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엉터리 편지(마지막)

소요유 : 2014. 6. 29. 08:36


어디선가 이런 글을 하나 읽었다.    

그 글 주인은 'ooo전원별곡'이란 제호를 멋부리며 깃발 위에 새겨놓고는,
재미있게 전원을 노래하시는 분이다. 


오늘은 풀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무더운 날씨에 2행정 예초기의 매연 냄새가 더해져 머리가 띵 하다.

풀과의 전쟁을 재개한 건 순전히 비암 때문. 어제 데크 근처에서 뱀그물을 뚫고 침투한 새끼 독사 한마리를 끝장냈다. 그리고 오늘은 마당 초입에서 어미 독사를 큰 딸이 발견했다. 뱀들이 다시 설친다. 그것도 독사들이...공존은 인정하되 동거할 수는 없는 법. 가족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면 강력 응징할 수밖에...

...

블루베리는 2010년 이사 온 해 가을에 심었다. 우리농장에서 가장 먼저 심은 과일나무다. 7그루를 심었는데, 괴물(포크레인)이 잘못 파헤쳐서리 2그루는 사망했다. 나머지 5그루는 잘 가꾸어 보련다. 내년에는 아로니아(블랙초코베리)를 좀 심어봐야겠다.


난 이 글을 읽자 장난기가 발동한다.
심통을 부리기로 한다.

해서 글 하나를 남겼다.   

사람들은 곧잘 핑계를 댄다.
아니 모든 사람을 이리 한데 묶는 것은 온당치 않다.
말하기 쉬운 대로 따른다면,
어리석거나, 혹은 영약한 이는,
핑계, 변명에 기대어 자신을 꾸민다.

이런 행위 양식엔 언제나 상대가 있다.
상대를 적당히 속이며 눙치기엔,
이런 형식이야말로 헐하게 동원할 수 있는 수월한 수단이 되고 만다.
그렇지 않은가?
제 살기에도 바쁜데,
누가 남의 일을 어이 까탈스럽게 일일이 챙기며 따지랴?

그러함이니,
핑계를 대면 곧잘 위기를 넘길 수 있다.
변명을 해대면 잘도 제 양심을 속일 수 있다.
한마디로 이는 수지 맞는 장사다.

나는 지나가는 뱀도 죽이지 않고 멀리 사라질 때까지 공손하니 읍(揖)하며 전송한다.
벌레도 가급적 죽이지 않고 밭두렁으로 내놔준다.
다만 뱀이나 개구리를 예초기로 아지 못하는 사이 죽인 적은 더러 있다.
이것은 씻을 수 없는 나의 죄업이다.

비닐 하우스 안에 들린 뱀도,
잠자리 채나 걸망 따위로 거둬,
곱게 밖으로 내모신다.

내가 여름 한 철 거(居)하는 움막 밑엔 뱀이 들어 산다.
난 그냥 내버려 둔다.

밭에서 뱀을 만난다.

‘나는 너를 해하지 않는다.
이곳에 마음대로 드나들어도 되지만,
여기 밭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해하지만 말아라.’

내가 뱀을 보고 두렵지 않은데,
어이 화를 낼 이유가 있으랴?
뱀 또한 내가 화를 내지 않는데,
어이 두려울 이치가 있겠음인가?

‘공존을 인정하되 동거할 수는 없는 법’

누군가는 이리 외친다.

아,
저이는 마음이 아름답구나.
부지불식 간 이리들 그를 셈한다.

과연 그러함인가?

그이는 이리 말한다.
밭엔 드나드는 것은 참겠다,
하지만 집 가까이 오는 것은 용서를 하지 못하겠다 이른다.

난 이 지점에서,
짐작만 하고 있던,
그의 마음보를 헤집고 바로 내력을 명확히 알아내고 만다.

말이다.
가령, 밭에 드나드는데 농작물이 피해를 입게 되거나,
가족이 다치기라도 할 짝시면,
그는 이내 모든 곳에서 만나는 뱀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가 공생이니 동거니 하며 분별심을 내는데는,
뭇 생령을 아끼고 염려함이 근저에 깔리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이해에 보탬이 되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음이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겠다,’
이 문법 체계에 한 치인들 그가 벗어나 있지 않단 말이다.
다만 여느 사람들에 비해 조금 그 기준이 널널할 뿐,
그의 가치판단 준거틀은 저들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함인데도,
그가 뱀을 무작정 해치지 않고 있다.
여기 그 표면적 사실내지는 선전에 빠지면,
그의 마음이 제법 아름다운줄 알고 속아 넘어갈 수 있다.

