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code - ⑤

소요유/묵은 글 : 2008.02.17 21:51


이제까지는 code에 대한 의론을 펴기 전 컴퓨터를 중심으로 한,
기초 사항을 점검해보았습니다.
앞의 이야기 중에서 혹 오해가 있을까봐 몇가지 확인을 해두고자 합니다.
컴퓨터에서 문자를 2진코드화한다라는 말씀은 옳지만, 주의할 일이 있습니다.
즉, 자판의 문자들이 하나같이 ASCII에 입각하여 code화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프로그램에 형편에 따라, key stroke시 변화되는 code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ASCII 상 01000001 = A이지만,
A key 누른다고 모두 ASCII code인 01000001로 변환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앞에서는 이야기 편의상 ASCII code를 들었습니다만,
이게 다는 아니다라는 점을 이해해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아니 설혹 귀찮아 그냥 넘겨버린다고 하셔도 최소한
“무엇이되었든간에 하여간 code화” 된다는 것만 챙겨두시면 되겠습니다.
예컨대, A, B key를 문자인 A, B로 취급할 수도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 여자로 다루겠다고 작정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은 프로그램 자신의 專權的 선택사항이라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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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을 있는 그대로 대하지 않고 code화 하는 사연은 무엇입니까 ?
지금까지 우리는 컴퓨터에 대하여 말씀을 이끌어 왔기에
처리 객체인 data 또는 information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펴왔습니다.

하지만, 컴퓨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도 부지불식간에
code화(encoding)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컨대 저 사람은 “인중이 깊고, 길어 장수할 것이다.”라며
그의 인중을 보며 이리 내심 생각해본다고 합시다.

“인중이 깊고, 길면 장수한다”라는 것은
관상쟁이 비결서에 쓰여져 있습니다.
이 때, 그 비결서가 앞에서 말한 ASCII와 같은 코드체계에 해당됩니다.
이 코드에 익숙한 이는
“인중이 깊고, 길다”라는 현실세계의 사상(事象)을 “장수”라는 코드체계속의 특정 코드로
바꿉니다.
거꾸로 장수하는 사람을 찾기 위해 우리는 인중이 깊고,
긴 사람을 찾는 것으로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전자를 coding, 후자를 decoding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게 相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닙니까 ?
관상, 족상, 수상... 등으로 부르는 그 相 말입니다.
型, 形, 象, 그리고 相, 命, 占...
이 한자어들이 모두 실인즉 code와 관련이 있습니다.
人相, 印象, 天象, 地形, 觀相, 四柱八字, 占卜, 命卜醫相山 등의 쓰임에서 보듯이
다양한 코드체계가 존재합니다.
천상만태(千狀萬態)이니,
이리 놓고 보면 삼라만상의 표상들은 실인즉 모두 코드시스템으로 새겨도
좋을 정도입니다.

coding을 통해 우리는 현실계를 다른 界로 바꿉니다.
이를 통해 기존의 현실계를 다른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새로운 계는 복잡다기한 현실을 간단/신속/편리하게 해석해내리란 기대가 있습니다.

이를 저는 domain transformation이라고 칭합니다.
우리 말로는 영역(공간) 변환쯤 될 것입니다.

적외선 경비시스템이 설치된 공간속에 
거미줄처럼 얽히설키 설치된 적외선을 육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적외선 안경을 쓰면 적외선이 보입니다.
안경이라는 코드시스템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영역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현명한 사람은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여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지 않습니다.
적절한 코드시스템을 도입하여 이를 통해 효율적으로 현실을 해석해냅니다.

만약 이 주장처럼 현명한 사람이 코드시스템을 이용한다면,
다음 질문이 자연스럽게 던져질 수 있습니다.

즉 “코드시스템은 누가 만드는가 ?”
또는 “코드시스템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하는 것입니다.

코드시스템은 누구든 고안할 수 있으며,
어떠한 형식적 제한이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만들어진 코드시스템이 유효하지 않다면 무슨 소용이 닿겠습니까 ?
따라서 코드시스템은 현실 정합성이 있어야 합니다.
coding/decoding시에 변환손실이 초래되거나,
역사적인 누적검증 결과가 기대수준 한도내에서 만족을 창출해야 됩니다.

자신이 만든 코딩시스템이 홀로 자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면,
보편 타당한 검증을 통해 바른 평가를 획득하여야 합니다.

