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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삼경(夜半三更) 문빗장 - 주반칠흑(晝半漆黑)

소요유 : 2008.02.29 09:14


당나라 무종(武宗) 서기 845년 “회창(會昌)의 폐불(廢佛)”사건이 일어난다.
소위 3무(武) 1종(宗)의 법난(法難)중 가장 혹독한 탄압으로 꼽힌다.
정치적인 이유가 있었지만, 도교를 믿는 황제는 외양 이를 빌려 다른 종교를 탄압했다.
당시 4천6백의 사찰을 헐고, 26만5백여 승려가 환속 당하였다 한다.

일일부작 일일불식(一日不作 一日不食)으로 유명한 백장(百丈)의 선문규식(禪門規式)엔
다음과 같은 규정이 실려있다.
“선원에는 부처님과 보살상을 안치하는 불전(佛殿)을 세우지 않고,
다만 설법을 하는 법당을 마련해야 한다.”
이 규율에 따라 선종만은 불전을 세우고 그 안에 불상을 안치하지 않았으며,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도만을 닦았으니, 무종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다 한다.
이에 선종만이 타종파와는 다르게 멸화를 당하지 않고 발전을 계속하였으니,
그후 당말에 이르러, 구름같이 많은 선사들이 배출되어 선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뜬금없이 왜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는가 하면,
전일 초파일에 한 감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그 감상의 끝을 저 역시 더듬어 좇아가 본다.

내 집 주변을 걷다보면 물 묻은 손에 깨알 묻듯 도처에 사찰과 마주친다.
초파일 볼거리는 많은데, 모두 한꺼번에 볼 수는 없는 노릇.
먼저 산 넘어 괘불(掛佛)을 뵈러 갔다.
(* 괘불 : 절에서 큰 법회나 의식을 행하기 위해 법당 앞뜰에 걸어놓고 예배를 드리는 대형 걸개 그림)
그 사찰은 매년 초파일에 고이 모셔두었던 괘불을 법당 뜰에 걸어 모신다.
비가 오락가락하여 어쩔까 싶었으나, 괘념치 않고 산을 거슬러 올라섰다.
.
지지난 겨울 그 눈길 따라 강아지(유기견)를 찾으러 다닌 적이 있었다.
오늘은 겸사겸사 그 길을 찾아 든다.
인적이 거의 끊긴 길이지만,
겨울, 그 강아지를 만났던 바위를 다시 보고 싶었다.
너럭 바위 위에서 함께 눈꽃을 맞으며 잔명(殘命)을 겨워하던 그...
그는 지금 이 세상에 없다.

골을 따라 그의 이름을 불러본다.
그는 없고, 검은 구름만 젖어 흐른다.
꽃도 진 골짝에 검푸른 나무가지들이 겨운듯 누워있다.

오늘 괘불은 비가 오셔서 모시지 않는단다.
나는 왜 괘불을 보려하는가 ?
일년에 딱 한번 뵈옵는 사연은 무엇인가 ?
어둠의 장막을 찢고 일년 단 한번 얼굴을 뵈이시는 그 그림은 그래서 영험할까 ?
그래 사람들은 괘불을 향해 합장하며 원력을 돋우어 비옵는 것인가 ?
부처에게 눈도장이라도 찍어 두고 싶은가 ?

정작은 내가 그를 봄으로서 그에게 빛을 내리는 것이다.
내 안광(眼光)이 괘불탱(掛佛幀)에 이르자 배광(背光)으로 화하니,
이내 한갓 그림이 부처로 나투심이 아니겠는가 ?
그러하니 나의 안광인즉 생명의 점화자(點火子, igniter)다.

지피어 오른 탱화에 나의 마음이 실리고,
이는 곧 연화심(蓮花心)을 피어내니
나의 합장은 곧 귀일(歸一)의 인(印)이다.

내려오는 길,
앞서 가던 부부를 본다.
괘불을 뵙지 못하고 내려 간다하니,
그는 산에 버려진 강아지를 가끔 본다는 엉뚱한 말을 한다.
조주는 개에 불성이 없다 하였는데,
그 사람은 괘불 소리 듣고 개불을 보았음인가 ?
조주는 다른 곳에서는 개에게 불성이 있다고 했다.
유무가 반복무쌍하니 조주야말로 개불인가 하노라.

제 절 괘불조차 모르는 그 신도는 낙락하니 산을 내리고,
산객(山客)은 괘불 대신, 겨울새(間) 잃어 버린 강아지를 사려품고 내려온다.

