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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리의식과 박리의식

소요유/묵은 글 : 2008. 2. 11. 16:34



제가 어제 흙삽을 들고 땅을 골랐습니다.
땅은 버려 묵힌 것이 아니고, 전 사람이 농사를 짓던 터라,
이미 이랑 골이 나 있고, 땅도 비교적 부드러웠습니다.
제 계획은 손이 가지 않는 작물을 심고,
관행농법에서 벗어나 서투나마 온전히 손짓, 발짓으로만 키워보자는 작정인데,
적지 아니 놀란 일이 있어 “ooo님의 분리의식”에 곁붙여 이리 나서봅니다.

저야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초보라, 농사 일에 견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땅 위를 보니 검은 비닐이 갈갈이 찟겨져 콩깻묵처럼 점점히 박혀 있더군요.
멀칭용 비닐이 밭에 버려진 것은 어제 오늘이 아니니, 후에 차근차근 주어내지 하며,
그려러니 하였습니다만, 나중에 보니 저희 밭에 벌어진 광경은 예상을 벗어나
자못 심각하게 느껴지더란 말입니다.

자세히 보니 비닐 조각이 그냥 뭉텅이져 찢어진 게 아니고, 마치 믹서기에 넣고 갈려진 듯,
아주 잘게, 갓 퍼온 국물 속 수제비처럼 밭 전체에 고루 퍼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 밭 주인과의 대화속에서 건져낸 짐작입니다만,
전 해의 멀칭 비닐을 걷어내지 않고 당년에 그냥 트랙터로 갈고 바로 로타리를 쳐서
비닐을 갈갈이 갈아내었던 것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니, 땅을 깊숙이 파보아도, 검은 비닐 조각이 내내 고르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제 힘이 땅 전체를 상대할 주제가 되지 않으므로,
일부는 전에 부치던 이에게 알아서 농사를 지어도 좋다고 진즉 허락하였습니다만,
당장 도로 거두고 싶은 마음이 불같이 입니다.

그이는 본색이 전직 농부인즉 최소한의 농심을 지켰어야 한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받아내는 그곳 농토를 그리 막 대하며, 훼손시킨 마음보가 미웠던 것입니다.
비료치고 농약 뿌리는 것이야 천하가 그리 돌아가며,
그 결과물을 나 역시 나누고 있는 마당인즉, 함부로 남을 탓할 수만은 없는 노릇이라 하더라도,
멀칭비닐을 벗겨내지 않고 그냥 회전 칼날로 찢어 발겨버리는
그 마음보가 너무 불결하여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등산 가서 사탕 한 알 쌌던 껍데기가 버려져 있어도 눈살을 찌뿌리고 마음이 상합니다.
살비듬 헐어 흘려내듯, 그들이 오르는 발자국마다 저들은 저리 점점히 불량한 마음을 흩뿌리고 다닙니다.
제가 다니는 등산 길은 비교적 인적이 드문 곳입니다만,
이는 이들을 피해 정갈한 마음을 지키고 싶은 연유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리 한적한 곳입니다만, 그곳 계곡 역시 일년에 몇 차례씩 내려가 쓰레기를 집어내도,
년년세세 변함없이 다시 그대로 쌓입니다.

밭 위뿐이 아니라, 땅 속까지 비닐이 범벅이 되어 있으니,
이는 마치 쌀 낱알 속에 섞인 콩알을 골라내듯
인고의 시간을 두고 해결하지 않으면 아니 될 사태에 봉착한 것입니다.
예전 서강대의 김열규 교수가 남해로 낙향한 후, 함부로 버려지는 쓰레기를 보고 살이 떨린다고 하였는데,
저 역시 일점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처지이니, 저의 놀라움이란 감정은 실인즉 분노를 짐짓 이리 가장하며 돌려,
혹여 터지려는 불상사를 저지하려는 자기방어기제의 작동 결과인 양 싶습니다.

그이가 팥쥐 어미라도 된 것일까요 ?
미상불 저는 원하는 바 없이 콩쥐가 됩니다.
왕자를 만나기 위해선 늘 이리 고통의 사다리를 건너야만 되는 게
동화의 장치만이 아닌 것임을 사무치게 깨닫습니다.

ooo님은 말씀하십니다.
분리된 의식이 실재를 추상화하여 재구성하며,
진리란 분리의식의 헛된 바램인지 모른다고 차탄(嗟歎)합니다.

실재와의 합일이든, 분리든 이런 논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제겐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ooo님은 자신이 소설(所設)한 바는 해석이라며 중인(衆人)처럼 제 주장일런 듯
타인에게 강박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이런 겸양을 저는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인즉 저는 그게 겸양이 아니라,
실재를 향하는 유의미한 방식이라 여기기에 당당함이라 새기기도 합니다.
양자역학이든, 상대성이론이든 이게 어찌 진리이겠습니까 ?
이 역시 제마다 세상을 쳐다보는 해석틀이 아니겠습니까 ?
부처 역시 팔만 장광설을 사자후하지만, 종국엔 설한 바 하나도 없음이라 읊조립니다.
그렇다면 장광설 역시 세상의 구조역학적 한 소식에 불과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

지동설이 진리고 천동설이 엉터리가 아닙니다.
천동설의 체계가 역학적으로 지동설에 비하여 사뭇 복잡하고 산뜻하지 않을 뿐,
천계의 운동을 기술하는데 결코 하자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천동설은 지구를 중심으로 천하를 바라보았을 따름입니다.
천동설이든 지동설이든 하나의 분석틀로서 기능할 뿐입니다.

