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feedback(피드백)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3. 16:23



이 말이 현재 두루두루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원래는 공학에서 나온 말인데,
지금은 생물학, 사회학, 경제학, 예술 등 학제를 가리지 않고 쓰이고 있지 않습니까.
실생활에서도 널리 쓰이니,
예컨대, 사이트측에서 고객 고정사항을 되받아들이는 것도 feedback이요,
사내 상하, 좌우간 의사교류 역시 feedback 경로를 타고 이루어집니다.


여기 이 자리, 본글과 댓글 역시 상호 feedback 과정의 연속입니다.

왜 이 딱딱한 공학 용어가 널리 일상에도 사용되는가 하는 것을
오늘 좀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우선 아주 소박한 feedback system 그림을 소개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그림에서 보면 A가 system입니다.
저는 이를 우리말로는 계(系) 또는 계(界) 정도로 새기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계(系) 또는 계(界), 이 양자는 조금 다른 말입니다만,
지금 이를 상세히 따질 지점이 아니므로 그냥 넘어갑니다.
이 system을 무엇이라고 생각해도 됩니다.
오디오, 스피커, 전동기, 유도탄 ...등등,
기계라고 생각해도 되고, 생물체라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사람, 동물, 신, 우주라고 해도 상관없습니다.
물론 신, 우주에 대하여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만,
지금 이 지점에서는 “목적을 위해 체계적으로 조직된 단위” 정도로 생각하면 됩니다.

A라는 system에 input(입력)라는 자극이 전달됩니다.
자극은 데이터라 해도 좋고, 신호(signal)라고 해도 됩니다.
이 신호가 system에 수용되면 system은 특성 반응하게 되고
그 결과를 토출해냅니다.
이 결과를 우리는 output(출력)이라 부릅니다. 또는 부르기로 합니다.

거꾸로,
자극(stimulation)에 대한 반응(response)이 있고,
그 주체가 system이다 이리 생각하셔도 됩니다.

자 이제, 이 system이 지향하는 목표 또는 목적이 있다고 해봅시다.
출력이 그 원하는 바를 토출해내었다면, system을 통해 만족解 또는 최적解를
얻어낸 것이고 그로서 사명은 달성되고 과업은 종결됩니다.

문제는 출력이 원하는대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실제 생활에선 대부분은 단방에 원하는 출력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녀를 사랑하지만, 단방에 그녀의 사랑을 얻어내는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아무리 잘난 놈도 시행착오(trial and error)를 겪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다 못해 젓가락으로 콩자반을 집어내는 것도 단박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한 공학적 고안(考案), 생물학적 장치, 우주적 지혜가 feedback입니다.

feedback은 negative feedback, positive feedback, bipolar feedback 세가지가 있습니다.
feedback을 궤환(饋還)으로 번역해서 쓰는 것 같습니다만,
저는 그냥 익숙한대로 feedback으로 쓰겠습니다.

자, 다시 돌아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때는 무엇인가 조정을 해야 합니다.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feedback은 이를 이렇게 해결합니다.
즉 출력 결과의 일부 또는 강도를 조절하여 다시 입력단으로 되돌려 넣는 것입니다.
자극(stimulation) - 반응(response) 도식으로 설명하면, 반응을 다시 system의
자극으로 되먹이는 것입니다.

그림에서는 이것을 B로 표시했습니다.
B에서는 최초의 출력을 역상(reverse phase), 가감 조절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여,
입력단에 되먹여 돌립니다..
이리 되면, 입력단에 기존의 입력과 되돌려진 것 두 가지가 함께 투입되게 됩니다.

B의 역할에 따라
negative feedback은 출력을 줄이는 방향으로,
positive feedback은 출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bipolar feedback은 正否 양 방향의 것.
이리 나누어집니다.

보통 자연계는 bipolar feedback로 되어 있습니다만,
공학에서는 주로 negative feedback를 사용하고,
positive feedback은 특별한 경우에만 사용합니다.

