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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왜?

분류없음 : 2010.07.24 23:00


내가 출타하려고 자동차에 시동만 걸어도 농원 앞집에서 사육하는 강아지들이 난리다.
용케도 나를 알아보고 있음이다.

‘기르는’ 또는 ‘키우는’이 아니라 ‘사육하는’ 강아지들 말이다.
사육이란 事育이 아니고 飼育이니 이는 곧 먹여 기른다는 뜻이다.
여기서 사(飼)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을 ‘먹이어’ 나중에 도모하겠다는 뜻이다.
거저 먹이는 것이 아니라 곧 잡아먹겠다든가, 시장에 내다팔겠다는 셈이 있는 것이다.
자식을 먹인다고 할 때, 나중에 잡아먹겠다고 먹이는가? 내다 팔려고 먹이는가?
그 자를 위하여 먹이는 것이 아니고 그 자를 해쳐 자신에 이익 되는 것을 꾀하고 있을 때,
사(飼)란 말이 동원된다. 그것도 떳떳이.

그래,
그 사육되는 강아지 집에 들어가자면 거기 지옥이 따로 없다.
그렇다.
거기 현생지옥이 펼쳐지고 있음이다.

오늘 저녁,
내가 잠깐 그 안으로 들어간 사이 이내 물것에게 몇 방 뜯기고 만다.
저들 강아지들은 도대체 하룻밤 사이에 몇 만 방이나 당하고나 있을까?
나를 제일 반기는 녀석은,
아직까지도 털갈이 털이 남아 뭉쳐진 채 군데군데 누구한테 맞은 멍처럼 뭉쳐있다.
밥그릇에 개털이 범벅이고 바닥엔 개똥이 '버려진 참외밭'처럼 너부러져 있다.

도대체 저들은 왜 지상에 유배되어 저리 모질고도 진 고생을 종일 마주하고 있는가?

저 눈 맑은 착한 녀석들이.

주인은 어이하여 저들을 돌볼 틈이 없는가?

고물할아버지야 인성이 아주 고약스럽고 더러운 나쁜 인간이지만,
이 집 주인은 심성들이 착한 편이다.
아마도 저들을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으리라.
나는 주인을 결코 미워하지 않는다.
외려 도울 일이 있다면 돕고 싶다.

내가 나서 대대적으로 청소를 해주고도 싶은데,
이게 행여나 주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게 되는 폭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다.

아마도 저들 강아지들은 올해 안으로 어느 날 끊어진 다리(橋)처럼 갑자기 이승을 하직하게 될 것이다.
이 더럽고 잔인한 세상을 떠날 것이라면 차라리 한시라도 바삐 떠나는 것이 나으리라.
나는 저들을 위해 사온 달걀을 삶아 몇 알씩 전해주었다.

바쁘게.
여름이 지나기 전에.

하마, 저 달걀인들 멀쩡한 것이랴?
서러움 덩어리들.
살아생전 좁은 케이지에 갇혀 온갖 항생제로 키워진 닭들의 서러운 증언들.
농협 하나로마트, 아닌 척, 단 한 점도 아픈 것이 없다는 듯,
거짓으로 오연(傲然)하게 꾸며진 모습으로 진열된,
한 판에 4200원 하는 싸구려 달걀 꾸러미.

싸면 쌀수록 혐의가 짙다.
저들이 얼마나 아파하고 슬펐다는 것을.
점주든 손님이든 모두는 지난 폭력을 위장하고, 애써 잊기 사뭇 바쁘다.
우리시대는 예의를 잃었다.

세상의 달걀은 결코 하얗지 않다.
심연처럼 검다.
너무 슬픔이 깊어,
하얗게 창백해진 얼굴 안쪽,
나는 칠흑을 접한다.

백단비단(白蛋非蛋)

공손룡의 白馬非馬는 白蛋非蛋에 비하면 한가롭다.

한가롭지 않은 그것을 도리 없이 사서 저들에게 먹인다.
서러움의 점화식(漸化式) 아니 점화식(點火式)이라 일러야 더 실감난다.
화택(火宅)이 이웃에게 불 번져 들고 있음이다.
중생은 괴롭다.
이 단순명제가 여기 현현한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
더럽고 잔인한 세상을 기획한 신이라면 있더라도 최소한 선량한 존재는 아니리라.
그런 신이라면 전지전능은커녕 추악하다.
그런 신이라면 비록 내 존재의 바탕이라도 회의할 수밖에 없다.

오늘 뉴스엔 북한 고위층 아파트 쓰리기통에 경비를 세운다고 한다.
쓰레기통을 뒤져 옷가지, 음식물들을 가져가는 주민들을 막기 위해서라고 한다.
저쯤이면 혁명이 일어날 때가 가까웠지 않았는가?

그런데 동물들은 인간이 쳐놓은 그물, 채워넣은 차꼬 속에 갇혀 있길 수만 년이 지나고 있지 않은가?
왜 저들은 혁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일까?

혁명 革命
명을 바꿔버리는 것,
운명이 아니라 숙명이라도 뒤집어 바꿔버리는 파천황(破天荒).
그래 天荒을 깨는 유세(劉蛻)는 언제라야 준비가 끝날 터인가?