만약, 국지적(local)으로 고착된 특정 코드시스템에 매몰되면,
그의 인식지평은 편협되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습니다.
이게 개인 수준에서 형성되기도 하지만,
특정 문화 전체 수준에서 형성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자면,
전자는 선입견, 후자는 스테레오타입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리프먼(Walter Lippmann)이 말했듯이
이런 이그러진 코딩시스템을 고집하게 되는 이유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그 코딩시스템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구축하는 노력을 아끼려는 경제성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자아방위의 매커니즘 때문입니다.
경제학에 말하는 메뉴코스트처럼, 비록 더 나은 수익 창출이 예견된다고 하여도,
기존의 메뉴판을 바꾸는 노력에 따른 보상이 미래의 불확실한 기대이기에,
이를 시험하여 위험을 선불(先拂)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한편, 기히 존재하는 코딩시스템에 대한 회의 또는 외부로부터의 비판은
자신의 존재기반에 대한 공격이 되며, 개인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힙니다.

하지만, 스테레오타입의 경우 사회적 전통이란 미명하에 정당화되기도 합니다.
사회적 규범화된 그것에 개인적으로 항거하기엔 지불하여야 할 비용이 많이 듭니다.
때문에 개인은 규범적인 순종과 동조를 보임으로서 사회적 안전을 확보합니다.
현대사회에선 매스컴, 인터넷이 스테레오타입을 퍼뜨리는 주역으로서 기능합니다.

예하건데, 그 안에서 퍼져나가는,
맹목적인 신념에 의해서 받들어지는 OO빠로 불리우는 현상들이 
이런 범주에 속하지 않은지 조심스럽게 자증(自證)되어야 합니다.

OO빠가 받드는 code는 실인즉 code가 아니라 부적(符籍)에 다름아닙니다.
부적에 대하여는 나중에 잠깐 언급을 할 예정입니다만,
그것엔 decoding이 없이 그저 一向性 경배, 의존만 존재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대단히 슬픈 존재형식입니다.
당자는 절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이지만,
주체가 상실된 그들은 덫(trap)에 갇힌 미망(迷妄)들입니다.
예전에 말씀드린 positive feedback의 當體가 그들인가 합니다.

반면, OO까는 OO빠에 대한 비판세력으로 존재하기도 합니다만,
자신 역시 맹목적 분노에 빠져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까든 빠든 모두 유사한 존재형식을 갖고 있습니다.
즉, code 자체에 매몰되어, decoding이 중지된 채,
열정 또는 분노의 감정에 빠져 있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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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퓨터의 코딩시스템에 비견되는 것으로,
전통적이고, 아주 거대하며, 정치(精緻)한 것이 있습니다.
저는 그것인즉 주역(周易)을 주저없이 듭니다.

주역 역시 2진법을 기초로 삼라만상 우주를 코딩하고 있습니다.

먼저, 음양으로 한 효(爻)를 만들어내는데, 이 효는 컴퓨터에서의 bit에 해당됩니다.
이 효 세 개를 한데 모아 괘(卦)를 짓습니다.
이를 소성괘라고 부릅니다.
이 소성괘는 2^3=8 state이니 우리가 흔히 말하는 8괘를 이룹니다.

八卦 :  坤 = 地, 艮 = 山, 坎 = 水, 巽 = 風,
          震 = 雷, 離 = 火, 兌 = 澤, 乾 = 天

이 소성괘 두 개를 상하로 겹쳐 대성괘라 이름하는 최종 괘상(卦象)을 만듭니다.
결국 대성괘는 효 여섯이니, 곧 2^6=64 state가 됩니다.

다시 정리하자면,
최초에 太極(supreme ultimate)이 운동을 계속함에 따라 陰과 陽이 생기고
이 陰陽은 다시 四象으로 분화되며, 또 이 四象은 八卦를 이룹니다.
더 나아가 다시 이 八卦는 한 번 더 분화되어 六四卦를 이루게 됩니다.

하마 (128→256卦) → 512卦 → 1024괘....등등
차서(次序)의 가없는 변전상이 어찌 없을까마는, 문득 그치어 이 64괘로 거둔 바,
이로써 道를 오롯이 드러내는데 오히려 부족함이 없을 따름인 것입니다.
만약 1024괘... 등등을 넘어 무한히 더 추구된다면,
그 끝은 삼라만상 그 자체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러하다면, 굳이 괘를 지을 까닭이 없는 것이지요.
64괘에 멈추어 이를 지렛대 삼아 삼라만상을 겨냥하고자 하는
그 당찬 시도가 易의 정신에 숨겨져 있습니다.

