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범려(范蠡)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1. 16:27


중국에서는 미인이라 하면 예전부터 모장(毛嬙)과 서시(西施)를 꼽고 있다.
관자(管子)에도 "모장과 서시는 천하의 미인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들은 어떠한 여인들이었는가 ?
모장에 대하여는 "월나라 왕의 미희(美姬)였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자세한 설명은 없다.
그러나 서시에 대하여는 오월춘추에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제 소개하려는 범려(范蠡)를 떠올리면, 서시 역시 그 곁에 서성거리며 다가온다.
이에 잠깐 분단장한 그녀를 새겨보았다.

범려는 누구인가 ?
희대의 거부(巨富)로 중국인으로부터 가장 흠모를 받는 이다.
이제 칼럼을 시작하면서 이곳 온라인 마켓터들에게 소개하기엔 범려가 제일 알맞지 않은가 싶다.
거만의 부를 일구었지만, 담백한 처신으로 온고지신하기엔 적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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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범려, 출처 : 三十六計經典故事)

자 그럼 이야기를 풀어보자.

오월춘추에 의하면 서시는 와신상담(臥薪嘗膽)의 고사로 유명한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 이야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서시를 이야기 하기 전에 와신상담의 고사를 간단히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춘추시대 말기 중국 강남 지역에 제법 세력이 강성하였던 오, 월 두나라는 철천지 원수관계였다.
우리나라에 널리 알려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두나라가 바로 이 나라들이다.
십팔사략에 의하면 월나라 왕 구천(句踐)에게 부왕 합려가 패하여 죽자
오나라 왕이 된 부차(夫差)는  부왕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아침 저녁으로
장작 위에서 잠을 자며(臥薪) 복수의 의지를 불태웠다.
마침내 월나라 왕 구천과 싸워 회계산에서 항복을 받아낸다.
포로로 잡힌 구천은 거짓 충성을 다하여 몇 년만에 요행이 풀려나 월나라로 돌아가게 된다.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자기 방에 걸어논 동물의 쓸개를 항상 혀로 핥으며(嘗膽)
“회계산의 패배와 그뒤의 치욕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자신에게 이르며 복수를 위한 치열한 집념을 불태운다.
그리고는 결국 오나라를 멸망시킨다.

이것이 간략히 알아본 와신상담의 고사다.
십팔사략에는 이렇듯 와신한 사람이 부차고, 상담한 사람이 구천이라고 확실히 구분되어 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에는 구천의 상담에 대하여는 기록되어 있지만,
부차의 와신에 대하여는 논하고 있지 않다.
오월춘추란 책에 의하면 와신, 상담 모두 구천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십팔사략은 사기나, 오월춘추에 비하여
훨씬 후대의 사서이므로 최소한 이 이야기에서만큼은 이들에 비해선 조금 미덥지 않다.
아마도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이끌려고 각색하지 않았는가 하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지금 현대에 사기나, 오월춘추를 따르지 않고 십팔사략을 인용하여
와신상담의 고사를 얘기하는 것만 보아도 십팔사략쪽이 훨씬 드라마틱한 유인 요소가 있다.

1980년대 후반 호북성 강릉지방에서
옛 묘에서 오나라 왕 부차의 기명(記銘)이 새겨진 검(劍)이 발견되었다.
그 이전에는 이 근처 묘에서 이미 월나라 왕 구천의 검이 발굴된 일이 있다.
이들 와신상담의 두 주인공 검이 모두 발굴된 셈이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전 아득한 옛날,
원수지간이었던 두 나라 왕의 검이 발견된 것이고 보니 와신상담의 고사가 더욱 현실감 있게 다가온다.
인걸은 스러졌지만 검만이 그 역사의 현장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월나라 왕 구천이 쓸개를 핥으며 복수의 집념을 불태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오월춘추의 기록에 의하면 구천은 문종(文種)이란 신하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알기엔 오나라 왕 부차는 색을 좋아하여 여자에 넋을 잃고 정치를 잘 돌보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를 이용하여 계략을 세울 수도 있다고 보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떠한가 ?”
“좋은 생각이십니다. 이 기회에 미녀를 바쳐서 부차의 혼을 빼 버리는 좋겠습니다.
그러나 보통의 미녀로는 안됩니다. 절색에 재능을 갖춘 미녀이어야 할 줄로 압니다.”
“그 계책이 좋겠소.”