나는 그 주역은 아마도 강아지들이 아니라 고양이가 되지 않을까 짐작한다.
강아지와 다르게 저들은 인간에게 곁을 잘 주지 않는다.
나는 저들의 결벽하고 고고한 모습에 곧잘 신뢰가 간다.
반면 강아지들은 너무 충직하여 마냥 안쓰럽다.
세상에 저 한없이 사랑스런 가여운 녀석들이라니.

자기자신에게 진지한 동물이라면 결코 인간 나부랭이에게 곁을 주지 말아야 한다.
동물들에게 인간은 이제껏 결코 친구가 아니라 모질고 독한 적당(敵黨)으로서 서있었다.

나는 저들의 인간을 대향한 핏빛 혁명을 고대한다.
사뭇 진지하게.

왜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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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은유시인 2010.07.25 18:35 PERM. MOD/DEL REPLY

    한참 글을 쓰다가 뭐가 어찌되었던지 화면이 바뀌면서 다 날라버렸네요.

    오늘 날씨가 엄청 무덥네요.
    해가 기울 무렵 근처의 다대포해수욕장으로 우리 어여쁜 강아지 예삐 데리고 산책 다녀올 생각입니다.
    밖에만 다녀오면 탈진하여 기운이 없습니다.
    아마 운동부족인지 늙은 탓인지...
    우리 강쥐가 다 어여쁜데
    딱 두 가지 못된 버릇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료를 먹으려 들지 않는데
    매일 생닭을 고아 먹이곤 합니다.
    근데 한번 먹다남긴 음식은 죽어라 먹질 않습니다.
    그것도 복에 겨운 짓일까요?
    또 한가지는 요즘 또 화장실 입구에다 오줌을 질펀하게 싸질러 놓습니다.
    야단쳐도 막무가냅니다.
    그렇다고 그리 큰 소리로 야단치거나 때리진 않습니다.고 어여쁜 것이 때릴 데가 있던가요?

  2. 사용자 bongta 2010.07.25 23:42 신고 PERM. MOD/DEL REPLY

    고물할아버지로부터 데려온 우리 집 풀방구리는 집 안에서는 절대 오줌을 싸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루에 세 차례 밖으로 데리고 나가야 합니다.
    아마도 예전에 살 때 실내 방뇨로 인해 강한 심리적 외상을 입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이 녀석을 원래는 여름 한철이라도 농원으로 데려 오려고 하였으나,
    너무 더울까봐 아직도 데려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의사 말로는 몇 개월 살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살도 많이 찌고 쌩쌩하니 잘 뛰어 다닙니다.

    강아지들이 나이를 먹게 되면 심술도 제법 부리지요.
    화장실 문턱 하나 넘어가는 것도 귀찮으니 그냥 근처에서 오줌을 갈겨버리지요.
    그래보았자 주인한테 싫은 소리 한번 듣고 말자는 심산일 것입니다.
    나이를 먹어 꾀돌이가 되고 만 것인데,
    문제는 그만큼 죽을 날도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지요.

  3. 은유시인 2010.07.26 15:25 PERM. MOD/DEL REPLY

    우리 예삐는 이제 3년11개월 되었습니다.
    강아지들이 평균 12년을 산다해도 앞으로 8~9년은 족히 더 살 것 같습니다.
    화장실 문 앞에 오줌을 질펀히 싸고 뭐라고 야단치면 슬그머니 머리를 늘어뜨리고 눈치를 봅니다.
    왜 야단치는지 뻔히 아는 눈치더라니까요.

    날씨가 무덥습니다.
    너무 땡볕에서 일만 하지 마시고
    부채를 부쳐가며 천천히 일하세요.

  4. 사용자 bongta 2010.07.26 20:38 신고 PERM. MOD/DEL REPLY

    10년 이상을 같이 살 녀석이라니 이게 보통 인연이겠습니까?
    동물 중에서 사람과 교감이 이리 깊게 되는 강아지는 무엇인가 특별한 구석이 있습니다.
    그래서 가족이라고 이르게들 됩니다.

    4살짜리가 꾀가 보통이 아니군요.
    그런데 예전 저의 경우를 보건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경우,
    실례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집을 많이 비웠더니만 돌아와서 보면 식탁 다리에다 대고 오줌을 갈겨놓았었지요.
    사람이 집에 있을 때는 화장실 바닥이 젖어 있어도,
    싫어하면서도 도리 없이 그리로 들어가 일을 치루는 녀석이었거든요.

    부채를 부쳐가며 일을 할 처지가 못 되는군요.
    예초기 매고 부채질을 할 수는 없지요.
    외발 손수레를 끌고 다니면 땀이 비 오듯 하는데 잠깐 쉬는 게 더 성가시답니다.
    잠깐 쉴 때 땀이 식으면서 옷이 축축해지니 이게 기분이 좋지 않거든요.
    그래 오래 쉬지도 않고 그저 얼음물이나 서너 모금 들이키고는 이내 일하러 나가지요.

