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자정수(子正水)

소요유 : 2008.02.27 11:37


야반(夜半)이란 밤의 절반을 이르니 곧 밤의 한가운데를 뜻한다.
삼경(三更)이란 밤을 오경(五更)으로 나눌 때,
그 중앙이니 이 역시 밤이 가장 깊은 때를 이르게 된다.

고래로 밤을 일경(一更), 이경(二更), 삼경(三更), 사경(四更), 오경(五更)의 다섯으로 나누니,
저녁 7시부터 9시까지를 일경(一更)으로 하고, 이어 每2시간 단위로 차수를 더해 셈해나간다.
한편 십이지(十二支 )를 빌려 이를 각기 戌時, 亥時, 子時, 丑時, 寅時로 이르기도 한다.
사경(四更)은 계명(鷄鳴)이라 하기도 하는데, 이 때에 수탉이 꼬끼오 울며 새벽을 연다.

계명(鷄鳴)과 함께 새벽을 일으키는 옛 사람들은, 아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
언제고 시골에 내려가면 bongta 기필코 토종 수탉을 키워 함께 붉은해(紅日)를
경건히 채비해, 맞이하는 禮를 다하리.

이러하니 삼경(三更)은 바로 야반(夜半)이요. 곧, 子時에 해당되니,
지금의 시간법으로는 저녁 11시에서 다음 날 1시에 이르는 시간대를 일컫는 것이다.
한편 자정(子正)이란 말도 쓰이는데,
이는 자시(子時)의 정중을 가리키니 곧 밤12시를 이름이다.

무서움증을 억누르고 야반삼경 아낙네가 한 밤에 삽짝문을 열고 길을 나선다.
똬리 끈을 입에 즈려물고, 물동이 머리에 이고, 어둠을 가르며 나서는 사연은 무엇인가 ?
자정수(子正水)를 받아 모시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이 자정 정각에 우물에 두레박 던져 고이 모셔내니 이를 자정수라 한다.
거기 만월(滿月)이 비추어 용알(龍卵)이 알심져 계시오면 더욱 영검(靈驗)스러우니,
간절한 정성이 오롯하니 가슴에 떨림으로 살피어져 자르르 온몸을 번져나간다.
그믐밤엔 칠흑 흑혈공(黑穴孔) 혼백까지 얼어붙으니, 그는 그대로 정성이 옹영근다.

(※ 자정엔 지축(地軸)이 한바퀴 돌아 생명의 원수(原水)인 수기(水氣)가
치성(熾盛)하니 신령함이 깃들어 있다.
오행상 북방은 水에 배대되고, 子方 역시 북방이니 자정수는 이리 기운이
제 자리를 지켜 계합(契合)된다.)

그 떨림이 무엇이냐 ?
두려움인가 ?
그런가 ?
삽짝문 열고 첫 걸음 뗄 때, 모골이 송연, 오금이 져려오는 두려움이 왜 아니 없겠는가 ?
지아비, 시부모 혹 금쪽같은 아이가 유고(有故)하니, 지어미 소견인들 어찌 편하리.
첫걸음에 이는 두려움을,
지난 갈(秋) 항아리에 넣어둔 김치 돌멩이인 양 어금니 악물어 눌러둔다.

아무도 다녀간 흔적이 없는 우물 앞에 서니,
두려움이 선뜻 가시고 우선 안심이 되고 본다.
우물 안을 드려다 보니 만월이 원만하니 찰나간 아낙 얼굴에 반가움이 번진다.
두레박 고이 던져 행여나 月心 흐려질까 조신하니 맘을 조아린다.
이윽고, 정성드려 물동이에 모실 제, 치마끈 동여맨 앙가슴이 자르르 다시 떨려온다.
이제 모셨다는 득의(得意)가 물결짐이겠으나,

머리에 이고 돌아오는 걸음마다 사뭇 떨림은 커져간다.
가슴에 물레방아가 들어 섰음인가 ?
방아 공이 찧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린다.
이건 두려움이 아니다.
떨림이다.
왜 떨림이라 이르는가 ?

아낙네의 그 떨림이 집안을 지켜내린다.
그래, 그럼,
그 떨림이 도시(都是) 무엇이관대 ?

나무 잎은 바람을 받아 떨리는가 ?
정녕 그러한가 ?
여린 이파리로 애잔한 생명의 기운을 두레박질 하니라 그리 아프게 떨렸음이라.
하니 바람은 잎 밖에서 오는게 아니라,
정작은 잎이 존재의 창밖으로 흔드는 가녀린 연두색 손수건이다.
그 애닯은 현장,
저린 구원의 손짓으로 바람은 잎 끝에서 허공중으로 물무늬져 번져나간다.

아낙네의 가슴에 이는 그 떨림 역시 매한가지다.
그 떨림은 제 집안의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비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그러하니 아낙네는 한 집안의 잎이다.
녹두빛 잎은 그래서 숭고하다. 

그러니 떨림은 존재가 존재케 되는 확고한 증인(證認)이다.
그대 손목에 바람을 듣는가 ?
아낙네의 앙가슴으로부터 전해져온
존재의 춤, 삶의 춤 - dance of living
그대 손목위에 춤추는 나비가 되어 앉아 있다. - 태연접무(太淵蝶舞)주)
이를 우리는 그저 싱겁게 맥박이라 부르고들 만다.

bongta는 가냘픈 손목위에 영원을 향해 춤추는 시바를 본다.
춤추는 시바 - Dancing Siva
종국에 Siva와 함께 춤을 추는 bongta를 본다. - Dancing with Siva
아니, bongta가 곧 Siva이었음이니.