이렇게 하여 발굴된 여인이 서시다.

병법서 삼십육계에도 제31계에 미인계라는 것이 있다.
역시 병법서의 하나인 육도(六韜)에도
“진주와 구슬을 많이 바치고 미인을 바쳐 즐기도록 한다.”
“미녀의 음탕한 소리를 항상 가까이 있게 하여 이를 타락시킨다.”라고 쓰여 있다.

서시는 월나라의 저라산(苧蘿山) 속에 살던 장작장수의 딸이었다고 한다.
아무리 미녀라 하지만 처음엔 촌뜨기 시골여자에 불과했다.
구천은 서시를 도성 안으로 불러들여 예의범절을 가르쳤음은 물론 화장하는 법,
미태 연출법 등 철저하게 비밀 특별교육을 시킨다.
이 훈련은 3년간 계속되었다고 한다.
역시 느긋한 중국인 답다.
우리나라 같으면 3년씩이나 복수를 위해 참아낼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나라의 왕을 사로잡기 위한 일이니 그리 허술히 준비할 일은 아니었을 게다.

서시는 어떠한 타입의 여인네였을까 ?
장자에는 빈방(嚬倣)이라하여 찌푸리는 것을 모방하다란 말이 나온다.
빈(嚬)이란 곧 눈을 찌프린다라는 뜻이니, 이 이야기의 사연은 이렇다.
서시가 한참 훈련을 받고 있을 때,
가벼운 가슴 통증에 시달려 고향인 저라산으로 돌아가 휴양을 취하게 되었다.
서시는 고향에 돌아와 가슴에 통증이 올 때마다 가슴에 손을 얹고 미간을 찌푸리곤 하였다.
이럴 때마다 이 미녀는 더욱 아름다워 보였으니, 마을 사람들은 모두 넋을 잃게 되었다.
서시의 찡그린 상이 아름다움을 더하니,
그 마을의 가장 추한 계집도 상만 찡그리면 아름답게 보이는줄 알고
자기도 서시의 흉내를 내며 돌아다녔다.
그러자 이 추녀가 보기기 싫어 마을 사람들이 나돌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는 장자(莊子)에 소개가 되어 있을 뿐 아니라,
홍루몽(紅樓夢)의 여주인공 임대옥(林黛玉)의 별명이 빈아였던 것도 이 서시를 상사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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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시, 출처 : 三十六計經典故事)

그녀가 언젠가 강변을 거닐고 있었는데, 맑은 강물에 그녀의 모습이 비추었다.
물속에 노닐던 물고기가 그 모습을 보고는 헤엄치는 것을 잊고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래서 서시는 침어(沈魚)란 별명도 갖고 있다.

서시보다는 훨씬 후대의 미녀지만 당나라의 양귀비는 풍만한 타입이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반해
서시는 나긋나긋한 타입의 미녀였다.
서시가 3년간의 특별 훈련을 받고 재상인 범려를 따라 오나라 왕 부차에게 바쳐진다.
부차는 서시를 한번 보고 반해 측실로 들이고 총애했다.
바야흐로 미인계가 먹히는 형국이었다.

그런데, 일설에 의하면 서시가 부차에게 가기전에 범려와 이미 은밀하게 정을 통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지기(吳地記)란 책에 의하면
‘가흥현 남쪽 백리되는 곳에 어아정(語兒亭)이란 정자가 있다.
구천은 범려를 시켜 서시를 훈련시킨 후 부차에게 바치게 했다.
서시는 그동안 범려와 은밀하게 정을 통하다가 3년만에 오나라에 갔다.
서시는 한 아이를 낳았는데 이 정자에 이르렀을 때 1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어아정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기록에 따르면 서시는 부차에게 가기전에 범려와 이미 관계를 맺고 아이까지 생산하였던 것이다.
이 기록의 진위 여부는 지금으로선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르는 촌 아이를 데려다 3년간 갖은 남자 후리는 법을 교육시켰으니
그동안 총책인 범려가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교정(交情)할 수 있었으리라.
한편 상대 적국에 간자를 보내는 마당이니 실수가 있으면 안될 일.
모종의 안전책으로 의도적으로 정분을 통하고 아이까지 생산하게 하여
이를 인질로 서시의 변심을 막았을 수도 있으리라.

