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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의 졸기

소요유 : 2013. 11. 28. 10:18



肅補 21卷, 15年(1689 己巳 / 청 강희(康熙) 28年) 6月 3日(戊辰) 1번째기사
전 좌의정 송시열의 졸기

○戊辰/殺前左議政致仕奉朝賀宋時烈。 時烈以元子定號後, 陳戒疏語, 重觸上威怒, 群憾遂躍然, 朋譖慫慂, 旣栫棘海島。 繼有合辭之請, 欲必殺而後已。 命按法金吾郞, 旣以拿來出, 旋又命賜死於所遇處, 竟受後命於井邑道中。 時烈以三朝元老, 死於非罪, 國人冤之。 時烈英毅剛果, 氣力絶人, 崇尙氣節, 自少受學於金長生, 周旋於金集、宋浚吉、尹宣擧、兪棨諸賢之間, 漸磨麗澤, 知見日博, 勉强砥礪, 操履甚確, 力於拘檢, 勇於擔負, 自任以法朱子、尊李珥, 爲一生家計。 持論峻截, 臨事勇往, 有足以驚動聳伏人者, 自處間有太過不近情, 而論者不敢非之, 以復讎大義, 際遇孝廟, 一世名卿賢士, 多出其門。 己亥論喪服, 守正義。 甲寅被群小毒螫, 旣竄置嶺海。 又請告廟, 跬步刀鉅。 然士流益傾嚮推重, 名論如山斗, 爲儒林宗師者, 幾五十年。 議禮以後, 頗以愛憎爲是非, 且參涉朝論, 大官要路, 黜陟與奪, 多由之。 而亦復任情取舍, 每一言自懷德來, 人莫敢違。 少有拂逆, 雖平生服事者, 卽齟齬, 識者已深憂之。 及庚申造朝, 出處多可議, 追上尊號之論, 見笑於識者。 伸救益勳之言, 背馳於淸議, 士流漸益失望。 而若其所以處朋友師生之間者, 前後決裂違背, 不成道理。 晩年言議, 尤猖狂, 多失常度, 全非有道人口氣, 遂令士趨潰裂, 世道盪潏。 時烈旣不能保有其名德, 而國與受其敗焉。 君子以是歸之於時運焉。 蓋時烈居大不疑, 而實無才具。 氣麤學踈, 而素欠涵養。 過於剛厲, 而少怛恒之仁。 役於名目, 而無體驗之功。 自許以衛護斯文, 而不免爲黨習乖激之歸。 自勉以發明大義, 而乃反有偏伯假借之病。 始也能痛刮磨硬, 把捉言行, 傑然爲一時所服, 而君子固疑其學術之未純。 及其血氣旣衰, 自治漸疎。 經歷乎世禍, 而忿嫉旣勝。 習熟於導諛而主張太過, 矯楺之力旣微, 執拗之性難回。 私意之所作弄, 親黨之所詿誤, 擧措郞當, 辭氣忿懥, 視盛年殆若別人, 君子尤惜其大名之不終。 然朴世采嘗論: “時烈, 以爲出以大義, 死於士禍, 有不可甚攻之者。” 又或取其言云: “時烈之死, 雖平日異議者, 亦莫不憫憐。 況其被禍, 何與於山林自守之尹拯?”而修初史者, 必與賊鑴, 竝稱爲兩憾, 有若以拯爲輕重於禍機者然。 夫庚申以前, 誰復助鑴而必欲殺時烈也耶? 其亦太不成說。 直是兒童之見。 而自謂此等言, 可以快意。 誣辱於暗地, 譸張至此, 殊不知自公眼觀之, 殆不滿一笑, 其〔亦〕痛矣。

숙보 21권, 15년(1689 기사 / 청 강희(康熙) 28년) 6월 3일(무진) 1번째기사
전 좌의정 송시열의 졸기

전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을 죽였다. 송시열이 원자(元子)의 명호를 정한 뒤에 진계(陳戒)한 상소의 말이 임금의 위엄과 노여움에 거듭 저촉되어 모든 감정이 드디어 폭발하고 붕당(朋黨)의 참소가 이를 종용(慫慂)하여, 해도(海島)에 위리 안치(圍籬安置)된 뒤에 이어서 합사(合辭)의 청함이 있어, 반드시 죽인 뒤에 말고자 하였다. 금오랑(金吾郞)410) 에게 안법(按法)하기를 명하여 이미 나치(拿致)해 오게 하였는데, 문득 또 만나는 곳에서 사사(賜死)하기를 명하여 정읍(井邑) 길 가운데서 후명(後命)을 받았다. 송시열은 삼조(三朝)411) 의 원로(元老)로써 죄가 아닌 데도 죽었으므로 나라 사람이 원통해 하였다. 송시열은 영의 강과(英毅剛果)하고 기력(氣力)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기절(氣節)을 숭상하였다. 젊어서부터 김장생(金長生)에게 배우고, 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유계(兪棨) 등 제현(諸賢) 사이를 두루 다니면서 점차 갈고 닦아, 서로 도와서 알고 보는 것이 날마다 넓어졌다. 힘쓰고 가다듬어서 지조와 행실이 심히 확실하여 구검(拘檢)412) 에 힘쓰고 담부(擔負)413) 에 용감하여 주자(朱子)를 본받고 이이(李珥)를 존경하는 것으로 자임(自任)하여 일생의 가계(家計)로 삼았다. 지론(持論)이 준절(峻截)하고 일에 임하여 용감히 추진하여 족히 사람을 놀라게 하고 감동시켜 복종하게 하는 바가 있었고, 자신의 처사하는 사이에는 너무 지나쳐서 인정에 가깝지 아니함이 있었으나, 논하는 자가 감히 비난하지 못하였다. 복수(復讐)414) 의 대의(大義)로써 효묘(孝廟)의 지우(知遇)를 만났고, 일세(一世)의 유명한 재상과 어진 선비가 그 문하(門下)에서 많이 나왔다. 기해년415) 에 상복(喪服)을 논하였을 적에 정의(正義)를 지켰고, 갑인년416) 에 뭇 소인(小人)의 독한 모함으로 영해(寧海)에 귀양갔는데, 또 고묘(告廟)하기를 청하여 한 걸음 사이에 도거(刀鉅)가 있었으나, 사류(士流)가 더욱 마음을 기울여 복종하고 존중하여 명론(名論)이 태산(泰山)·북두(北斗)와 같이 높아서 유림(儒林)의 종사(宗師)가 된 지 50년이 되었다.
 