    앞서 주말농사를 3년 지을 때도 땡뼡에서 쉬지 않고 일을 하며 즐기었습니다만,
    지금 역시 힘은 들지만 할 만 합니다.
    그새 하얀 얼굴은 새까맣게 타고, 팔뚝은 햇볕에 타서 반점까지 생기고 있습니다.
    제가 가끔씩 제 처에게 말하듯,
    우스갯소리로 제가 얼굴 하나로 버티고 있는데 이 지경입니다만,
    개의치 않고 일 속으로 뛰어 들어가 삼매에 듭니다.

    선생님도 더위에 무탈 평안하시길 빕니다.

  5. 은유시인 2010.07.27 09:44 PERM. MOD/DEL REPLY

    저는 늘 엉뚱한 생각에 사로잡힌답니다.
    이상한게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스스로 노력해서 돈을 벌고 자신이 수고한 것만큼만 결실을 걷으려 하지 않을까?
    이게 제겐 큰 의문이요 수수께끼랍니다.
    그저 남을 등치고 남을 파멸시켜가며 얻은 수익으로
    아니면 공짜로 무임승차하여 얻은 수익으로
    잘 먹고 호사를 즐기려 한다는 겁니다.
    도둑놈도 살인마도 사기꾼도 남을 희생시켜 얻은 돈으로
    고기도 사먹고 아이들 장난감도 사주고 기마이도 쓰고....
    이게 이상하단 생각입니다.

  6. 사용자 bongta 2010.07.29 14:38 신고 PERM. MOD/DEL REPLY

    전자는 욕심이 등천하여 ,
    후자는 속이 비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게 따지고 보면 같은 내용입니다만.

    저는 책 혹은 인터넷만 공급된다면,
    한 오백년이라도 혼자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단 일각이라도 홀로 있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안.
    불안한 것이지요.

    하기에 종일 음악을 틀어놓는다든가,
    사람을 불러들여 무료함을 풀어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혼자 있게 되면 단 일각도 버티지 못하고 심심하여 미치겠노라고,
    여기 저기 전화질 하며 빨리 내게 오라고 투정을 부립니다.
    저는 이게 불안한 까닭이 아닌가 하는 것이지요.
    속이 비어 있기에 무엇인가 외부로부터 견인하여 채어 넣어야 하지요.
    그렇지 않으면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 시골에 들어오니까,
    제가 심리적으로 한층 한가해진 탓도 있겠지만,
    도시인과 다르게 무장 해제된 적나라한 인간 군상을 접할 수 있게 되었기에,
    자청하여 구하는 바도 아닌데,
    아주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깊숙하니 관찰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저는 도농 불문 어디에 처하든 이웃에게 폐를 끼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저쪽 아랫마을에선 매일 밤만 되면 드럼 소리가 발악을 하듯 아주 크게 들립니다.
    누군가 직업상 연습을 하는지 아니면 취미활동을 하는지 거의 매일 큰 음악소리가 납니다.
    저와 멀리 떨어져 지장이 없지만 가까이서 이런 소리가 들린다면
    참으로 매일 버티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서울보다 시골이 더 시끄러울 수도 있는 것이지요.
    도무지 염치없는 사람들이 시골입네 하며 더욱 안하무인으로 처신을 하는 것이지요.

    우리 이웃 밭에서도 매일 똑같은 음악 소리가 종일 크게 틀어져 들립니다.
    서울 같으면 이미 진정을 들이고도 남았을 터인데,
    여기서는 그냥 참아 주기로 하였습니다.
    아마도 공간이 넓어 소리가 폐쇄되어 모이지 않고 허공중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북한산에 있을 때는 음악 소리 크게 틀어놓고 산에 오르는 자가 있으면,
    제가 주의를 꼭 주었지요.

    ‘남에게 폐를 끼치면 아니 되지요.’
    조금만 주의를 하면 되는데 안하무인으로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입니다.
    제가 제일 염오하는 짓이지요.
    염치없는 사람을 저는 싫어합니다.

    거지반 노인들이 그러는데 거의 예외 없이 뽕짝류 따위를 틀고 국립공원을 오르지요.
    거의 육탈에 가까운 몰골로 그리 몸부림치며 진세(塵世)를 건너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악이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시간에,
    매일 똑같은 음악을 반복하여 듣는 것은 고역입니다.
    하지만, 저는 저이를 불청(不請)DJ 또 출근하였다고 놀리며,
    그냥 참아 주기로 하였습니다.

    따지고 보면 불쌍한 것이지요.
    우리 모두 그리 허기가 져서 투정을 부리며,
    이 진흙뻘밭을 건너고 있는 것이려니 하는 것입니다.
    그가 가진 것은 CD 한 장 뿐입니다.
    그래서 언제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로운 CD를 여러 장 선사할까 합니다.

    왜 이런 말씀을 드리느냐 하면,
    이들은 속이 비었기 때문에 이리 외부로부터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취하지 않으면,
    견디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지요.