서시를 오나라에 보내 효과가 어떠했는지에 대하여는 소상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부차는 월나라를 가볍게 여기고 방심하고 있다가 구천에 의해 멸망되었으므로
서시에 의한 미인계가 전혀 효과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이 글의 주인공인 범려와 관련성을 더 추적해보자.
부차가 구천에게 패하여 죽고난 후, 서시의 운명에 대하여는 두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부차가 월나라 군사에 쫓겨 자살한 뒤,
서시는 오나라 군사들에 의해 장강에 빠져 죽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의 설은 범려에게 구조되어 후에 범려가 월나라를 떠나 제나라로 갈 때,
함께 가서 행복한 여생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아정의 전설과 범려에 의한 구조.
이 둘 모두 범려와 관련되어 있다.
범려 정도의 인물이라면 인심수람의 달인이라 할 터.
3년간 훈련 시키면서 미인계 작전의 완수를 위해서라도 서시로부터의 신뢰를 담보하지 않고서는
애시당초 훈련의 성과란 무의미한 것이었으리라.

더욱이 천하의 절색이니 이 양인 사이에 정분이 난게 그리 부자연스럽지도 않다.
또 하나는 후에 얘기 하겠지만 범려의 인물됨이 진퇴가 말끔하니
구천에게 복심으로 충성만 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작전 성공만을 위해 남녀간의 연정을 굳이 자제할 소이도 적다.

서시와 같은 절세 미인을 잡아 죽인다는 것도 마땅한 설정이 아니다.
당시엔 미인이란 하나의 옥, 구슬 같은 패물, 재물에 불과하였기 때문이다.
누가 취하든 귀한 재보로 기능할 것을 그리 쉽사리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았았으리라. 
더욱이 배후엔 범려가 있다.
만약 범려와 서시 사이가 범상치 않은 관계라면 더욱 범려가 사전에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

20년간 구천 밑에서 봉직하며 부차를 죽이고 오나라를 멸망시킨 일등 공신인 범려이지만,
마냥 충신이라고만 할 수 없다.
오나라 부차를 꺾은 후 범려는 상장군에 임명되었다.
바야흐로 그의 영화가 극에 다다랐다고 모두가 생각하였다.
그러나 범려의 생각은 달랐다.

“지나치게 큰 명성을 얻으면 다른 사람의 질투와 원한을 사고 일신이 위태로와 진다.
그런 자리에 오래 있어서는 안된다.
더구나 구천은 어려움은 같이 할 수 있어도 안락함은 함께 할 수 없는 위인이다.”
이렇게 생각한 범려는 완곡히 사임의 뜻을 구천에게 전한다.
그러나 구천은 범려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았다.
“이 월나라의 반을 그대에게 나누어 주어도 좋으니 제발 사임만은 하지 말시오.”
하고 구천은 극구 말렸다.
범려는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 나라를 떠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만약 그냥 남아 있다가는 어떤 화가 닥칠줄 모른다.
범려는 귀중한 보물을 챙긴 후 가족을 이끌고 월나라를 탈출한다.

여기서 잠깐 필자는 한식(寒食)의 주인공인 진(晉)나라의 개자추(介子推)가 생각이 난다.
설이 분분하나 개자추 역시 면산에 숨어 벼슬을 사양했다.
공은 함께 이루나, 그 과실은 함께 하지 못하는 것.
떡은 함께 만드나, 먹는 데 이르러서는 혼자 다 먹는 것.
이게 인심의 향배다.
개자추, 범려 모두 이런 인성의 깊은 곳을 찰지(察知)한 인사들은
사물의 극에 이르렀을 때,
미련없이 모든 영화를 내던지고 물러나 명을 보전한다.
이를 일러 명철보신(明哲保身)이라 한다.

그러나 아깝게 개자추는 불에 타 죽는다.
전설엔 숨어 있지 말고 나오라는 권유에 개자추가 나오지 않으니,
그를 나오게 할 요량으로 면산에 불 연기를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즉 연기속에 부러 죽여버리고 싶은 권력자의 의지가 읽혀진다.
핑계 삼아 죽일 작정으로 불을 질렀던 게 아닐까 ?
공을 이룬 자를 곁에 두고, 이룬 과실을 나누지 않고 인색하기엔 여러 모로 성가시다.
그러니 아예 제거하고 싶은 것이다.
왜 그런가 ?
공을 이룬 자는 아무래도 이를 빌미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아무리 임금이라지만
그들에 대한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없다.
절대 권력자는 권력을 온전히 혼자 다 장악하기를 원한다.
이게 권력자와 신하간 통상 성공후 겪게 되는 인심의 곡절인 것이다.