이 정도는 아실만한 분은 다 아는 얘기입니다만,
혹 익숙치 않은 분이 계실까봐 간단히 소개해 본 것입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얘기 이어갑니다.

콩자반 젓가락으로 집기.
이 과정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이 과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선 무엇이 전제되어야 합니까 ?
당연, 눈, 뇌, 손가락, 젓가락, 콩자반 등등이 있어야 합니다.

눈으로 콩자반을 보고 젓가락(+손가락)을 그리로 향합니다.
이 과정을 slow motion으로 조각내 생각해봅니다.
처음에 다가간 젓가락이 콩자반의 위치를 벗어나 오른쪽으로 치우쳐졌다고 해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정보를 뇌가 받아 그만큼 왼쪽으로 젓가락 위치를 이동할 것을
손가락에게 명령합니다.
그러면 손가락은 그 명령만큼 왼쪽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이 때 출력결과를 조정(adjustment)하기 위해 일정분 다시 입력으로 되돌리는(-)
행위가 발생하게 됩니다. 이경우는 차이만큼 즉 차분(differential)을 되돌립니다.
이게 negative feedback입니다.

교정하기 위해, 다시 손가락이 왼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만,
이번에는 조금이지만 너무 지나치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요번엔 반대로 다시 오른쪽으로 미세 조정(fine tunning)하여야 합니다.
이런 것을 빠른 시간내에 되풀이 하는 작업,
negative feedback의 연속 축차적인 수렴-집적 과정,
이를 “젓가락으로 콩자반 집기” 과정이라고 우리는 이름 붙이는 것입니다.
- 이 때 중요한 두가지 요소는 반응속도와 강도입니다.
그외 위상(phase) 등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첨언합니다만,
이를 생략하여도 글 이해에는 지장이 없으므로 약합니다. -

이 세상은 모두 feedback으로 이루어졌다 이리 말할 수는 없지만,
이 방식을 여윈 것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조금 있다가 실제 예를 하나 하나 들어보겠습니다만,
자연계에서 특히 balance, 즉 균형, 평형이라는 이름의 프리즘으로 해석할 수 있는
모든 객체(object)는 "negative feedback system"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전형적인 객체가 바로 생명입니다.
balance가 깨지면 바로 고장이 납니다.
그 balance를 되잡아 주는 기술 아니 삶의 태도가 한의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양의학은 balance, feedback을 생명 전체의 관점에서 조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작금의 한의학은 많이 변질되어 의사(pseudo)양의학화 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현재의 한의학에 걱정이 많으며, 충분한 신뢰를 보내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제가 깊이 연구하지는 못하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의론을 접습니다.

그런데 feedback system에서는 놓치지 않아야 할 아주 중요한 消息이 있습니다.
기대치 교정을 system 그 자체, 즉 제시한 그림에서 A 부분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B란 부분을 채비하여 대응하려 한다.
바로 이 점에 주목하여야 합니다.
system 자체 A를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feedback 장치 B를 고안한
바로 이 지점을 잘 음미하여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물론 A 자체를 개선하는 것 무용하다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필요한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진.선.미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
그래서 feedback이 필요하다라는 것.
아니 feedback 없는 system이란 이미 system이 아니다 라고 저는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는 바로 이 소식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가 스피커를 통해서 소리를 듣습니다.
이 세상 아무리 정교한 audio system이라도 잡음(noise)을 완전히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음악의 소리 그를 原신호(signal)라고 한다면,
출력단엔 재현된 signal이 나옵니다.
이 때 signal뿐이 아니고 noise가 함께 나옵니다.

그래서 audio system의 질을 측정하기 위해 이 양자의 비율
SN 비(Signal to noise ratio)를 따지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noise가 필연적으로 따른다라는 것.
완벽히 제거할 수 없다라는 것.
(*잡음에 관한 학문이 따로 있을 정도이니 이 문제는 그리 한가한 주제는 아닙니다.)
system A를 아무리 개선하여도 해결할 수 없다라는 것.
이것이 기계뿐이 아니고 자연계의 실상이라는 것.