太極 → 兩儀(陰陽) → 四象 → 八卦 → 六四卦

 


이 64괘는 모두 독특한 우주삼라만상에 대한 상징체계를 엮어 내게 됩니다.(symbolization)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는 계사전의 차서체계를 따름입니다.

是故易有太極 是生兩儀 兩儀生四象
시고역유태극 시생양의 양의생사상
四象生八卦 八卦定吉凶 吉凶生大業
사상생팔괘 팔괘정길흉 길흉생대업

기독교는 一者를 섬기는즉, 태역(太易)내지는 太極에 집중하고 있으며,
불교는 空을 노래하고 있음이니,
“무극(無極) 즉 태극(太極)”이란 코드를 펼치고 있음이 아닐런지요 ?
주렴계 역시 태극도설에서 無極而太極이라고 말했습니다만,
이는 정적인 무극에서 기동한 즉 태극이라 명명한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무극을 空, 태극을 色에 배대하여 시험삼아 생각해보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기독교의 십자가는 열십자인즉,
이게 동양의 상수론에 따르면 구극의 수 九를 넘고 있습니다.
꽉찬 九까지 넘었음이니 十은 곧 상대계를 넘은 절대를 상징하고 있음이 아닐런지요.
하여, 十 그 자체로 자족하므로, 卍자와 같은 동적 표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태극이시로데,
그 말씀인즉 로고스로 오신 예수는 이제 주역의 卦象을 빌어보자면,
건위천(乾爲天)에 해당된다 하겠습니다.
카톨릭에서 경배드리는 마리아는 坤爲地(곤위지)의 위격으로 배대됨이 아닐까 싶군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반면 불교의 卍은 十의 사방 끝이 전부 꺽여 구부려져 있습니다.
이게 무엇입니까 ?
절대가 굽어(변용되어) 온 우주에 흩뿌려져 처처에 나툰 삼라만상(森羅萬象)을
상징하고 있는게 아닐런지요 ?
그러하니 곧 절대를 여윈 상대의 세계를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
얼핏 보면 형상이 마치 태극도형과도 비슷합니다.
나선형의 추동력으로 지금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역사를 휘젓는
표창(鏢槍)되어 허공에 印짓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든, 불교든 그것이 세상의 진리를 진정 말하고 있다면,
十이나 卍같은 sign이 아닌
O과 같은 무늬없는 무극(無極)의 sign이어야 할 터인즉
象을 굳이 지어, 스스로를 특정 sign으로 한정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
허니 무문인(無文印)이어야 종교답다란 생각을 해봅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
불상없는 사찰을 짐짓 그려보는 보는 사연이 이러합니다.

역점(易占)이란 바로 이들 64괘중 하나를 얻어(득괘) 사물의
이치를 밝게 살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효(六爻)를 얻는 일은 기계적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
신성(神性)과의 감통(感通)에 의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지극한 정성과 바른 마음으로 작괘(作卦)에 임하여야 되는 것입니다.
(이를 일러 相應相感이라 할 터입니다.)
고대의 역점에서는 시초라는 풀의 줄기를 사용하였는데
이 시초는 한 뿌리에 50개의 줄기가 자란 것으로서
마침 易占에 필요한 50개와 일치하여 신성한 것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위에서 말한 괘상(卦象)은 기호논리학에서 말하는 變項(variables)과 비슷한데,
이 변항은 구체적인 사물의 집합에 대입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무슨 사물이든지 어떤 조건에 합치되기만 하면 모두 어떤 변항에 대입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역에서도 사물을 어떤 卦 또는 어떤 爻에 대입시킬 수 있습니다.

괘 혹은 효에 대한 풀이인 卦辭나 爻辭는 모두 공식과 같은 것입니다. 
이 집합의 사물들이 이러한 상황아래에선 꼭 좇아 따라야 하는 도리인 것입니다.
점복(占卜)의 관점에서 보면 이 道에 따르면 吉하고 그렇지 않으면 凶하다고 할 수 있으며,
- 추길피흉(追吉避凶)
도덕적 관점에서 보면 道에 따르면 옳고 그렇지 않으면 그르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 중정(中正)

