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식물복지

소요유 : 2020. 10. 17. 10:36


식물복지


어제 주신 댓글 가운데, 식물복지 운운의 글을 보았다.

우리가 동물복지란 말은 간간히 듣지만, 

식물복지란 말은 거의 듣지를 못한다.


복지를 두고 말한다면,

을밀농철이야말로, 이를 구체적인 실천현실로,

여기 농장에서 구현하고 있지 않은가?


식물복지란 저 귀한 말씀 앞에 서자,

이내 생각의 파편이 사금파리 조각처럼 빛을 내며 좌르르 튀어 오른다.

이제, 그 사금파리 조각을 주섬주섬 주워보련다.


농업보조금을 두고,

여기 시골의 촌부 하나가 이리 말했다.


‘나라에서 혜택을 주었다.’


내가 이 말 앞에 서자,

서슴없이 되쏴주었다.


‘그것은 혜택이 아니라, 우는 아이 입에 물려주는 눈깔사탕에 불과하다.’


그런즉, 눈깔사탕 앞에서,

헤헤 잎을 벌리고, 눈물을 멈춘다면, 영영 어린아해로 멈춰서, 자라지 못한다.

입에 물려준 눈깔사탕을 당장 뱉어내고,

세발자전거를, 나이키 운동화를 사내라 더욱 큰소리로 당당히 외쳐야 한다.

이를 고고성(呱呱聲)이라 이른다.


흔히 고고(呱呱)를 그저 아이가 우는 소리 정도로 알고들 있다.

이것 단순한 이해 단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呱呱墜地라 하듯,

呱呱란 아이가 태어나 처음으로 우는 소리이긴 하지만,

이는 마치 부처의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와 같은 언명이라,

제 존재, 개별 인격의 만천하(滿天下)를 대(對)한 선언이기도 한 것이다.

헌즉, 고고성은 울음이 아니라, 개별 주체의 인격적 선언명령인 것임이라. 


복지(福祉)란 무엇인가?


현대의 복지학적 정의를 무시하고,

나대로 해석을 해보련다.


福이란 자의대로 푼다면,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면,

따라오는 댓가, 행운 같은 것이다.

하니, 이런 준비가 없다면 복은 내려오지 않는다.


하니까, 제물로 바치는 제육(祭肉)과 술도 복의 전칭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 않은가?

신에게 공물도 바치지 않는데,

뭣이 예쁘다고 복을 내리겠는가?

자자, 이쯤이면 福의 함의를 느낄 수 있겠음인가?


福의 반대는 화(禍)이다.

이 역시 하늘을 역(逆)하면,

하늘에서 재앙이 내리니,

화복은 모두 하늘이 주관한다는 세계관을 고대인은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 지(祉)란 무엇인가?

이 말도 福과 거의 같다.

혹자는 이 글자를 파자하여,

福이 止한 것이라 푼다.

즉 복이 머물러 움직이지(떠나지) 않는 상태를 그리고 있다.


하니까 복지란, 이 풀이대로 하자면, 하늘이 내려 주는 것이다.

현대사회처럼, 나라가 시민들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다.

저 촌부의 말처럼 국가에서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닌 것이다.


福善禍淫이라,

선한 이에겐 복이 내리고,

악한 이에게 화가 내릴 뿐이다.


결국 하늘이 아니라, 개별 인간에게 달린 문제로 환원된다.

신이 할 일을 국가가 대신할 수 있는가?

신은 고도의 추상적 존재이다.

존부를 증명할 수 없다.

신을 믿는 이도 있겠지만,

신을 인간현상의 하나로 여기는 이도 있다.

잠정적으로 신을 밀쳐놓으면,

화복은 결국 국가가 아닌, 개별 인격에 귀착한다.


이리 생각한다면,

고대의 복지관이야말로 현대의 복지관보다 사뭇 세련되었다 하지 않을 수 없다.

누가 누구에게 시혜(施惠)를 베풀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민, 시민 

각각 개별 주체 윤리적 문제에 귀착된다.

헌데, 과연 이게 경제적 보상(報償)에 이르는가?

하는 것은 양자는 상관이 없거나, 있더라도 현실적 장애가 있다.


이제 다시 생각한다.

인간복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도대체 왜 동물복지, 식물복지를 말해야 하는가?

아니, 왜 새삼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가?


