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다문화 사회

소요유 : 2017. 9. 16. 12:47


최근, 내가 한 인연에 이끌려,

평생 낚시를 모르던 위인이,

어떤 낚시 사이트에 들려 글을 두 개 정도 올렸는데,

게 객들이 주제에 집중하지는 않고 가욋일에 눈들이 팔려

미주알에 똥을 달고 숭어뜀을 뛰듯 법석을 떨더라.

(※ 참고 글 : ☞ 표절(剽竊))


급기야 어떤 이는 백로가 날아들었다고 고하며,

짐짓 까마귀임을 자인하고 있더라.


積土成山,風雨興焉;積水成淵,蛟龍生焉; 


흙이 모여 산이 되면, 바람과 비가 일어나며, 

물이 고여 못이 되면, 교룡이 생긴다. 


과시 이대로라면 비바람이 불고, 용이라도 나타날 형국이다.


아닌 게 아니라, 

운종룡풍종호(雲從龍風從虎)라,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하였으니,

글 몇 줄만 더 부주하면,

미구에 이 사이트에서 용을 낚겠다고 대드는 이도 나타나겠다.


이 얼마나 경이롭다 하지 않을손가?


강신무((降神巫)가 강신한 신의 말씀을 받잡아 공수를 내리듯,

나도 한번 이 곳에 도목검(桃木劍)을 잡고,

명두(明斗) 소리를 내본다. 


*** 


다문화 사회


내가 한철 머물고 있는 시골 동네엔,

베트남 새댁도 눈에 띄고, 외국인 노동자도 적지 아니 거리를 지난다.

설혹 체격이 우리와 엇비슷한 동양인이라도,

아무래도 외양이 조금씩 다르므로 이내 구별해낼 수 있다.

그러하니 거리엔 알록달록 색색의 사람들로,

문채(文彩)가 여여(如如)하다.


여기 시골엔 공사판이 많이 벌어진다.

여남은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트럭 위에 실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현장으로 가는 모습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아마 현장엔 한국인 노동자는 책임자급이나, 전문 기공들이나 있고,

대부분은 이들 외국인들로 채워져 있을 것이다.


혹자는 이들 외국인 때문에 일자리가 줄어드니,

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이도 있는가 본데,

내가 수년간 이곳 시골에서 관찰한 바로는,

저들이 없으면 한국에선 공장이나 토목 공사가 원활이 돌아가기 어려울 것이다.

10여 년보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품삯은 사뭇 올라 내국인들과 큰 차이가 없다.

이리 저들 노임이 오른 것은

내국인들은 험한 일들을 하려고 하지 않아,

외국인들일지라도 노임을 올려주며 끌어들여야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 사회의 내재적 요인에 따라,

저들을 불러 들였을 뿐, 

결코 저들에게 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시내에 있는 전기상에 물건을 사러 가면 베트남 며느리가 맞곤 한다.

할아버지는 손주가 귀여운지 얼싸안고 어르는 것을 몇 차 보았다.

이런 가정들을 두고,

다문화 가정(多文化家庭. multicultural family)이라고 부르는 모양인데,

과연 이 용어가 적당한지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선 다문화가족지원법이 제정되어, 저들의 정착을 지원하고 있다.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이 결국은 여성차별 금지에 방점을 둔 것이로되,

이 법의 제정은 곧 여성차별이 실재하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이렇듯 다문화가족지원법 역시 다문화가정의 차별 현실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법을 통해 차별 없는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법률적 의지를 읽을 수 있으나,

이런 법 자체가 필요 없는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시민사회의 의식은 아직도 한참 따르지 못하고 있다.


우리 때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가 단일 민족 국가임을 배우고,

이를 은근히 자랑스러이 여기는 의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지금 한국 사회의 다문화 결혼 비중은 2008년 11.2%에서,

지속적으로 줄어 2015년 현재 7.4%에 이른다.

하지만 출생률은 2.9%에서 4.5% 늘어나 있다.


우리 소싯적엔 이른바 주한미군을 중심으로,

양공주, 튀기 등으로 이름지어진, 

시대의 아픔을 잉태한 주변인들 그리고,

그 현장 거증의 상흔(傷痕)인 혼혈인이 있었다.

