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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과 코인

decentralization : 2018. 8. 11. 13:49


계집과 코인


드라마를 보든가 영화를 보면,

계집 출연자가 톡톡 불거지며, 전갈처럼 상대를 쏴주는 장면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당면 사태에 임할 때, 계집사람은 논리적 반항에 앞서,

저리 기능적, 감정적 처리가 능한 것이다.


톡 톡 쏴주는 맛으로 계집사람을 사귄다는 이도 있다.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밍근한 여자는 재미도 없고, 맛도 없고, 싱겁다.

차라리 청양 고추처럼 맵싸름한 맛에, 그런 여인네를 좋아한다는 이도 적지 않다.

이도 성에 차지 않으면, 월남 고추처럼, 발딱 선 여인이 낫다는 이도 있다.

혓바닥은 물론, 인후(咽喉)까지 쳐들어와 자극하는 계집이 사랑스럽다는 말이다.


내가 텃밭에 토종 고추를 심었다.

매운 것을 잘 못 먹은즉, 골라 아니 그러한 것만 취하여 기른다.

그런데, 희한한 것이 마치 월남 땡고추처럼,

하늘을 향해 발딱 선, 발기(勃起)한 고추를 보게 된다.

영양고추 연구소를 통해 분양 받은 것이로되,

이런 망측한 모습을 보게 되자,

저들이 토종 유전자 고정을 한다고 하였지만,

혹여 혼입된 외래종 인자를 충분히 거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런 의심을 일으키곤 한다.

혹여, 토종도 저리 발딱 서서,

하늘을 발칙하게 꼬나보는 종자가 있는가?

나는 미처 아지 못하겠다.

그렇다면,

내 상상력을 근원으로부터 허무는 슬픈 노릇이 되겠음이라.


내가 코인 거래소 시장을 두루 훑어보니,

참으로 처참하기 그지없다.

연일 2~10%씩 하락하고 있다.

이런 정도는 암호화폐 시장에선 그저 일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수많은 불나방들은,

밤을 돋아, 찬란한 낮을 꿈꾼다.


내가 이에 한 소식을 전하고자 한다. 


최근래 봉도표를 보면, 두 가지로 대별된다.

그저 밋밋하니 수염 하나 없는 무염봉(無髥棒) 열차(列次) 시리즈와,

수염이 자주 출몰하는 유염봉(有髥棒)의 행렬이 그것이다.


여기 수염이란, 일봉 봉 몸통(body) 위아래에 달린,

기다란 측선(側線)을 말한다.

영어권에선 이를 shadow라 하는데,

이는 원래의 그림자란 말을 취한 것이다.


하니까, 이런 하락장에서도,

유염봉은 몸통 밖으로 톡톡, 툭툭 불거지면,

내가 그리 간단하지 않으니,

몸부림이라도 치고 죽으리오 하는 형상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거 계집으로 치면,

예사로운 모습이 아닌 것이다.

다 시들어 이파리가 쳐진 세상에서,

나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

하며 하늘을 향해,

뾰족하니 독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기실, 하락장에선,

주식이든, 코인이든 쉬는 것이 무난하다.


하지만, 그대가 카사노바라면,

적중에 넘어가 영어(囹圄)의 신세라도 여인을 사랑하길 멈추지 못할 것이다.

이럴 형편이라면,

코인 시장에서도 쉬는 것을 받아드릴 수 없을 것이다.


내 충고하거니와,

이럴 경우,

밋밋한 봉형으로 일관된 코인이 아니라,

툭하면, 불거지며, 위아래, 수염을 달고 세상을 향해,

시앗 보아 투기 부리는 아낙처럼, 수염을 내달은 코인을 주목할 일이다.


결론은,

고추를 탐할진대,

청양고추 나아가 월남고추를 노릴 일이거니와,

아니 그러할진대, 차라리 그대 알량한 부자지 명주실로 꽁꽁 처매고,

산중으로 줄행랑 친 땡중이라도 사모하며 좇을 일이다.


이것 악습이다.

부자지 받고 태어난 사내 녀석이,

왜 명주실로 묶어야 하는가?