문제는 주역의 64괘들이 함의하는 바가 우주의 진리를 모두 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역이 원래 점치는 것으로부터 유래하였듯이, 은, 주 시대의 시대상황을 배경으로 한,
고사들의 기록에 다를 게 없다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후대에 철학적인 의미들이 덧씌어져 변질되어 갔습니다만,
주역 자체가 우주의 비밀을 모두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각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이게 거꾸로 인간이, 주역이 그러길 희망한 결과가 아닐런지요 ?
우리가 미신이라고 치부하면서도 점을 치러가는 이유는 미래를 예지하기 위함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거기 비밀을 다 알고 있는 신비스런 존재가 있다는 것을
믿고 싶은 인간의 희구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아슴푸레 떠오르는 낙원에서 추방된 기억을 되살려내려는 눈물겨운 시도일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 안기는 순간 이 동토에서의 고통을 망각하는 위로가 보상으로 주어질 것입니다.

컴퓨터 코드체계에선 coding 전후의 저쪽과 이쪽의 세계가 일대일로 정확히 대응됩니다.
하지만, 주역에선 코드체계의 신뢰성을 거울에 비추듯 여실히 확인할 수도 없지만,
코딩하는 작법원리, 즉 득괘 과정도 정확한 일대일 대응을 담보하지 않습니다.
지극한 정성과 바른 마음으로 괘를 얻어내야 한다는 추상적인 말씀만이 있을 따름입니다.
게다가 decoding 즉 이를 해괘(解卦)라고 합니다만,
이도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본괘(本卦)가 변한 지괘(之卦)의 괘상을
아울러 살피는 동적인 시스템이기에 이게 외려 대단히 재미있습니다.
그뿐인가요 ?
같은 괘상일지라도 decoder 즉 괘를 푸는 이, 괘를 묻는 이, 등 상황조건에
따라 천차만별로 해독된다는 것이지요.
“꿈보다 해몽이 좋다”라는 우리네 속담처럼 괘상과 참여자가 혼효하여
새로운 해석공간을 창출해내는 것이니 참으로 역동적인 세계인 것입니다.
그런즉, 그만큼 괘 풀이가 어렵고도, 깊은 경륜이 필요합니다.

컴퓨터 코드체계에선 코드를 빌어 수리학적인 양화(量化) 자체로 만족합니다.
그리고, 이를 기초로 놀라운 computing power 즉 속도와 省力을 빌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양적인 능력이 질을 변화시킬 정도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주역에선 코드를 빌뿐 아니라, 그 코드 자체에도 의미를 부여합니다.
예컨대, 효사, 괘사라는 것을 잘 살펴보면,
그 코드 즉 효상(爻象), 괘상(卦象)에 입각한 풀이가 적지 아니 목격됩니다.
이는 부호(符號)에 의미를 부여하는 동양철학적 전통에 기인하는 바이니,
漢字 역시 자형 하나하나의 형상이 뜻을 갖춤과 같이
괘상(卦象)에서 뜻을 길어올리고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점복(占卜)기능 즉 “미래 예측”이란 실용적인 목표도 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오해가 있기에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주역에서의 점이란 점복(占卜)이 아니라 점단(占斷) 기능으로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단순히 미래에 대한 예측을 구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진인사대천명이니,
人智로서 최대 궁리한 마지막에 이르러,
어쩔 수 없이 남겨진 결정 불능한 선택지중에서 하나를 주역 점을 통해 묻는 것,
그리고 이 물음에 답하여 괘를 하나 얻고(得卦), 푸는 것(解卦)이 곧 점단(占斷)인 것이지요.
그러하니, 주역에서의 점이란 피동적으로 물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decision making 과정에서 인간으로서의 최선을 다하고,
마지막에 이르러 주역을 통해 조언을 얻고자 하는
주체적인 행위여야 하는 것입니다.

1980년대 존 케이지란 작곡가가 스즈끼의 영향을 받아 주역에 심취하였습니다.
그는 주역 점을 쳐서 작곡을 하고 이를 chance operation이라 했었지요.
곧 괘를 무작위로 얻어내고, 이를 토대로 음표, 악기 등을 선택해서 작곡을 하였습니다.
하니, 이것은 실제론 주역을 난수(亂數)발생기로 이용하였을 뿐,
참다운 주역의 경계에 들지는 못하였던 유치한 노름에 다름 아니지요.
산가지가 아니라, 윷으로, 공깃돌로는 왜 아니 우연성(chance)을 만들어내지 못하겠습니까 ?
미아리 점집에 틀어박힌 설 배운 점쟁이라한들,
하다 못해 점치로 온, 아낙네 치마폭이라도 들추고,
수심에 찬 얼굴의 깨알 기미라도 헤아려 점사를 농단하지 않습니까 ?
케이지는 주역을 빙자하여 그저 컴퓨터로 random number를 만들어내었을 뿐이니,
그는 미아리 점복자(占卜者)보다 더 주체적인 성의가 없었다 하겠습니다.

