    따발총 맞은 자들의 비명소리를 듣기를 그는 원하고 있다.
    헤밍웨이가 사냥을 즐겼다고 하는데,
    사냥이란 기실은 약한 동물을 가학함으로써,
    자신의 나약함을 지어버리려는 과장된 몸짓인 것이다.
    그의 소설이 제법 재미도 있고 감동을 일으키곤 하지만,
    나는 이 역시 잠재된 열등감을 세상을 향해 도발하고 있는 모습으로 읽혀지곤 했다.
    그를 모독하고 싶지 않지만, 또한 그리할 까닭도 없지만,
    사실이니까 더 말해보자.
    그는 결국 엽총 자살을 하고 만다.
    생존에 그리 사냥, 낚시를 즐기더니만,
    끝내 자신 역시 그 총의 제물이 되고 만다.
    마지막 속죄의례일까나 싶기도 하다.

    따발총을 외부로 투사하는 자는,
    실은 나약한 존재인 것이니,
    그 총에 자신이 맞기는 싫다는 것이나,
    세상에 그 미약한 총에 맞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지만, 끝내 스스로 자신이 맞고 만다.
    제 아니면 세상에 맞을 사람이 없으니까.
    헤밍웨이처럼.

    철학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모욕할 일이 아니다.
    실인즉 이를 행으로 입증할 수 있느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

    제 스스로 무엇인가 도모할 역량도 아니 되면서,
    그렇다고 세상을 관조하지도 못하면서,
    심청전에 등장하는 뺑덕어미처럼,
    끊임없이 이웃의 삶에 고개를 들이밀고 기웃거리면서,
    세상을 건너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가련타.

    나는 현실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역량이 있는 일을 하지는 못했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행동이 내 생각을 미처 따르지 못하는 것을 부단히 경책하면서 살아왔다.

    의문을 갖는다.
    그런데 그가 말한 현실적인 역량이란 것이 무엇인가?

    가식, 위장을 잘하는 것일까?
    사기를 잘 치는 것인가?
    돈을 잘 버는 것인가?

    정치인들도 전과가 꽤 되는 이가 많지 않던가?
    재벌도 보면 노조 결성을 막고, 산업재해 노동자의 아픔을 외면하는 철면피도 많다.

    실학자 안정복은 삼수(三仇)를 말했다.
    “그 첫째는 자기 몸이니 聲色, 나태함, 방자함 등이 가만히 안으로 나를 빠뜨리는 것이요.
    둘 째는 세속이니 재산, 세력, 功名 드러나 밖으로 나를 빠뜨리는 것이요.
    셋째는 마귀로서 거만하고 오만하게 현혹시켜 안팎으로 나를 친다.”

    나는 현실적 역량 운운하는 사람치고,
    욕심꾸러기, 파렴치하지 않은 사람을 보질 못했다.
    차라리.
    정치인처럼 철저하니 몰염치하지도 못하고,
    재벌처럼 이악스럽지도 못한 자가 태반이리라.
    게걸스럽게 원하면서도 그리도 못되고,
    그렇다고 마음보나 정갈하니 개결한 것도 아니고,
    탐욕으로 얼룩져있을 뿐,
    게거품만 삼천척(尺) 길게 품어낼 뿐,
    쉬이 지는 해만 애닯고뇨.

    그저 뜨물처럼 흐릿하니 비몽사몽 세상을 갈지자로 취해 걸어갈 뿐.

    투생(偸生)이라!

    죽어야 할 때 죽지 못하고,
    구차하게 구구도생 명을 이어갈 뿐인 인생들이라니.
    가련타.

    그런데,
    공연히 상대할 무게가 아닌 이를 향한
    내 부주(扶助)가 너무 과하군.
    두어라, 이 또한 사랑이어라.

  10. bongta 2010.11.06 19:33 신고 PERM. MOD/DEL REPLY

    오늘 밭 언덕에 서 있으니,
    소슬(蕭瑟)하니 바람이 불어옵니다.

    ‘바람처럼 살고 싶다.’

    머떨이님에게,
    그 아름다운 바람 한자락을 선사합니다.