    남 얘기하는 것은 언제나 뒤가 개운하지 않습니다.
    이제 제 이웃 얘기는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악착같이 벌어서는 헤프게 쓰는 사람들은 이런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속이 어어 있기에,
    이리 기분을 내면서 주위의 좋은 평가를 돈으로 구매하는 것이지요.
    일종의 전시효과 같은 것 아닐까요?
    제 자신의 형편으로는 빛을 낼 수 없으니까,
    외부의 자원을 끌어들여 위광을 보태려는 수작질이지요.
    홀로 이 깜깜한 세상을 견디어 낼 수 없는 것입니다.
    속이 비었다고 규정하는 까닭이 예에 있으며,
    이를 저는 존재불안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하자니 결국은 말씀대로 기마이를 써서,
    이런 외부자원을 자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지요.
    그런데 끌어들인다고 끌려가는 사람은 오죽하겠으며,
    이런 식으로 제 존재의 누추함을 가리려는 인물은 얼마나 가련한 것입니까?
    그런데 항차 이 돈을 갖은 구린 짓, 떳떳하지 못한 사술로 확보한 것이라면,
    참으로 부끄러운 노릇이지요.

    기마이를 쓰더라도 그게 진실된 마음이 실려야 하는데,
    오직 상대의 관심을 사려고 하는 수작질이라며,
    참으로 일변 야비하기도 하며, 일변 가련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선생님의 말씀 ‘기마이’를 대하니,
    제 글 하나가 생각납니다.
    http://bongta.com/436
    얼추 이번 주제와 맥이 가닿으니 이리 소개해둡니다.

    국산 영화 한 장면입니다.
    부동산 중개소 사장인 주인공이 직원들 앞에 바둑돌 5개를 죽 늘어놓습니다.
    ‘내가 2개를 가지면 상대는 3개를 가지게 되며,
    내가 3개를 가지면 상대는 2개를 가지게 된다.
    그러하니 악착같이 하나라도 더 뺏으려고 노력하여야 한다.’
    직원들을 불러 모아놓고는 이리 일갈합니다.

    그런데 얼마 있지 않아 직원 하나가 퇴직을 고합니다.
    그러자 사장이 불러 이유를 묻습니다.

    ‘저는 2개를 가지며 살아가겠다’고 말합니다.

    3개를 구하고 나면 4개를 원할 것이며,
    4개를 얻고 나면 다음엔 5개를 욕심내게 될 것입니다.
    2개에 만족하며 살겠다는 저 젊은 직원은,
    찬바람 부는 밖에 나가 얼어 죽게 되었을까요?
    3개를 구하는 자들에게 치여 2개가 1개로 줄어들고,
    종국엔 하나도 남지 않고 모두 빼앗기고 말았을까요?

    한비자는 신을 믿지 않았지요.
    사람들의 선량함에 의지 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이(利)를 탐하고 있다라는 사실에만 주목하였습니다.
    도덕이니, 예의염치는 하는 것은 현실에선 별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로지 사람들이 이를 탐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한 사실이다.
    이게 진실이지요.
    그는 그러하기에 유가를 비판적으로 다룹니다.
    사실 당시엔 순자 계열이 일세를 풍미를 하고 있었지요.
    한비자는 순자의 제자이기에 이런 생각을 펴는 것은,
    대개는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하기에 法에 의지하여 이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자고 생각하였던 게 아닐까요?
    만약 한비자가 펴는 이상적인 세상이었다면,
    저 젊은이는 2개 정도는 수분(守分)하며 세상을 평화롭게 살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실제 당시 한비자가 추구한 현실은,
    전제 군주 하나를 중심으로 한 세계질서 구축이었습니다만,
    그를 오늘에 초청하였다면 아마도 개개인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세상을 공정하게 가치 분배하는 사회적 룰을 마련하는데 진력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한비자는 능히 그러하고도 남았을 것입니다.
    그는 합리주의자이거든요.
    구질구질하게 자기 잇속만 밝혀,
    세상을 자기쪽으로 구부리려 하지않고 공정하게 세상을 대하였을 것입니다.

  7. 은유시인 2010.08.03 01:42 PERM. MOD/DEL REPLY

    하루 한두 번씩은 꼭 들어옵니다만,
    댓글은 몇 번 읽고 답니다.

    요즘은 어찌나 더운지 하루에 몇 번이고 찬물 샤워를 합니다.
    일도 잘 되지 않고 글도 통 쓰질 못하니...
    날씨 핑개 대고 마냥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인간세상에서는 진실이 실종된지 오래입니다.
    그저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할 뿐 진심으로 대할 수가 없습니다.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들 하나하나가 뭔 흑심을 품었는지 알 도리가 없지요.
    눈 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

  8. 사용자 bongta 2010.08.03 17:18 신고 PERM. MOD/DEL REPLY

    날씨가 무덥습니다.
    밖에 나가 농사일을 하면 온몸이 땀으로 흥건합니다.
    그동안 수십 년 몸 안에 쌓인 독(毒), 적(積), 괴(塊)들이 녹아 흘러내립니다.
    하지만 마음보 안에 들은 죄와 허물은 워낙 커서 여전합니다.

    선생님 댓글에 잠깐 생각이 일어, 본글 하나를 지어 올려봅니다.