농약을 아무리 사용하여도 벌레는 제거할 수 없다라는 것.
제초제를 아무리 사용해도 농업 역사 만년을 지나고 있지만,
잡초를 제압할 수 없었다라는 것.
인터넷에서 아무리 물여우를 잡아 없애도 박멸할 수 없다라는 것.

- 그런데, 저조차 물여우란 말을 쓰고 마네요.
이런 말들은 조잡하여 의도적이라도 피합니다만,
이젠 하도 많이 들어서 편한대로 한번 사용해 보았습니다.
이런 조잡한 말을 많이 쓰면 정신이 황폐해진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차라리 욕질을 해댑니다. 아주 작정하고 제대로 황폐해지려고.
제가 원작자지만, 응용엔지니어링업계의 탁월한 기사 ccc님에게 공을 돌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

system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숙명을 지고 있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하니, 필연적으로 feedback system이란 조절 기능, 평형 장치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저는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이 밑에 내재된 철학은 무엇입니까 ?
인정하라는 것.
noise를 담담히 쳐다 보아야 한다라는 것.
system A에 매몰되는 한, 갈등과 슬픔은 치유되지 않는다라는 것.
system B로 우회하거나, 제 몸에 다시 품어야 할 수 밖에 없다라는 것.
아니 어쩌면,
signal, noise를 모두 하나로,
system A, B 모두 하나로 인식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라는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우리가 feedback을 통하여 건져내어야 할 지혜는
audio의 음질개선, 자동제어 기계장치가 아니라,
실상은 자연계의 이 담대한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리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 feedback system은 제의 앞선 글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자정수(子正水)”에서 거론한
존재의 4가지 양식 중 진동(oscillation)에 해당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형식만을 통해서만이 생명 현상은 유지됩니다.
제가 지금 머리에서, 수수밭을 지나는 바람소리처럼 우수수 별별 생각이 다 지나쳐
자꾸 옆 길로 새기 때문에 다시 제 자리로 되돌아 가야 합니다.
이게 정식으로 쓰는 글 같으면, 어림도 없는 짓거리지만,
다 이해할만 분들을 모시고, 이리 얘기 하듯 편안히 글을 쓰고 있으니,
이 자리가 송구한 가운데, 여간 고마운 게 아닙니다.

불완전한 듯한 system A는 우리의 숙명이라는 것.
이 숙명은 그래서 도리없이 슬픔을 유발합니다.

이 때, 이 슬픔을 거세한 완전체로서의 system A를 쫓는 이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
이데아를 노래한 플라톤,
신을 찾은 기독교도들.
이들이 그들 아닙니까 ?

지금
노빠 앞의 노짱,
황빠 앞의 황우석은
system A의 변용으로서
우리 앞에 현현(顯現)하고 있습니다.

aaa의 내려진 글 “권태”에서 그는 system B를 얘기한 것이 아닐런지요 ?
그런 의미에서 본질적으로 aaa야말로 저는 일등 노빠라고 감히 말합니다.
원심분리기(centrifuge)를 거친 순수한 원형질로서의 노짱, 황우석이 있다면,
그의 순혈 경배자로 저는 감히 aaa를 꼽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가 노빠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만,
그리고 저 역시 노빠는 아닙니다만,
제가 제작한 centrifuge를 돌리고 난 시험관 맨 밑바닥에 걸러진 그 앙금을
살펴보면 aaa가 가장 밑바닥에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감히 외칩니다.
aaa야말로 유일의 노빠고, 황빠고, 인간빠라고.

작금의 sss에서의 분란에서 저는 system간의 충돌을 목격합니다.

제가 소농자님에게 고한 글에서 지칭한 이들
음흉하고 교활한 퇴물 비구니,
뒷구멍으로 호박씨 까는 으뭉덩어리 도판승,
불당 하나 차려놓고 신불 팔아 먹는 찌든 묵승,
계집처럼, 요리조리 불질러 다니며, 쾌감 느끼는 변태 쪽발승.
헛깨비 날품만 파는 속빈 무 같은 건들바람.