당시엔 이들을 해외 이주, 입양 등을 통해,

정치적 편의를 꾀한 비인도적 방출이 적극적으로 행해졌다.

때문에 국내엔 혼혈인이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엔 적극적 의지로써,

외국인 여성과의 혼인이 이뤄진다.

동시에 이들 사이에 출생한 자녀들이 한국 땅에서 항구적으로 살아간다.

위 통계엔 4.5%라 하지만, 일부 지역에선 10%가 넘는 경우도 많다 한다.

통계청 자료를 검토해보면 농촌 인구가 많은 호남과 

외국인들 유입이 많은 제주 지역의 출생률이 타 지역을 곱절 이상 상회한다.


이제 이 정도라면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국가가 아니다.

편협한 민족 단위로 세상을 인식하던 시대는 지났다.

이제라도 인류 단위로 인식 지평을 넓혀야 한다.


세계의 중심이 중국이라는 중화사상(中華思想)이란 게 따지고 보면,

저들의 깊은 두려움의 소산이 아닐까 싶다.

하기에 고대엔 남만(南蠻),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 등 중국 외 사방은 

모두 오랑캐가 사는 나라로 치부하기도 했다.

밖을 낮춤으로서 스스로 중하고 귀하다라고 생각은 실은 두려움을 위장하고, 

혹은 자신을 따스히 위로하기 위한 자기최면이라고 규정한다면 억탁(臆度)일까?


이런 한편 저들은 곧잘 사해동포(四海同胞)를 다시 말하곤 한다.

胞란 태를 뜻한다.

탯줄을 함께 하였으니 사해 안의 모든 사람들은 어머니가 같은 형제란 뜻이다.

그럼 사해란 무엇인가?

한(漢)나라 이전 중국 변경을 가리키는 비유인데,

서쪽과 북쪽엔 바다가 없지 않은가?

이 경우엔 전설상의 바다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巴爾喀什湖, 青海湖 등 바다 같이 넓은 호수를 지칭한다.


사이론(四夷論)과 사해주의(四海主義)가 대립하는 양 싶지만,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기실 중국은 유사이래 변경 민족과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을 일으켰다.

점령도 하고 거꾸로 침탈도 당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변경은 확대일로로 나아가 강역이 넓어져갔다.

변경족들을 복속시키기 위해 무력행사를 불사하였지만,

한편으론 통치자들은 인의(仁義)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며,

저들을 포섭하는 노력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한나라 당시 유행하던 시가 여기 있다.

四海皆兄弟,誰為行路人。

사해 안은 모두 형제다, 서로 관련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현재 중국은 다민족 국가로,

인구 13.5억, 56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족(漢族), 몽골족(蒙古族), 회족(回族), 티베트족(藏族), 위구르족(維吾爾族), 묘족(苗族), 이족(彝族), 장족(壯族), 부이족(布依族), 조선족(朝鮮族), 만족(滿族) ...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 일컬어졌지만,

고대부터 일부 외래인이 들어와 정착하며 살아왔다.

처용이 그러하고, 신라의 허왕후 許黃玉 역시 인도로부터 온 외래인이다.

오늘날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외래인이 유입되어, 피가 섞이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이들을 대하는 태도는 하나같지 않다.

하지만 개인 선호와 사회적 당위 가치를 혼동하여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가령 개인적으로 외래인에 대한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하지만 이와는 별개로 같은 사회에 사는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등한 주체로 존중해주는 일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四海皆兄弟,誰為行路人。


이 말은 당시로는 통치자들의 다분히 정치적 선전 구호일 수도 있다.

매양 흉한 족속이라 배척만 하여서는 변경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한족만큼 제대로 대우는 하지 못하지만, 말만이라도 이를 다독일 필요는 있었으리라.


하지만 오늘날처럼 시민의 자유, 평등 가치를 존중하는 민주사회에선,

시민 스스로 이런 가치와 정신을 적극 발양하고 수호하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공간적으로도 제 나라 안의 시민만으로서가 아니라, 

열국(列國) 모든 시민과 함께 인류애를 공유하고,

민주 시민 의식과 그 실천 가치를 온 세계인과 더불어 인식하고 지켜나가야 한다. 


한 때 신토불이(身土不二)란 말을 앞세우며,

국내산이 무작정 좋다는 식으로 우리 농산물을 선전하곤 하였다.