  9. 은유시인 2010.08.03 23:34 PERM. MOD/DEL REPLY

    세상 사람들을 삐딱하게 보는 제 눈에도 마냥 고운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조선족 영감님인데 1년1개월만에 다시 한국에 오셨습니다.
    아마 토요일쯤 부산 제 집에 도착할 겁니다.
    그 분이 작년 6월말 중국으로 떠났을 때 쓴 수필이 있습니다.
    부끄러운 제 생활상이 적나라하게 고백된 글이라 내놓기 되게 쑥스럽습니다만,
    선생님만 살짝 읽어주세요.


    ***


    [수필]

    조선족(朝鮮族)영감님

    - 은유시인 -



    사람관계는 지극히 상대적이다. 예컨대 사람이 누군가를 가리켜 ‘좋다, 나쁘다’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여러 가지이겠으나 보편적으로 자신에게 호의적이고 도움을 주었을 경우엔 좋은 사람이라 판단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엔 나쁜 사람이라 판단하기 마련이다.
    아무리 사회적으로 지탄받는 흉악범일지라도 제 자식에겐 더할 나위 없이 자상하고 관대하다면, 그는 그 아이에게 있어 좋은 아빠요, 더 나아가 훌륭한 아빠인 것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21평에 방 세 개짜리 서민아파트 전세보증금 5백만 원도 실상 내 돈이 아니다. 조선족영감님 돈이다. 그렇지만 영감님은 내게 수차례에 걸쳐 ‘그 5백만 원은 내가 김 동무에게 쓰라고 조건 없이 줬기 때문에 당연히 전세보증금의 권리는 김 동무한테 있다’라며, ‘5백만 원은 형편이 어려우면 갚지 않아도 된다. 아니, 갚을 필요도 없다’라고 하였다.
    이 5백만 원은 영감님이 한동안 힘든 일을 하여 받아온 월급과 잡다한 일을 처리하고 푼푼이 받아 쥔 돈을 모은 것으로 영감님에게 있어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돈이다.
    작년 겨울, 내가 전세보증금이 없어 방을 구할 도리가 없자 영감님이 내게 자청해서 건네줬던 돈이고, 나와 영감님을 잘 알고 있는 주위사람들이 ‘전세계약서를 내 이름으로 하면 항차 그 돈을 내가 떼어먹을 것’이라 우려하여 반대를 심하게 했었기에, 전세보증금을 집주인에게 건네고도 열흘 지나도록 계약서를 작성하지 못했었다.
    따라서 나 또한 불편한 심기로 ‘그들 가운데 재산도 제법 있고, 또 믿을만한 사람이름으로 전세계약을 하자’며 한동안 내 이름으로 전세계약 작성하기를 거부했었다. 영감님은 주위사람들의 경우 없는 간섭에 역정까지 냈고, 결국 영감님의 뜻대로 내 이름으로 전세계약을 했던 것이다.
    내가 저들에게 돈을 빌렸다거나 신용에 손상될만한 짓거리를 하지 않았음에도, 단지 내게 방 한 칸 얻을 돈조차 없다는 이유만으로 나를 ‘세상물정 모르는 조선족영감님을 상대로 금품이나 갈취하려드는 인간’취급하려든 것에 대한 굴욕감 때문에 한동안 나로서는 분한 마음을 삭히기가 힘들었었다.
    그 외에 영감님은 자신이 폐지나 헌 박스 등을 모아 그걸 팔아 생긴 돈도 무조건 내게 갖다 주면서 쓰라했다. 뿐만 아니라 과일이며 떡이며 먹을거리가 생겨도 자신은 전혀 입에 대려하지 않고 내게 가져다주는 것이었다. 하다못해 내가 마땅히 해야 할 힘들고 궂은일마저 낚아채어 대신 해주곤 했었다.
    그렇다고 내가 영감님께 돈을 꿔달라든가 그 어떤 일을 대신해달라고 요구한 적도 없을뿐더러 돈을 쥐어줄 때마다 수중에 돈이 없어도 ‘돈이 있다’라며 거짓말하고 몇 번씩 거절해도 끝내 악착같이 쥐어주는 것이었다.
    그와 내가 피와 살이 섞인 혈육도 아니요, 특별하다 할 인연이 있었던 것도 아니요, 내가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푼 적도 없었으니, 그와 나를 익히 알고 지내왔던 주위사람들은 일방적으로 그가 내게 도움을 주는 것에 대해 나를 ‘그를 등쳐먹는 질 나쁜 사람’으로 볼 수도 있을 테고, 반대로 그를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어수룩한 멍청이’로 볼 수도 있을 테다.