그러나 의례(議禮)417) 이후로는 자못 애증(愛憎)으로써 시비(是非)를 삼고, 또 조정의 논의에 참여하고 간섭하여 대관(大官)과 요로(要路)를 내치고 올림과 주고 빼앗는 것이 송시열에게서 말미암음이 많았으며, 또한 다시 뜻에 따라 취하고 버렸다. 한 마디 말이 회덕(懷德)418) 에서 나오면 사람들이 감히 어기지 못하였고,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바가 있으면 비록 평생을 복종해 섬긴 자라고 하더라도 곧 서로 불화하였으니, 의논하는 자가 깊이 이를 근심하였다. 경신년에 조정에 나감에 이르러, 출처(出處)에 의논할 만한 것이 많았으니, 존호(尊號)를 추상(追上)하는 논의는 식자(識者)들에게 비웃음을 당했고, 김익훈(金益勳)을 신구(伸救)한 말은 청의(請議)에 배치되므로 사류(士類)가 점점 더 실망하였다. 그 붕우(朋友)와 사생(師生) 사이에 처우하는 바가 전후에 결렬되고 위배되어 도리를 이루지 못하였으며, 만년(晩年)에 말과 의논이 더욱 창광(倡狂)하여 상도(常度)를 잃음이 많아 전혀 도덕[道]이 있는 사람의 구기(口氣)가 아니었다. 드디어 선비의 추세(趨勢)가 분열되고 세도(世道)가 어지럽게 되자 송시열은 이미 명덕(名德)을 보전하지 못하고 나라와 더불어 패망하게 되었으니, 군자(君子)는 이를 시운(時運)에 돌린다.
대저 송시열은 크게 의심되지 않은 데 있었으나, 진실로 재주를 갖춘 것이 없었으며, 기질이 거칠고 학문이 허술하여, 본래 함양(涵養)함이 없고 강(剛)함과 엄함이 지나치며, 가엾이 여기는 어짊이 적었다. 명목(名目)에 끌렸으나, 체험의 공(功)이 없었으며, 스스로 사문(斯文)419) 을 위호(衛護)하면서 당습(黨習)의 괴격(乖激)함으로 귀착됨을 면하지 못하였다. 스스로 대의(大義)를 발명(發明)하여 힘쓰면서도 도리어 패도(覇道)에 치우치고 〈인의(仁義)〉를 가차(假借)하는 병이 있었다. 처음에는 능히 통렬하게 갈고 닦으면서 말과 행실을 굳게 잡아서 우뚝하게 한 때 사람들이 복종하는 바가 되었으나, 군자(君子)는 본디 그 학술(學術)의 순수(純粹)하지 못함을 의심하는데, 그 혈기가 이미 쇠하게 되자, 스스로 다스림이 점점 허술하고 세상의 화(禍)를 겪어서 분함과 미워함이 이미 치우쳤다. 인도하여 아첨함에 익숙해지고 주장이 크게 지나치고 바로잡는 힘이 이미 약하여, 집요(執拗)한 성질을 돌이키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농간을 부리고 친당(親黨)이 그르치는 바가 되어 거조(擧措)가 낭당(郞當)420) 하고 사기(辭氣)가 분치(忿懥)421) 하여 젊은 시절에 비하면 거의 딴 사람과 같았으므로, 군자(君子)가 더욱 그 이름을 끝까지 보전하지 못함을 애석해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朴世采)가 일찍이 송시열을 논하기를, ‘대의(大義)로써 나와서 사화(士禍)에 죽었으니, 심히 공격할 수 없는 것이 있다.’고 하였으며, 또 혹자는 그 말을 취하여 ‘송시열이 죽자 비록 평일에 의논이 다른 자라도 가엾이 여기지 아니하는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하물며 그 화(禍)를 입음이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지조를 지키는 윤증(尹拯)에게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초사(初史)를 편찬한 자가 반드시 적휴(賊鑴)422) 와 더불어 두사람의 감정(憾情)을 아울러 일컬어서 윤증을 화기(禍機)에 경중(輕重)이 있는 것과 같이 여김이 있었으니, 대저 경신년423) 이전에 누가 다시 윤휴(尹鑴)를 도와서 송시열을 죽이려고 하였겠는가? 그것도 크게 말이 되지 아니하며, 단지 아이의 소견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같은 말을 가지고 마음에 쾌하게 할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여 암암리에 속이고 욕하며 거짓으로 과장하기를 이와 같이 하였으니, 공정한 눈으로 보면 자못 한 번 웃을거리도 되지 못하는 것을 알지 못하니, 또한 마음이 아프다.
 
(src: http://sillok.history.g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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