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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화와 합리적

소요유 : 2008.02.28 09:44


합리화와 합리적

合理化,
合理的.

둘 다 合理로 시작하지만, 끝에 化가 붙느냐, 的이 붙느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선 合理란 무엇입니까 ?
자의대로 해석한다면,

“이치에 합한다.
이치에 부합한다.”쯤 됩니다.

합리적이란, 지금 현재의 상황이 ‘이치’나 ‘도리’에 부합됨을 의미합니다.
‘的’이라는 것이 적실하다, 또는 과녁의 뜻을 가졌으니,
합리라는 말 뜻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의’로 새겨 다음에 오는 말을 한정하는 쓰임도 가능합니다.
이럴 때는 명사를 형용사화는 접미사가 됩니다.

합리화란 지금, 현재의 상황이 ‘이치’나 ‘도리’에 부합되지 않으나,
이를 그리 되도록 꾀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미래를 향한 개선의 의지를 표상하기도 합니다만,
때로는 과거, 또는 현재의 불합리한 상황을 억지를 부려,
짐짓 합리적인 양 가장하거나, 주장하는 경우를 일컫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는 아주 고약합니다.
모략, 책략을 부려, 의도적으로 합리화할 경우에는
소위 말발, 글발로 겉이 화려하게 포장이 되기 일쑤이므로,
그 기세나 힘에 이끌려, 도리없이 당하거나,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사물의 이치라는 것이 자로 잰 듯이 명확하게
인식될 형편이라면, 상대의 합리화에 대해 시비선악을 바로
분별하여 대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치를 분별하여야 할 상황이 대단히 복잡하거나,
불명확한 경우, 또 현재가 아니라, 먼 훗날 결과가 밝혀질 성질인 경우,
당장 이를 확인하기 어려울 경우도 많습니다.
보통 문제가 되는 것은 후자이기에,
세상사에는 구절양장(九折羊腸) 우여곡절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이 때, 두가지 성향이 현실에서 대립되곤 합니다.
고집과 소신이 그것입니다.
누구라도 앞 일에 대해 확실한 평가를 내리기 어려울 경우,
‘국가와 민족을 위해’라든가,
‘나는 너를 사랑해, 사심이 없어’라며 대의명분을 내걸고,
자신의 선의를 믿어 달라고 호소할 경우는 참으로 난처합니다.
이게 소신인지, 고집인지 쉽사리 평가하기 곤란합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열심히 관련 정보를 수집, 분석, 평가 합니다.
때로는 그 자의 과거 경력에 의지하여, 믿거나 불신하기도 합니다.
혹은 진위불문, 자신이 처한 위치, 입장에 따라서
무작정 부하뇌동하여 찬반을 표하기도 합니다.

이리하여, 고집이 똥고집이 되고,
소신이 선견지명이 되기도 합니다.

나아가, 똥고집쟁이가 꼴통으로 진화하고,
선견지명을 가진 이가 세상을 구할 영웅, 구세주로 받들어 집니다.

때에 이르러,
이리저리 갈가리 찢기기도 하고,
높이 추앙되기도 하는 것이지요.

혹은, 이를 기화로 사실이 어찌되었든,
또는 앞으로 상황이 어찌 전개되든 상관없이,
우선 자신의 이익을 꾀하기 위해,
어느 편에 서서 더욱 한쪽으로 몰아가는 인간들도 나타납니다.
이를 우리는 모리배(謀利輩)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이익이 아니라도,
제 감정에 부역(?)하기 위해
시비선악 불문하고,
무작정 하나에 올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에 나타난 족속들로서,
이들을 우리는 빠돌이라고 부릅니다.
노빠, 황빠, 명빠 등등.....

경우에 따라서는,
고집쟁이가 소신있는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고,
소신있는 사람이 옹고집쟁이로 낙인이 찍히기도 합니다.

중국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公有公理, 婆有婆理’ - 공유공리 파유파리
시아버지에게는 시아버지대로의 이치가 있고,
시어머니에게는 시어머니대로의 이치가 있다.

※.
公理 : 정당한 도리,
婆理 : 제멋대로 합리화하는 구실.

원래는 이리 대립되는 말이기도 합니다만,
외양상 公理, 婆理가 구별이 되지 않거나,
짐짓 公理가 婆理의 모습으로,
婆理가 公理의 외투를 입고 거리를 배회하기도 합니다.

밝은 눈이 아니라면,
현실에서 이를 가려내기란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 보다는 현실의 세계에선 나의 시각에서 본 도리가,
是(옳음)고 남의 관점은 非(그름)로 자리매김하기도 합니다.

혹자는 ‘사실과 관점’을 정확히 구별하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리 주장하던 그 자의 행실을 두고 보았더니,
정작, 그 자 역시 ‘자신의 주장은 사실’이고,
‘남의 주장은 관점’에 불과하다고 외치고 있더군요.

논어 이인편(論語, 里仁篇)에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子曰 君子之於天下也 無適也 無莫也 義之與比

“군자는 천하에 임함에 있어서,
이렇게 해야 한다든가, 하지 말아야 한다든가 하며,
고집스런 주장을 펴지 않는다.
다만 의로움을 따를 뿐이다.”

공자는 행동의 기준으로서 義를 들었습니다만,
지금까지 제가 떠들어온 합리성이라는 것은
시비(是非) 곧 옳고 그름, 도리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인즉,
仁義禮智 사단의 智쯤에 갖다 댈 수 있겠단 생각입니다.
(是非之心 智之端)

공자가 말한 행동기준으로서의 義라면, 
이게 맹자식으로 하자면 수오지심이 끝단(端)이니,
(羞惡之心 義之端)
결국은 마땅함을 좇지 못하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은
사뭇 부끄러움을 모르는 소치라 하겠습니다.

작금의 정치인들을 보면 하나같이 고집불통들입니다.
노무현 역시 의로움 보다는 자기고집에 매몰되다시피
5년을 지내다 국민의 차가운 외면 속에 사라졌습니다.
이명박 역시, 대운하에서 보듯이
제 고집외에 다른 의견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모두 마땅함을 모르는 소치이니, 부끄러운 노릇입니다.

"나무가 먹줄을 좇으면 곧아지고, 사람이 충간(忠諫)함을 받아들이면 거룩해진다."
공자 말씀입니다.

저들이 귀를 열어,
의로움과, 도리를 삼가 좇는 합리적인 사람이 되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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