- 이들을 다시 거론하는 것은 사실 추접습니다.
그래서 이미 다 떠내버렸습니다만,
마침 글제가 feedback이라 교보재(敎補材)로서 안성맞춤이라 만부득 차용할 뿐이지,
다른 뜻은 없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어차피 폐가 되는 것은 사실인 것.
부끄러움을 무릎쓰고 text를 완성하기 위해 거쳐 갑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하지만 앞으로 한 두어번은 더 교보재로 채용할 일이 있을 듯 싶습니다.
이에 미리 당겨 비는 바인즉,
ccc님의 말씀인 길상사 관음의 “화해와 포용”으로 대하여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

저는 이들은 positive feedback의 적나라한 실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system A 자체만으로 완벽한 이들이 그 누가 있겠습니까 ?
모두들 자신이 완벽한 존재가 아닌 것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system B를 구하고, 비로서 자족하는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 거론한 이들은 negative feedback system이 아닌
positive feedback system을 장착하였다고 보여집니다.

그럼 positive feedback system은 무엇입니까 ?
콩자반 집기에서 오른쪽으로 빗나간 그 젓가락을
negative로 조정하지 않고 positive로 어깃짱 부리며 더 강화하는 것.
system은 일견 힘을 받아 힘차게 폭발하듯 기세를 뿜어냅니다.
하지만 끝간데 없는 divergence는 종국엔 파국(catastrophe)으로 종결됩니다.
(* divergence: 발산 정도로 번역되지만, system 용어인 영어 그대로 썼습니다.)

효행 제일의 증자가 말한 일일삼성(一日三省)이란 무엇입니까 ?
system A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이 없으면 반성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 자각의 기초위에 삼세번 negative feedback 하겠다는 것.
이것이 일일삼성의 두가지 뜻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즉 부재증명과 존재확인의 두가지 프로세스.

그러하니, 흔히 말하는 성인(聖人)에서의 聖은 완전성의 경지가 아니라,
반성적성찰(反省的省察)로서 거듭 나는 길 위에서만 오로지 확인될 뿐이다.
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흔히 쓰는 반성(反省)을 영역하면 negative feedback쯤이 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반성(反省)이란 글자 뜻도 “되돌이켜 살핀다.”
이니, 그럴 듯하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말씀 하시길
"내가 심히 노쇠했구나! 이토록 오랫동안 내 다시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하는구나.”
라고까지 추앙하셨던 주공단(周公旦)의 토포악발(吐哺握發)의 고사는 또한 무엇입니까 ?

"주공(周公)이 자신을 찾아온 현인(賢人)을 극진히 영접하기 위해 식사 때나 머리 감을 때 
입에 먹은 것을 뱉어내고, 감던 머리를 움켜쥐고서까지 나와 맞이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 주공단은 유가에서는 성인의 전형으로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 역시 역사를 건너 뛴 feedback의 증인인 것입니다.

기왕에 나온 것, 앞에서 거론한 저들 가여운 영혼을 위해 시를 지어,
무량공덕을 회향할까 합니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더럽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어리석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야비하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미련하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더러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더러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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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록 제일칙에 나오는 “達磨廓然無聖(달마곽연무성)”에서 말하는
무성(無聖)이란 무엇입니까 ?
달마가 서쪽 인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양 무제를 만납니다.

擧:梁武帝問達磨大師:「如何是聖諦第一義」 磨云:「廓然無聖」
들어보자! 양나라의 무제가 달마대사에 물었다.
『도대체 불교에서 말하는 최고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게 뭐요?』
달마가 대답했다.
『텅 비었지. 성스럽긴 뭐가 성스러워?』

도올은 bongta 보다는 조금 점잖은 것같습니다.
이 부분의 bongta version 譯을 따르면 이렇습니다.
system A를 찾는 무제에게
달마는 한 마디로 이리 대답하고 있는 것입니다.