    나는 한때 부산에서는 내로라하는 광고회사를 운영하여 남부럽지 않을 만큼 큰돈도 벌었으나 손아래동서로부터 사기피해를 당해 엄청난 액수의 부도를 겪었고, 이후 여러 가지 정기간행물을 발행해오면서 완전히 거덜이 났다. 또 그로인해 10년 전부터 가족들과 헤어져 살아야 했다.
    쉰이 넘은 나이로 마땅히 취업하기도 어려웠지만, 그렇다고 노가다를 할 만한 체력도 지니지 못했다. 그래서 두문불출하고 글쓰기를 작정했던 것이고, 그로인해 적잖은 위로를 받았으며, 많은 작가들로부터 글을 잘 쓴다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글이 당장 돈이 되는 것은 아닌지라 가끔씩 인쇄디자인편집관련 일거리를 맡기도 하지만, 그 외엔 별다른 수입이 없다보니 그게 영감님 눈에는 퍽이나 안쓰러웠던 것이다.
    내가 영감님이라곤 하지만 실제론 영감소리를 들을 만큼 나이가 듬직한 것은 아니다. 나보다 다섯 살 위니까 올해로 예순둘이다.
    평소엔 형님으로 호칭하지만 편의상 영감님으로 소개하곤 한다. 얼굴에 잔주름이 그득하여 마치 십년세월을 훌쩍 더 뛰어넘은 얼굴마냥 쪼글쪼글해 뵈기 때문에 처음 뵀을 땐 나이가 꽤 많으려니 하여 영감님으로 불렀고, 본인도 속으론 어떤지 몰라도 그런 호칭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영감님, 그러니까 ‘한상렬(韓祥烈)’이란 자그마하고 마른 덩치에 약간은 꾸부정한 사내를 처음 만난 것은 다대1동에 소재한 기영빌딩 3층에 사무실 겸 주거공간을 임대하여 입주해 있을 때인 2006년8월경이었다.
    조선족 2세인 그는 중국 심양이 고향으로 평생 농사나 짓고 양어장을 하면서 물고기를 길렀던 전형적 시골사람이다.
    그는 3년 전 딸을 서울에 사는 한 청년에게 시집보내면서 그 결혼식에 참석차 국내에 입국했다가 중국에 되돌아갈 마음이 없어 일자리를 구하고 눌러앉았다. 잠시 경기도 모처의 목재소에서 궂은일을 했었고, 그러다 우연히 알게 된 조선족여자의 소개로 기영빌딩의 잡부로 취직되어 부산 다대포로 내려온 것이다.
    건물 내 계단과 화장실청소는 물론 온갖 허드레 일들도 모두 영감님 몫이었다. 그렇게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쉴 새 없이 불려 다니며 종살이보다 더한 일을 해오면서도 몸을 사리거나 게으름 피우지 않고 늘 묵묵하게 일만 해왔기에 주위사람들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다.
    얌체 없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아 건물 내 입주 사무실사람들도 걸핏하면 영감님을 임의로 불러다가 부려먹곤 했는데, 그렇다고 수고한 것에 대해 별도의 사례를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한번은 7층 사무실의 뭐가 잔뜩 든 무거운 캐비닛을 가파른 계단위로 옮겨주려다가 계단에서 굴러 발목을 크게 다치기까지 했다.
    내가 오히려 크게 분노하여 7층 사무실 사장에게 따지려드는데 ‘캐비닛을 끌어안고 계단 밑으로 굴렀음에도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며 말리기까지 했다.
    모두가 우리말이 서툰데다 순박하고, 게다가 단기비자로 입국한 조선족이란 이유로 영감님을 은연중에 깔보는 탓이었다.
    영감님은 매달 고정적으로 받는 급료 1백만 원 외에, 건물 내에서 버려진 물건들이나 박스 등을 수집하여 고물장수한테 넘겨 그로인해 자그마한 부수입을 올렸다. 매달 두 차례씩 그렇게 모은 폐지나 고물로 3만원이나 5만원의 수입을 올렸던 것이다.
    영감님은 그렇게 번 돈 천여만 원을 중국으로 보내어 아들이 집을 사는데 보탰고, 또 서울 딸네 아파트 구입하는데도 천여만 원을 보탰다.