  11. 리누 2011.07.05 01:38 PERM. MOD/DEL REPLY

    저... 임베디드쪽으로 가려고 준비중인 학생입니다.

    죄송합니다만...

    종교와 기술이 접합된 글을보니 물인지 술인지 헛갈립니다...
    그래서 기술부분만 따로 때어서 정리한 문서를 제 블로그에 올려도 될지 질의드립니다.

    만약 불가하다면 기술 부분만 때어서 따로 글을 포스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12. bongta 2011.07.05 10:34 신고 PERM. MOD/DEL REPLY

    대도무문(大道無門)

    오로지 술만 먹고자 慾하면 독에 중독되고,
    물만 먹고자 慾하는 자는 아사(餓死)하고 말 것임이라.

    다음 시 하나 읽어본다.

    剛日讀經 柔日讀史
    無酒學佛 有酒學仙

    양일에는 경전을 읽고
    음일에는 사서를 읽다.
    술 없으면 불법을 배우고
    술 있으면 선법을 배운다.

    내 학교 다닐 때 화학교수님은 이리 말씀하셨다.
    앞으로는 Π형 인간이 되어야 한 사람 노릇을 다할 수 있다.
    이 말씀이 무엇인가 하니,
    전공 하나로는 아니 되고 최소 3가지를 익혀야 한다는 말씀이다.

    널리 알려진 TED 역시,
    Technology, Entertainment, Design을 아우르고 있다.

    동양 고대의 정(鼎)은 삼족(三足)이라,
    즉 발이 3개다.
    발 하나는 물론 두 개로도 제대로 서있을 수 없다.
    적어도 3개는 되어야 넘어지지 않는다.

    Steve Jobs가 iPad 2를 프리젠테이션 하면서 내놓은 말이다.

    “This is worth repeating, It’s in Apple’s DNA that technology is not enough. It’s tech married with the liberal arts and the humanities. Nowhere is that more true than in the post-PC products. Our competitors are looking at this like it’s the next PC market. That is not the right approach to this. These are post-PC devices that need to be easier to use than a PC, more intuitive. and the software, hardware, and applications need to intertwine in an even more seamless way than on a PC. We think we’re on track with this.”

    It’s in Apple’s DNA that technology is not enough. ....

    “technology로 충분치 않다,
    technology는 liberal arts, humanities와 결혼했다.”

    이리 말하고 있다.
    Technology, Liberal Arts, Humanities
    역시 삼족정(三足鼎)인 게다.

    엔지니어의 한계는 기술만이 최고라고 여길 때 나타난다.
    Technology가 Entertainment, Design을 하시(下視)하게 되면,
    시장터에서 뭇사람들에게 곧바로 외면당하고 말 것이다.

    ***

    “종교와 기술이 접합된 글을보니 물인지 술인지 헛갈립니다...”

    “만약 불가하다면 기술 부분만 때어서 따로 글을 포스팅을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게 무엇이 잘못인지 곰곰이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잘못을 넘어 무례하기까지 하지 않습니까?

    이게 모두 기술자(or 지향하는 자)가,
    자기 울에 갇혀,
    세상을 향해 열려있지 않기 때문에 나타나는 폐단이다.

    제대로 된 기술자가 되기 위해서라면,
    지금 당장 기술을 떠나 인문학을 배우라.
    술도 먹고, 물도 먹고 ...

    無酒學佛 有酒學仙
    대도무문(大道無門).
    길없는 길.

    이게 무엇인가?
    그대 알겠음인가?

    ***

    그런데,
    이 본문 글을 읽는 기술지향 인간형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혼란스러워하고 있는가?
    캐퍼시티가 부족하니 놀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흔히 자기 수용의 한계를 넘을 때,
    무례해지곤 한다.

    차제에,
    저들이 아무쪼록 삼족(三足)의 뜻을
    이해하게 되었으면 싶다.

  13. 리누 2011.07.06 10:24 PERM. MOD/DEL REPLY

    죄송합니다. 제가 '무뢰한'이 었습니다.

