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 유감
내가 사는 동네엔 주민들이 산기슭을 일구어 만든 텃밭이 제법 많다.
구청에서 푯말을 세워 위법행위라고 고지하고 있지만,
몇 년을 지켜보아도 텃밭은 여전히 무사하다.
구청측은 그 고지행위를 통해 태만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사고,
주민들은 남의 땅에서의 영농행위를 은근히 묵인 받는다.
이 땅에서, 일상으로 재현되는 이 뜬물 같은 결탁행위가 이런 경우에만 해당하련만,
텃밭 자체가 과히 흉한 것은 아니며,
거기 소박한 정성과 소망이 지펴지고 있음이니,
꼬물거리는 감수성(?)을 눅이며, 그냥 지나치곤 한다.
감수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밭 자체가 아니라, 그 주변에 벌어지는 작태에 반응하는 내 모습을 그린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냥 수풀이 낫지, 비닐멀칭 덮힌 텃밭이 좋을 것은 없다.
게다가 텃밭 주인들의 끊임없는 욕심 때문에 밭은 조금씩 확장되어,
산기슭을 범하고, 차츰차츰 사람 다니는 소로길도 먹어들어온다.
하지만, 도시에서 텃밭을 가꾸며, 소일하는 이들의 마음이야말로 얼마나 갸륵한가 말이다.
조금만 나이 들면, 노인정에 죽치고 앉아 끽연, 화투질로 세월을 보낸다든가,
국립공원 안으로 출퇴근하며, 싸움질, 술질, 화투질, 쓰레기투기 등으로
잔명(殘命)을 농탕(弄蕩)질하는 가련한 이들에 비할손가 ?
그게 아닐진대, 손이라도 꼭 잡아주며 격려라도 해주고 싶기까지 하다.
금년 봄엔 주위에 텃밭이 5개가 새로 만들어졌다.
더 이상 들어설 곳이 없을 것 같았는데도,
용케도 틈을 비집고 장만을 했으니,
그 감투정신에 아연 놀라고 만다.
텃밭을 만드는 사람들은 버려진 나뭇가지, 돌 등을 긁어 모아,
울 삼아 둘레 경계를 짓고, 흙을 돋아 어엿한 자기만의 공간을 지어낸다.
비록 손바닥만한 밭이지만,
이른 봄 고랑과 두둑을 정갈하게 만들어 논 것을 어느 날인가 문득 마주치게 되면,
참빗으로 야무지게 빗어, 차라리 파르라니 빛나는 계집아이 가르마를 대하는 양,
문득 내 마음에 낭랑(琅琅)하니 맑은 소리가 지난다.
짤랑 부딪힌 옥구슬인들 이리 청쾌할까 ?
그런데, 내가 몇 년을 두고 관찰한 것이지만,
저들 텃밭의 경계 밖은 바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하고 있다.
필시 지나는 행객이 저지른 것일 터지만,
온갖 쓰레기가 너저븐하게 널려 있다.
깨진 병조각, 각종 폐비닐, 폐가구 ....
심지어 저들 밭을 에우고 있는 울벽도 쓰레기가 점점이 박혀 있다.
밭뙈기를 가르는 밭두둑(畦), 그 안과 밖은 기름과 물처럼
못내 등지고 화해하지 못할 경계일런가 ?
울은 왜 존재하는가 ?
바둑을 위기(圍棋)라고 부르기도 한다.
위(圍)란 에워싼다란 말이니,
바둑이란 흑백 갈라 각기 제 울을 쳐서 영역을 가르고 다투는 놀이기에,
위기라 덧새겨 그 이름 뜻을 오연(傲然)히 밝히려고 함이 아니겠는가.
위전(圍田) 역시 제방으로 빙 둘러싼 밭을 일컫는다.
위리안치(圍籬安置)란 것도 리(籬)가 울이니,
울로 둘레를 에워싸고 죄인을 그 안에 가둬 앉히는 것을 두고 이름이다.
이렇듯 울타리 쳐두는 것은 모두 나와 남을 가르는 짓이니,
필연, 여기 욕심이 내재하고, 다툼과 갈등이 발생할 소지가 있음이라.
그럼 세상에 울이 없으면 어찌될까 ?
당장 바둑이란 게임이 없어질 것이며,
80년대까지 기껏 5층, 높아야 10층이던 아파트가
지금 수십층으로 올올(兀兀)히 하늘을 솟았다한들,
이내 모두 허물어질 것이 아니랴 ?
우리동네 텃밭 울도 없어지고, 길도 밭도 구별이 아니 되며,
네 밭, 내 밭 경계도 없어질 것이라.
하지만, 주인이 없으면,
울 밖은 물론이거니와,
그나마 안까지 기어히 엉망이 되고 마는 것이 또한 인간사 이치이니,
마냥 부재가 자랑이요, 선(善)은 아니다.
나는 지금 울의 선악을 얘기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두둑 밖의 쓰레기를 보고는 울적하니 마음이 언짢아지고 있을 따름인 게다.
몇 년이 지나도 버려진 쓰레기가 손 하나 까닥없이 그대로임은 물론이거니와,
년년세세 쓰레기가 보태지며 늘어나고 있다.
텃밭을 만들어놓았으니, 한 해 내내 주인이 밭을 수십번 오가지 않겠는가 ?
그런데도 제 밭 두둑 밖은 오불관언 눈길도 주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는 게다.
