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code - ⑥ 終回

소요유/묵은 글 : 2008.02.17 22:22


앞에서 제가 말씀드리길 현명한 사람은 코드를 이용하여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
현실을 바로 해석해낸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와 생각하니, 현명한 게 아니라,
지나친 자만의 결과이겠거니 여겨지는 노릇이겠습니다만,
제가 한 때, 주가의 등락원리를 찾아내고자 컴퓨터로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그게 80년대이니, 당시 증권사 객장엔 호가판이 있어,
고학생(苦學生) - 요즘식으로 말하면 아르바이트생쯤 되겠습니다. -
그러고 보니, 이젠 고학생이란 말을 쓰는 사람조차 희귀한 세상이군요.
그 고학생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호가를 분필로 칠판에 적던 시절입니다.
객장에 들어가면, 제가 제일 젊어 어색스러웠던 그 풍경 한가운데,
등 돌려, 칠판을 마주하고 열심히 숫자를 쫓아가며
돈이란 괴물의 흔적을 하얀 백묵으로 그려내던 고학생이 자리잡고 있었지요.

- 고학생, 이리 불러보니, 추운 날 다방에 앉아 있으면,
그들이 거수경례를 하며 다가오던 생각이 납니다.
시린 바람을 가르고 뺨을 발그스럼히 붉히며, 미소짓던 그들.
옆구리에 말아 낀, 당시 제법 팔리던 독서신문을 권하던 그 손짓 앞에
자만과 권태에 서서히 침몰하던 동갑내기의 부끄러움이 찻잔에 어립니다.
부끄러움은 그 현장을 서둘러 은폐하려는 듯, 독서신문 하나를 사듭니다.
그 신문 뒤에 숨어 젊은 청춘의 허갈진 영혼을 비추어보곤 하였습니다.
이젠 그 청춘마저 저 멀리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고학생은 군밤 냄새 아련한 명동 꽃다방 앞 눈길을
아직도 걷고 있을 것입니다.
저의 몽환적 봄날의 흔적과 함께. -

당시까지 알려진 각종 기술적분석 지표를 전부 연구 검토하고,
통계프로그램까지 직접 짜서 주가란 놈의 행적을 추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음양봉이라는 것이 상당히 충격적인 것으로 제 뇌파에 잡혔습니다.
이게 지금은 캔들(스틱)이라고 어설픈 역어로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하여튼 그것을 보니, 이것이 주역 또는 컴퓨터의 코드시스템하고 유사하더란 말입니다.
그래 한국주식시장의 역사적 주가 전자료를 구해, 통계분석을 시도하였습니다.

이 음양봉(납촉형)이 음봉, 양봉으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실체와 수염이란 또 다른 이진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이 역시 코드시스템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지금은, 일어→영어→국어 순의 역어로 봉형 이름이 엉터리로 불려지고 있습니다만,
원어에 충실하자면,
절입선, 차입선, 역습선, 잉선, 포옹선 등등...으로 명명된
각종 code들이 마치 주역의 64괘처럼 가지런히 영글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게 막부시대부터 유래한 근 300년 역사를 가진 것이니 고색창연하기 그지 없지요.

참으로 묘한 게,
그 수많은 기술적지표중에서 서양에서 개발된 것은 마치 컴퓨터 코드와 유사하게
거지반 수리계산 모형들이고,
반면 동양에서 만들어진 음양봉, 구지도 등은 주역과 마찬가지로
상형부호(象形符號)의 형식이라는 것이지요.

code를 챙기다 보니 눈에 걸리지 않는 것이 없군요.
차후, 기회가 되면 당시의 제 행적을 조금 소개할 수도 있겠습니다.

부처님의 인계(印契)도 특히 새겨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불상을 보면 손의 모습이 특이한 형태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를 수인(手印)이라고 합니다.
혹간은 보병(寶甁)같은 물건을 들고 계시기도 한데,
이러한 물건을 빌은 인상(印相)을 계인(契印)이라 구별하여 부르기도 합니다.
원어로는 Mudra라고 하며, 부처님네들의 자내증(自內證)의 덕을 표시하기 위하여
열 손가락으로 가지가지 모양을 만들어 표상(表象)합니다.