    글을 전달하여 사람의 마음을 나누고, 마음을 움직이는 '필력이 아닌 재주 축에도 끼지 못할' 형편없는 글 재주와 두서없이 전하는 말 주변머리가 저의 단점입니다.

    지금은 기술만을 생각하여 철학적인 부분을 분리를 해서 머리속에 기술부분만 정리를 해야하는데 계속 기술은 없고 종교나 철학쪽으로 생각의 스트림이 흘러가기에 표현을 그리 하였습니다.
    자조적인 자책이 있었던것으로 보입니다.

    어떡게해야 생각을 통제(Control Center)하고 관리할지 모르겠습니다.;본문글을 정돈할 여유.

    막상 글을 "제 블로그에 포스팅 합니다."라는 글한마디와 허가 없이 가져가서 포스팅을 한다면 예의가 아닌것 같고, 청탁 또는 허가를 부탁을 드렸던것이 거슬렸다면 죄송합니다.

    리누 2011.07.06 10:26 PERM MOD/DEL

    어떡게해야 생각을 통제(Control Center)하고 관리할지 모르겠습니다.;본문글을 정돈할 여유.

    본문글을 정리해서 분리하여 정돈해야 할 두뇌의 힘.

    즉 필터능력.

  14. bongta 2011.07.07 12:10 신고 PERM. MOD/DEL REPLY

    “종교와 기술이 접합된 글을보니 물인지 술인지 헛갈립니다...”

    물인지 술인지 헛갈린다는 표현은 상대의 티미한 모습을 지적할 때 쓰입니다.
    설혹 그렇게 느꼈다고 할지언정 초면에 이런 식의 반응은 무례하지요.
    물론 의도한 바는 그게 아니고 기술적 부분만 취하려는 의지가 강해서
    그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아니한 게 아니지만 학생이시라니까,
    저는 우정 한발 더 내밀어 나아가 경책(警責)하고자 한 것입니다.

    리누님의 사과의 말씀을 들으니 한편 고맙고,
    한편으론 제가 친절하게 대해드릴 수도 있었는데 그리하지 못한 게,
    미안스럽기도 합니다.

    생각을 통제하는 방법을 말씀해주셨는데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막 떠오른 생각 하나를 기초로 우선 하나 소개합니다.

    제가 지금 정확한 인물의 이름이 떠오르지 않습니다만,
    우리나라 근대문학에 한 획을 그은 분 중이 하나인 것은 분명합니다.
    조심스럽지만 아마도 조지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기억이 가물가물하니 확언할 수는 없습니다.
    어쨌든 이 분이 약관(弱冠)의 나이에 신문사 주필을 맡아 사설을 쓸 정도였습니다.
    오늘날 같으면 20살 나이에 주필이 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사설을 쓰는 것도 거의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데 그가 어린 나이에 그 일을 어찌 맡을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은 실로 간단합니다.
    그가 총명한 것은 틀림없었겠으나,
    한학을 한 것이 가장 큰 요인이라는 생각입니다.
    요즘은 한학을 배우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만,
    당시의 한학은 거의 경전, 사서를 외우는 식이었습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이런 훈련과정을 밟다보면,
    경전, 사서의 내용, 가르침을 배우고 익히는 것은 물론이겠지요.
    그렇지만 그 틀, 형식이 몸에 배게 되는 것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이 틀을 익히게 되면 세상의 이치, 물정을 파악하고,
    바로 보는 시각을 자연 갖추게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태권도 따위를 배우게 되면,
    흔히 품세라는 것을 익히게 됩니다.
    공수(攻守)간 이치를 배우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 자세를 수백 번 따라하게 되면,
    자연 몸에 그 격식과 폼이 곰삭아 자리 잡게 됩니다.

    한학, 태권도가 아니더라도,
    공부라는 것은 내용도 내용이지만,
    ‘좋은 틀’
    ‘Good Frame of Mind’
    이것을 배양하는 것이 훌륭한 방편이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물론 나중엔 이 틀까지 뛰어넘어야 합니다만,
    이는 이야기가 길어지니 이 자리에선 언급하지 않습니다.)