“니미 씹이다.”

aaa 역시 노무현이 모든 것이다 라고 하는 이들에게

“니미 좃이다.”

조금 강도를 낮추어 조심하면서 이리 말했습니다만,
sss에서의 싸움 황제, 武帝 ccc은 positive feedback system론자 답게 이리 재우쳐 묻습니다.

帝曰:「對朕者誰?」 磨云:「不識」
무제가 말했다.
『도대체 짐을 대하고 서 있는 당신은 누구요?』
달마가 말했다.
『몰라』

ccc는 분명 벽암록을 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지금 북촌 고물상 광고하기에 사뭇 분주한 까닭일 것입니다.
그를 용서합니다.
아파트 딱지 세는 것이나, 광고하는 것이나,
모두 삶을 지탱하는 밥, 옷, 집에 다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은 이리도 곡진히 슬픈 것입니다.

곧바로, 달마는 인연이 이르지 않았음 알고 강을 건너 떠납니다.
면벽9년의 이야기가 이로부터 시작됩니다.

帝不契, 達磨遂渡江至魏 帝後擧問志公. 志公云:「陛下還識此人否?」
帝云:「不識」 志公云:「此是觀音大士傳佛心印」 帝悔, 遂遣使去請, 志公云:「莫道陛下
發使去取, 闔國人去, 豹亦不回」
아뿔싸! 무제는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달마는 드디어 강을 건너 위나라로 갔다. 그 후에 무
제는 당대의 고승 지공에게 이 지나간 이야기를 들어 물었다. 지공은 깜짝 놀라 말했다.
『폐하! 아직도 이 사람이 누군지 모르신단 말입니까?』
무제가 말했다.
『몰라』
지공이 말했다.
『이분이 바로 부처님 심인을 전하는 관음대사이십니다』
양무제는 후회막급이었다. 그래서 사절을 보내 돌아오시도록 청하게 했다. 지공이 말했다.
『폐하! 사절을 보내 모셔오는 그따위 짓거릴랑 하지 마세요. 온 국민을 다 보내도 그는 돌
아오지 않습니다』

지금 aaa는 강, 아니 바다를 건넜습니다.
그가 면벽(面壁)9년을 할지, 면전(面錢)9년을 할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들 보다는 돈을 많이 벌었으면 하고 야반삼경 때마다 앙원(仰願) 기도합니다.
혹 압니까 ?
언제 한국에 돌아와 저한테 말술로 빚을 갚을런지 ?
아니면 제가 말술로 빚을 갚아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저기 등장하는 달마가 곧 aaa이자 bongta일 터이니,
bongta가 aaa를 빌어 농탕질 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이 소식을 aaa가 모를 리 없겠지만,
만약 모른다면, aaa는 깝데기 벗겨져 미국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한국에 한번이라도 나오지 않으면, bongta는 aaa가 이 숙제를 하지 못하여
미국에서 끙끙 앓고 있다고 치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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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인연 따라 왔는지,
제 집 식탁에 오래간만에 장미가 화병에 꽂혀 있습니다.
마치 조화같이 삼삼합니다.
하지만, 조금 지나니 가여워지기 시작하면서 이내 분노가 입니다.
저리 개량하기까지 저들은 얼마나 모진 고초를 견디어내었을까 ?
그 뿐입니까 ?
저들은 뿌리가 늘 잘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꽃이 아름답다고 취해있습니다만,
그들은 뿌리가 가위로 잘려 지금 아.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장미에 뿌리가 달려 있었다라는 사실을 모릅니다.
아니 외면하였을런지도 모릅니다.
너무 외면해서 잊혀지고, 종국엔 “아는 바 없음” 無知가 되고 말았습니다.
화훼업자 외에는 이젠 잊혀진 전설이 되고 말았습니다.
저의 감수성은 아직은 조금 건재하여 그 전설을 피로 되지피어낼 수 있습니다.

