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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수(農手)

소요유 : 2014. 2. 26. 14:07


이 글에 앞서 내가 앞서 쓴
다음 글을 먼저 대함이 요긴하다.

☞ 2008/07/11 - [소요유] - 상(象)과 형(形) 
☞ 2008/07/19 - [소요유] - 상(象)과 형(形) - 補

이제 본론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농수(農手)

한 사람이 있어 비료로 블루베리를 키우는가 보다.
비료를 넣고 키우면 대개는 농약도 함께 짝으로 따르게 마련이다.

어느 카페에서,
한 이가 있어,
제 과오를 반성한다며,
엇그제 제가 쓴 글을 모조리 지우고 사라졌었다.

그런데 단 한 식경(食頃)도 아니 되어,
수채 구멍 들락거리는 새앙쥐처럼,
빼죽 나와 썰 하나를 퍼질러 놓는다.

내 이에 글 한 자락 떨구어,
그자를 경책하노라.

비료란 무엇인가 하니, 식물이 필요로 하는 것이라, 판단되는 물질들을,
인간이 인위적으로 뽑아 선발하고, 이를 적절히 조합하여,
만들어낸 것이다.

여긴 분명히 효율 제고를 위한 부단한 노력이 경주되고,
경제적인 평가가 면밀히 셈하여지지 않을 수 없다.

이 길로 들어서면,
마치 자전거 폐달을 밟기 시작하면,
도중에 멈출 수 없듯이,
앞으로 달려 나가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폐달 밟기를 소홀히 하면,
자전거는 더 이상 굴러가지 못하며,
급기야는 쓰러지고 만다.

이러하니,
필경은 능력 이상 안간힘을 쏟게 되고,
이런 무리가 종내는 탈을 일으키고는 한다.

이러할 때는 역시 농약이 뒤를 받쳐주고 있다.
한편에선 열심히 목표를 향해 질주하고,
그 과정 중에 발생되는 부작용이나 탈은,
농약으로 뒷감당을 하게 한다.

이것 그리 녹록한 게 아니다.
인간쯤 되니까 이런 교묘한 꾀를 내지,
아무나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난, 이게 크게 잘못되었다든가,
당장 이 짓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럴 위치에도 있질 않고,
그러한들 저들이 들을 위인도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다만, 그것 외의 것을 백안시하거나,
나아가 비웃고 조롱하는 짓거리는 옳지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지금 의론을 펴려고 하니,
이에 앞서 먼저 거론해야 할 것이 하나 둘이 아니다.
그것을 먼저 꺼내놓고 이야기를 펴는 것이 마땅하겠음이나,
그럴 기분도 아니 들고, 여기 제한된 자리 형편에서 그럴 여유도 없다.
그저 필 가는대로, 인연 따라 말을 늘어놓기로 한다.

공자를 두고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말을 하고는 한다.
이게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따라 이를 수 없는 경지쯤으로 새기곤 한다.

내가 시골에서 한 귀농인을 사귀었는데,
이이가 제법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양 행색을 스스로 닦아 차린다.
그는 열 일 다 재끼고 일요일엔 서울 교회를 가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예수는 도저히 인간으로서 따라 흉내 낼 수 없다.
그러함이니 그는 그고, 나는 나다.
이 말인즉슨 나는 이리 하고 싶은 대로 산다는 말이다.

그이의 홈페이지를 보면,
온갖 현란한 선전으로 도배되어 있다.
유기농도 모자라 자연재배를 한다 하며,
산 좋고 물 좋은 곳에서 정성을 다하여 키운다.
등등 글귀를 보면 그저 황송해서 오금이 저려올 지경이다.
그런데 내가 그이의 흉한 정모(情貌)를 다 알고 있음이니,
실인즉 나는 그이 밭에서 나는 소출은 거저 주어도,
하나도 취할 욕심이 동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왜 이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그이의 어둔 구석을 들추어내어 까발리기 위함인가?
그게 아니라 성인(聖人)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려 함이다.

맹자는 당시 천하에 양주와 묵적의 무리들이 가득 차있다고 한탄했다.
지금이야 양자니 묵자니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자이기는커녕,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이도 많지만, 공맹은 누구인지는 다 안다.

그러함인데 맹자는 천하에 양자와 묵자가 판을 휩쓸고 있다고 탄식을 하였다.
원래 제자백가의 각 문도들은 그가 속해 있는 집단의 우두머리 선생을,
당시는 모두 성인(聖人)이라 했던 바이라,
이게 공자에 전속된 것이 아니란 말을 지적하고 싶은 게다.