    특히 고전이라는 것은 수천 년 내리닫아오면서,
    풍파에 단련이 되고 정제된 것이기에,
    믿고 따를 만한 것입니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역사학이든, 경제학이든 ...
    제 관심 분야라든가 혹 마음이 이끌리는 방면의,
    기본 텍스트를 벗 삼아 무작정 따르고 익히면,
    어느 순간 폭발적인 힘이 뛰쳐나올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문제는 이게 한두 해 정도가 아니고,
    십년, 이십년, 삼십년 ...
    이리 길게 시간을 두고 닦겠다는 각오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남과 비교하지도 마시고,
    오로지 자기 하나만을 믿고 그리 정진하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못나고 부족하다면,
    남이 1년 할 것을 나는 10년 공부하겠다,
    이리 작정 못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10년을 오로지 인고(忍苦)의 세월로 견딘다는 것도 아닙니다.
    남은 1년으로 가고 말지만,
    자신은 10년 동안 오지게, 재미있게, 사무치게 이리 가는 것일 뿐,
    이러는 동안 거꾸로 남이 놓치고 만 것을,
    좀 더 섬세하고, 깊게 공부할 기회가 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실은 방편 상 남과 비교하여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도 바른 생각은 아닙니다.
    나는 나의 길을 갈 뿐인 것을.
    그대는 그대의 길을 가듯이.

    그대의 크리스털 잔을 존중하듯이,
    나는 내 질그릇을 아끼고 사랑할 뿐인 것을.
    이를 일러 자존(自尊)이라고 합니다.

    부처가 말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도 내내 마찬가지 말씀입니다.
    각자는 자신의 잔을 채워가는 것입니다.
    여기 우열은 없지요.

    게다가 엔지니어는 예하건대 인문학을 배워 자신의 배(舟)를 채워갈 여지가 많습니다.
    하지만 거꾸로 인문학 전공자가 공학을 배우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수학이니 물리, 화학을 비전공자가 새롭게 배우기는 심히 어려울뿐더러,
    그 유인도 그리 강하지 않습니다.

    리누님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좋은 위치에 계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게 보시고 좀 더 열린 자세로,
    폭 넓게 공부하시면 좋은 기회가 열릴 것으로 확신합니다.
    용기를 내시고 정진하시길 바랍니다.

    끝으로 한 마디 더 첨언합니다.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義自見)이란 말이 있습니다.
    글을 백번 읽으면 뜻을 자연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게 요즘 세상엔 고루하고 멍청한 짓으로 치부됩니다.
    꾀를 내어 요령부리고 질러가는 것이 어떤 때는 근사해보일 수 있지만,
    사람의 마음 깊은 안 뜰에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결정적일 때 주르륵 미끌어져 천길 나락으로 떨어지기 십상입니다.

    모쪼록 자중자애(自重自愛) 스스로 귀하게 여기고 아껴,
    제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시길 빕니다.
    무소의 뿔처럼.

  15. 리누 2011.07.08 17:22 PERM. MOD/DEL REPLY

    “감사합니다... Master(선배님, 스승).... ”



    폐가 될듯 하여 덧글에 긴 글을 썼다가 지웠습니다.
    제가 쓴 짧은 글에서는 감정과 생각을 전하는 힘이 미약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의 뜻, 생각이 전해지길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기회가 된다면 가르침을 책으로 만나뵙고 싶은 마음이 동 합니다.
    어떤 글을 쓰더라고 지금의 제가 가진 글쓰는 능력으로는 지금의 감흥을 전할 수 없음을...(긍정, Right)

  16. bongta 2011.07.09 20:55 신고 PERM. MOD/DEL REPLY

    고맙습니다.

  17. xdoc 2012.09.29 22:52 PERM. MOD/DEL REPLY

    바이어스에 이런 심오함 뜻이......
    대단한 성찰입니다^^

    bongta 2012.10.02 09:26 신고 PERM MOD/DEL

    감사합니다.

    아울러, 본 주제와 연관된 다음 글을 소개합니다.

    http://bongta.com/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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