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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子絶交 不出惡言

소요유 : 2016. 11. 2. 10:45


君子絶交 不出惡言


군자는 비록 정(情)이 다하고, 수(數)가 틀어져,

절교를 할 때라도 악담을 늘어놓지 않는다.


이에 대한 출전은 실로 여러 곳이다.


故君子耳不聽淫聲,目不視邪色,口不出惡言,此三者,君子慎之。

(荀子)


“고로 군자는 귀로는 음란한 소리를 듣지 않고,

눈으로는 삿된 색을 보지 않고,

입으론 악언을 내놓지 않는다.

이 셋은 군자가 삼갈 것이다.”


臣聞古之君子,交絕不出惡聲

(史記 樂毅列傳)


“신이 듣건대 옛 군자는 절교할 때라도 악담을 퍼붓지 않는다 하였다.”


그 외 颜氏家訓, 戰國策 등에도 등장하며,

특히 三國志에선 여러 장면에서 인용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리 뱉은 이라 할지라도,

장래까지 이런 삼가는 마음을 간직하는가 하는 것은 또 별도란 것이다.

가령 삼국지에서 조조가 원소와 헤어지며 이리 말하지만,

이런 마음가짐이 지속되지는 않는다.


이로 볼 때,

이 말은 그 본 바탕 마음까지 담보하지는 않는다 하겠다.

‘미운 놈 떡 하나 더 준다.’

이 속담에서도 미운 놈을 용서하는 것인지,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현재를 참는다는 것인지,

마지막까지 그 향방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최근에 한 인사와 결별을 하게 되었다.

그이가 말한다.


‘사람의 인연이란 어찌 할 수 없다.

다음에 또 어찌 만나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과히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라.’


君子之交絕無惡聲


군자란 헤어질 때, 악담을 늘어놓지 않는 법.

내가 그에게 악담을 늘어놓지는 않았지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장래의 인연은 아직 오지 않은 것.

지금 맞이하고 있는 인연을 소홀히 하고서 나중을 별도로 기약할 일이 있으랴?

과거나 미래는 현재를 딛고 만들어지는 것.

과거는 앞선 현재가 시간의 궤적을 그리며 지나 이뤄지며,

미래는 오늘의 현재가 쌓여 만들어지는 것.

Here & Now.

나는 과거나 미래로 오늘의 일을 미루지 않는다.


오늘 인연에 충실할 때,

바로 여기 이 자리가 천국이 되고, 불국토가 되는 것.

그 외 미래를 들어 별도로 미륵불을 찾을 일이 있겠음인가?’


나는 미래로 이연(移延)된 인연(因緣)을 믿지도 않지만,

연연(戀戀)하지도 않는다.

오늘을 살 뿐이다.


눈앞의 인연이지,

헤어지면 헤진 헝겊처럼 다시는 돌아보지 않게 되는 법.


군대에서 제대를 하게 되면,

서로간 이리저리 연락처를 묻고 챙기곤 한다.

나는 묻지도 않고 전하지도 않았다.

물어 챙긴다한들 우정 생각나 연락을 취하고 아낄 줄 아는가?

열중 아홉은 다 놓고 떠난 인연일 뿐,

다시는 돌아보지 않기 십상이다.

하지만 제대하고도 절로 연락을 하고 만나는 인연은 있게 마련이다.

이런 인연은 장래를 기약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만나는 당시 인연을 귀하게 여기고 진실되게 살았기 때문에,

별도의 노력 없이도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는 한의사다.

우리가 흔히 인술(仁術)이란 말을 한다.

이것 참으로 비릿한 말임을 알아야 한다.

술(術)이라 영어로 하자면,

technique, skill, art쯤 된다.

차갑고 기능적인 기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 여기 앞에 인(仁)으로 꾸며 숨을 불어넣고, 온화한 기운을 더한다?

이러하다한들 본디 차가운 술(術)의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술을 부리는 이의 마음가짐을 더듬어 살펴볼 수 있을 뿐이다.


오늘날 양의나 한의나 술사(術士) 이상의 가치를 부여할 대상이던가?

아직도 병원에 가면 의사를 두고 선생님이라 칭하며 환자들은 굽실거린다.

이거 영 우스운 짓이다.

나는 의사라 하여 무작정 선생이라 부르지 않는다.

저들은 기능인으로써 사회의 일각을 담임하고 있다.

서비스 제공하는 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마치 두부장수, 선반공, 미장이가 저마다 가진 기술로써,

당해 분야의 일을 맡고 있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내가 의사를 선생이라 부를 때는,

그가 기능, 기술도 뛰어나고, 인격적으로 훌륭할 때일 뿐이다.

우리 집을 고치는 보일러공에게도,

그가 성실하니 제 일에 임할 때,

그의 행동거지가 반듯할 때,

나는 스스럼없이 그를 선생님이라 부른다.

너무 고맙고 존경스럽기 때문에,

절로 그런 마음이 일고 만다.

(※ 참고 글 : ☞ 2009/01/01 - [소요유/묵은 글] - 선생(先生)과 후생(後生))


박근혜

그의 주변 인물들의 행동거지를 관찰하노라면 재미가 있다.

끝까지 그를 변호하는 이,

바로 앞전까지 그를 감싸고돌더니만,

안면을 싹 바꾸고서는 폄하(貶下)하기 바쁜 이.


후자는 전자보다 곱절은 더 나쁜 놈이라 할 것이다.

저들은 시민을 위해, 그리 마음보를 바꾼 것이 아니다.

그럴 양이면 진작부터 박근혜를 제대로 보필하고, 

바른 소리를 내놓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렇다고 전자가 바른 놈이라 하는 것은 아니다.

잘못 된 것을 충언으로써 바로 개진하지 않은 인물이니,

결코 정인군자는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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