건조한 수리학적 숫자 그 자체만 취한 컴퓨터의 코드체계지만,
그를 빌어 구축된 고도의 정보처리 능력은 현재 천하를 제패하고 있습니다.
반면 촉촉이 윤기 흐르는 동양의 주역은 애초 “예측”을 목표로 하였지만,
기껏 누항의 뒷골목에 점사(占事)로 전락하고 만 형편입니다.

물론 상수(象數)외에 의리(義理)를 추구하며 철학적으로 발전합니다만,
성인(聖人)은 논이불의(論而不議)라 하였듯이,
범인(凡人)으로서는 뜻은 아득하니 멀고, 利는 가까이 구하는 바인즉,
주역의 바른 뜻이 널리 실사구시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 것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저들 서양의 dry한 방법론이 외려 “예측”에서도 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예측에 관한 한,
이 미지의 세계를 향한 주역의 점복적(占卜的) 코드화의 기도(企圖)가
순수한 수리학적 코드에 의한 현실 적응형 성공 신화 앞에서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왜 아니 그렇습니까 ?
슈퍼컴퓨터를 돌려 맞춰가는 일기예보를 점복으로 감히 따라갈 수 있겠으며,
수요예측, 의사결정 등 경영정보학적 성과를 점복으로 대체할 수 있겠습니까 ?

하지만 점복기능을 벗어나서 주역을 쳐다보면,
한의학 등에서 보듯이,
易의 기능적 효용은 누천년 내리 우리 곁에서 여전히 확인되고 있습니다.
또한 의리(義理) 역학적 측면에서도 대단히 높은 경지의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易의 실패로 보이는 것들은 실인즉,
어두운 미지의 세계에 갇힌 인간의 미신 내지는 미망에 의한 오용일 따름이지,
易 자체의 실패라 규정할 수는 없다는 위로(?)내지는 희망을 갖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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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모음

bongta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code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 code라는 것이 내뿜어내는 의미가 고정된 것만도 아닙니다.
글 예에서 든 주역의 괘상을 풀이하는 과정 역시 고정된 의미를 향해 달려가지 않습니다.
복자(卜者), 또는 문복자(問卜者)에 따라 동일한 괘상이라도 解卦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정된 의미로 해석되지 않는 code의 세계야말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진실입니다.
저는 그리 생각합니다.

장주의 호접몽처럼 꿈속에 나타난 지시기호의 애매성이
현실세계에서도 여지없이 펼쳐집니다.
저 여자가 싱긋 웃는 모습이 과연 나에게 가진 호감의 징표인가 ?
아니면 비웃음의 code인가 ?
지난 밤 헤어질 때 눈웃음치며 마중하던 “안녕”이란 목소리가
오늘 밤의 “안녕”이란 sign과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
기호가 뿜어내 펼쳐내는 의미들은 실로 부유하는 먼지처럼 석연치 않습니다.
하여, 내 의미망에 명확히 포집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합니다.

관습, 경험, 지식, 환경, 신념.....
내가 가입한 단체, 까페, 정당, 모임....
이런 것들이 얼기설기 쳐진 구조망 속에 놓인 인간들.
우리들은 이들을 포집망 삼아 허공중에 떠도는 의미들을 그럴듯이 잡아채어
일용할 양식으로 삼습니다.

어렸을 적, 동무들과 잠자리채 들고 뚝방에 내려섭니다.
허공중에 날고 있는 잠자리들을 내달리며 어렵사리 잡습니다.
한참 놀이에 빠져 있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면
어둠의 자락이 서서히 내려 개천바닥벌이 가뭇가뭇 떠오르고,
이미 동무들은 집으로 돌아가 버리고 혼자만 남아 있습니다.