동업이 어려운 점은 일을 꾸며, 성사를 도모하는 과정상의 갈등에 있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성취한 과실을 나눌 때 더욱 부각된다.
왜 그런가 ?
기여도의 평가가 어렵고, 분배가 고르지 않기 때문이다.
평가를 객관화한 사전 장치가 없는 한, 평가란 늘 당사자에겐 미흡하다.
실인즉 기여도, 능력의 정확한 객관적 평가란 거의 불가능한 과제다.
그러니 불만이 쌓이고, 상대에 대한 불신은 높아만 간다.
동업이 성공하려면 자신의 희생이 필요한 것.
자신이 손해보겠다는 각오가 아니라면 애시당초 동업을 하지 않는 것이
대개의 경우엔 현명한 처사이리라.
오죽하면 도시락 싸들고 쫓아 다니면서 동업은 말리겠다는 속언이 있을까나.

이제 개자추 그는 없다.
그를 기린다며 불 없이 찬 음식을 먹는다는 한식.
그러나, 찬 음식은 고사하고, 그나마 요즘 세태엔 한식이란 명절 자체가 없어질 판이다.
한식, 청명지절에 성묘 가느라 분주하던 시절이 바로 엇그제건만,
이젠 어중이 떠중이도 연휴 해외여행이니 뭐니 하며 즐기기 바쁘다.
때문에 이즈음엔 길거리에 벌초대행 광고만이 빈 거리를 우쭐거리며 나부낀다.
금석(今昔)이 부동(不同)하니 세월이 무상할 뿐이다.

범려는 그 사연을 이미 읽고 있었던 것이다.
범려가 다 늦게 구천의 성격을 이제와서 깨달은 것이 아니다.
진작에 구천은 끝까지 함께 할 위인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서시와의 연분도 국가 대사와는 관계없이 죄의식 없이 맺었을 것이다.
그러니 작전개시 후에도 서시를 구출할 만반의 준비를 은밀히 진행해 두었지 않았을까 ?

월나라를 탈출한 범려는 제나라로 잠입한다.
제나라에 도착한 범려는 고생을 같이한 대부 문종(文種)에게 편지를 써보낸다.
“새를 다 잡고 나면 활은 거두어 감추어지고,
교활한 토끼를 다 잡고 나면 사냥개를 잡아 먹는다(蜚鳥盡良弓藏,狡兎死走狗烹)는 옛말이 있습니다.
월왕(구천)은 목이 길고 입이 새의 부리처럼 뾰족합니다.
이런 상(相)을 가진 인물은 고생은 함께 할 수는 있어도 즐거움은 함께 할 수 없습니다.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경도 하루 빨리 월나라를 떠나는 것이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 우리나라 某 정치인의 탄식하며 토해낸 토사구팽이란 말로 널리 대중에게 알려진
이 말은 원래 한신이 고조에게 잡혔을 때 제 신세를 한탄한 말이다.)

사기(史記) 월왕구천세가(越王句踐世家)의 원문 ▷
范蠡遂去, 自斉遺大夫種書曰:「蜚鳥尽, 良弓蔵;狡兔死, 走狗烹. 越王為人長頚鳥喙, 可與共患難, 不可與共樂. 子何不去?」種見書, 称病不朝. 人或讒種且作亂, 越王乃賜種剣曰:「子教寡人伐呉七術, 寡人用其三而敗呉, 其四在子, 子為我従先王試之.」種遂自殺.

문종은 범려의 편지를 받고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으나, 당장 월나라를 떠나지는 못했다.
그러나 결국은 모반을 꾀한다는 모함을 받고 구천이 보낸 칼로 자살을 강요받는다.

제나라에 정착한 범려는 이름을 치이자피(鴟夷子皮)라고 바꿨다.
치이자피란 말가죽으로 만든 신축성이 많은 주머니를 말한다.
이런 이름을 지은 이유는 신축자재한 이 주머니처럼 모든 명예를 버리고 자유로와 진
자신을 상징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부차가 충언하는 오자서를 죽인 뒤 가죽 자루에 넣어 버렸던 것에서 따온 이름이라고도 한다.