밀교에선 입으론 진언(呪)을 외고, 손으로는 무드라(印)를 지어 진리와 만나고,
부처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합니다.
무드라를 그린 도판을 구경해보면 마치 매듭공예처럼
손가락으로 지어낼 수 있는 온갖 모양들이 현란히 수놓아지고 있습니다.

석굴암의 석가모니불이 印짓고 계신 바를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 합니다.
보통 우리나라 불상에선 이 항마촉지인과 시무외인 수인(手印)들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만,
저 개인적으로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의 지권인(智拳印)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부처는 염화시중의 미소로도 못 알아듣는 중생을 그리 갖은 手印 지어,
깨우침의 소식을 전하고 계심일런가 싶기도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수인 보고 좋은 인연을 지을 수만 있다면,
더없이 좋은 노릇이겠으나,
정작은 우리 몸둥아리로 짓는 행실이야말로 인계(印契)가 아닐런가 싶기도 합니다.
도장 찍듯 맺어지는 것임이니,
실은, 인(印)인즉 업(業)의 다른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

주역을 통달하였기에, 삼라만상 우주의 이치를 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외려, 세상 이치에 통달하면 자연 주역의 이치에 통할 것인즉,
부처의 인(印)이나 주역의 괘상(卦象)이 아닌,
자신의 몸둥아리로 짓는 印, 卦象을 먼저 살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무드라 또는 주역이 문제가 아니라,
정작은 code를 구하는 마음,
그 간절하고 정성스런 마음이 더 重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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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무몽(至人無夢)이란 말이 있습니다.
지인은 꿈도 꾸지 않습니다.
항차, 현실에서 至人이 code가 필요할까요 ?

저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야,
한 때, 코드를 만들겠다고 나대었습니다만,
지인(至人)은 code는 커녕 꿈도 꾸지 않고 있음입니다.

지인(至人)은 무몽(無夢)이고,
성인(聖人)은 논이불의(論而不議)인데,
범인(凡人)은 욕단장(欲斷腸)이니, 남이 만들어 놓은 code에 갇혀 허우적 대고,
치인(癡人)은 수다몽(愁多夢)임이라, 분수 모르고 code를 만들겠다고 기고만장입니다.

이렇듯 code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code 앞에서 제 혼자 잘났다는듯 우쭐거리며 해석해낼 수도 있습니다만,
정작, 道人은 무몽(無夢), 무인(無印)이라며,
어리석은 이들을 한껏 희롱하고 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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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에 요절한 천재 왕필은 득의망상(得意忘象)을 말했습니다.
뜻을 얻었으니 象을 여의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소위 당시에 퍼져 있던 역에 대한 상수(象數)의 의론들,
즉 부호나 수리에 집착하던 풍조를 일신하고,
의리(義理)의 역, 즉 우주와 인간에 대한 철학적 해석을 펴나갑니다.

code에 의지하는 것은, 그를 빌어 뜻을 얻기 위함인데,
이제까지의 상수역이란 게, code 자체에 매몰되어 번쇄해지며,
지엽말단에 집착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노장철학에 심취한 왕필이지만,
그가 노장보다 오히려 공자를 높이 보았다는 것입니다.
까닭인즉,
성인은 무를 체득하였으되, 무란 가르칠 수 없는 것이고,
그런즉 유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란 것이지요.
반면 노장은 유를 완전히 여의지 못하였기에,
늘 자신들에게 부족했던 무를 노래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code를 말하고 있는 사람인즉,
실상은 저같이 code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들다 지친 사람이 아닐런지요 ?

왕필이 말한 게, 득의망상이지만,
저는 이게 글자대로 象, 즉 코드 무용론을 편 것은 당연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설문해자 서문을 보면
“옛날 복희씨가 세상을 다스릴 때, 하늘을 우러러
그 변하는 모양(일월성신의 변화)을 관찰하고
고개를  숙여 땅에서 그 법(이치)를 살펴 새와 짐승의 무늬가
땅의 마땅한 이치와 서로 알맞게 어울리는 것을 보았다.
가까이는 사람의 몸 주변에서 그것(법)을 취하고,
멀리는 온갖 사물에서 법을 취하였는데,
이에 팔괘를 짓기 시작하였고,
그것으로써 역법에서 정한 도형을 드러내었다.”
이리 말하고 있습니다.
성인 역시 코드를 구해 이를 빌어 우주와 인간을 탐구하였습니다.

