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슬픔은 아름다운가 ?

소요유/묵은 글 : 2008.02.11 16:46


슬픔은 아름다운가 ?
슬픔은 자기 자신을 슬퍼하는가, 아니면 타자를 향한 슬픔인가 ?
타자로 인해 유발된 슬픔일지라도, 가만히 느껴보면 그게 자신을 위로하거나
연민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혼동스러울 때가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슬픔의 대상을 특정한다는게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닌 양 싶다.
아니 슬픔의 대상을 구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불요한 짓이라고 보는 게 옳지 않은가 ?

초상이 났을 때, 곡(哭)을 일정한 형식을 갖추어 호곡(號哭)함은
그저 소리내어 우는 것만으로 예를 다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가 ?
혹은 그저 체면치례에 불과한 것일까 ?
법에 맞춘 호곡성도 모자라 나 대신 울어줄 전문가 곡비(哭婢) 동원하여,
그로 하여금 슬픔의 현장을 파수(把守)케 하는 저들의 노력은 지극한 정성의 발로인가 ?
아니면 참여한 이들의 슬픔을 간절히 아껴, 우물물 두레박질 하듯 퍼올려,
젯상위에 슬픔을 진설(陳設)함을 부절(不絶)키 위한 정교한 장치였을까 ?
그도 아니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애 끓는 이 현장을 쉬이 잊고 필경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고 말, 자신들을 못 믿어하며,
그리 앞서서 미리 진저리치며 경책하고 있는 것인가 ?

장자는 아내가 죽자 두 다리를 뻗고 앉아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고분이가(鼓盆而歌)와 곡비의 호곡은 어찌 다른가 ?
장자가 정녕 죽음이란 천지로 돌아갈 뿐이라고 여겼다면
장구항아리를 두들기는 번거로움은 어인 작위인가 ?
호곡성(號哭聲)이든 고분가(鼓盆歌)든 죽음앞에선 인간의 소리임에 차별이 있을까 ?

나는 동물보호단체를 회원도 아니면서, 기웃거릴 때가 많다.
거기 별처럼 아름다운 천사들이 점점히 깜빡이고들 있다.
이 뜬 세상, 범강장다리, 악다구리에게 낚아채이고, 휘둘림을 당하여,
밤하늘을 눈 치켜 본들 별은 이미 거기 없다.
설혹 밤 하늘에 별이 있은들, 고개 들어 하늘을 볼 틈도 귀하니,
그들에겐 여전히 별은 실종된 상태다.
거세된 하늘, 불임의 누리끼한 하늘.

그러나, 동물보호단체엔 그 실종된 별들이 거기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반짝이고들 있다.
몇 년전 우연히 그곳을 방문하였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거기 그들은 그렇게 모여, 세상의 슬픔을 호곡(號哭)함으로서 별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은 모두 곡비였음이라.
닷냥 칠푼에 품 팔려 동원된 곡비가 아니라,
심봉사 젖동냥할 제, 동네 아낙 젖가슴 풀어재껴 심청 거두듯,
거기 우물가에 떨어지는 아이 건져올리는 사단(四端)의 실오라기 하나가 풀려나
마침내 가문 하늘가를 날아 은빛 별이 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이러하니 그 슬픔은 내게 아름다움의 구상(具象)이자, 놀라운 전율의 역사현장이었음이다.
그 현장의 목격자로서 나는 세상에서의 그들의 알리바이(不在證明)를 증언함을 기꺼워하였으며,
한편 나의 가냘픈 호곡성을 부끄러워했다.

슬픔의 강속에 잠긴 그들은 파르라니 핏줄을 가는 팔뚝에 새기며,
새벽 찬 우물물 길어내듯 사랑을 퍼올려 그곳을 향해 종달음을 치고 있었다.
그곳엔 시루처럼 구멍 숭숭, 귀퉁이 깨진 항아리가 스물다섯,
연이나 흥부 자식새끼 셈하듯, 비오는 방죽 개구리 떼로 울고 있었으니,
부어도 부어도 허갈진 아귀처럼 채워지지 않는 깊은 허무가 마중나와
갈증을 조롱하고 있었을 뿐.
거기 그렇게, 시지프스의 자맥질이 풀무인 양 뜨거운 사랑을 지펴내고 있었다.

묵자는 넓적다리 살이 빠지고, 정강이 털이 다 달토록
천하의 사람을 사랑하길 그치지 않았다고 하였음인가 ?
양주(楊朱)는 사람마다 모두 제 터럭 하나 아끼면 곧 천하가 태평할 것이라 하였음인가 ?

동물단체에서 만난 저들은 묵자의 후신인가 ?
갈심진력(竭心盡力),
푸른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지어의 손수건
그들의 지칠줄 모르는 뜨거움에 난 경복(敬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난 기원한다.
모든 사람이 어서 바삐 양주가 되기를.
그들이 묵주가 됨은 무망한 노릇이니, 차라리.

양주는 이기주의자(利己主義者)인가 ? 애기주의자(愛己主義者)인가 ?
양주가 진정 자기 터럭을 아꼈다면, 어찌 다른 사람의 터럭을 빼앗고자 하였을 터인가 ?
무릇 모든 이가 제 터럭을 귀히 여긴다면, 어이하여 나를 헐어 남을 구할 일이 생기리요 ?
양주가 자기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여도,
그리 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은 노자의 무위(無爲)의 구체적 실천행의 현현(顯現)이다.
이어 그는 말한다.
“... 온 천하를 맡긴다 한들 받지 않을 것이며, 모든 이들이 털 한 터럭인들 뽑지 않고,
또 사람들이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천하는 반드시 태평할 것이다.”
세인(世人)은 함으로서 세상을 어지럽히나,
양주는 하지 않음으로서 천하를 태평케 하고자 함이 아닌가 말이다.