뿌리가 뽑힌 장미를 장미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
뿌리가 잘린 장미를 장미라고 이름할 수 있는가 ?
과연 가능한가 ?
정당한가 ?

타자의 아픔 위에 인간의 행복이 구축되고 있는 이 현실.
분별지, 세간지라 부르는 인간의 지식은 실은 타자를 향한 폭력이기도 합니다.

땅을 떠난 저들 장미의 영혼 앞에 저의 심미안은 그저 부끄러워 저들과 함께 통곡합니다.
젖은 눈으로 들여다 보며, 잘린 줄기에 참회의 눈물로 이긴 흙을 고이 덮어줍니다.

잡초를 향한 제초제는 그래서 인간의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벌레를 향한 농약은 그래서 인간의 폭력에 다름 아닙니다.
좁은 울타리에 갇힌 동물들.
주둥이가 잘리고,
꼬리가 잘리고,
제 동료의 사체를 먹이로 자라는 소들은 그래서 미쳐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절규하고 있습니다.
정작은 인간이 미친 것이 아닐까요 ?

지난 봄 어떤 망난이가 제가 다니는 등산로 옆에 새로 길을 내었습니다.
이미 길은 나 있었지만, 단 20보를 좁히기 위해
잘 자라고 있는 나무를 전부 베고 길 옆에 새로 길을 또 낸 것입니다.
사람도 거의 다니지 않는 그 길,
제 혼자 편하자고 나무 수십 그루를 무참히 베어 버린 것입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그는 저 아래 길변, 저 위 잣나무 숲도 무차별적으로 산벌을 하였습니다.
저는 잘린 나무들을 주어 땅에 심어 주었었습니다.
그 중 굵은 진달래 나무 3개엔
한달이 넘도록 하루도 빠지지 않고 물을 길어 부어주었더니
나무 잎이 살아나며 생명을 길어내었습니다.

이젠 되었다 하고 잊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보니 다시 시들고 있더군요.
떠오던 약수물을 덜어 뿌려주고 돌아왔습니다.

뿌리가 없으면, 생명을 불 붙일 수 없습니다.
이 시리도록 자명한 사실이 그대의 감수성을 작은 풍경만큼일지라도
소리의 파문으로 방문하고 있습니까 ?
저는 지금 분노의 풀무질로 달궈
온 세상을 향해 뜨거운 삿대질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장자 천지편 노인과 자공의 문답에서
기심(機心)을 경계하는 우화가 나옵니다.
노인이 우물에서 물길어 밭에 내고 있었는데,
자공은 용두레란 물 긷는 기계를 권하며,
노인의 우둔함을 딱하게 여깁니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
기계가 있으니 그 기능(機事)이 있고, 기능이 있은즉
이를 동원하려는 기심(機心)이 생깁니다.
이 기심(機心)이 질주할 때,
20보를 취하기 위해 무수한 생명을 죽이게 됩니다.
그래 그 우화에서 노인은 자공에게 이리 말합니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이 기심(機心)이야말로, 실은 positive feedback system이란 욕망의 심장이요,
폭주 열차의 엔진인 것입니다.

눈사태(a avalanche)는 전형적인 positive feedback system입니다.
주먹만한 눈덩이의 점화식(漸化式, 點火式).
굴러 굴러 집채만해집니다.
이들은 종국엔 파국을 맞이합니다.
이 때라서야 눈사태는 숨을 거둡니다.
그 안식일엔 우리는 이미 없을 것입니다.