( ※ 참고로 象이란 글자는 원래 본뜬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니, 象이란 글자가 들어간 말은 행위나 모습을 흉내내어 취했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는 것입니다.
곽말약같은 이는 갑골문을 연구하여 주역의 음효, 양효를 성기를 본 뜬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습니다.
觀相할 때의 相은 (얼굴)모습, 모양 등으로 바로 그 자체를 뜻합니다. )

문제는 "coding을 왜 하느냐"라는 자각을 잃지 말아야 하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coding은 decoding하기 위해서 한다”라는 이 자명한 사실을 우리는 잊곤 합니다.
현실에선 coding 이 자체가 과업이 돼버리고 마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럴진데, 차라리 coding을 꿈꾸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은 이게 정답이긴 할 터인데....)
coding이 decoding보다 더 중하게 여겨지게 되는 까닭은 딱 두가지입니다.

욕망과 어리석음이 그것입니다.

제가 위에서 든 음양봉 연구도 욕망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decoding보다 coding 그 자체의 무결성(無缺性)에 집중하느라,
정작은 decoding을 소홀히 했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정치라는 것에 진작 등을 돌린 문외한이라 잘 알지 못하지만,
한 때, 노무현 정부를 향해 “코드정치”란 이름하에 비판이 무성했었던 적이 기억이 나는군요.
저는 그의 coding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바로 이 decoding의 存否에 입각하여 비판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만약 그들이 실패한 것이 있다면,
coding이 아니라, 실인즉 decoding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환언하면 그들의 flagship 코드였던 개혁정신이 아니라, 개혁성과 말입니다.
묻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를 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정권을 그들에게 준 것은,
국민이 수임자에게 소신대로 coding하라고 위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decoding하여 국민에게 그 coding의 처리결과를
제대로 내놓는 것은 그들의 책임입니다.

이번 선거는
노정권의 coding에 의해서가 아니라,
decoding에 의해 판가름이 날 것입니다.

어떤 선거판이든,
나선 이는 모두 황홀한 coding 能力만 자랑합니다.
하지만, 국민은 decoding을 엄히 물을 뿐입니다.

저는 왕필이 편 득의망상(得意忘象)론에서,
외려 decoding의 重함을 풀잎 위를 흐르는 바람처럼 느낍니다.
민초(民草)들 역시 빗바랜 희망을 푯대위에 걸어두고,
decoding의 깃발을 애초롭게 초혼(招魂)하고 있음입니다.
그러한즉 모름지기 위정자는 남루한 민초들의 꿈에 기대어
화려하게 질러 질러 불꽃잔치를 벌인 책임을 져야합니다.

노정권 역시 진정 그들의 coding 전능성(全能性)을 증명하려면,
그들은 이제 decoding이란 제단에 몸을 맡겨야 할 것입니다.

#

득의사상(得意謝象) - 뜻을 얻으니 象에게 제물 바쳐 謝神하다.

하니, 저는 득의망상(得意忘象)하는, 지인(至人)이 아니 되어도 좋으니,
설사(設使), 범인(凡人)이나 치인(癡人)으로 머물러 있은들,
득의사상(得意謝象)하며, 낙락(樂樂)하니 한가롭고자 합니다.

사상(謝象)으로, 사천사지(謝天謝地) 즉 감사하고자 할 따름입니다.
decoding된 복덕을 기려, 그 象을 흠감(歆感)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자어 사(謝)는 중한사전을 찾아보면 “감사하다”와 “거절하다”
즉 “thank”와 “decline”의 두가지 뜻을 갖고 있습니다.
하니 제가 여기서 사상(謝象)이라고 하며 감사하다라는 뜻으로 겉 새겼습니다만,
거절하다라는 함의가 있음을 은연중 암시하고 있음을 혹여 눈치채실 분이 계실런가 싶군요.