종이상자 안에 잡은 잠자리가 전리품처럼 파드득 떨고 있습니다.
하루종일 애썼지만 이미 태반은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허무가 외롭게 버려진 동심을 잠깐 스쳐지나갔겠습니다만,
다음 날도 여전히 잠자리채 들고 동무들과 함께 다시 뚝방을 내려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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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無常한 의미를 애써 잡아 고정시키지만,
때 되면, 그 의미는 움켜진 손가락 사이를 물처럼 빠져나가버립니다.
곧 허무하게 사라질 의미들을 고정시키려는 의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
그렇게라도 동여맨 의미들에 의지하여
집을 짓고, 짝을 지으며, 사랑을 노래하고, 때로는 분노합니다.

단 100년 남짓이면 모두 허물어지고 말 것들이지만,
대개는 그 뒤엔 아무도 당신을 기억하지 않을 것이지만...
이리 하지 않으면 당장, 풍랑 심한 이 바다 위에서 살아 남을 수 없다고 믿습니다.
그리하기에 그것이 영원하리란 욕망을 푯대 세워 이 밤을 지새웁니다.
이를 누군가는 미망이라고 했습니다만, 그게 욕심이 되었든 어리석음이 되었든
대개는 그리 이 한 세상을 버티어냅니다.

하지만,
그 의미들이 파닥거리는 잠자리처럼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는 갈퀴쥔 손을 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음 날 다시 새 것을 움켜질 것을 예정하고 있듯이,
우리는 그렇게 어제를 버려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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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돌이”라 이름하는 이들의 그 욕망 방정식이 저는 너무 허무해서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그러하기에 부처는 감히 자신까지도 쳐바르라고 유혹하고 있음이 아니겠습니까 ?
하물며 한 인간이 한 인간을 향해 빠짓을 하는 것은 대단히 슬픈 형식입니다.
거기 빈 틈이란 없습니다.
도대체 거긴 허물도, 비판도, 존재하지 않는 유리알 같은 지고지순의 순결만이 있단 말입니까 ?

옛날 충효를 지고의 가치로 머리위에 이고 살던 시대에서도,
정작 충신들은 목숨을 담보로 왕에게 간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 시절 왕에게 보비위나 하던 “王빠”들을 지금 사람들은 간신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항차 지금처럼 개명한 세상에서 “빠돌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

저들 충신들을 인자(仁者) 또는 지사(志士)라고도 합니다.
어진(=현명) 이들, 뜻을 지킨 이들.
하여 정작 “왕빠”란 칭호는 저들에게 바쳐져야 합니다.
지사란 이리 비판의식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피어냅니다.

- 지지자라 밝히신 kkk님의 앞 선 글 제3편을 읽었습니다.
사뭇 완곡하게 처리하신 비판의 강도가 저로서는 아쉽더군요. ㅎㅎ
쉽지 않은 일이셨겠지만,
저로서는 비판 없는 지지란 도시 생각해볼 수 없는 것이기에
그 글을 감사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저는 표를 보탠 이였으나, 빠도 아니고 지지자도 아닙니다.
저는 정치 허무주의 성향이 강한 편입니다.
하기사 삶 일반이라 한들 다를 바도 없습니다만. -

봄이 되면 이내 얼었던 땅도 풀어집니다.
사시장철 꽁꽁 언 땅에 서 있는 저들 “빠돌이”는 계절의 미아에 불과하단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슬프다고 하였습니다.

궁즉변(窮則變),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 구즉생(久則生)
만물은 변합니다.
주역 역시 이리 변함의 이치를 설하고 있습니다.
언 땅에도 봄은 돌아옵니다.
그 봄을 맞이 할 국량(局量)이 없는 한, 저들은 늘 겨울지기일 따름입니다.
봄은 우리에게 code란 항구적인 의미로 읽혀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다시 찾아옵니다.
그러하니 모든 봄은 햇봄, 신춘, 새봄으로 불리워지며,
여늬 계절과 달리 그 “새로움의 덕”이 사뭇 새겨져 칭송되고 있는 것입니다.

형영상조(形影相弔)

형상과 그림자가 서로를 조상하고 있음이니,
때론, 세상은 자신의 그림자만이 위로가 되기도 합니다.
고독하니 홀로 제 그림자를 벗삼아 울 수도 있어야 하지 않을런지요 ?

아마도 짐작하건데, “빠돌이”는 홀로 울기가 무섭게 두려운 존재가 아닐까요 ?
울어야 할텐 데,
혼자서는 무서워 울지도 못하는 겁쟁이.
그래서 기어히 꼬깔모자 속으로 숨어든 존재들.
그래서 저는 모든 빠들을 가엽다고 감히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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