이런 부자유스런 기습(奇習)은,

기실, 혜가(慧可)로부터 연원한다.


立雪斷臂悲淚求法


혜가는 법을 구하고자,

눈 내리는 날,

달마 면전에서,

팔을 자르고 눈물을 흘렸다.


도대체 왜 멀쩡한 팔을 자르고서야,

달마의 눈에 드는 것인가?

달마는 너무 매정하다.

그가 과연 도가 높다면,

혜가가 팔을 자르기 전에,

그를 바로 알아보고 거둘 수 없었는가?


아, 아무리 도가 높다한들,

상대의 생심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인가?


하여간, 이 이후, 절집에선, 툭하면 피를 보인다.

부자지를 명주실로 꽁꽁 동여매는 것은 약과다.

오늘날 연비는 그저 쇼 형식으로 전락하였고,

소지(燒指), 단비(斷臂)쯤 하여야 세인의 주목을 받는다.

부자지를 식칼로 자른 이도 나타난다.

까짓 연비(聯臂)치는 의식은,

요즘엔 이게 그저 형식에 불과할 뿐,

아무런 외부 지시 효과를 발출하지 못하고 있다.

차라리 부자지 잘라,

외부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수지맞는 일이다.

중(僧)도 자본주의 체제의 노예에 불과하다.

잘 팔려야 부처 말씀 펴기 쉽다.

아니, 팔아먹기 수월하다.


단자(monad)화 된, 개인은,

전설을 소비하고, 신화를 선전하며,

오늘을 무대에 올려 세일하기 바쁘다.

그 밖의 것은 다만 효과적으로 연출할 자료에 불과하다.


그러함이니,

손가락 태웠다느니, 팔뚝 잘랐다 하는 짓에,

그리고 부자지 잘랐다 하여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모두 그대를 속이는 장치일 뿐이다.

쇼에 불과한 남의 부자지 자름 쇼에 놀아날 일이 아니라,

그럴 양이면, 차라리 내 부자지 잘라 남을 속일 일이다.

내 음부에 붉은 가지 박고 헐떡이며, 좌중을 옭아맬 일이다.

이게 장사로 치면, 한결 수지맞는 일이 아니랴?


이럴 배짱이 없으니,

부엉이 바위로 참배 가고,

다시 문재인의 위선에 속고 마는 것이다.


부엉이 바위는 없다.

하지만, 올빼미 바위는 다음을 예비하고 있음이다.

그 때에 이르면,

올빼미 바위도 환(幻)이라,

모두 다 허깨비 놀음인 것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소지, 단비,

이것 어리석은 이들이 저지르는 짓이다.

니에미, 

손가락 자르고, 팔뚝 자를 양이면,

차라리 곱다시 차려 입고, 산문을 올라오는 계집사람을,

하나, 둘, 스물, 서른 잡아먹을 일이다.

그리고 천하만고 청정승 자승이니 설정처럼 시침 뗄 일이다.


이럴 배짱이 없으니까,

애꿎은 제 손가락, 팔을 시장통에 잘라 내놓는 것이다.


고삼 때,

친구 녀석 하나는,

툭하면 백호치고,

책상에 삼당사락(三當四落)이란 표찰을 붙였다.

녀석 그리 악착같더니만,

끝내 s대 가고, KAIST 들어갔다.

그는 지금 아니 그 때부터 진작 황교안이 되어 있었다.


당시 우리는 KAIST 기웃 거리는 것을 변절로 치부하던 시절이었다.

노회찬 동기인 황교안처럼, 현실 공간을 열심히 헤엄치던 이들은,

제 손가락은커녕 손톱 하나 사회를 위해 내놓지 않는다.

항차 팔뚝을 내놓을런가?

어림없는 소리다.


나는,

손가락 태우고, 팔뚝 자르는 녀석들 우습게 안다.

하지만, 황가에 비하면, 백천만배 훌륭한 이들로 쳐준다.


부자지란,

여인네들을 향해 흔드는 영원의 노스탈지어(Nostalgia) 수건이다.

이것 부정하는 순간,

제 존재를 근원적으로 무화시키는 짓이다.