나는 당시에도 이런 인식 태도를 비판하였다.

가령 계피나 감초는 우리 것이 없으니,

외국에서 사다 쓰지 않는가?

저것들이 외국 것이로되,

소용이 닿기에 들여오는 것이니,

어찌 산물(産物)을 두고 내외로 나눠 차별을 두어야 하겠는가?


반대로 인삼이나, 황기 등은 한국 것이 탁월하니,

외국 것을 들여와 쓸 이유가 없다.

그런즉 산물(産物)은 산지(産地)에 따라 구별되는 것이 아니라,

산물 그 자체의 효용 가치에 따라 쓰임의 차별이 있을 뿐이다.


신토불이라는 것도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마치 민족우월주의, 선민의식과 같이 세상을 분절하고,

타자를 배척, 차별하는 편협된 도그마의 발로가 아닌가?

나는 이리 회의를 일으키곤 하였다.


내가 과수 농사를 짓는데,

농부들은 대부분 풀을 원수 대하듯 한다.

하니까 작물외의 초목은 모두 방해가 되니,

남김없이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나는 모든 풀을 받아들이며 농사를 짓는다.

심지어 외국에서 넘어와 정착한 풀들도 가리지 않는다.

다만 작물에 과도한 해를 끼치는 풀들은 도리 없이 일정분 생육에 제한을 가할 뿐이다.

하기에 우리 밭은 과시 다문화 풀 가족들의 경염장(競艶場)이라 할 수 있다.

저마다 제 품성을 뽐내며 마음껏 제 생을 구가한다.


나는 이를 지켜보는 관찰자 ‘보는 이’로서 곁에 서 있을 뿐이다.

이런 환경 내용을 두고 흔히 생물다양성(Biodiversity)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를 노려, 무슨 농경영학적 목적의식을 갖고,

의도적으로 그리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나의 농사 철학이 본원적으로,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을 차별 없이 품어 안기에 그러할 뿐이다.


이를 실현하려면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는 작위(作爲)의 마음보를 버려야 한다.

조금이라도 꾀하려는 순간, 자연은 되려 사람들의 소구(所求)를 저버린다.

가령 비료를 넣거나 농약을 치고, 제초제를 뿌리려 대들기 시작하면,

당장에 생물다양성은 파괴되며,

저들 행위들에 스스로 묶여, 

다시는 그 강고한 연환쇄 고리로부터 놓여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혹자는 유기 비료니, 친환경 농약이니, 방초망, 방조망 등을,

들이대며 유기농을 한다느니, 자연재배를 한다며 으쓱거린다.

이것들은 화학 비료, 농약과 별반 다름없으며,

생물다양성을 해침에 있어서도 대차가 없다. 

나는 오랜 시간 연구하여, 실증적으로 이를 확인하였다.


나는 무제초, 무농약, 무비료 등 완전 무투입 농법을 행하고 있지만,

소출이 적었던 적이 없음은 물론,

병충해로 작물이 해를 입은 적이 없다.

다만 밭엔 온갖 자생초가 자유롭게 자라게 놔두었을 뿐이다.


天地位焉,萬物育焉。


천지가 제 자리를 차지하고,

만물이 자란다.

이는 바로 만물이 화(和)할 때의 모습이다.


헌즉 이러한 말이 옛부터 전해오고 있다.


和者,天之正也,陰陽之平也,其氣最良,物之所生也


화(和)란 천지가 바르며,

음양이 고를 때니라, 

그 기가 최고로 좋아,

만물이 생하는 바이니라.


아, 그러므로 내 말하노라.


세상을 자유롭게 하라.

천하만물을 평화롭게 하라.


모든 식물은 뿌리에서 삼출액(滲出液, exudation)을 분비한다.

이것 놀라운 일임을 알아야 한다.


내가 이 자리를 빌어 설명하자면 한참 길을 돌아가는 짓이라,

긴 이야기는 생략하겠거니와 오늘은 그저 그 요체만 간단히 소개를 해둘까 한다.


보살은 바라밀행을 닦는다.

하지만 식물은 바라밀행을 별도로 다시 구하지 않는다.

내가 보기엔 그들의 삶 자체가 바로 바라밀행이다.

삼출액은 그 바라밀행의 대표적인 하나의 체현(體現)이다.