범려는 경제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곧 거만의 재산을 모은다.
해안가 땅을 개간하여 크게 부를 이루었다고 한다.

범려가 이름을 바꾸고 거만의 부를 이루자, 제나라에 소문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제나라의 왕은 그를 재상으로 기용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범려는 이렇게 탄식하였다고 한다.

“벼슬길에 나가서는 재상이 되었고, 물러나서 장사를 하여서는 천금을 벌었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
다시 이름을 세상에 알린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 뿐이다.”

제나라 재상을 거절한 범려는 더 이상 그곳에 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모은 재산을 모두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값비싼 보물만 가지고 도(陶)란 곳으로 몰래 이사를 갔다.
도는 제나라 변두리로 지금의 산동성 지방이다.

도에 든 범려는 이번에는 이름을 도주공(陶朱公)으로 바꿨다.
도에서도 농업과 목축업을 하면서 물가의 변동을 살펴
물자를 사고 팔아 또한 이득을 상당히 보아 바로 거만의 재산을 이루었다 한다.

늘 그렇듯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 전형적인 매점매석의 수법이다.
즉 세상의 형편을 살펴 미리 물건을 싹 쓸이 하여 두었다가, 품귀로 가격이 급등할 때 푸는 방법이다.
현대에는 매점매석방지법이라든가 여러 견제 세력으로 인해 이게 쉽지 않지만,
당시에는 이게 쉽게 통했다.

그래도 이 방법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세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자본, 정보, 배짱.
자본이란 곧 종자돈이니 범려의 경우 최고의 벼슬까지 하였던 처지이니
비록 출분(出奔)한 형편이나 적지아니 챙겨 두었을 것이다.
정보란 무엇인가 ?
중국처럼 광할한 지역에선 타지역의 정보를 선점하면 수단을 부리기 훨씬 쉽다.
예컨대 염광지역의 소금 산출량 동향을 미리 장악할 수 있다든가,
유통망의 목을 쥐을 위치에 있다면,
필요불가결한 생필품인 이를 내륙지방에 공급할 때,
고삐 꿴 소 다루듯 마음껏 농간을 부릴 수 있는 것이다.
소금은 원래 국가 전매품이지만, 고대엔 사매(私賣)가 적지 아니 기승을 부렸다.
왜그러냐 하면 이문이 상당하였기 때문이다.
끝으로 배짱이다.
자본, 정보를 갖추었다고 하여도 예리한 분석과 최후의 결단력을 담보할
배짱이 없으면 병풍에 그린 닭꼴인 것.
범려는 일국의 상장군에 오를 정도로 지혜와 실천적 능력이 뛰어났으니,
삼박자가 고루 갖추었다 할 것이다.

정치인으로서도 성공을 하였지만, 후반 경제인으로서도 크게 성공을 한 범려는
현대 중국인으로부터도 상당한 흠모의 대상이다.
그렇지만 중국인들이 범려를 흠모하는 것은
오나라의 부차를 멸망시킨 재상의로서의 뛰어난 능력이 아니라,
후반의 거만 재산을 모은 재주에 집중된다.

중국인 특유의 현실감각은 범려처럼 수만의 재산을 모으고,
더하여 서시같은 미녀를 취하여 인생을 즐기기를 소망하는 것이다.
서시와 범려간의 전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런 이야기들이 생명력을 얻어 지속되는 것은
이와같은 중국인의 세속적인 현실욕에 기초한 심리적 요인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이리라.

사물이 극에 다다르면 화가 미칠 수 있다라는 자각의식이 범려에겐 몸에 배어 있다.
정치적 성공의 순간, 거만의 재산 축적의 순간 모든 것을 버리고 변신을 할 수 있는
범려의 처신이야말로 실은 그 앞의 성공을 위한 전제조건이었는지도 모른다.
인심의 향배를 지극히 깊은 곳까지 체득한 인물 범려가 펼쳐 그린 세계가
사뭇 교훈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마지막으로 도에서 일어난 얘기 하나를 더하며 마무리 한다.
도에서도 착실히 재산을 불리던 어느날 그의 차남이 초나라에서 사람을 죽이고 체포되었다.
범려는 막내아들에게 돈을 주고 그를 구해오라고 시켰다.
그러자 장남이 나서며 기필코 자기가 가겠다고 우겼다.
어머니도 곁에서 장남에게 시킬 것을 권했다.