무차별적으로 해치지 않는 마음이 어찌 곱지 않으랴?
하지만 그게 본원적으로 생명을 사랑함에 터함이 아니라,
다만 아직 내 가족까지는 해치지 않았음이니,
참을 만하다는 소식이라면,
나라면 무작정 그의 마음이 아름답다 상찬할 수는 없다.

때론 이런 양보의 마음, 절제된 행위가,
무작정 무식하게 제 마음을 부리는 이보다,
더 위험하고 조심스럽다.

왜냐하면,
자칫 거기엔 위선이 독버섯처럼 자랄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 가족을 염려하고 있음인가?
난 이게 핑계일 뿐이라 믿는다.
외피상으로는 가족의 안위에 기대어 뱀을 경계함이지만,
기실 본 마음 역시 뱀을 아끼고 사랑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환언하자면,
가족 때문에 피치못하게 뱀을 단속한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단 말이다.
그의 마음 속엔 뱀을 달갑지 않게 여기고 있음이 먼저인 것이다.
다만 밭에 나다니는 것을 용서함은 나중 일이다.

먼저 금하고 일부 관용함과,
관용이 먼저이고 일부 제한함과는 천양지차이란 말이다.

그러함인데 문장의 구조 속엔,
뱀을 용납하는 것이 먼저이고,
가족을 위함이 2차적 조건인 양 꾸며지고 있단 말이다.

요는 아직은 참을 만하다는 말이다.
만약 가족이 다친다면,
집 근처 뿐이랴,
밭이곤, 들이건, 산이건,
몽조리 만나는 족족 뱀을 쳐부수고 말지니.

헌즉 나는 이게 위선의 한 모습이라 이르고 있는 게다.
이것은 좀 위험한 가치 선양이란 뜻이다.

난, 생각한다.
무식하고, 거친 이들이야 더 이상 일러 무엇하랴?

하지만 이런 생심을 내신 분이야말로 귀하다.
이리 여기지 않을 수 없다.
비록 거기엔 함정이 있고,
위선이 숨어 있지만.

세상에 블랙초코베리는 없다.
다만 블랙초크베리만 있을 뿐이다.

초코란 말은 얼마나 달콤한가?
하지만 초크(choke)는 달콤하기는커녕,
목을 죄이는 아픔이 있다.

떫음이 그대의 목을 죄이고 만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잘 초코란 말에 현혹되어,
저 말에 기대어 저게 그럴듯한 가치인 양 혹해버리고 만다.

형광등에 끼우는 조그만 전구 그를 초크라 칭한다.
이 역시 choke인데 목을 죄이듯,
전류를 한껏 꽉 조였다 양단의 전극에 풀어재끼는 것임이라,
그 기능에 기대어 이런 이름을 붙여 둔 것이다.

블랙초크베리 역시,
떫음의 그 모습을 감추지 않고 온전히 바로 지시하고 있는 게다.

이처럼,
말이나 글 역시,
진실에 터해야 한다.

드라마 전원일기는 허구를 넘어 거짓 선전을 하기 일쑤이다.
거긴 전원을 팔아 도시민을 기망하곤 하는 게 적지 않다.
구름이 흐르고, 물이 남실되는 곳,
마냥 평화로운 그곳이 전원인가?

난,
거기 평화만이 있는 게 아니라,
거긴 살벌한 다툼과 아픔이 있음을 증언하련다.

뱀이 간단없이 출몰하고,
벌레가 지칠줄 모르고 나타나는 전원.
이것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말로 꾸며진 한쪽의 절름발이 별곡(別曲)이 되고 만다.

양단,
한쪽 끝의 별곡 더하기 또 다른 한쪽 끝의 별곡을 모두 아우를 때라야,
정곡(正曲), 정악(正樂)이 된다.

난 오늘 잠시 잠깐 이를 빌어 오늘의 사태를 경계하고자 한다.


그러자 나는 그 글 터에서 강제로 탈퇴되었다.
그는 카페장이다.
무소불위 용력(勇力)을 뽐낼 수 있다.  

난 사실 그동안 엉터리 편지를 쓰면서,
저들을 충동하고 여기(勵起, exciting)시키며 들까부른 편이다.
녀석들의 국량(局量)이 어느 정도까지인가 하는 심산도 있었지만,
제법 참아내는 모습들이 기특도 하였어라.

난 이미 강퇴를 예정하고 있는 바라,
이 진진한 재미를 어찌 그칠 수 있으랴?

勝固欣然,敗亦可喜。

소동파(蘇東坡)는 관기(觀棋)란 글에서 이리 노래하지 않았음인가?

