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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법설(法說) - 췌술(贅述)

소요유 : 2013. 12. 19. 12:03


부처의 십대 제자는 각기 저마다의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두타(頭陀) 제일 마하가섭(摩訶迦葉),
해공(解空) 제일 수보리(須菩提),
신통(神通) 제일 목건련(目建連),
지혜(知慧) 제일 사리자(舍利子),
다문(多聞) 제일 아난다(阿難陀),
지계(持戒) 제일 우바리(優婆離)
설법(說法) 제일 부루나(富樓那)  
...

난 법륜 스님을 대하면 이내 설법 제일 부르나 존자가 연상된다.
- 그는 미래의 부처님 법명여래(法明如來)가 될 것이란 수기(授記)를 받는다.

법륜 스님은 대중으로부터 어떠한 질문을 받든지 마침 준비가 되었다는 듯,
거침없는 교설을 펴신다.
세상엔 백팔번뇌, 팔만사천 망상이 떠돌아다닌다.
중생이 그 어떠한 난제를 들고 와도,
맞춤 떡집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기로운 말씀을 내려 주신다.

우리의 떡집 아줌마 법륜.

변설자재(辨說自在), 응구첩대(應口輒對) 막힘이 없다.
천하의 대학자라도 이리 천의무봉(天衣無縫) 꾸밈없이 물 흐르듯,
통변치용(通變與致用)하긴 어렵다.

예수 팔아먹는 목사, 불상에 빌붙어 사는 땡중이 지천인 세상에,
이리 법답고 실다운 분이 곁에 계시다는 것이 참으로 기이하다.

이리 광설(廣說)이 가능함은,
그가 이미 법리(法理) 의 벼릿줄을 꿰갖고 계심이라,
천변만변 현상계를 묘강(妙綱)으로 잡아 후릴 수있는 까닭이 예 있음이다.

그의 내력은 어찌 될까?
조계종 소속이 아니다. 
그런데 의혹스런 점 하나가 눈길을 끈다.
그는 2005년 뉴라이트전국연합이 창립될 때, 발기인대회에 참가해 축사를 했다고 한다.
( →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050630083631775 )
 
묘법연화경의 부르나 존자가 부처로부터 수기를 받는 장면엔,  

其國衆生,常以二食,一者、法喜食,二者、禪悅食。

이런 글이 나온다.

부르나 존자가 미래불인 법명여래가 될 때,
그의 불국토에 사는 중생은 이식(二食)을 하는데,
하나는 법(法), 하나는 선(禪)이라 하였다.
이게 모두 희열(喜悅)을 일으키니 굳이 냄새나는 밥 먹을 일이 있겠는가?

모두들 得大神通、四無礙智이라,
대신통력과 걸림 없는 지혜를 얻으리.

불법의 광대무변(廣大無邊), 대자대비(大慈大悲)함을,
법륜 스님을 뵙고는 새삼 다시 깨닫게 된다.

그러함인데 난 또한 이러한 생각 하나를 일으키고 있음이고뇨.

보살 하나가 일어나 법륜께 청법, 구법한다.

“남편이나 아들이나 자기의 희생을 몰라준다.”
“배우자가 바람을 피운다.”

법륜의 말씀을 듣잡으면 대체로 일관된 말씀의 흐름을 붙잡게 된다.

“네 잘못이다.”
“참회하라.”

천하의 모든 이들이 하나 같이 이 말씀의 구조, 가르침을 따르게 되면,
아닌 게 아니라 세상엔 갈등도 없고 불화도 없어질 것이다.
이내 온 세상은 불국토가 되리라.

그런데 만약,
저 질문에 등장하는 불평의 상대가 다른 자리에서 법륜께 청법하면 어찌될까?

불문가지라,
법륜은 매한가지로,

“그대의 잘못이니 참회하라.”

이리 가르치시지 않겠음인가 말이다.

이는 곧 양비론(兩非論)이 아닌가?

“남의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런 자세로 살아간다면,
세상은 한결 평화롭고 아름다우리라.

황희는 반대로 양시론(兩是論)을 폈다.

“종년 말도 옳고, 부인 말도 옳다.”

이에 대하여는 내가 기히 글 하나를 적어 둔 것이 있다.

是非之心,智之端也

맹자는 시비지심은 지혜의 단서라 하였다.
법륜이 펴는 불법의 지혜와 유가의 지혜는 어찌 다른가?

이는 놔두고서라도,
한비자라면 당장 양비론이든 양시론이든 이 모두를 물리쳤을 것이다.

시시비비(是是非非)를 정확히 가르지 않기 때문에 천하에 난이 일어난다.
형명법술(刑名法術)이라, 
형과 명이 겉돌면 나라를 빼앗기고 임금은 신하에게 죽임을 당한다.
도대체가 시비를 명확히 분별하지 않고서야(明辨),
어찌 그르고 곧은 것을(曲直) 밝힐 수 있으랴?

그러함이니 양비나 양시는 일시적으로 사태를 덮는 것일 뿐,
화(禍)는 여전히 잠복되어 자라고 있을 것이다.

제 아무리 양민이라 하여도 밤엔 등불을 돋우고,
번견(番犬)으로 밤도둑을 방비한다.

아무리 나 혼자 청정하고 곧아도,
세상 밖은 감은(黑) 물처럼 어둡고 흉하다.

이게 세상의 실상이다.
법가는 이를 외면하고 의론을 폄은 모두 다 혹설(惑說)로 치부한다.

법륜의 말씀을 들으면,
당장은 고개를 주억거리게 되고, 
마음이 맑고 향기로워진다.

하지만 법당문을 박차고 나오면,
세상은 여전히 깜깜하고 어둡다.

도도처처에 도적과 강도가 숨어 있다.
사기꾼과 아첨꾼이 널려 있다.

다만, 나 혼자 참회하면,
이 칼산 지옥, 화탕 지옥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음인가? 

법가는 법의 칼을 들고서는,
파사현정(破邪顯正),
삿됨을 없애고, 바름을 현양한다.

삼국지에 등장하는 제갈량.
우리는 그를 신출귀몰하는 대단한 전략가로 알고 흠모까지 한다.
그는 기실 법가로서,
그의 장기는 신상필벌(信賞必罰)이다.

읍참마속(泣斬馬謖)
군령을 어겨 전략 요충인 가정(街亭)을 잃은 장수 마속을 참(斬)한다.

軍中無戲言
자고로 군중에 희언이 없는 법.

마속이 울며 하소연을 늘어놓자,
공명은 이리 말한다. 

“吾與汝義同兄弟,謖曰父子,亮曰兄弟,情好如此而終不免一死,可見軍法之嚴。汝之子即吾之子也,不必多囑。”

“내가 너와 더불어 동형제일지라, 정이 비록 도탑다한들 죽음을 면하지 못하니라,
군법은 지엄한 것.
네 자식은 내 자식과 같다. 
더 이상 바랄(부탁) 필요 없다.”

대의(大義)를 세우려면,
아무리 사랑하던 장수라도 죽일 수밖에 없는 것.

사랑만이 능사인가?
용서로써 만인을 이끌 수 있는가?
負責任
과연 상대는 용서에 값하는 책임을 부담할 수 있으런가? 

세상은 전쟁통처럼 험하디 험한 곳.
한비자는 법의 칼을 휘두르며 시시비비를 가려 세상의 안녕을 구하고자 한다.

허나 법륜은 부루나가 환생한 것인가?, 관음의 화신인가?
그는 다만 잔뜩 미소를 머금고 연꽃 하나를 들고 서 계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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