범려는 할 수없이 장남을 보냈다.
장남을 떠나 보내면서 범려는 이리 당부했다.

"초나라로 가면 장선생을 만나서 황금을 주고 청탁을 하라.
장선생의 말대로 따르되 절대 논쟁하지 마라."

장선생은 청빈한 선비로 이름이 높았다.
장남이 둘째의 일을 부탁하며 황금을 건네자 장선생이 말했다.
"동생이 나오면 그 까닭을 묻지 말고 바로 떠나라."
장선생은 청렴한 사람이어서 황금에 욕심이 없었다.
일을 마치면 황금을 돌려줄 생각으로 받아 놓았을 뿐이었다.

장선생은 초나라 왕을 만나 "하늘의 별이 불길하므로 대사면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꾸며 말했다.
초나라 왕은 이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초나라 왕이 대사면을 내릴 것이라는 소문이 곧 장남에게도 전해졌다.

장남은 대사면이 있으면 둘째는 자동적으로 살아날 것이고,
그러면 황금을 헛되이 썼다고 생각했다.
어리석은 장남은 장선생에게 찾아가 이리저리 요령부득으로 말을 주어 섬겼다.
그러나 현명한 장선생은 그가 황금을 되찾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분노한 장선생은 황금을 돌려준 뒤 초나라 왕을 만나 다시 말했다.

"이번 사면이 도주공의 아들 때문이라는 소문이 있습니다."

초나라 왕은 둘째를 처형한 뒤 대사면을 베풀었다.
장남은 둘째의 시체를 가지고 돌아왔다.
모두 슬퍼했지만 범려는 오히려 웃으며 이리 말했다.

“내가 그럴줄 미리 알았다. 큰 놈은 나하고 고생을 함께 하였기에 돈을 잘 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막내는 어려움 없이 자랐으니까 돈을 잘 쓸 것이다.
내가 처음에 막내를 보내려고 하였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큰 놈이 떠날 때 이미 각오했다.
차남은 시체로 돌아온다는 것을 짐작했었다.”

상당한 통찰력이다.
여기서 이리 따지지 말자.
그리 상당한 통찰력이라면 왜 어째서 차남의 죽음을 예상하며 막내를 보내지 않았는가 ?
왜 그래을까 ?
이 의문에 독자 나름의 한 소식을 건져 올리며 음미하는 것으로, 그냥 그것으로 그쳤으면 싶다.
범려의 처신을 따지는 순간
그대는 아마 이미 떠나 버린 여우 굴에 서서,
천년 묵은 여우가 나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구천을 버리고 월나라를 탈출한 것도 구천의 됨됨이를 알고, 앞 날을 이미 예견하였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명철보신(明哲補身)의 전형이다.
밝은 통찰력으로 몸을 보한다.
그러나 통찰력만 있어서도 아니 된다.
그 통찰력을 기초로 결행할 수 있는 실천력 또한 중요하다.
범려는 정세를 밝히 읽고 사리판단을 하는데 남다른 뛰어남이 있었으며,
부차를 멸망시키기까지 월나라의 작전계획을 진두지휘하여
끝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실천력까지 갖추었으니 보기드문 인걸이라 하겠다.

거기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재물을 아낌없이 풀어내놓으니
이 또한 범상치 않은 일이다.
재물을 모으기보다 모은 후 풀어내기는 더욱 어렵다.
위 장남의 예에서 보듯이 모은 것을 덜어낸다는 것은 결코 범인이 흉내내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의미에 비추어 이곳 ooo의 자유.생명이란 캐츠프레이즈(catch phrase)가 문득 다가왔다.
범려를 첫 컬럼의 글제로 삼은 소이연(所以然)이다.

* 이글은 某 사이트에 올린 제 글을 전재(轉載)한 것입니다.
글 마디가 가끔 어색함이 있은즉, 그려러니 그냥 지나치시고 허물 탓하지 말아주십시요.
비가 건듯건듯하여 그저 산바람만 쐬고 바로 돌아와 휴일을 한가로이 이리 소일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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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묵은 글 : 2008. 2. 11. 16: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