이 현실 내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뭐 대단한 연구나 조사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 내가 끌어내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여도,

바른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원래 노자에 나오는 말이긴 한데,

이를 제 문장에 끌어들여, 풀어놓은 글이 여기에 있다.

하여 이를 꺼내든다.


老子又說:“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失宇作流字解,則道德仁義禮五者,是連貫而下的。老子洞明萬物變化的軌道,有得於心,故老子言道德,作爲老子的弟子,孔子重仁,孟子重義,萄子重禮,韓非重刑,從而完成了先 - (李宗吾)


“노자가 또한 말했다.


‘도(道)를 잃은즉, 덕(德)이 나타났고,

덕(德)을 잃은즉, 인(仁)이 나타났으며,

인(仁)을 잃은즉, 의(義)가 나타났고,

의(義)를 잃은즉, 예(禮)가 나타났다.’


‘실(失)’을 ‘류(流)’자로 다시 풀이해보면,


“도덕인의례(道德仁義禮) 다섯은 연하여 아래로 꿸 수 있다.”

(※ 즉 도가 흘러 덕이 되고, 덕이 흘러 인이 되며, 인이 흘러 의가 되고, 의가 흘러 예가 된다는 말.)


노자는 만물변화의 궤도를 철저히 알았던 것이다.

마음에 얻은 바 있으니,

노자는 이를 도덕이라 하였다.


노자의 제자들은 이를 두고 각기 지어내길 이러했다.


즉,

공자는 인(仁)을,

맹자는 의(義)를,

순자는 예(禮)를,

한비자는 형(刑)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각기 제 길을 완성하였다.”


이종오 선생은 중국학술지추세(中國學術之趨勢)에서

성현(聖賢)에 대해 이리 등급을 매겼는데,


부처 - 장자 - 노자 - 공자 - 고자 - 맹자 - 순자 - 한비자 - 양주 - 묵자 - 스펜서 - 다윈 - 니체


이에 대하여는 내 의견을 언젠가 덧붙인 적이 있는데,

여기까지는 더는 말하지 않겠다.


다만, 위에서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이 이후에 나오는 노자의 원문을 다시 더 새겨본다.

그러면 이제 내가 하려는 이야기가 보다 명확해진다.


(故失道而後德,失德而後仁,失仁而後義,失義而後禮。) 夫禮者,忠信之薄,而亂之首。前識者,道之華,而愚之始。是以大丈夫處其厚,不居其薄;處其實,不居其華。故去彼取此。


“()

대저 예란 충신(忠信)이 옅어져, 환란이 일어나는 근본이다.

남보다 앞선 지식이란 것도, 도의 겉치레라 어리석음의 시원이 된다.

그러므로 대장부는 두터움에 처하지, 얄팍함에 거하지 않는다.

실속에 처하지, 겉치레, 화려함에 거하지 않는다.

고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그러니까 道-德-仁-義-禮는 차서로,

세상이 본을 잃고 망가져 가는 실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 복지 또한 禮의 말단에 서서,

국가가 시민복지, 사회복지를 한다며, 짐짓 조빼며 염치를 차리려 하는 것이요.

동물복지, 식물복지는 인간이 저들 뭇중생을 향하여 잔뜩 생색을 내는 짓이 아니랴?


가만히 생각해보라.

아니, 왜, 도대체 저들에게 복지가 필요한가?

애시당초 그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으며 되는 것이지 않은가?

세상이 진작 망가져 버렸음인데,

그리 되도록 방치하고, 동조하고, 가담해놓고,

아니 그런 척, 

저 멀리 내빼놓고는,

뒤늦게 슬그머니 돌아와,

나 이제 네들을 좀 보살피려 해.

이리 잔뜩 폼을 잡는 것이 아닌가?


하니까 동물복지, 식물복지는,

저 촌부의 말처럼 혜택이나 시혜가 아닌 것이다.

결단코.


이는 인간의 시뻘건 부끄러움의 증표일 뿐이다.

착해서 그런 것이 아니란 말이다.


동물복지란 말 앞에서,

우쭐되지 말란 말이다.

식물복지란 말 앞에서,

부끄러움을 우리의 가슴에 되새겨야 한단 말이다.


마트에 들어가 유기농, 유정란, 또는 동물복지 인증 표시가 된,

달걀을 집어 들며, 착한 사람씩이나 되고 마는 당신들.


과연 그대 당신들이 착한 이들인가?


오늘, 그 잘난 그대 당신들에게,

나는 이 물음의 칼날을 던지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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