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천도재(遷度齋)

소요유 : 2014. 3. 4. 14:04


내가 어제 서울에서 시골로 내려왔다.
이제부터 올 한 해 농사를 시작한다.

내려오기 전 아침 일찍 산에 올랐다.


산 초입에 이름하여 청수 폭포가 하나 있다.
이름은 폭포이되, 기실 초라하여,
여름 한 철 그저 조그마하게 폭포수가 흘러내린다.
거기 가로질러 아치형 나무다리가 놓여져 있는데,
한가운데 서면 산 안쪽 그윽한 정경 속으로 손목 잡혀 끌려가게 된다.


난 언제나 거기 가만히 서서 그리 끌려들기도 하고,
고개를 숙여 폭포 밑 웅덩이에 노니는 물고기들을 살피곤 한다.
거기서 슬프고도 아름다운 하나의 인연을 지었는데,
그 은혜로움은 지금 아니 계시다.

그리 다리를 건너섰는데,
커다랗게 걸린 플래카드를 보게 된다.


“인간에 의해 대량 살처분된 조류(닭,오리 등) 천도제”

어느 마음씨 고은 분들이 이런 생심(生心)을 내셨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은,
조류독감, 구제역이니 하며,
툭하면 살육(殺戮)질을 자행한다.

난 이들 병 대부분이 인간 때문에 생긴 것이지,
결코 저들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지만,
난 백(bag) 재배니, 과도한 화학 비료 투척, 가온 재배 따위도,
옳은 방식이 아니라 생각한다.
분명한 것이로되 이리 하게 되면,
작물이 편치 않아 할 것임을 나는 가슴으로 느낀다.
난 그리 느끼고 있음이니,
어떠한 다른 이유로든 이를 거스르지 못하겠다.

거긴 당연 병충해가 들끓게 된다.
그래 필경은 농약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여기 교묘한 술수가 동원될 터인데,
저들은 이를 기술이 좋다든가, 솜씨가 뛰어나다고 우쭐거린다.
이 이야기는 오늘의 주제가 아니니 건너 뛴다.

저 플래카드를 보자,
차탄(嗟歎)하지 않을 수 없음이다.
누가 게 있어 저리 아름다운 마음을 길어 올리셨음인가?
한데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천도제라니, 저것은 천도재이어야 함인온데,
어찌 저리도 무심할 수 있는가?

제(祭)와 재(齋)는 사뭇 다른 의미 공간을 지시한다.
 
제(祭)는 육고기의 희생물을 바쳐 신(神)을 섬기는 것이다.
신(神)인즉 사람의 경우엔 죽은 이의 넋 즉 귀신(鬼神)이 된다.
어쨌건 이 의식에선 남겨진 이, 또는 살아 있는 이와,
저 멀리 떨어진 신(神)과의 교섭이 있다.
이를 인신상접(人神相接)이라 한다.
전자가 후자를 청하여 모시고, 섬기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제(祭)에서 육고기 제물이 빠지면 荐(천)이 된다.
荐(천)은 맛이 아니라 그저 경(敬)을 바치는데 그 뜻을 삼는다.
우리 옛적 여인네들이 장독대에 정한수 한 그릇 떠놓고 빌 때,
거긴 육고기란 맛(味)이 아니라,
그저 지극한 정성만이 오롯하니 여여(如如)할 뿐이다.

재(齋)는 무엇인가?
세심(洗心) 즉 내 마음을 씻는 행위인 것이다.
潔也!
마음을 정결히 하는 것,
재(齋)는 기실 이것 말고 더 추구하고 논할 가치가 없다.
그러니까 재(齋)는 재계(齋戒)로 곧잘 전화되어 쓰이고,
나아가 목욕재계(沐浴齋戒)로 굳어진다.
전자는 계(戒)로써 정신을 삼가고 가지런히 하며,
후자는 몸을 씻어 더러움을 경계한다.

제사는 대개 기일이 정해져 있다.
예컨대 망자의 망일이라든가,
특별한 절기에 맞춰 의식이 행해진다.

하지만 재(齋)는 360일 중 359일이 잿날이다.
一年三百六十日 三百五十九日齋
내 마음을 깨끗이 하고 계(戒)함에 어찌 쉬는 날이 있겠음인가?

제(祭)는 경(敬)을 줄거리로 하고,
재(齋)는 계(戒)를 본바탕으로 한다.

제(祭)는 상대를 의식한다.
거긴 나보다 상대에 대한 추모의 마음과 공경심을 바치는데 중점을 둔다.

반면 재(齋)는 상대가 아니라 우선 나를 먼저 돌보고 있음이다.
못난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참회하며 엎드려 통곡하는 것이다.

자, 천도재가 천도제가 아닌 까닭을 이제 짐작하실 수 있겠음인가?
닭, 오리를 죽인 게 누구인가?
난 이 물음을 던지고 싶은 것이다.
인간 그대들 자신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감히 주제넘게,
이 더러움의 당체(當體)들이,
저들을 천도(遷度)하겠다 나설 수 있음인가?
가증스러운 노릇일러라.