이명박은 멀쩡한 국토의 배를 갈라 내장째 쳐먹자고 외칩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슴 목에 대꼬챙이를 박아 넣고 피를 뽑아 제 몸을 죄로 보혈합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곰 쓸개에 파이프를 박아 즙을 빨아 먹고 게트림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기 돼지를 산 채로 찢어발개도 세상은 요지부동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진출처 http://blog.daum.net/grandbleu/11863360)

나라 안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는 뜀박질 경주를 합니다.
닭싸움, 개싸움, 소싸움, 말싸움.
싸움박질 대회에 군수놈들, 의원놈들은 눈시깔이 시뻘겋습니다.
bongta는 이런 놈들 때려잡지 못해, 분노로 눈깔이 싯빨갛습니다.
미련한 것들입니다.
당장 sss mmm에 가면 싸움박질 도사들이 차고 넘치는데,
그들을 왜 그들을 scout하지 않는 것일까요 ?
이들은 제가 밤 새워 글 짓느라고 눈이 시뻘겋다고 말합니다.
이래도 저래도 싯빨갛게 토끼눈이 되는 것은 매한가지니 그들을 마냥 탓할 노릇은 아닙니다.
bongta도, 저놈들도, 이놈들도 모두 적안(赤眼)의 도적들입니다.

저의 앞선 글 “주리(主理)와 주리(主利) - 남녀의 code”에서 말하는
주리(主利)주의자.
온 천하는 지금 모두 주리(主利)주의자로 떼 덮혀가고 있습니다.
하여 이들 이해에 복무하는 그들은 모두 순혈 계집들이라
저는 그리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negative feedback은 없습니다.
온전히 positive feedback만 작동되어 가열차게 욕망이 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 그 끝을 환히 압니다.
divergence, catastrophe.
이 언어들로 꾸며지는 묵시록.
그 종말의 묵시록.
지금 저까지 포함해 모든 인간은 실은 이 묵시록의 기록자, 그 주인공들입니다.

뿌리없는 장미꽃에서 아름다움을 절취하는 그 마음조각이
살아 있는 아기 돼지를 찢어 발기게 되는 단초가 되는 것입니다.
나중엔 국토의 배를 갈라 흘러내리는 진물에다 배를 띄어 돈벌 궁리를 트게 되는 것이지요.

제 분노의 점화식은
저만의 negative feedback 장치입니다.
하지만 그저 노래뿐입니다.
허화(虛華)처럼 지붕에 던져진 초혼(招魂)의 외마디,
청중없는 노래,
짓거리 부재의
공허하고도 무력하여, 불쌍한 歌人 bongta.

bongta는 기꺼이 폭풍의 신이여, 분노의 신인 루드라가 되고자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
거기엔 슬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으로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며,
분노로서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드라는 곧 시바의 다른 이름인 것입니다.
시바의 남근 링가는 곧 생식(生殖)이니
파괴가, 분노가 곧 생명을 향한 절절한 절규가 아닐런지요 ?

이해에 복무하는 자들은
분노가 아닌 화(火)로서 질러 질러 화택(火宅)을 태우는 바,
이는 그들에겐 슬픔이 거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해서, bongta는 그들이 슬픈 것입니다.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萬學歸一學, 一學歸萬學입니다.
혹자는 제가 다루는 주제가 자신처럼 명상 한가지가 아니고
만가지라고 빈정됩니다.

저는 이리 대답합니다.

“니미 씹이다.”

『시방삼세가 텅 비었지. 萬學은 무슨 萬學 ?』
『시방삼세가 텅 비었지. 명상은 무슨 명상 ?』

그래서 다음 이야기는 바둑에 대하여 간단히 적어 보려고 합니다.
물론 ooo님의 절세절학의 “명인기원 출입기”엔 감히 족탈불급입니다.

저들 positive feedback의 화신들을 전부 팔자에 없는 중놈으로 만들었으니,
bongta 역시 중이 한번 돼보고자 합니다.

허무장발승(虛無長髮僧) bongta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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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발췌

bongta :

제가 토요일은 외려 바쁩니다.
그래 종일 인터넷에 접속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휴일만 되면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는가 봅니다.
전번엔 aaa님 사진을 보지 못해 참 섭섭하였습니다.
오늘도 sss가 제법 재미있었는가 싶더군요.
bongta 어쩌고 하는 제목을 얼핏 보았는데,
이것도 제목만 발견하였고, 곧 읽으려고 하였더니,
바로 삭제되고 말았더군요.