하기사 득의(得意)를 구하고자 꾀하는 것 자체가 미망일런지도 모르겠음이니,
사상(謝象)이라며 중의(重意)적 표현을 앞장세워 망의(忘意)의 경지를
그리고 있음입니다.

부적(符籍)이란 게 무엇입니까 ?
coding, decoding의 변환 작업을 통한 企圖가 중지되고,
code 그 자체의 영험한 기운을 단숨에 빌고자(借)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표(記表)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의(記意)도 아닌 기기(記氣)가 아닐런지요 ?
하니, 거긴 decoding은 거세되고,
피타고라스학파와 같이 부호(符號)에 대한 경배만 남아 있습니다.

부적 앞에 서면 "빠돌이"가 연상됩니다.
저는 그래서 “빠돌이”를 그 열정은 존중하지만, 회의합니다.
빠돌이에게는 반성과 비판이 실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겐 feedback, decoding이 부재하기 십상입니다.
망상(忘象)이 아닌 득의(得意)와 득상(得象)만 있습니다.

반면 “까돌이”는
격려와 평가가 아주 인색합니다.
망의(亡意)와 망상(亡象)으로 존재를 대합니다.

그러한즉 “빠돌이”나 “까돌이”나 
따지고 보면 모두 슬픈 존재들입니다.

###

과연 得意란 게 무엇인가 ?
象 즉 code를 구하는 이들에게 저는 이리 묻고 있음입니다.
물론 저도 포함해서입니다,
그래서 code에 대하여 함께 생각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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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ooo님/

문제는 그 허물어지고 말 coding에 안주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상황이 아니겠습니까 ?
일시적으로 취하여 고정된 의미라는 것이 영원히 지속되지 않지만,
인간은 그것에 의지하여 이 거친 한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것이 영원히 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기독교와 같은 절대 신을 향한 믿음에 근거하고
있겠지만, 영원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기꺼이 의미를 포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포집된 의미망 안에서만 居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제법무아, 제행무상이라고 외치지만,
이게 인간이 생존하는데 필수불가결한 밥과 황금을 제공하는데
효과적이라는 징험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들은
오로지 사찰에 기식한 사람들에게서만 찾아질 뿐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요즘 집앞의 사찰 염불소리가 밤낮 없어
어떤 때는 귀에 거슬릴 정도입니다.
년년세세, 아연 시주들이 늘어나는 형국입니다.
특히 안개비 오는 날 염불, 목탁소리는 제법 듣기 좋습니다만,
그도 지나치니 그쪽 동네 형편이 떠그르르 펴는 모양새입니다.

황금광시대 서부로 달려간 수 많은 사람들의 손아귀에 쥐어지는 황금보다는
그들을 맞이하여 국밥집, 旅閣 차린 주인의 호주머니가 더 불룩하고,
증권시장에 달려든 개미들보다 거간꾼인 증권회사가 돈을 더 많이 벌며,
탄광촌에 개설된 카지노는 떼돈을 갈퀴로 긁어 모읍니다.
반면, 그늘에선 온 재산을 날린 자살자들이 널부러져 있습니다.

하지만,
서부로 달려가는 사람들은 여전하고,
증권시장을 서성거리는 사람들은 줄지를 않고,
도박장으로 가는 길은 붐빕니다.

그래 저는 앞에서 형영상조(形影相弔)란 말을 떠올려 보았던 것입니다.
저 의미망에 갇혀 파드닥 거릴 때,
홀로 고독을 체험함으로서
주체적인 삶의 지평을 노크하는 모습을 말입니다.

ooo님이 지적하신 인간현상들은
고독이라는 외나무 다리를 통하지 않고는 건너갈 수 없는
계곡에 짙게 드리운 환영의 운무(雲霧)같은 것이 아닐런지요 ?


bongta :

kkk님/

합종연횡술의 주인공 소진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소진이 처음에 주유천하하며 출세 길을 모색합니다만,
세가 궁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여, 거지 꼴로 낙향합니다.
집에 돌아오니 온 집안 식구는 마구 욕설을 퍼부어댑니다.
소진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왔건만 베틀에 앉아서 베만 짤 뿐 내다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소진은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지요.