파동(wave)이 있다.
파동은 떨면서, 진동(oscillation)함으로서 영원을 달려간다.
생명이 식어가면(underdamping) - ‘떨림-진동’이 잦아 들며 죽음에 이른다.
생명이 폭발하면(divergence) - ‘불꽃 분노’로 별의 진화과정처럼
거성을 거쳐 백색왜성이 되거나 블랙홀이 된다.
그러하니 별은 마냥 신화가 아니다.
때론 분노의 잿더미, 거문 웅덩이, 잿빛 회한이다.
생명이 조루(早漏)하면(overdamping) - 단말마의 환희로 찰나를 불지르다 이내 삭는다.
그래 교접후 우리는 바로 식는다, 아니 죽는(假死) 게다.

(※ 나는 이 양식을 빌어 주식 강의를 행할 참이다.
지금 연재중인 봉도표 강의 "☞ 2008/03/16 - [주식/봉도표] - 제 8장 중립형 봉도표 - 3"를 주목하시라. )

이 파동의 전개양식은 생명이라는 이름을 갖는 모든 존재의 물리적 구속형식이다.
생명은 떨림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삶도, 주가(株價)도, 나무 잎, 꽃 잎, 강아지....
심지어 바위도, 물도, 구름도...
이 생명도식을 bongta는 시스템특성반응도라 이름한다. - 此限不在
system characteristic response diagram

손목위에라야 떨림을 느끼는 여느 사람과 다른 이가 있다.
그들을 우리는 巫女라 부른다.
무녀는 떨림을 온몸으로 느낀다.
이를 접신지경(接神之境)이라 하니,
곧 황홀경(恍惚境)이기도 한 것이다.
ecstasy, 망아(忘我)가 그 다른 이름이다.

양자역학은 무엇인가 ?
떨림을 자기 자(尺)로는 정확히 잴 수 없다라는 고백과 다른 바 없다.
이를 과학적 진술이라는 미명하에 그들은 숫자 위를 얼음 지치듯 미끌어져 가고 있음이다.

지금은 모두 그저 달려가고 있다.
폭발을 선전하고, 남을 동원하기 바쁘다.
모두 분노하고 있음이다.
지금 이 시대의 파동 상태(state)는 divergence인 게다.
이 phase는 슬픔을 넘어 아픔이다.
유마(維摩)가 자신을 유보한 그 곡진한 아픔.

우리네 풍속에
어긋난 파동을 푸는 놀이, 그래 놀이다, 그 놀이가 있음이다.
해원(解寃)굿이 그것이다.
해원(解寃)굿이란 무엇인가 ?
divergence하는 떨림을 oscillation 떨림으로 정위(正位)하자는 것이다.

yyy,
xxx,
bongta,
ooo,
kkk,
sss,
...........
모두 한바탕 춤을 추자는 게다.

연자방아에 bongta 옷고름 물릴 것을 깨소금이 즐길만히 한가롭지 않은 게다.
남 옷고름 염려하다, 정작 자신이 그 연자방아에 깔릴 일은 없을 텐가 ?
그러니 별빛 받아 내려,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달빛 비추어 그대 양 볼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이자는 게다.
이게 해원굿이다.

하지만, 놓치지 말 것이 있다.
해원굿은 怨, 寃이 먼저 있음이니,
그저 무조건 사랑하자는 것 하고는 다르다.
원망, 좌절, 분노가 있음에
해원(解寃)하자는 게다.
먼저, 원망이 좌절이, 분노가 삭도록 익어야 한다.
bongta도, 그대도 기다려야 한다.
채근은 값싸다.
그 연후에 해원굿이 있다.
무조건이란 말은 아름다우나,
자칫 위선의 궤도에 든다.
그러하니, 차라리 해원, 해원굿이 정직하니 미덥다.

그래 bongta는
오늘 “무왁자지”란 음식만들기 글을 읽고는 안에 청을 넣었다.
 (ref: http://www.xxxe.com/xxx/view.php?uid=xx&table=xxx)
그래서 오늘 저녁은 bongta 혼자 “무왁자지” 한 솥을 먹었다.
해원하듯, 왁자지껄 소란 떨며.
yyy도, xxx도 “무왁자지” bongta와 함께 먹자.
오늘이 아니라면, 내일, 모래, 그 언제가 되었든 예약하고 싶은 게다.
그 땐, 인삼 막걸리는 yyy가 풀고, 녹두전은 bongta가 산다.
“무왁자지”는 xxx 아주머니가 준비할 테지.

해원굿은 그러하고,
남겨둔 마지막을 이리 이어 마치고자 한다.

내 손목에 춤추는 나비를 슬어논 그 아낙네는 지금 없다.
생명의 어미,
그 아낙네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
하얀 버선코같이 정갈하고,
쪽진 머리 비녀처럼 고운 그들은 지금은 어디에 있는가 ?
그들을 만날 수만 있다면,
언젠가 만난다면,
영원이 다하도록,
안아주고 싶다.
안고 싶다.
아니 안기고 싶다.
이를 일러 딴드라(Tantra)라 한다.

존재의 떰.
Siva의 춤.
bongta의 꿈.
그리고 너.

bongta 바로 야반삼경 자정수 모시러 산에 든다.
삼가.

주)
태연접무(太淵蝶舞) :
태연은 수태음폐경(手太陰肺經) 유주상 혈자리인즉,
맥진시 그 자리를 짚으니, 바로 손목 부위다.
여기 나비 춤이 나리니
생명은 어미가 그리 두레박으로 길어 올림이다.
- bongta 造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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