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형 만한 아우는 없는가 ?

소요유 : 2008.07.03 09:41


본 글은 보나세란 사이트에 걸린 이독제독, 이명박 퇴진 불가론 등의 일련의 글을 읽고 불현듯 떠오른 감상이다.

“아버지 만한 아들 없다.”
“형 만한 아우 없다.”

과연 그런가 ?
이 질척거리는 세상, 선행하여 앞 길을 인도하는 이가 있어 그지없이 다행인가 ?
아우는 형 밑에서라야 오로지 안전과 행복을 구할 수 있단 말인가 ?

형이 펼치는 세계,
폭제와 억압이 있다한들,
못난 아우인즉 감수하여야 할 노릇인가 ?
아우의 명운(命運)이니 체념할 수밖에 없는가 ?

정녕 그러한가 ?

아버지가 유고(有故)하면 아들이 나서고,
형이 죽으면 아우가 이를 대신할 수 없음인가 ?

하늘은 가뭇하니 거칠고 허랑한 것 같지만,
죽은 자 다음을 푸르게 예비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억조창생(億兆蒼生) 늘 생명은 蒼蒼한 게다.
뿐인가 ?
사람은 하늘보다 더 독하다.

“하늘이 정(定)하면 사람을 이긴다지만,
사람이 정하면 하늘을 이기는 수도 있다.”

천하에 형 만한 아우는 비온 뒤 죽순처럼 속속 돋아 가득하다.

천도(天道)만 탓하고 나자빠져 있을손가 ?
사람 일은 사람이 구(救)하는 것,
마지막 하나의 사람이 남아 있는 한,
기어히 사람은 천도를 이길 수 있다.
게으른 사람은 뒤늦게 깨어나,
나중에 이를 천도라 부른다.
그러한즉, 정작 천도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아우는 형을 죽임으로서 다음을 살고,
아들은 아비를 죽임으로서 새 세상을 연다.

이 아니 경이로운 세상인가 ?
피가 뚝뚝 듣는 세상은 그래서 아름답다.

핏빛 장미 역시 그래서 처연히 아름답다.
그저 빨간 장미는 장미가 아니다.
피 먹은 장미.
나는 이를 복례(復禮)의 지극함이라 이른다.
자기 검속(鈐束)을 피로 완료한 장미.
순결의 비녀장, 은장도 품고,
옥비녀 꽂은 아낙의 검은 쪽머리는
그래서 차라리 핏빛으로 붉어 보인다.
저 처연한 아름다움이라니.
아낙 쪽머리에 피빛 장미가 꽂혀 있는 환영을 볼 때,
나는 비로소 고개를 숙이고 예를 갖춘다.
정녕 여자를 뵈인 게다.

파토스는 그러하기에
붉은 피가 흐르지 않으면 공허한 외침이 되고 만다.
촛불집회에 폭력이 있든, 없든
거기엔 이미 눈물과 피가 흐른다.
눈물과 피 듣는 소리가 가슴을 쏴하니 지나고 있는 한,
그것은 이미 폭력의 현존이나 부재를 넘고 있음이다.

그러하므로,
세상의 시래배 아들놈들에게 나는 타이른다.

“아우는 제 형을 죽이고,
아들은 제 아비를 죽여라.”

평화와 사랑을 구하는 이는
주저없이 앞 선 이를 주륙(誅戮)하여야 한다.
내가 나임을 증거하는 길은
형 뿐인가, 아우라도 전부 참살(慘殺)함으로서 징험할 수 있음이다.

어느 아들이 있어, 지레 찌그러져 머리 조아리고,
제독(制毒)을, 불가(不可)를 외치는가 ?
차라리 달려가 저들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를 드려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간에 경배를 드리는 이를
나는 누구라도 건드리지 않는다.

그게 노빠가 되었든 황빠든, 명빠든, 박빠든,
한미FTA빠든, 미국쇠고기빠든 ...
그 슬픈 형식들을 나는 차라리 사랑한다.
하지만, 저 나약한 아들들은 어찌 저리 딱하여 차마 막 뱉어줄 말조차 아까운가 말이다.

나는 피아불문 오로지 도부수(刀斧手)만을 찬(讚)할 뿐인 것을.
배만 불룩불룩 울어대는 맹꽁이를 행여 대하랴.

살불살조(殺佛殺祖)란 말은 구상유취 너무 나약하다.
부처뿐이 아니고, 죽이려면 세상 천하를 모두 죽여야 한다.
이 때라서야, 문득,
눈을 들어 푸른 하늘 쳐다보매,
천하인이 노래 부르고, 춤을 춘다.

살불살조
어중이떠중이 척하면 말은 뱉어내지만,
목을 치기는커녕, 미쳐 쓰다듬지도 못한 이들이,
제독을, 불가를 말하며 점잖은 양, 의뭉을 떤다.
물 부른 방죽가에 늘어선 줄남생이도 하품은 그럴싸하다.
삼년 독수공방 과부년 제 허벅지 사이를 자줏빛 가지로 북북 긁어댄들,
개울창 건너다 넘어져 시름시름 앓는 한낱 거렁뱅이 살송곳을 당할손가 ?
기러기 소리를 들으면 가난한 이들은 뱃속까지 춥다고 한다.
염천지절, 아직 오지도 않은 기러기 소리를 홀로 들었나 떨기는 왜 떠나 ?
국 쏟고 좃 데는 꼴이지,
제독씩이나 하고 나자빠질 저 용렬함이라니.

그러하니,
천하인은 천하인을 죽임으로서만
온전히 평화로운 세상을 열 수 있을 뿐이다.
이 말씀이야말로
이 예토(穢土)의 복음(福音)이요,
이내 길음(吉音)이다.

고마운 일이다.

끝으로, 도마복음 한 귀절 인용하며 그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구하는 자는 찾을 때까지 구함을 그치지 말지어다.
찾았을 때 그는 고통스러우리라.
고통스러울 때 그는 경이로우리라.
그리하면 그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리라.”

Jesus said,
“He who seeks should not stop seeking until he finds.
When he finds, he will be troubled.
When he is troubled, he will marvel,
and he will rule over all.”

'소요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상(象)과 형(形)  (3) 2008.07.11
역겨움  (0) 2008.07.08
방(方)과 원(圓)  (4) 2008.07.07
형 만한 아우는 없는가 ?  (2) 2008.07.03
富와 貴  (6) 2008.06.27
성황당(城隍堂)  (3) 2008.06.22
찔레꽃  (7) 2008.06.07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1. 아프냐 2008.07.05 02:22 PERM. MOD/DEL REPLY

    사람 일은 사람이 구하는것 정녕 그러합니다 모두가 신령한데 부당한 기득권이 웬말입니까? 두려워하는 노예들은 접어버리고 아버지에게 형에게 시퍼런 칼날을 들이대는 구함을 예수는 부처는 말했습니다. 적당하고 얄팍한 평화야말로 우리가 분노해야할 추악함입니다. 도마복음 예수 가라사대 인용하신 구절에 한참을 바라보며 되뇌였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날조된 일상을 살고 있는지요...

  2. 사용자 bongta 2008.07.07 14:55 신고 PERM. MOD/DEL REPLY

    이 글에 이어 약간의 과녘을 빗긴 것으로되,
    글 하나를 방금 하나 더 지어보았습니다.

    모난 곳에 사는 이들의 모난 해법.
    세상을 향한 모난 方의 복권(復權)을 한번 꾀해보았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무엇이 참일까요 ?
    이리 되뇌어 보며 안개 낀 듯한 산숲을 쳐다봅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