의욕하지 않으면서 삶을 구현해가는 저들 순수체(純粹體)들,

그들은 구체적 실천행으로 나아가지,

별도의 다짐, 원망, 기획, 꾀함이 없다.

하기에 낱낱의 행이 바라밀다(波羅蜜多)이다.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 


식물은 아낌없이 남에게 내주며, 

비바람, 천둥을 견디며 긴 인고의 세월을 건넌다.

삼출물을 내어 지혜롭게도 모든 미소(微小)동물과 토양을 아우르며,

상대차별이 아닌 절대무차별의 실재이다.

그 자신이 本이 되고, 根이 되어,

일체만유(一切萬有)의 태자리(胎源)가 된다.


식물이 뿌리를 통해 토양에 방출하는 삼출액엔 실로 다양한 성분이 들어 있다.

이 성분은 토양의 종류, 근권(根圈) 환경 조건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Marschner, 1995),

식물은 광합성으로 고정한 탄소 성분의 5~21%를,

뿌리 삼출물을 통해 근권에 내놓는다고 한다.


사람들의 행악질을 알아야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

제초제로 모든 풀을 죽이고, 오로지 화학비료, 농약으로 키운다.

그러다 가을 추수 때는 볏짚마저 둘둘 말아 깡그리 거둬 내다 판다.

단 하나도 땅에 돌려주지 않는다.

똥구멍이 막히지 않고서야 어찌 이리 내놓는데 인색할 수 있겠음인가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농법을 따르고 있는 농부들은 구멍이 막힌 배냇병신이 아닌가 싶다.


삼출물을 포함한 땅은 생땅에 비해 수분 함수율이 높다.

삼출물은 점액질 형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수분을 잘 간직할 수 있다.

이른 새벽엔 한낮보다 식물 뿌리깍지에 수분 함량이 더 많다.

이는 야밤에 뿌리에서 삼출된 액이 뿌리가 토양 속으로 확장되는데,

일정 역할을 하고 있음을 추측케 한다. 

삼출액은 증발이 일어나면 건조해지며, 인접 토양 입자에 들러붙게 된다.

이처럼 뿌리깍지 영역은 수분 함량이 주기적으로 변하며,

주변을 통제하는 역동적 역할을 한다.


토양으로 삼출물이 분비되면,

이를 이용하는 미생물들이 등장하고, 성장하며,

토양의 생태 환경을 바꾸게 된다.


처음엔 세균, 균류가 등장하고,

이어서 선형동물, 원형동물들이 이들을 먹이로 하여 뒤따른다.

다시 이들을 노리는 절지동물들이 나타나게 된다.


식물은 거꾸로 이들이 활동한 결과의 혜택을 본다.

가령 저들이 유기물을 분해하여 식물이 흡수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며,

토양 물성을 식물 생육에 적합하도록 변화시킨다.


식물은 root-root, root-microbe, root-insect

즉  뿌리와 뿌리, 뿌리와 미생물, 뿌리와 벌레 간,

삼출물을 통해 모종의 정보를 교환하는 것이다.

삼출물은 이 때 일종의 메신저 역할을 한다.


밭에 다양한 식생이 존재하면 할수록,

이에 따라 다양한 삼출물이 더욱 더 풍성해진다.

오늘날의 상업적 영농 행위는 대개는 단일종 위주로 짜여져 있다.

예전의 사이짓기(間作), 돌려짓기(輪作), 섞어짓기(混作)는 거의 사라졌다.

화학비료가 등장하자,

이들의 강력한 비효(肥效)를 믿고,

농부는 더 이상 번거로운 짓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농약, 제초제가 곁에 있기에,

풀을 원수 보듯 하는 농부들은,

밭에서 자신이 재배하는 단일종의 작물 외엔,

모두 몰아내고 만다.


다문화 가정을 배척하고, 차별하는 이를 볼 때마다,

눈만 뜨면 짐통 매고 모든 풀 제압하겠다고,

제초제 뿌리려 나서는 농민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대다수의 농부들은 풀들을 모조리 추방하고,

애오라지 비료에만 의지하여,

속성(速成), 성력(省力)의 벼농사를 짓는다.


그러함이니,

저 논 속에 삼출물이라야 벼 자신이 내놓은 것밖에 없다.