성인이란 말은 그 새김이 천차만별이지만,
한 마디로 한다면 고귀(高貴)함을 셈할 수 없는 정도의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진시황이 오로지 자신을 부르길 짐(朕)이라 하였지만,
기실 이 짐이란 말은 당시 일반인들이 자기 자신을 지칭하는 말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이게 진시황 이후론 일반의 쓰임을 금하자,
왕의 자칭으로 고정되어 갔듯이,
성인이란 말도 문도들이 자신이 따르는 수장들을,
높여 부르다 보니 그리 고정되었던 것이다.
그전엔 그저 사무불통(事無不通)이라,
사물의 이치를 바로 꿰어 막힘이 없는 총명한 이를 지칭하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장자란 책을 보면 성인 위에 天人, 神人, 至人 등이 등장한다.
가령 이런 문귀가 있다.

至人無己,神人無功,聖人無名。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성인 위에도 사뭇 계차가 여럿이 있단 말이다.

그러함인데,
비료 처넣고 농사를 나는 이리 잘 지었다.
하며 마치 농사의 성인이라도 된 양,
뽐낼 일이 아니란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엔 이 정도 수준이면,
농사의 성인이 아니라 그저 농수(農手)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목수(木手), 석수(石手) 등에서,
수(手)란 무엇인가?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technician쯤 될런가?
그 방면의 기술자내지는 기교를 부릴 줄 아는 자 정도로 새기면,
근리(近理)하리라.
기능(技能), 기교(技巧)에 힘을 좀 낼 수 있는 수준을 일컫는 말이란 게다.

그럼 이게 나쁜가?
물론 아니다.
그런 재주도 오랜 기간 공을 들이고 기술을 닦아야 하니,
어찌 마냥 하시(下視)할 수 있으랴?

예전에 간호원(看護員)이 지금은 간호사(看護士)로,
또 운전수(運轉手)가 운전사(運轉士)로 바뀌어 불려진다.
수(手), 공(工), 원(員)은 대개는 기능에 능숙한 이를 가리키는 말임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게 사(士)로 이름만 바뀐다고 과연 무슨 질적인 변개가 일어날까?

절집을 짓는데,
단청 기술자는 화공(畵工), 화원(畵員) 또는 중이 맡을 때는 화승(畵僧)이라 한다.

화승(畵僧)이 좀 실력이 붙으면 어장(魚丈), 금어(金魚)로,
이제 본격적으로 위격이 높아지며 대우가 달라진다.
이름이 아니라,
실력이 달라지지 않고서야,
어찌 다름을 논할 수 있겠음인가?

이 경지에 오르려면 그저 손재주가 좋아 그림만 잘 그리면 되는 것이 아니다.
단청(丹靑)하는 이가 불화(佛畵)를 모르고서야 어디 가서 티나 낼 수 있으랴?
도법, 도경에 대한 공부도 게을리 해서는 아니 된다.
불교문화 일반에 대하여 깊은 이해가 뒤따라야 하며,
나아가 교리에도 밝아야 제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다.
그러자면 당연 신앙심도 뒤따르지 않겠는가?

항차 화공(畵工)도 이리 겸손한데,
우리나라에 블루베리가 도대체 얼마나 오래 전부터 키워져 왔는가?
몇 해 비료로 키워 그럴 듯하다고,
천하사를 다 논하겠다고 대들면,
이 얼마나 참람스런 일이랴?

미처 시왕초도 치지 못하는 주제에,
단청 팽개치고 탱화를 그리겠다고 설치는 격이로구나.

대중은 귀가 얇고, 흉통이 작아,
놋쇠 요령 흔드는 소리가 요란하면,
바로 우르르 몰려들며 넋을 잃는다.

속칭 기적의 사과 기무라는 목숨을 걸고 자신의 농법을 일구었다.
결과에 매몰되고, 남의 농법을 비웃는 풍토에서,
기무라와 같은 지인(至人)을 어찌 알아 모실 수 있으랴?

농수(農手)만 들끓는데,
저들은 자칭 타칭 농성인(農聖人)인 행세를 하는도다.

성인(聖人) 밖에,
진인(眞人)이 계시오며,
天人, 神人, 至人
또한 계심이라,
어찌 자신의 조그마한 재주로서,
이들을 겨냥하려 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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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4. 2. 26. 14: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