그런데, 어제 제가 문득 든 생각은 이렇습니다.
분리의식이 실재를 對하여 합일을 지향하든,
초극하고자 길을 묻든 또는 ooo님 말씀대로 분리를 완성하려 하든간에,
이 진지한 구도의 지점을 진즉 인간들은 넘어선 지점에 서 있지 않은가 하는 것입니다.

분리의식이 실재를 두고 거량하는 단계가 아니라,
“이(利)를 탐하며 벌겋게 그저 바삐 달려만 가고 있는 도상에 있을 뿐이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그저 모두 이리 바쁠 뿐입니다.
제 이웃 밭 주인도 한달 전 처음 만났을 때,
초면 인사가 대뜸 너절하니 인근 땅값 등귀를 꿰주워 섬기며,
제 이악스런 주변머리가 소명함을 자랑함에 힘줄을 팽팽히 당겨 분주하더군요.

제 땅값 올라 좋아하지 않을 인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문제는 그들의 의식엔 왼통 그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는 것이고,
저는 저들이 휘젓고 있는 세상이 견디어내기 힘들다는 것입니다.
하니 그들은 분리의식이 아니라 박리의식(剝離意識)의 환영들이 아니겠습니까 ?
분리의식은 실재를 그리워 대향(對向)하지만,
박리의식은 홀로 고독하니 떨어져 나와 스스로를 열망할 뿐입니다.
그들 앞에 타자란 도대체 없습니다.
ooo님 하고는 다른 의미겠지만 그들은 진즉 분리의식을 완성하고 있음이 아니겠는지요 ?
분리가 사무쳐 저들은 박리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입니다.

뜬물처럼 부유(浮游)하며 존재를 욕망으로 가득 채워 제 스스로 아귀되는 미망들.
허나, 한 발 나서면 저라고 뭐 뾰족하니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미침에 한껏 자탄스런 노릇입니다.
그래서 미망은 저리도록 현기증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공자가 변변한 벼슬하나 하지 못한 처지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말년 13년간 주유천하 하기 전 노나라에서 5년간 꿈같이 원하던 바, 벼슬을 합니다.
그 때의 일입니다.
공자가 사구(司寇)란 직책에 있을 때인데,
이 이후로 노나라에서 양에게 물을 먹이고 체중을 늘려 팔아 이를 취했던
심유씨는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았고... 운운의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보니, 이게 딱 2500년전 얘기이나, 지금과 하나도 다를 바 없군요.
인간은 이제나 그제나 달라진 바 없음이니,
새삼 콩쥐가 됨을 한탄함은 아직도 세상 사는 도리에 어두운 소치일런가요 ?

박리된 존재들은 제 고치에 스스로 갇혀 이미 박제화되어 있습니다.
ooo님의 분리된 의식이란 해석론이 그래서 저는 귀하니 사랑스럽습니다.
깨달음이니, 휴거니 하는 깨알같이 약소한 희망이나 약속보다
ooo님의 솔직한 증언이 더 절실하니 구원으로 읽혀집니다.
그래서 고맙습니다.

덧붙입니다.
ooo님이 저의 글을 두고 문학적 향기 운운하셨는데요.
참으로 부끄러운 책망의 말씀입니다.
저는 본색이 공학도인즉 그와는 상거천리입니다.
다만 그리 오해를 하셨다면,
이는 법구경에 향싼 종이에서 향내가 나고 생선 묶은 새끼에서는 생선비린내가 난다 하였듯이
거죽에 잠깐 스친 냄새를 향으로 착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제 위선의 책임입니다.

법구경의 이 말씀을 흔히 오해를 합니다.
향이 아니라, 향 종이, 또는 냄새에 주목하고 쉬 머무르는 것이지요.
실인즉 향 냄새는 차라리 역겨운 부끄러움의 흔적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
당체인 향은 아미산 심장처에 봉해진 것, 무릇 범인이 어찌 구할 수 있으리오.
다만 사향노루 궁뎅이에 붙은 똥찌거기를 훔쳐내어 이를 흉내냄이니
적악이 도척을 방불하고 있음입니다.
그러니 그깟 향이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
이게 저의 겸양이 아닌 것이 저는 제가 이무기에 불과한 불쌍한 중생이거니 하며,
긴 밤을 전반측후반측 뒤척이며 앞 산 소쩍새 벗삼아 매양 웁니다.

이무기를 사람들은 괴물로 치부하며, 경원시 합니다.
하지만, 뱀이나 지렁이 또는 용은 괴물이라 하지 않습니다.
제 꿈에 겨워 용을 그리다 제풀 힘이 꺽여 연못에 천년 갇힌 신세.
제 분복을 넘어 욕심을 낸 죄업이라면 오히려 가볍습니다.
하니, 뱀은 하늘을 날지 못하지만 이무기보다는 당당하며,
지렁이는 그저 소소히 담담합니다.

아직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이리 소명하고자, 오늘 찢어진 비닐을 핑계 삼아 나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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