만약 거기 다양한 식생이 있다면,

실로 셈할 수 없는 다양하고도 풍부한 삼출물이 나올 것이며,

이에 따라 다양한 미소동물들이 제 생을 제 품성대로 구가(謳歌)할 것이다.

작금의 대부분 벼농사에선 이게 완전히 배제되어 있다.


이런 토양 환경에서 자란 벼는,

애오라지 농부들이 공급한 비료에만 의지한다.

주요 성분인 N, P, K 외 다양한 요소 성분들은,

매년 수탈 농법에 의해 고갈되어 간다.


하버-보쉬(Haber-Bosch) 공법에 의해 질소가 공업적으로 만들어지자,

사람들은 두엄을 더 이상 내지 않게 되었다.

사물을 기본 요소로 해체하여 분석, 구성, 이해하는 짓거리,

이런 따위의 환원주의로 인해 농업은 망가졌고,

따라서 덩달아 세상도 천박해지고 말았다.


내가 이리 늘어지게 떠드는 것은,

이 환원주의가 우리 사회에 팽배한 순혈주의,

단일민족주의에 함몰된 실상에 바로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넘어 만민을 향해 열린 뜨거운 인류애의 열정과,

천하 평화의 소망을 함께 하였으면 하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Ivan Illich)는 이리 말하고 있다.

날으던 돌이 땅에 떨어지면,

영악한 사람들은 그것은 만유인력 법칙에 따라 그런 것으로 이해한다.

현대인들은 뉴턴에 사로잡혀 있다.

하지만 똑같은 현상을 두고, 

땅에 이르고자 하는 돌의 욕망 때문이라고 이해하였던,

중세 학자들과 우리는 의식을 함께 공유할 수 없다.

땅의 가슴에 가능한 한 가깝게 다가가고자 하는,

돌의 자연스런 욕망은 우리에게는 이제 신화가 되었다.


돌의 자연스런 본성을,

신화로 밀어 넣은 현대인들은,

이제 시적 감성도 함께 잃고 말았다.

현대인들은 밝은 태양만 쫓지,

밤에 떠오르는 달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저 거친 황야를 돈을 향도(嚮導) 삼아 마냥 달려만 간다.


***


내가 한 사이트에 놀러가 최근 글 두 편을 올렸다.

낚시 사이트인데 한 귀퉁이에 이슈방이란 타이틀을 단 카테고리가 하나 개설되어 있다.

저들 선참자들은 내가 문제를 제기한 내용이 아니라,

다만 내 글쓰기 스타일에 각다귀, 쉬파리 떼처럼 들러붙어 갖은 행악질을 부린다.


가령 한자 많이 쓴 것을 두고서는,

조선시대에 온 기분이라든가, 

선비 운운하는 이도 있다.


한자라야 고등학교만 제대로 나와도 다 읽을 수 있을 터이며,

친절하게 번역까지 해놓지 않았던가?

국어의 80%가 한자어로 되어 있다.

이러한 것이거늘,

한자로 본 뜻을 밝히며,

고삐 끌어 못가로 이끌었으면,

곱다시 고개 숙이고 허갈진 목구멍과 주린 배를 채우면 되지 않겠음인가?


작금 우리나라 실정인즉, 대학 진학률이 80%에 육박한다 하지 않던가?

그러함인데 한자 문화권에서 한자 쓰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서양인들 역시 교양인들은 라틴어를 배운다.

이것 모르고는 지혜의 조약돌이 깔린 생각의 뜨락을 제대로 걸을 수 없다.

누천년 축적되어 온 한문의 세계를 모르면,

아무리 잘나도 외눈박이가 되고 말 것이다.


이러함이니, 외려 내 글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이들이야말로,

자신들의 문자 생활이 나태하였음을 되돌아보아야 할 노릇이 아니겠는가?


어떤 이는 또 내 글에 비유가 많다고 투덜댄다.


언어는 뿌연 안개 속을 짧은 간짓대 하나로 더듬거릴 뿐,

사물의 실상은 완전히 파지할 만한 인식의 연장이 되지 못한다.

하여 옛 성인들은 비유로써 어리석은 중생을 교화했다.

불설비유경(佛設譬喩經)이란 경전은 비유와 우화로써,

법(法)을 설하고 중생을 깨우치고 있다.

