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도대체 왜?

카테고리 없음 : 2010. 7. 24. 23:00


내가 출타하려고 자동차에 시동만 걸어도 농원 앞집에서 사육하는 강아지들이 난리다.
용케도 나를 알아보고 있음이다.

‘기르는’ 또는 ‘키우는’이 아니라 ‘사육하는’ 강아지들 말이다.
사육이란 事育이 아니고 飼育이니 이는 곧 먹여 기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飼)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먹이어’ 나중에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거저 먹이는 것이 아니라 곧 잡아먹겠다든가, 시장에 내다팔겠다는 셈이 있는 것이다.
자식을 먹인다고 할 때, 나중에 잡아먹겠다고 먹이는가? 내다 팔려고 먹이는가?
그 자를 위하여 먹이는 것이 아니고 그 자를 해쳐 자신에 이익 되는 것을 꾀하고 있을 때,
사(飼)란 말이 동원된다. 그것도 떳떳이.

그래,
그 사육되는 강아지 집에 들어가자면 거기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다.
거기 현생지옥이 펼쳐지고 있음이다.

오늘 저녁,
내가 잠깐 그 안으로 들어간 사이 이내 물것에게 몇 방 뜯기고 만다.
저들 강아지들은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몇 만 방이나 당하고나 있을까?
나를 제일 반기는 녀석은,
아직까지도 털갈이 털이 남아 뭉쳐진 채 군데군데 누구한테 맞은 멍처럼 뭉쳐있다.
밥그릇에 개털이 범벅이고 바닥엔 개똥이 '버려진 참외밭'처럼 너부러져 있다.

도대체 저들은 왜 지상에 유배되어 저리 모질고도 진 고생을 종일 마주하고 있는가?

저 눈 맑은 착한 녀석들이.

주인은 어이하여 저들을 돌볼 틈이 없는가?

고물할아버지야 인성이 아주 고약스럽고 더러운 나쁜 인간이지만,
이 집 주인은 심성들이 착한 편이다.
아마도 저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리라.
나는 주인을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
외려 도울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

내가 나서 대대적으로 청소를 해주고도 싶은데,
이게 행여나 주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되는 폭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아마도 저들 강아지들은 올해 안으로 어느 날 끊어진 다리(橋)처럼 갑자기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이 더럽고 잔인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면 차라리 한시라도 바삐 떠나는 것이 나으리라.
나는 저들을 위해 사온 달걀을 삶아 몇 알씩 전해주었다.

바쁘게.
여름이 지나기 전에.

하마, 저 달걀인들 멀쩡한 것이랴?
서러움 덩어리들.
살아생전 좁은 케이지에 갇혀 온갖 항생제로 키워진 닭들의 서러운 증언들.
농협 하나로마트, 아닌 척, 단 한 점도 아픈 것이 없다는 듯,
거짓으로 오연(傲然)하게 꾸며진 모습으로 진열된,
한 판에 4200원 하는 싸구려 달걀 꾸러미.

싸면 쌀수록 혐의가 짙다.
저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슬펐다는 것을.
점주든 손님이든 모두는 지난 폭력을 위장하고, 애써 잊기 사뭇 바쁘다.
우리시대는 예의를 잃었다.

세상의 달걀은 결코 하얗지 않다.
심연처럼 검다.
너무 슬픔이 깊어,
하얗게 창백해진 얼굴 안쪽,
나는 칠흑을 접한다.

백단비단(白蛋非蛋)

공손룡의 白馬非馬는 白蛋非蛋에 비하면 한가롭다.

한가롭지 않은 그것을 도리 없이 사서 저들에게 먹인다.
서러움의 점화식(漸化式) 아니 점화식(點火式)이라 일러야 더 실감난다.
화택(火宅)이 이웃에게 불 번져 들고 있음이다.
중생은 괴롭다.
이 단순명제가 여기 현현한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더럽고 잔인한 세상을 기획한 신이라면 있더라도 최소한 선량한 존재는 아니리라.
그런 신이라면 전지전능은커녕 추악하다.
그런 신이라면 비록 내 존재의 바탕이라도 회의할 수밖에 없다.

오늘 뉴스엔 북한 고위층 아파트 쓰리기통에 경비를 세운다고 한다.
쓰레기통을 뒤져 옷가지, 음식물들을 가져가는 주민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저쯤이면 혁명이 일어날 때가 가까웠지 않았는가?

그런데 동물들은 인간이 쳐놓은 그물, 채워넣은 차꼬 속에 갇혀 있길 수만 년이 지나고 있지 않은가?
왜 저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혁명 革命
명을 바꿔버리는 것,
운명이 아니라 숙명이라도 뒤집어 바꿔버리는 파천황(破天荒).
그래 天荒을 깨는 유세(劉蛻)는 언제라야 준비가 끝날 터인가?

나는 그 주역은 아마도 강아지들이 아니라 고양이가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강아지와 다르게 저들은 인간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다.
나는 저들의 결벽하고 고고한 모습에 곧잘 신뢰가 간다.
반면 강아지들은 너무 충직하여 마냥 안쓰럽다.
세상에 저 한없이 사랑스런 가여운 녀석들이라니.

자기자신에게 진지한 동물이라면 결코 인간 나부랭이에게 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동물들에게 인간은 이제껏 결코 친구가 아니라 모질고 독한 적당(敵黨)으로서 서있었다.

나는 저들의 인간을 대향한 핏빛 혁명을 고대한다.
사뭇 진지하게.

왜 아니?


Bongta LicenseBongta Stock License bottomtop
이 저작물은 봉타 저작자표시-비영리-변경금지 3.0 라이센스에 따라 이용행위에 제한을 받습니다.
카테고리 없음 : 2010. 7. 24. 23:0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