    영감님이 내게 처음 돈을 준 것은 2006년12월 중순이었다.
    11월30일 내 사무실이 입주해있던 기영빌딩 주인 이 사장이 느닷없이 불과 보름후인 12월15일까지 사무실을 비우라는 통보를 해왔다. 보증금도 걸지 않고, 그렇다고 월세마저 제대로 준 것도 아닌지라 주인 말대로 비워줄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사무실을 옮기려면 5백이든 1천이든 전세보증금도 있어야 하고, 적게는 몇 십만 원이란 이사비용도 문제였다. 짐이 예사 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디자인 전문서적이라 무게가 여간 아닌 책들이 수천 권이 넘는데다, 책상이며 책장이며 사무집기 또한 2톤 트럭으로 세 대분은 족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다음날인 11월31일엔 이웃집과의 전기사용료에 따른 불화로 차단기가 있는 그 쪽에서 전기마저 일방적으로 끊었다. 전기가 끊기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컴퓨터도 사용 못하고 텔레비전도 볼 수 없었다. 뿐인가, 아무리 추워도 전기장판이고 전기난로고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다.
    춥고 썰렁한 사무실에서 대책 없이 시간을 보냈다. 긴 롤 전깃줄을 이용하여 2층 화장실 콘센트에서 전기를 끌어다가 책상 위의 자그마한 조명등으로 주변을 밝히고, 전기난로를 피워 그 앞에 웅크리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꼼짝 않고 지냈으니, 내가 나를 돌아봐도 미련하고 아둔하기론 곰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그런 상황에서도 신춘문예에 도전하기로 했다. 구질구질하게 돈을 빌리러 다닐 바엔 상금 타서 그 돈으로 사무실보증금을 맞춰주는 게 더 나으리란 생각에서였다.
    연전 ‘평사리토지문학상’중편소설에 도전하고자 써놓은 소설 ‘동지(冬至)’가 있었다. 소설의 무대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경남 함안일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나는 가끔 사무실을 기웃거리던 영감님한테 그 소설을 읽어주었다. 그때까지는 그저 일 열심히 하고 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조선족영감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영감님은 진지한 표정으로 들으면서 ‘아직 한국말을 잘 몰라 10분지1밖엔 이해를 못하겠다’라고 밝혔고, ‘김 동무는 아주 훌륭한 사람임엔 분명하다’라는 존경심을 표했다. 그러면서 사무실문제가 그 지경에 이른 것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런 상황에서도 전혀 걱정 따위를 내색하지 않는 나를 의아하게 생각했다.
    “이 동지라는 소설은 배경이 함안이란 곳인데, 함안은 아직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요. 사투리표현도 현지사투리가 맞는지 확인도 해야겠고……. 이참에 생각도 좀 할 겸, 여행 삼아 소설의 무대가 된 함안산청지역을 한번 둘러보고 왔으면 좋겠네요.”
    소설을 다 읽어주고 나서 지나가는 얘기처럼 한 마디 했던 것이다. 수중엔 단 한 푼도 없던 상황이라 가까운 거리라도 하루 이틀 머물려면 최소 10만원은 있어야 했다.
    영감님은 온다 간다 말없이 사라지더니, 잠시 후에 꼬깃꼬깃한 만 원권 열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딴 생각 말고 이 돈으로 여행을 다녀와요. 이 돈은 내가 그냥 드리는 거니까 갚을 생각 마시고…….”
    한사코 마다했지만, 억지로 쥐어주기에 그 돈으로 함안산청을 이틀 다녀왔었다. 기대와는 달리 별 수확은 없었어도 그 최악의 상황에서 여행이란 걸 다녀왔던 것이고, 영감님으로부터 처음 돈을 받아 쓴 것으로 기록되었던 것이다.
    함안산청을 다녀오고 나서 그 다음날인 12월18일 건물주 이 사장의 요구에 의해 내 사무실 짐을 모두 같은 건물 내의 창고로 옮겼다.
    버리자니 아깝고 지니고 있자니 여간 골치를 앓게 하는 것이, 제대로 늘어놓으려면 30평은 족히 차지할 엄청난 분량의 짐들이었다. 그리고 임시거처로 5층의 기영빌딩 직원들 전용숙소에 끼어들었다. 영감님은 자신의 방까지 내게 양보를 했다. 그렇게 며칠 남지 않은 2006년 연말을 영감님과 함께 보낸 것이다.

    새해를 넘긴 2007년1월3일, 건물주 이 사장이 ‘마침 공짜나 다를 바 없는 도개공임대아파트가 하나 빈 게 있다’라며 내게 입주하라는 것이었다.
    “열두 평짜리 도개공아파트인데, 전세보증금 50만원이면 당장 입주할 수 있는데 들어갈란교?”
    비록 작은 영세민아파트지만 아파트를 통째로 사용할 수 있다는데, 나로서는 군말할 여지가 없었다. 오히려 횡재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방이 두 개짜리니, 방 하나를 작업실로 사용할 수 있으렸다.’
    직원숙소에 공연히 끼어들어 낚시매장 직원들 눈치가 보이던 터라 대뜸 들어가겠노라 했다.
    그런데 2~3일 내로 당장 입주하지 않으면 그 아파트가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갈 수밖에 없노라 했다. 그런 긴박한 상황임에도 막상 50만원을 빌릴 데가 없었다. 운에 맡겼다기보다 그저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태연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인가, 영감님이 50만원이 든 봉투를 내게 건네었다. 낚시매장에서 빌린 돈이라며, 대신 차용증을 써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낚시매장 주인이자 건물주인 이 사장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그렇고, 또 나를 거지 취급하던 낚시매장 직원들에 대한 괘씸한 감정으로 나는 그 돈을 거절했다.
    “아파트에 들어가는 게 급선무지, 그깟 종이 한 장 써주는 게 뭐가 문제요?”
    영감님은 나를 설득했다. 그러나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아파트 못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그 사람들한테 차용증까지 써줘 가며 돈 빌리고 싶지 않아요.”
    보는 이에 따라 참으로 억지라도 그런 억지가 없었을 것이다.
    ‘쥐뿔도 없는 놈이 자존심만 내세우는 꼴이라니…….’
    그렇지만 조막만한 자존심을 꿰차고 있던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무리 아쉽더라도 굴욕적인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하물며 내 자신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내가 이 사장한테 가불한 돈이니, 이 돈 받아요. 차용증은 안 써도 돼요.”
    결국 영감님은 엉뚱하게도 당사자인 나보다 영감님 자신의 속이 더 탔던지, 그 돈으로 얼른 아파트계약하고 입주하라며 봉투를 내 손에 꼭 쥐어줬던 것이다.
    도개공아파트로 이사하고 나서도 영감님은 한 달에 두어 번꼴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간 5만원, 또는 10만원을 내놓고는 되돌아갔다. 돈이 있다고 아무리 안 받으려 해도 막무가내였다.
    “담배 사 피워요.”
    어느 땐 영감님이 그리 주고 간 적은 금액의 돈도 꽤 요긴할 때가 많았다. 담배가 떨어졌을 때도 그렇고, 쌀이나 부식 또는 내가 아파트로 옮기면서 기르기 시작했던 강아지 예삐의 사료가 떨어졌을 때도 그랬다.
    도개공아파트에서 다시 이 사장의 제안으로 기영빌딩으로 거처를 옮기기까지 거의 1년3개월간을 오로지 글만 쓰며 지냈다.