이 경은 실로 넓디 넓은 비유의 바다이다.


화엄경은 또 얼마나 신비스럽고 깊은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던가?


말이 나온 김에, 잠시 곁길로 새며,

이 비유의 세계로 안내하고자 한다.


無量劫海修功德,  供養十方一切佛,

教化無邊眾生海,  盧舍那佛成正覺。

放大光明照十方,  諸毛孔出化身雲,

隨眾生器而開化,  令得方便清淨道。


"... 그리고 광명을 발하여 시방세계를 비추며, 

하나하나의 털구멍으로부터 화신(化身)의 구름을 일으켜서,

중생의 근기에 따라 교화 방편의 길을 얻으셨다.” 


이 같은 연화장엄세계의 동, 서, 남, 북에 또 다른 세계가 있고,

그 안에 부처님의 나라가 있으며,

그 부처님을 중심으로 무수한 보살들이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있다.


또한 이들 무수한 보살들은 자기 몸의 모든 털구멍 하나하나로부터,

구름과 같은 빛을 뿜어내고,

그 하나하나의 빛 속에 다시 무수한 보살들을 나타내고 있다. 


一毛孔中, 無量佛剎


“털구멍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불국토가 있다.”


이런 짜릿한 표현이 세상에 더 있을까?

이게 한낱 꾸밈, 수사가 아니라,

세상의 실상이라면,

농부는 과수나무에 열리는 한 알조차 소홀히 할 수 없다.

네티즌은 만나는 글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없다.

이곳에서처럼 말씀의 활자들을 욕뵈이는 것도 예사로 하지 않았던가?

삶에 진지하지 못한, 단순한 천박한 소비객들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여기, 무량(無量)이란 곧 무한(無限)과 같다.


一切十方諸佛土,  入佛一毛猶不滿,

佛以大慈如虛空,  是名清淨慧法門。

(大方廣佛華嚴經 世間淨眼品)


“일체의 시방 제 불국토를 부처의 털구멍 하나에 넣어도 가득 차지 않으며,

부처의 자비는 허공과 같이 크다. 이를 이름하여 청정지혜법문이라 한다.”


여기 공연히 종교적인 편의(偏倚)에 빠져 자칫 그릇되게 이해할 필요는 없다.

문학적 수사로 보아도 좋겠지만,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의 한 모습으로 보면 어떠할까 싶다.

물론 불교도들은 저것을 깨달음의 실상으로 볼 터이지만,

그것은 그것대로 놔두고 말이다.

(혹 오해할까 첨언하는데 나는 불교도도 아니오, 기독교도도 아닌 無敎다.)


그러니까,

이 세상은 중중무진(重重無盡) 법계연기(法界緣起)로 짜여져 있다.


다문화 가족, 식물 다양성 ...

마찬가지로 글쓰기에도 가지가지 스타일이 있는 법.

자신과 다른 형식이라든가,

이제껏 보지 못한 내용이라,

배척하고 차별할 일이 아니란 말이다.


어떤 이는 제법 점잖게 글을 다듬어 올렸으되 이러하였다.


‘좋은 글은 글쓴이의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알기쉽고 정확하게 전달 해야하는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글 쓰는 작업이라는 것이,

이것 뭐 머리 올리고 기생 점고 받는 사또라도 뵙는 것인가?


왜 남을 의식하여야 하는가?

일시 표 구걸하는 양아치 정치인도 아닌데,

내가 왜 다른 사람을 배알을 맞추며 글을 써야 하는가?

내 생긴 대로, 내가 평소 닦은 대로,

내 소신을 폄에 있어 거칠 것이 어디에 있음인가?


다만 내 양심에 부끄럽지 않고,

남에게 잘 보이려 글을 꾸미지 않고,

당당하게 내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야말로,

남에게 예를 제대로 차리는 일이 아닌가?


평소 이런 정신을 가지면,

하지 않아도 글쓰기 훈련이 되어, 절로 반듯해지는 법,

구태여 남을 의식하며 움츠러들 일이 아니다.


이이는 또 이리 말하고 있다.


‘초반 완급조절은 실패를 안길지모르니 조심해요’


사내장부가,

무슨 완급 조절까지 해가며 제 말을 뱉어낸단 말인가?