이겨도 흥, 져도 흥.

我時獨遊,不逢一士。

천지 간을,
내 홀로 소요유(逍遙遊) 하노나,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하는구나.
두어라,
본디 누구를 구하거나,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이 아님이니.

나는 안다.
저들의 인내가 제 본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다만 내 글에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 나를 대할 방도를 모르고 있었을 뿐.
그래 우정 점잖은 척 아닌 척 의뭉을 떨며 사태를 피면(避免)하고 있었을 터다.

고장난명(孤掌難鳴)
외손바닥으론 소리가 나지 않는다.
법거량도 법기(法器)가 아니면,
그저 허공에 대고 소리지르기에 불과하다.

내 눈에 저들의 모습이 좀 시시해보였다.
저리 맥없는 짓으로,
서로를 거들며,
진지한 척 하는 모습들이 우스워보였다.

그렇다한들 저들은 착한 이들인 바라,
적개심을 가진다든가 척을 지려한 바는 전혀 없다.
다만 내 도를 펴서 저들의 매(昧)를 일깨우려 하였다.
자우(慈雨)를 뿌려주려 하였음인데,
저들은 미처 알지 못하였으리라.

廣行四等,被慈雨於枯根;大闡三明,驚法雷於羣夢。

하늘에서 내리는 자애로운 비는 마른 뿌리를 적시고,
법의 천둥은 어리석은 꿈을 놀래키니라.

헌데 역시나 군몽(群夢) 무리지어 단꿈에 젖어 있구나. 

블루베리 농장 4년 차인 분 하나를 안다.
거기 가보니 키가 난장이다.
올해도 소출을 하나도 기대할 바가 없다.
그 농장주가 이른다.
이 타는 듯한 올 봄 가뭄에도 그는.
올해 부러 물을 극히 제한하였다 한다.

이유를 물으니,
그리 물을 제한하면 뿌리가 깊게 내려,
곧 튼튼해지리라 그리 기대하였단다.
천근성 뿌리를 갖고 있는 블루베리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면,
이는 사자 새끼도 아닌 강아지를 벼랑 아래로 굴러뜨려,
살아남는 녀석을 취하려함과 같다. 

驚法雷於羣夢 

내 그에게 法雷를 들려주려 하였음인데,
그가 나를 찾아오고 아니 오고는 그에게 달렸음이니,
이 역시 그의 명운이라 할 터. 

자,
내 이리 노니며,
주막 하나를 지나치노니.

水里对酒,酒里对水
저 주막은 술에 물을 탄 것인지,
물에 술을 탄 것인지,
도통 싱겁기 짝이 없구나.

게다가,
주모는 박색에다,
교태도 없다. 

다음,
길을 지쳐 나가다,
또 새로운 인연을 지을 뿐.
난, 어디 매일 바가 없다.

***

엉터리 편지의 상대는 기실 따로 있었다.
그이는 보아하니 천성은 맑고 착한 이리라.

헌데,
그는 매양 남이 쓰고 버린 지팡이에 의지하여 헛다리를 짚고 있으니,
내 손을 내어 잡아 주려 하였음이다.

헌데 이번에 카페장이란 자의 글을 만나,
내가 이자의 본심을 까발려주려 이리 충동하였음이라.

이리 한 철 노닐며 즐겼으니,
신세를 한껏 지고는,

그냥 물러나는 것도 싱겁다.
하여 그 상대에게 글 하나를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전원별곡의 ooo입니다.

제 말씀 하나 드려봅니다.

***

위선에 대하여

난, 누군가를 시험하기 위해 글을 쓰지는 않는 편이다.
그가 먼저 나를 도발하기 전까진 그리 예에 어긋나는 짓을 할 이유는 없다.

△△△이란 분의 편지는 그럴싸하지만,
언제고 거기 인용되는 고씨의 중계방송은 엉터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 몇 차 의견을 개진하였지만,
카페의 수많은 이들 중 하나도 그럴 듯한 의견을 말하는 이는 없었다.
하다못해 내 글을 향해 비난을 해도 재미있었을 터인데,
모두는 꿀 먹은 벙어리들이었을 뿐이다.
이리도 인사들의 면모가 허술할 수 있으랴?

하다못해 구구 거리며 모이를 쪼아 먹기 바쁜 닭 무리 가운데도,
장닭 하나는 끼어 있게 마련이다.
때론 장끼 한 마리가 섞여 있기도 하다.
헌데 오천이 넘는 회원 가운데,
장닭은커녕 메추라기 하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박★★(전원별곡 카페장)이란 이 역시 이를 지켜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별반 뚜렷한 반응을 하지 못하고 있다.
제법 점잖지 않은가 말이다.
대개의 경우 이쯤에선 앙탈을 부리거나 제재가 들어올 만도 한데,
아무런 기척도 내색도 없다.
난, 그래서 이 분이 공부가 좀 되었구나 싶었다.

