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You were my anchor.

소요유 : 2011. 12. 6. 23:51


얼마 전 유명(幽明)을 달리한 고인을 생각한다.

You were my anchor.

내 마음의 의지처인 당신.

오늘 인간들의 나약함, 두려움, 비열함을 목격합니다.
그러자 저들을 향한 분노, 측은지심을 넘어,
이내 당신의 은덕(恩德)을 생각하며,
외투 옷깃을 세워 올렸습니다.
요즘은 날씨가 춥지 않아도,
목덜미가 늘 서늘합니다.
세상은 이리도 낯섭니다.
아직도.

오늘 서울에서 부러 여기 시골까지 왔습니다.
경찰과의 약속시간을 맞추기 위해
저녁 늦은 시각 연천군 시내를 마냥 걸었습니다.

젊은 경찰은 내게 묻습니다.

"소 취하를 왜 하려고 하는가?"

"이즈음 겪는 시간이 내겐 치욕인 양 더럽다.
흘려 떠내려보내고 싶을 따름이다."

바로 한 치만 걸어도 이내 들통이 날 터인데도,
순간 앞에서 거짓, 위선을 떠는 인간의 추악함, 아니 나약함이 슬펐습니다.

경찰은 나지막하니 내게 들려줍니다.
선고처럼, 아니 신탁(神託)인 양.

"전과 30범도 여기 이 자리에 서선 자기가 잘못하지 않았다고 우깁니다.
상대가 아무리 거짓을 떠벌려도 속상해 하지 마세요.
다만 신고를 하십시요.
녹음 하시든가 ..."

그래도,
저들은 안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나는 피해자, 저 괴한은 피의자라고 형사상의 신분으로 갈렸습니다.
이것은 제게 안전이 아니라 욕됨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 아니 인간 전체를 향한 회의로 확대되지 않기를 스스로에게 빌듯 타이릅니다.

연천역 부근만 잠깐 가로등이 열을 지어 빛나고 있을 뿐,
뒷골목까지 거닐었지만,
거긴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더군요.
여기 사람들은 일찌감치 동굴 속으로,
웅크리고 숨어들었나봅니다.
평화의 잠자리에 든 저들의 안녕을 빌어봅니다.
그리고 자격이 된다면 축복해주고 싶습니다.

그러자,

전혜린.
레몬 빛 가스등.

이 두 글귀가
어둠을 가로질러 가로등 불빛을 토하며,
불현듯 제 의식을 스치듯 지나갑니다.

문둥이라도,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
저는 한창 젊음이 푸를 때,
이리 호기를 부리며 그녀를 사랑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오늘 여기 연천에서,
저를 불러내고 있습니다.

아마도,
저 들뜬 환청 소리는,
이즈음 욕스럽게 더렵혀진 저를 안타까이 슬퍼하고 있음일 것입니다.

어둔 도로를 되짚어 돌아오면서,
어둠에, 더러움에, 어리석음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저는 스스로에게 타일렀습니다.
결단코 친할 수는 없지만.

슬픈 습관,
그래도 배는 고프더군요.
늦은 밥을 먹고,
커피 한잔을 끓였습니다.

검은 악마를 홀짝이며,
컴퓨터, 아니 인터넷을 타고 오르니,
선생님이 저를 지긋이 내려다보시며,
말씀으로 저를 맞아주십니다.

“닥터 리”
“고마워”

선생은 내겐 언제나 이리도 관대하시고 은혜로우셨다.
조그마한 것이라도 늘 나를 염려하시고 격려해주셨다.
선생은 내게 선생이라 부르지 말고 형이라 부르라 이르셨다.
나는 송구스러워 차마 형님이라 부르지 못했다.
끝내.

북한산에서 나무 잎 두어 장을 아프게 떼어냈다.
안주머니에 구겨지지 않게 가만히 넣었다.
‘오 헨리의 마지막 잎새’는 붓으로 그린 것이지만,
나는 이내 시들 것이 예정된 것이로되,
그날의 그 살아 있음을,
여여(如如)히 증거하고자 했다.
한 점 바람 앞에도 떨리는 나약한 기도처럼.

선생이 누워계신 병상 앞에 서자,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 쥐어드렸다.
그것은 내밀한 언약의 기호.
당신께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으시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지.
나는 나지막하니 그러나 약속인 듯 말씀드렸다.

‘곧 시들 터인데 그 땐 바로 버리셔야 됩니다.’

행여 시든 잎을 보시고 마음이 상하실까 걱정이 앞섰다.
죽음은 내겐 하나도 두려움이 아니지만,
선생의 죽음은 신불(神佛)이 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용서하기 힘들다.
그러자 선생은 베개 위에 살포시 내려놓으시면서 잠시 눈을 감으셨다.
마치 산에 오르시듯.
나뭇잎에 살랑거리는,
그날 그 때의 바람을 맞이하시듯,

그는 말씀했다.

“The gate of Heaven.
여긴 천국에 이르르는 문이야.”

북한산은 그에게나 나에겐 천국이었다.
둘은 북한산이 베푸는 은혜를 은밀히 공유했다.
그래 이것은 누구에게도 들켜서는 아니 되는,
그래 그것은 차라리 화간(和姦)이었지.

선생은 영문학을 전공하셨다.
내게 깨알같이 적으신 팝송 가사를 주시기도 했고,
찬찬히 읽어주시며 해설을 덧붙여주셨다.
저녁엔 홀로 영어 공부를 하신다고 일러주셨다.
왜 나는 이리도 어리석은가?
단 하루라도 선생을 모시고 저녁을 지켜드리지 못하였는가?

올 겨울엔 북한산을 자주 오르게 될 것이다.
거기 너럭바위는 아마도 나를 탓할 것이다.
혼자만 오르는 고얀 놈이라고.

오늘은 날씨가 차다.
찬 기온만큼이나 선생의 부재가 아프다.
밖에 나가 허공을 향해,
뒤늦게 부른다.

“형님”

눈가가 별빛에 물들듯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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