이게 무슨 내용인지 조금 궁금해지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저 잊겠습니다.
잊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가 잊혀진 그 현장.
비로서, 그 때라야,
골방에서, 저의 마음밭 안으로 인견합니다.
그리고 옷을 벗겨 알몸으로 안고 싶습니다.
그가 누구이던간에.

제 글이 조금 길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제목 feedback을 말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저의 슬픔, 저의 분노를 그저 토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누구한테 ?
저한테 말입니다.
그런 형식을 통해 저를, 아니 누군가를 구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제가 얼마전 말씀드린 소요유(逍遙遊).
그저 자적하거니 걷고자 하였던 것입니다.
장자의 자유를 통한 소요가 아니라,
슬픔과 분노란 형식을 통해.

장자는 상대공간을 절대공간화한 거인입니다.
소요유함으로서 그는 절대 공간을 창출한 것이 아닐런지요 ?
이 순간 상대공간은 자유를 획득하고
절대공간이 되버린 것이 아닐런지요 ?
비현실적인든, 관념적이든 그는 자유를 얻은 거인입니다.
장자외에 누구든간에 장자의 세계는 상대가 아닌 절대공간입니다.
그 공간에 누구도 도달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

그를 꺽지 않는 이상, 그가 노닐던 상대공간은 타자에겐 절대공간입니다.
장자는 미필적고의(未必的故意)로 衆人을 기롱한 것입니다.
타자의 인식능 한계, 그 안에서 절대공간을 인용(認容)하였기에 장자는 아주 질이 나쁜 확신범입니다.

장자의 절대공간은 누구든간에 깨부셔야 합니다.
bongta는 분노와 슬픔으로 장자를 비웃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도 죽이고, 장자도 죽여야 합니다.
그래 장자에게 빼앗긴 절대공간을 상대공간으로 되돌려야 합니다.
그 순간 상대공간은 bongta의 절대공간이 됩니다.
저 역시 제 확신에 기꺼이 벌받는 확신범이 됩니다.

저는 분노와 슬픔으로
이 세상 누구보다도 부처와 장자와 그리고 예수를 사랑한다고
외칩니다.
그래서 저는 부처와 장자와 예수를 매일 죽입니다.
죽이는 순간 그들은 실인즉 bongta를 이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을 구태여 죽일 필요가 없을 때, 정작 bongta는 온전히 그들이 됩니다.

오늘 밤.
저는 그들을 곡차 한잔으로 가볍게 버힙니다.

저는 피를 흘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심장을 아무리 칼로 베어도 피가 나오지 않는군요.
그래 마른 펌프에 물 부어, 지하에 갇힌 물 마중하듯,
제 영혼에 곡차 부어, 피를 길어냅니다.
그 슬픈 피를 앞 당겨, 미래의 제 시신 앞에 차려진 제단에 받칩니다.

미리 쓰는 저의 제사(祭辭)는 그래 마른 버짐같이
늘 서걱서걱 수수깡 부대끼는 소리가 납니다.

하지만,
그 소리를 통해 저는 구원을 듣습니다.
그를 통해 저는 장자를 죽입니다.

확신범 장자 하나 죽이는데,
세편의 글이 필요할런지요 ?
장자가 3명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의 글로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 동네, 당골무는 하룻 낯 종일, 얼쑤 덩더꿍 버선발로 신명을 떱니다.
나누면 신명 끝발이 나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덩더꿍 주제껏 신명을 떨었을 뿐입니다.

####

sss에 남아, 저들 noise들을 조리질 틀고도 싶었습니다만,
너무 추저워 제가 떠났습니다.

떠나자마자,
어떤 놈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공공연히 뽐내고 있습니다.
어떤 놈은 bongta가 bbb라고 하던 본을 받아
aaa가 누구라고 틀속에 주석, 납물을 붓더군요.

저 noise들.
다 부질 없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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