살아 있는 동물 털 벗겨 제 몸에 두르는 모피족이야말로 피 뚝뚝 듣는 작위(作爲)의
실체들이니, 실인즉 이들이야말로 양주를 부끄러워해야 할 것임이라.
차 타고 가면서 쓰레기 봉투 버리듯 키우던 강아지 유기하는 그들이야말로
양주가 준엄히 꾸짖는 불벼락을 두려워해야 할 것임이라.
제 입의 즐거움을 위해 뭇 생명을 유린하는 저들이야 말로 천하의 도척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러하니, 모든 이가 사무쳐 양주가 될 때에 이르러,
(동물단체)저들의 호곡소리가 그치고, 문득 눈 들어 밤하늘 우러를 때,
별빛을 다시 되볼 수 있으리라.

※ 실제 중국에선 산 채로 동물 가죽을 벗겨 모피를 내며,
차 타고 가다 강아지 유기하는 것은 목격한 우리 동네 이웃의 확인이 아니라도
웹에서 널리 증언되고 있다.
그 뿐인가, 우리 동네 골짜기엔 해마다 버려진 개들이 수마리씩 흘러든다.
사태가 이러한데, 양주를 어찌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를 이기주의자라 비웃으랴.

그대, 발밑을 보라.
거기 피가 닷말 석되가 흐르고 있지 않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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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댓글 모음

ooo :

양주가 누군지 모르겟으나 제 생각에는 점 건방진 사람인거 같군요

하여튼 모피 입고 다니는 것은 좋지 않은것이 확실합니다.


bongta :

ooo/

양주는 흔히 양자라고 하는 그 사람입니다.
실체가 좀 애매한 사람입니다만, 그만큼 그의 사상도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지요.
흔히 천하보다 제 터럭 아끼는 ... 운운하며 이기주의의 화신처럼 알려져 있습니다만,
실인즉 노자의 한 지파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제 터럭을 온 천하와도 바꾸지 않다는 것은 차라리 역설로 새기면 그의 사상의 맥이 오롯이 드러납니다.
즉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서(有爲), 실인즉 제 욕심을 차리기 바쁜
춘추전국시대의 군주, 세객, 사상가들을 비꼬고 있는 것이 아닐런지요.
그려러니 제 분복 지켜 자신을 담담히 지켜나가겠다는 것이고,
이 길을 온 천하인이 걷는다면 곧 천하는 안정될 것이니라 이리 부르짖고 있음이 아니겠는지요 ?
그러니 그는 노자의 무위(無爲)를 제 터럭을 아낌으로 비유하여,
실천적으로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였음이지요.

실제 그가 남긴 다기망양(多岐亡羊)의 고사에서 보듯,
즉 길이 갈래져 잃은 양을 찾기 어려움과 같이 학문도 다기한즉
오히려 학의 목표인 진리, 그 본성의 자리가 어지러워짐을 한탄하였던 것입니다.
그 역시 노자처럼 세상에 가득찬 유의를 비판하며 무위에 가치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이기주의자가 아님은 이 고사에서도 드러납니다.
즉 이웃에서 양을 잃어버려 양자에게 도움을 청한즉, 집안 사람을 내주어 도움을 주는 것이지요.
이를 혹자는 그의 사상에 철저하지 못한 예로 거듭니다만,
제가 보기엔 이와 반대로 그의 사상에 충실한 실례로 보고 싶은 것입니다.

천하인이 애기(愛己)한다면 궁극엔 다른 사람을 사랑함과 다름이 없으니,
(자기도 아끼지 못한즉 어찌 타인을 아낄 수 있으리오.)
이리 되면 결과적으로 이는 다시 유가의 사상에 맥을 잇대게 되는 것입니다.


aaa :

bongta님
이타와 이기의 분별 자체가 사실상 가능할까요?
아마 양주가 느꼈던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궁극적인 이기는 결국 이타일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은
가장 현실적이고 논리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불쌍한 동물의 아픔을 느낄 수 있는 감성을 지니신 bongta야 말로..
아니, 그러한 감성을 이 순간까지 유지하셨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bongta는 행복한 분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bongta :

aaa/

한발 나서면, 거기 그렇게 슬픔 덩어리와 마주치게 됩니다.
허나, 차마 두려워 멈추는 것일까요 ?
두려움은 어느 순간 부끄러움이 되고,
그 부끄러움은 스스로 겨워, 제 허물을 덮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나아가 더욱 분발(?)하며, 상대를 나무라기까지 합니다.
이 프로세스는 담장 넘는 도적처럼 은밀히, 음흉히 진행되기에
자신을 속이기에 아주 적합하지요.
은폐된 기도, 기만의 자리.
그 밑에 흥건한 닷말 석되의 피가 번질번질거립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턱을 넘으려면 exciting energy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턱을 넘는 순간 여분의 energy level은 다시 낮추어집니다.
화학에서의 반응조건엔 이리 문지방(threshold energy)이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지요.
문지방을 넘는 순간 방바닥은 다시 외부와 같이 낮아집니다.

이기와 이타의 차이는 이 문지방을 극복의 과제, 화합 코스트로 보느냐,
(무릇 산을 넘으려면 땀을 흘려야 하듯,
음료수를 마시려면 병마개를 따야하듯,
은밀한 성전에 이르는 길엔 이런 장치가 있습니다.)
아니면 너와 나를 가르는 분리의 장벽으로 보느냐의 차이가 아닐까요 ?
만약 후자로 보게되면, 우리는 장벽을 더욱 높이 쌓아야 안전합니다.

저의 다음 주제는 슬픔의 배리, 슬픔의 위선을 경계하는 것이 될 터이지만,
아마 한동안은 이곳에 들르지 못할 형편이군요.
내내 평온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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