땡초에게 끌려간 십 년 공방살 수절과부라도 되는가?

앙가슴 조이며 벌벌 떨기는 왜 떠는가?

차라리 사타구니 벌리고 자빠지는 것이,

수지 맞는 장사임을 뒤늦게 알고 말리라.


삼 년 백수 끝에 면접관 앞에라도 서있단 말인가?

그리 새가슴으로 늘 벌렁벌렁 가슴을 조이니,

삼 년에 이르른 것이요,

이게 장차 또 석 삼년을 더하지 않게 된다고 그 누가 있어 장담하리?

부랄 달린 장부가,

무슨 죄를 하그리 많이 지었기에, 

기껏 글 하나 내놓는데 그리 발발 떠는가?


차라리,

퇴청 마루 아래서 서발 혓바닥 빼어 물고,

먹다 남은 뼈다귀 바라는 검정 강아지에게,

쓸모없어진 부자지 쑥 빼어내 던져주는 것이,

삼세 복을 짓는 일이 되리라.


四海皆兄弟,誰為行路人。


얼굴 골상이 다르다고 차별하지 말 일이며,

피부색이 검다 놀리지 말라.

다만 그의 인격과 글격으로,

그를 만나고, 글을 대하라.


千人千色 萬人萬色


세상엔 천인이 있으면 천 가지 갈래로 나눠 다르며,

만인이 있으면 만 가지로 찢어져 각기 제 길로 달려 나가는 법.


가령, 종교 단체를 두고 보자. 

애초엔 교주 하나를 중심으로 뭉쳐 있으나,

세월이 흐르면 백, 천 종파로 나눠 제 길을 만들어 나간다.

선불교의 경우 한창 때 五家七宗으로 나눠지는데,

요즘엔 분파가 새로 이뤄진다든가,

참신한 종지를 내세워지는 일이 거의 없다.


이는 선종이 활력을 잃고 쇠미해졌기 때문이리라.

결코 대중들이 서로 화목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기실 선불교가 옳다면, 세상 사람들 숫자만큼 분파가 일어나야 할진대,

사람들이 몽매하여 이제껏 오가칠종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노태우의 보통 사람론이란 것이 다 사람들을 거짓으로 속이는 짓인 게라,

사람이란 본시 백 천 만이 다 저마다 특별하여야 한다.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란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는 언명일 뿐인 것을,


천 가지, 만 가지로 나눠져 뜻이 갈리고,

주장이 다른들(不同), 반목하지 않고,

군자는 상대를 존중하며 화목한다.(和)


君子和而不流


군자는 화목하나 따라 휩쓸려 다니지 않는다.


허나 소인배들은 강잉히 남을 한데 묶어 거죽으로 같은 양 행세를 하지만,

속으론 딴 셈을 하며 제 잇속을 따지기에 급급한다.


한 집에 같이 한 가족(a family)을 일구고 살아가고,

한 가지 옷(uniform)을 입고 있지만, 

늘 불화하고 딴 셈을 하며 살아들 간다.

헌즉, 문제는 분파(分派)로 나눠져 제 각기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상호 다름을 이유로 해하지 않고, 이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다만 자신의 뜻을 바로 세우고, 제 길을 묵묵히 걸어갈 뿐이다.

이게 화이부동하는 군자의 모습이다.


글 스타일을 두고 짓고 까불 일이 아니란 말씀이다.

외려 제 개성 잃고 천하가 모든 한가지로 놀아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여야 한다.

천하인의 얼굴이 다르듯,

각자는 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야 한다.

그대들은,

왜 네 목소리는 나와, 우리와 다르냐고,

소맷자락 부여잡고 끌고 당기다,

그도 여의치 않으면 손가락질 하며 비웃질 않았는가 말이다.

이 얼마나 비겁하고, 나약한 모습인가?

무엇이 두려운가?

네 자신의 목소리를 찾을 일이다.

남의 목소리를 존중하지 못하고서,

어찌 잃었던 제 목소리를 찾을 수 있으랴?


삭풍(朔風)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明月)은 눈 속에 찬데

만리변성(萬裏邊城)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김종서)


아 고인의 기상이 그립다.

당금(當今)을 사는 후손들이,

이리도 쩨쩨하니 비루하게들 살고 있으니,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고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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