내가 죄인인 것이니,
천도재는 상대 앞에 부끄러움으로써 용서를 구하는 자리여야 하는 것임이니,
죄는 지들이 다 지어놓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도대체 저들이 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래 그대 닭 천도재 지내 착한 사람씩이나 되었단 말인가?
이리 하였으니 죄 지은 마음이 좀 헐거워지련가?
모두 다 자신의 이해에 보탬이 되려는 짓거리가 된다면,
이 또한 삿됨 욕심의 발로에 다름이 아닌 게임이라.

내가 육식을 하지 않는다니까는,
이를 일러 위선이라 부르는 위인이 있다.
내가 비료를 주지 않는다니까,
그럼 비료를 주지 않는 음식을 네가 먹고 사느냐 이리 따지는 이가 있음이다.
이런 문법은 다 영혼이 맑지 않은 이들이 빌려 써먹는 천한 작법이다.

왜 아니 그러한가?
고기를 먹지 않고 어찌 살겠느냐?
이런 물음의 양단을 살펴보면 내가 저리 말하는 이치가 자명해진다.

그래 곡식 먹다보니 싱거워,
닭고기 먹고, 돼지고기 먹는 법을 배웠다.
그러자 욕심이 더하여 쇠고기를 먹고 싶다.
그래서 이젠 쇠고기가 천하에 지천으로 깔려있다.
그러자 이 녀석들이 인제는 살아 있는 곰 가슴에다 파이프 박아 넣고,
담즙을 뽑아 먹는다.
그래 산 자가 타자를 취하여 먹는 것이 어쩔 수 없는 도리라면,
그럼 네 자식은 왜 아니 잡아먹고,
애비, 어미는 왜 아니 잡아먹는가?

왜 그대는 거기서 멈추는가?

이쯤에서 이해가 되는가?

자, 이제 반대의 축을 따라 고개를 돌려보자.
사실 이는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내 중놈도 아닌데 애초 어찌 고기를 먹지 않았겠는가?
난 고기를 그저 탐내지 않을 정도지만 먹고 살았었다.
그런데 그 고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다 늦게 알게 되었다.
우연히 피터싱어란 분이 쓴 ‘동물해방’이란 책을 읽었다.
두툼한 책인데 거기 몰입하여 다 읽었다.
그리고는 집에 돌아가 처에게 말했다.
‘나 오늘부터 고기 먹지 않는다.’
그리고 난 이날까지 고기를 먹지 않았다.

저 책은 인간이 동물들에게 저지르는 온갖 죄악이 폭로되어 있다.
음식물내지는 식량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실인즉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패악질, 그 내력의 가검물임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을 다 읽은 게 2000년도인데,
그 날부로 고기를 먹지 않았다.
다만 길짐승 고기만 먹지 않지,
바다에서 나는 생선류는 어쩌다 조금 먹고 있다.
난 아직 실천의지가 박약한 죄인이다.

자,
이제 이 양단의 태도를 살펴보자.
이 양단에 서 있는 이들은 같고 다름이 있다.

모두는 먹는데 삼감이 있다.
전자는 제 자식이나 애비를 먹지 않음으로써 삼가고,
후자는 공장식 축산업에 희생되는 동물을 취하지 않으려는 삼감이 있다.

이 삼감에 어찌 계(戒)가 없음인가?
이러함이니 양자는 모두 재(齋)를 360일 지내고 있음이다.

그러하지만,
전자는 먹는데 즐거움(美食,美味)을 본(本)으로 하지만,
후자는 먹는데 아픔이 있음을 돌아본다.
이 차이를 그 누가 있어,
어느 태도가 옳고 그르다고 평할 수 있으랴?
타자의 명을 취해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은 그리 슬픈 것이온데.

하지만,
내 태도를 두고,
너는 먹지 않느냐? 라든가,
너는 비료를 준 농산물을 먹지 않느냐?
이따위 천박한 문법을 빌어,
위선이라고 한다면,
이 얼마나 무지하고도 무뢰(無賴)한 짓이 아니겠음인가?

진정으로 재(齋)를 지내는 이는,
설문의 풀이처럼,
示齊爲齋이임이라
밝히 제를 지내,
만물을 깨끗이 모시는 것임이라.

헌즉 洗心曰齋임이니,
마음을 정히 닦음외 뭣이 별 다른 것이 있겠음인가?

난 동물뿐이 아니고,
식물들에게도 저런 식의 옭죄임이 행하여지고 있음을 안다.
내 감수성은 저런 것을 따라가지 못하겠다.

하지만,
각자는 다 자기의 업(業)이 있음이니,
어찌 남의 태도를 두고 가타부타 논할 수 있겠음인가?
각행기로(各行己路)
각기 찢어져 제 갈 길을 갈 뿐인 것을.

혹 오해가 있을까 첨언한다.
저들 천도재를 지내려 모이신 아름다운 영혼에게 감사드린다.
나는 다만 이 자리에서 제와 재의 뜻을 밝히고자 하였을 뿐,
추호도 저분들을 욕뵈일 뜻이 없다.
외려 저분들과 친교를 맺고 따라 다니면서 배움을 깊게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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