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유심생(相由心生)
내가 관상 공부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 전이다.
요즘 좀 게을러진 폭인데 간간히 글을 스쳐 지나면서도, 깊이 머무르지 못하였다.
오늘은 여곤(呂坤)의 신음어(呻吟語)란 글에 등장하는 말씀 하나를 소개해두고자 한다.
有相予者,謂面上部位多貴,處處指之。予曰:“所憂不在此也。汝相予一心要包藏得天下理,相予兩肩要擔當得天下事,相予兩腳要踏得萬事定,雖不貴,子奚憂?不然,予有愧於面也。”
“관상을 보는 이가 하나 있어 나(呂坤)의 관상을 보았다.
얼굴 여러 곳을 가리키며 귀한 상이 많다고 지적하였다.
그러자 내가 이리 말하였다.
‘내가 우려하는 바는 귀하고 아니 하고가 아니다.
그대가 내 마음을 본다면, 응당 천하의 진리가 다 담겨져 있으며,
그대가 내 양 눈썹을 본다면, 응당 천하의 큰일을 다 담당할 것이며,
그대가 내 양 다리를 본다면, 응당 만사를 착실히 수행할 수 있으리란 것을 안다.
비록 귀한 상이 아니라도, 그대가 어찌 염려할 일인가?
그렇지 않다면(실제가 마음과 다르다면), 그야말로 내 얼굴에 부끄러울 것이다.’”
여곤의 이 글을 보면 진희이의 다음 글을 절로 떠올리게 된다.
心者貌之根,審心而善惡自見。
行者心之表,觀行而禍福可知。
(陳希夷, 心相篇)
‘마음은 겉꼴의 뿌리이니, 마음을 살피면 선악이 절로 드러난다.
행동이란 마음의 외표(外表)인 바라, 행동을 잘 보면 화복을 가히 알 수 있다’
상서(相書)의 꼭대기에 이르면 단지 얼굴의 꼴만을 두고 논하지 않는다.
소위 相由心生이라, 즉 상이란 마음으로 말미암아 형성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유가(儒家)에서 다음에 말하는 것과 맥이 닿아있다.
有諸內,必形諸外。
內充實,而外有光輝。
胸中正,則眸子暸焉。
胸中不正,則眸子眊焉。
(출처 : @中國某網)
‘내심에 있는 모든 것은, 필히 밖으로 모두 형체를 드러낸다.
속알이 충실하면, 밖으로 광휘를 뿜는다.
흉중이 바르면 눈동자가 맑게 빛나고,
흉중이 바르지 않으면 눈동자가 혼탁하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과도 일견 맥이 닿아 있다.
自種因,自受果。
‘스스로 인을 짓고, 스스로 갚음을 얻는다.’
하지만 세속적인 숙명론과는 다르다.
相隨心轉
마음이 구르는 대로 상은 따르는 법.
본디 상(相)과 명(命)은 말(末)에 불과하니 여기 관심을 두지 않는다.
舍本逐未이라 본을 버리고 말을 취할 일이 아니다.
자기 얼굴을 두고 관상을 본다든가, 사주팔자를 보는 따위로,
미래의 운명을 점치고, 의심을 잠재우는데 한눈을 팔 일은 아니다.
행운이 따를 터이니깐 로또를 사야겠다든가,
상이 좋지 않으니까 횡액을 만날 것이라든가,
하는 따위는 모두 다 번뇌를 더하는 짓이라,
해만 있지 결코 득이 되지 않는다.
(※ 이상 일부 내용은 중국 面相學 web을 참조하였음.)
※ 呂坤(1536年10月24日-1618年7月24日)
字 叔簡,
卑 心吾, 新吾
自號 抱獨居士
명나라 때 인물로 주희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반대하였다.
주자학, 불교, 도가, 법가에 대해 회의하며,
선진 시대의 유학 본류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我只是我
‘나는 다만 나일 뿐이다.’
天地萬物只是一氣聚散,更無別個。
천지만물은 다만 기가 모였다 흩어질 뿐, 그 외 다른 것이 없다며,
기일원론(氣一元論)을 견지하였다.
독창적인 사상을 전개하여, 전통적인 제 학설을 비판하였다.
'상학(相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떨기 (0) | 2016.10.04 |
---|---|
선고(仙庫) (0) | 2016.09.24 |
상(象)과 형(形) - 補2 (0) | 2016.02.15 |
신탈구개자사(神脫口開者死) (0) | 2015.03.17 |
순자의 관상론 (0) | 2014.02.03 |
관골(顴骨) (2) | 2012.10.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