나는 정녕 그리 무화될 수 있다면,

그리 되고 싶다.

하지만, 이게 무망(無望)한 것을 아니까,

이리 현실계에서 질척이고 있다.


프랑스의 원로 배우 브리지트 바르도(84)가 할리우드 여배우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미투' 캠페인을 비판했다.

바르도는 최근 프랑스 매거진 '파리 매치'(Paris match)와의 인터뷰에서 "'미투' 캠페인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대부분의 폭로는 위선적(hypocritical)이고 터무니없다(ridiculous)"면서 "수많은 여배우가 배역을 따내기 위해 제작자들을 (성적으로) 유혹하곤 한다. 그리고 나중에는 자신이 성폭행을 당했다고 이야기한다"라고 주장했다. 


이 말은 또 다른 프랑스 여배우 까트린 드뇌브(75)의 발언 이후 나온 것이라 주목 받았다. 드뇌브는 지난 9일 프랑스 작가와 공연가, 예술가, 학자 등 여성 100명과 함께 "남성에게는 여성을 유혹할 자유가 있으며 미투 캠페인은 지나친 청교도주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출처 : SBS 뉴스)


아,

이들의 말씀은 얼마나 멋진가?


브리지트 바르도, 까트린 드뇌브

네 젊은 영혼을 불태우던 여인들.

이들은 여전히 멋지구나.


왜, 이들은 저 찌질한 현실계를 향해,

종내 제 말을 사과하고 말았는가?

저들은 강고한 현실계의 폭력에 제 자존심을 지키지 못하였음이다.


미투 응원한다.

하지만, 孤陽不生, 孤陰不成인 것이라,

홀로 외떨어진 음양은 결코 생성(生成)을 기약할 수 없다.


만약, 사내 녀석 하나 있어,

부자지 명주실로 동여매고서야, 중노릇 할 수 있다고 여긴다면,

녀석들 보는 즉 족족 따귀를 열불 나게 때리고 말 것이다.

손가락 자르고, 팔뚝 자른 중놈들 보면,

녀석들 나머지 남은 손가락 다 잘라 버리고,

남은 팔뚝 소래 꽃게 다리처럼 쭉 뽑아내 버릴 것이다.

쥐꼬리처럼 남은 부자지 꼬다리라도 눈에 띄면,

토막 칼로 바로 훑어 내어 마당가를 서성이는 우리 바둑이에게 던져 주리라.


손가락 달린 채, 부처가 되어야 하고,

팔뚝 멀쩡한 채, 달마가 되어야 한다.

부자지 매달고,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한다.


이게 아니 되는 못난 녀석들이 별 못난 짓들을 벌이는 것이다.

이런 짓 벌이는 녀석이라면, 근본을 의심하여야 한다.


삼당사락 책상머리에 써 붙이고, 

백호 치고 머리에 흰 끈 불끈 동여맨 녀석들 의심하여야 한다.

왜 그런가?

부자지는 근원적으로 잘못이 없다.

있다면, 조물주에게 있을 뿐,

그대 당신에겐 허물이 없음이다.


헌즉,

코인에 투자하려 할 때,

수염이 상하로 자주 출몰하는 것에 집중할 일이다.

수염 하나 없이 몸통만 멀끔한 녀석들 다 가짜배기인 것이다.


도대체 부자지 달고, 발기하지 않는 녀석이라면,

이를 어찌 사내라 할 것이며,

구멍 있고서, 

달빛 받고 갯벌 숨구멍처럼 스멀스멀 거리지 않는 계집이라면,

이를 어찌 꽃물 흐르는 이라 할 수 있으랴?


허나, 나처럼,

쉰물, 단물 다 겪은 이에겐,

이 모두 먹물로 그린 담채화(淡彩畵)일 뿐,

그저 평온하니 흐르는 시냇물과 같을 뿐.

탐함이 잠자고, 욕함이 쉬고 있음이다.


혹, 이를 다 여윈,

그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여인네가 있다면,

내 어찌 시들은 부자지일지언정 불을 밝혀 살피지 않을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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