“형수씨 몹시 시장하니 밥 좀 지어 주오”
“땔 나무가 없어 밥을 못 짓겠네.”

富貴途人成骨肉
貧窮骨肉亦途人
부귀하면 남도 형제처럼 나를 따르고
가난하면 형제도 나를 남처럼 대하는구나.

후에 다시 유세 길에 오른 소진은
마침내 뜻을 이루어, 6국 재상의 인수를 받고, 출세를 한 후,
금의환향합니다.
집안식구들은 감히 쳐다도 보지 못합니다.

소진이 웃으며 형수를 보며 말합니다.
"어찌하여 전에는 거만하더니 오늘날에는 이토록 공손하십니까?"
蘇秦笑謂其嫂曰 何前倨而後恭也

"도련님의 지위가 높고 황금이 많은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嫂季地浦服 以面掩地而謝曰 見季子位高金多也

소진은 인심이 이러한 것을 뼈 속 깊이 알기에,
가족들을 다 용납하였다지요.

###

항차 골육지간에도 결과가 없으면 등을 돌리고,
황금이 많으면 아양을 떱니다.

민심 역시 소진의 형수와 한 치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니, 정치인은 coding이 아니라 decoding으로
말해야 한다고, 아니 그리 말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산이란 높다 해서 귀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있어서 귀한 것이란 이치를 정치인은 잘 아로새겨야 할 것입니다.

아참 짜장 한 그릇 잘 먹었습니다.
언제 우동 한 그릇 답례로 대접해드릴 날이 있으리라 봅니다.


bongta :

함께 미치지 않으면 미친놈 취급 받기도 하지만,
함께 미치지 않았음을 고집하다가 미친놈이 되기도 합니다.
한즉, 그 안으로 들어가면 외려 편해지지 않을까요 ?
미친놈 자신은 최소 미쳤다는 자각이 없을 터이니. ㅎㅎ

이제사 생각난 것인데, code의 대표적인 게 유전자인데 이를 거론치 못했군요.
생물시간에 배운 DNA라는 것
역시 ATGC라는 4개의 code 배열로 정보를 전하지 않습니까 ?
단 4개의 문자로 이루어진 code 체계로 곧 생명을 복제해내고 있음이니,
실로 code야말로 야릇한 것이군요.


bongta :

최근 제 컴퓨터가 말썽을 부려 웹 접근이 편치 않았습니다.

야릇하다는 말을 내놓고 보니,
眞空妙有란 말이 떠오릅니다.
글자 그대로 풀자면 이게 진짜배기 空과 야릇한 有 아닙니까 ?

ooo님이 말씀하신 "복잡화된 code화"는 현대사회에선 필연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동네 골목에 아이들이 지금 사라졌습니다.
소시적, 악동들이 까막까치떼처럼 득실대던 고샅길이 이젠 적막강산입니다.
이들은 학원 차량에 실려 종일 공부하느라 발에 흙 묻힐 새가 없습니다.
누적된 지식, code를 챙겨 무장하지 않으면 낙오하리란 두려움이
너나할 것 없이 가득한 증좌입니다.

이런 와중이니 부처가 말한 진공묘유란 얼마나
야릇한 유혹이자 엉뚱한 것입니까 ?
그러니 이 또한 챙겨 갖추어야 할 하나의 지적 목록에 들어,
명상족들이 우쭐되며 나는 이를 가졌다 하면서
상품처럼 벌려놓고 자랑하고 있기도 한 것이지요.
혹은, 경쟁에서 탈락한 이들이 숨어드는 피난처가 되기도 합니다.

code화가 분명 문제가 많다면,
결국은 진공묘유니 색즉시공이니 하는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허나 이 역시도 범인에겐 알음알이로 코드화하지 않으면
해석되는 척도 하지 않으니
범인은 이리 가나 저리 가나 어두운 길을 헤매일 따름입니다.
하니 火宅에 갇혀 한 세상 부대끼다 스러질 뿐인가 합니다.

육갑 아는 놈 농사 망친단 말이 있습니다.
저는 부질없는 번거로움 여의고,
그저 제 분수껏 淡淡하게 살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만,
이 역시 쉽지 않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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