    2008년4월 중순부터 기영빌딩에 머물다가 2008년12월10일 지금의 대건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리고 2009년5월 중순 그동안 멍에처럼 짊어지고 다녔던 사무실 책이며 온갖 비품 모두를 고물상에 헐값으로 넘김으로서 사무실을 완전히 정리했다.
    전세계약서는 내 이름으로 했으나 그날 이후 거의 6개월간 영감님은 기영빌딩 외에 올해 들어 그 빌딩에 입점해있던 식당일도 거들었으나 두 군데에서 월급은커녕 가불이란 것을 전혀 해주질 않았다.
    대건아파트에 입주하면서 줄곧 나와 함께 생활해 온 영감님에게 ‘월급이나 가불을 해주면, 그 돈이 결국 내 생활비로 담뱃값으로 사라질게 뻔하다’라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내가 푼푼이 벌어들인 돈으로 임대료니 관리비니 등 월 1백만 원 가까이 드는 생활비를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6월경 영감님이 중국 들어갈 때 한꺼번에 계산해주겠다고 약속했다지만, 막상 영감님이 중국에 들어갈 땐 약속과는 달리 단 한 푼도 마련해주지 않았다. 그땐 ‘돈을 주면 내가 그 돈으로 영감님 따라 중국에 갈까봐 그렇다’라는 핑계를 댔다.

    영감님은 결국 돈 한 푼 없이 한 달 전인 6월말 중국으로 돌아갔다. 3년 기한의 비자가 만료되어 어쩔 수 없이 중국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원래 계획은 월급을 정산 받으면 영감님 중국 갈 때 나도 함께 중국에 따라 갔다가 20일쯤 중국에 머문 다음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 20일 동안 천진과 심양을 오가며 중국 기행도 하고, 나중에 글을 쓸 때 요긴한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었다.
    영감님과 나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사이지만, 이젠 결코 남남이 아니다. 그가 내게 ‘내 아들딸보다도 김 동무한테 더 정이 가고, 김 동무에겐 뭐든지 해주고 싶다’란 말을 여러 번 들려줬지만, 그 때문만이 아니다. 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가 나를 실제 친동생 이상으로 여기고 있듯이, 나 또한 그를 실제 친형님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
    한 달 전 중국으로 건너간 영감님은 이후에도 내게 수시로 전화를 걸어 나더러 중국으로 건너오라 했다. 가장 싼 항공요금이 중화항공으로, 인터파크 예매를 통해 왕복비행기표를 20만원에 구입할 수가 있다.
    영감님은 먹고 자는 것은 자신이 책임질 테니 걱정말라했으나 영감님 집에만 머물 것도 아니고, 중국 몇 군데 구경이라도 할라치면 교통비며 여관비며 식사비며 그 돈도 만만찮을 것이다.
    그리고 영감님은 1년 후인 내년 7월경에 한국에 다시 들어올 것이다. 아직까지 월급이 정산되기 않았기에 돌아오자마자 월급부터 정산 받을 것이라 했다. 그때 월급을 제대로 정산해주지 않을 것 같으면, 그땐 내가 나서서 그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아무리 세상인심이 흉흉하기로 영감님처럼 남이 깔보는 사람을 상대로 인정을 베풀려는 사람을 어리석은 사람으로, 나같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인정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을 남의 등골이나 빼먹는 후안무치로 몰고 갈 수 있으랴.
    게다가 영감님을 위한답시고 ‘감 내놔라, 배 내놔라’ 한껏 주장해왔던 사람들이, 왜 또 남에게 일 시켰으면 당연히 줘야 할 그 알량한 월급 따위나 떼먹으려드는 그런 경우 없는 짓을 저지르려는지…….




    - 끝 -

    (200자 원고지 44매 분량)

    2009/07/30

  10. 사용자 bongta 2010.08.04 18:19 신고 PERM. MOD/DEL REPLY

    아름다운 인연을 지으셨군요.
    도움을 베푼 이도 존경스럽지만,
    그런 도움을 받는 분도 예사롭지는 않습니다.
    이 광기가 휘몰아치는 동토에서 누군가에게 은혜를 베푸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영감님일지라도 아무에게나 도움을 베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한데 유독 선생님한테만 저런 귀한 모습을 보이시니,
    이는 필시 그럴만한 까닭이 숨어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러므로 귀인은 고장난명(孤掌難鳴)이라,
    외짝 귀인은 없고 반드시 귀인을 부르는 사람을
    선행하는 제 존재조건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하여는 제가 http://bongta.com/792 에서 잠깐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다.

    두 분간 인연이 장구(長久)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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