하지만 이리 가벼이 단정을 지을 수는 없다.
그의 글은 내용 전개가 평이하지만, 대체로 편안하다.
이것은 그의 글이 가진 좋은 덕성이라 하겠다.
그렇지만 깊이가 없고 혹간 틀린 정보가 실려 있다.
누구도 이를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가고 있지만,
난 그가 그리 정확한 사람은 아니란 인상을 가졌다.

드디어 때가 왔다.
그의 본 바탕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다.

‘공존을 인정하되 동거할 수는 없는 법’

이 문법은 엉터리다.

동거를 할 수 없는데 어찌 공존이 가능하겠는가?
동거의 영역을 집, 집 마당, 집 울, 감나무까지, 우물터까지 ....
어디까지 잡느냐에 따라 저이의 언명은 마구 춤을 추며 변해갈 터다.

공존한다며 외부인의 시선을 끌며 칭찬씩이나 들을 수 있다.
그는 일약 착한 사람이 된다.
하지만 여기 가족이 등장한다.
가족을 그가 사랑하느냐 아니냐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다만 가족이란 장치를 동원하여,
그는 제 꾸민 선전을 교묘히 제한하며,
실(實)을 거둬 뒤로 챙겨가고 만다.

저런 언술 구조는 거죽으론 그럴싸하지만,
실인즉 전후 가치 배반적이다.
그래 나는 푹 찔러 보았다.
과연 호박이 익었는가?

그가 점잖고, 도량이 넓은 이라면,
내가 던진 화두를 멋지게 받아쳐야 한다.
그런데 바르르 떨며 기어이 본색을 드러내고 만다.
그동안 감춰 두었던 털 빠진 꼬리를 드러내고 만 것이다.

자, 이제 △△△에게 어찌 말할 것인가?
△△△의 경우엔 일언반구도 없던 이가,
제 일이 되니깐 단 일각도 참지를 못하고 성을 내고 말았음이다.

‘공존을 인정하되 동거할 수는 없는 법’

이제 이 언명이 왜 위선인지 알겠는가?

자신의 영역을 침범하면 공존이고 뭐고 참아낼 수 없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면 보고 즐기겠단 심산 아닌가?

△△△의 글엔 슬쩍 장구도 쳐주고, 추임새도 넣어주질 않았던가?
그의 집에 뱀이 나올 때는 모른 척 쳐다도 보지 않던 이가,
제 집에 뱀이 나오자 불 같이 화를 내고 있지 않음인가?

따라서 박★★가 말하는 공존이란 허울 좋은 앞가림에 불과하다.
그는 남과 동거는커녕, 공존씩이나 도모할 정도로,
도량이 넓은 이가 아님을 난 진작 짐작하고 있었지만,
오늘로써 그 증거를 남겼음이다.

△△△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이 사정을 알아채고 말았으리라.

박★★는 △△△ 앞에서 부끄러운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뭐 이게 하루아침에 될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오늘 만이라도 그리하길 바란다.
내게 본색을 들키지 않았음인가 말이다.

이 장면에서 바로 공자의 말씀 하나를 상기해본다.

出門如見大賓,使民如承大祭。己所不欲,勿施於人。在邦無怨,在家無怨。

문을 나서면 큰 손님을 대하듯 하며,
사람을 부릴 때에는 큰 제사를 받들 듯 한다.
자기가 바라지 않는 일은 남에게 베풀지 마라.
나라에 원망이 없고, 집안에서도 원망이 없으리라.

박★★는 △△△과 자신 사이에 인줄을 치고,
크게 차별하고 있었음이니,
다음부터는 공공연히 뱀과 공존한다는 따위의 침 바른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己所不欲,勿施於人。

이 말씀 하나만 제대로 챙길 수만 있어도,
언감생심 정악은 감히 넘보진 못할지라도,
개다리 소반 펼쳐 놓고,
얼추 별곡을 노래할 수 있으련만,
‘청산에 살어리랏다’
폼만은 퍽이나 요란하구나.

***

이젠 강퇴가 되었으니,
교분을 나눌 기회가 없게 되었습니다.

인연을 접게 되니,
그 끄트머리 인사를 이리 차려봅니다.

그 동안,
덕분에 공부를 많이 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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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4. 6. 29. 08: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