산 밑뿌리까지 내려오지 않고, 옆구리를 질러
우리 집 앞에 있는 다른 절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가야금 병창을 생목소리로 듣고 싶었기에 벼르던 차다.

도착하니 해동검도 시범이 한창이다.
헌데, 정작 가야금 병창네들이 길을 잘못들어, 도착이 어렵다고 한다.
대신 주지스님이 바라춤을 추겠단다.

바라춤을 보면 잔잔한 슬픔의 선율이 가슴을 싸아 지난다.

파르스름 깍은 배코, 특히 여승의 그것을 보면 자르르 코가 매워온다.
저들의 가슴엔 아마 절절한 회한과 아픔이 서럽게 흐르고 있을 테다.
뒷란에 모셔 앉히고, 그들의 잿빛 설움을 껴안아 제 울고 싶다.
손을 휙 젖히자, 바라가 물고기 흰 뱃가죽을 내보이며,
천지가 뒤집힌다.
머리 위에 수평으로 펴 하늘 가린 바라가
살큼 손따라 내려오니 우수수 번뇌가 물방울 튕겨 뜰에 뒹군다.
별빛 꾸어 담은 눈엔 등심(燈心)처럼, 잦힌 꿈이 파르르 떤다.
법식 따라 진퇴가 가지런한 외씨 버선에선
구도를 향한 은빛 검날(劍刃)이 반짝인다.

순간 바라가 칼이 되어 가슴을 지난다.
엊그제 찢기어 죽은 아기 돼지.
저 바라가 그 때 그 아기 배를 가른 미망의 칼날이 되어 하늘을 가른다.
번쩍 우뢰가 절 뜨락을 쪼갠다.

각설이패들이 뒤를 잇는다.
저들의 희학질에 법당 뜰이 까르르 자지러진다.
얼마전 조성한듯 희여멀건 관음석불은 끝내 떨어진 배꼽 찾으시느라
천수천안이 모자라고 만다.
젖은 옷이 성가시다.
조금 보다가 그냥 귀가한다.
내 집에서 쳐다보면 바로 절 마당이 보인다.
옷을 갈아 입고
차 한잔 받쳐들고 책상 앞에 앉으니, 창틀에 절 뜰이 들어선다.

그 절 기둥에 붙은 포스터.
천불봉안불사란다.
일인 一佛當 50만원.
만약 과거, 현재, 미래 三世의 千佛이라면 삼천이니 15억이다.
조그마한 절에서 만약 15억이 정녕 맞다면 신도들 허리가 휠 판이다.
삼천이 아니라, 몇몇 위만 골라 모신다 하여도 佛頭當 50만원이라면 적지 않다.

나는 종교가 없지만,
우리 집 식구중에 천주교를 믿는 이가 있다.
성당을 새로 짓더니만, 매번 10억이니 15억 적자라며 신도들에게 사실을 알리며
기부를 재촉한다.
평일엔 텅텅 비는 성당을 운동장만하게 크게 짓고는 빚 타령이다.

아기 돼지는 찢어발개지고,
산 채로 닭을 아스팔트 위에 패대기를 치는 세상.
지방자치단체는 눈깔이 싯빨갛게 충혈되어
소싸움, 닭싸움, 말싸움 대회 유치에 달음질을 쳐댄다.

불상 뽀개 어한(禦寒)한 단하천연이 이 땅에 오면 어찌할까 ?
아마 도끼 매고 다니면서 50만원, 천만원짜리 불상 목을 자르러 다니느라 여일이 없을 터.
예수가 이땅에 오면 고대광실 교회, 성전 부시느라, 정작 십자가 둘러맬 시간도 없으리라.

백장의 청규(淸規)를 내세우는 사찰도
실인즉 빼어난 풍광, 그림 같은 집 지어놓고 별장놀음하고 있는게 아닌가 ?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음인가 ?
여기, 죽어 가는 생명은 차고 넘친다.
저기, 현생지옥을 겪으며, 도살만이 유일한 구원인 중생의 삶이 가득인데,
불살생계가 제일 으뜸 계율이라는 그대들은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
신도들의 원망(願望)을 아귀되어 걸망에 긁어 담아
쇳덩이에 금박 물리고,
기와불사로,
나뭇덩이에 꽃단청 올리는 놀이에 여념이 없지 않은가 ?

백장의 주장자는 지금 어느 골에 쳐박혀 있음인가 ?
단하천연의 도끼는 지금 어디메에 녹슬고 있음인가 ?

bongta 야반삼경 산에 들 까닭이 없다.
정작 야반삼경은
여기 이 땅, 이 벌건 대낮임이니. - 주반칠흑(晝半漆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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