참 딱한 노릇이지만, 이런 현상을 관찰하면서 나로서는 뜻밖에 제법 공부가 깊어진다.
한 3주전 곁을 지나다 외진 귀퉁이 밭 주인을 우연히 만났다.
두 아낙이 밭을 돌보고 있었다.
마침 한참 오르다 게서 멈춰 숨을 고르던 차이며,
모두 점잖아 보이는 행색인즉,
늘 의심을 품고 있던 바를 조심스레 물어봤다.
“밭 주인이십니까 ?”
“그런데요.”
“이곳을 수년전부터 지나고 있는 객인데, 개인적인 하나의 감상이 있습니다.
마침 뵈오니, 말씀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
“네, 말씀하세요 ?”
“여기 밭이 꽤 많이 있는데, 통행로에 왜 이리 쓰레기가 많은지 놀랐습니다.
필시, 오가는 행객이 그리 한 것이겠지만,
밭을 거저 빌어 쓰고 있는 밭주인들이 오가며 주섬주섬 치우는게 도리가 아닐까 ?
이리 생각해보곤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좋으신 말씀입니다.”
“밭을 고르고, 푸성귀를 길러먹는 마음이 장(壯)히 아름답습니다만,
이곳에 의지하여 무엇인가 구하여 얻음이 있는 분이라면,
바로 한발 밖으로 내딛으면 거기 쓰레기가 있은즉,
마땅히 오갈 때, 주워내며 보살피는 마음이 일어야 하지 않겠는지요 ?
이야말로 안팎으로 덕을 기르는 것이니, 곧 복 짓는 마음이 이러한 것 아닙니까 ?”
“미쳐 보지를 못해서 ...”
제 밭은 눈을 부릅떠 알뜰살뜰 밝히 살필 수는 있어도,
단 한 발짝만 떼어도 펼쳐지는 이웃엔 칼로 자른 듯 나 몰라라 하는 저 마음보들.
참으로 밉고도 흉코뇨.
이게 한 두해가 아니요, 무릇 수년간 겪은 일이요,
수많은 밭이 있지만, 어느 밭주인인들 그렇지 않은 이가 없음이니,
이젠 새삼 놀랄 일도 아니오,
그저 두루 펼쳐진 일반현상에 불과하다.
하기에 도리없이 나는 이런 현상 일반을 무던히 견디어내고 있음이다.
견디어내지 않은들 나 홀로 배겨낼 재간이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저 아낙네들을 만난 지 지금 얼추 3주가 지나고 있지만,
한 치도 다름없이 그 밭 주위엔 쓰레기들이 여전히 나뒹굴고 있다.
도대체 부끄러움이 없다.
말갛게 화장한 저들 아낙네들,
저 가장(假裝)된 얼굴들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변주(變奏)인가 ?
난 못내 사람들이 무섭다.
이명박의 대운하 역시 저런 마음보들의 거대한 상징이 아닐까 ?
인간 對 인간을 편 가르고,
인간 對 동물을 발기고,
인간 對 자연을 찢어버리고 만다.
저 천박함, 몰염치가
끝내는 광우병을 만들어내고,
온 산천을 파헤쳐내며 질주하는 욕망의 실체가 아니겠는가 ?
내 어렸을 적엔 집 앞 골목을 저마다 쓸었다.
나는 대문 밖을 지나, 저 밑 동네 길목에 선 전봇대까지 신나게 빗자루질을 했다.
지금은 내 대문 밖을 벗어나면 단 한 치도 내 집 일이 아니다.
그렇다 하여, 이 공적 공간을 관리할 주체들의 의식이 달라진 것이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다.
공무 담임자들이 이를 담당할 의지도, 역량도 전혀 확립이 되어 있지 않다.
실제 나는 이 산동네로 이사와서 부단히 이들을 일깨우고, 채근하였지만,
저들의 나태함과 오만엔 당할 재간이 없다.
나 외의 것을,
급속히 대상화하고, 수단화함이 이젠 모두 마루 경지에 올랐다.
하기에, 몰입교육, 광우, 대운하 등등 모두 조져버리는 데 일등인 선수를
대통령으로 뽑아내지 않았던가 말이다.
이런 형편인데,
“대운하 소리만 들으면, 머리가 깨지는것 같다.”라는 이 말씀이란
얼마나 무망(無望)한 하소연이란 말인가 ?
듣잡기에 내국인으로서 여간 무렴(無廉)한 노릇이 아니다.
이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찍어낸 한국 국민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경제’에 몰빵해보고자 그리 했다면,
그와 새삼 무엇이 다를 바 있겠으며,
또한 이제와서 그를 탓할 염치인들 있겠는가 ?
안팎으로 자반뒤집기를 하는 사람들 인심을 볼 적시니,
허깨비인들 이리 부박스러우리 ?
이리 적고 보니,
잘못하다가는 정선희 짝 나겠다.
촛불(燭火)이 문제가 아니라,
그리 심화(心火)를 불지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 땅의 현실에 나는 나대로 심화가 솟을 뿐임이랴.
정선희 문제에 대하여 앞뒤로 자세한 것은 몰라도,
“백인 중 일인은 혹간 다른 시각에 서서 자유롭게 말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하는 감상을 갖는다.
외려, 천편일률적으로 빠짓하고 까짓하는 것이야말로 어처구니 없는 폭력 아닐까 ?
진정, 이명박이 염치 접은 폭력의 실체라면,
모두 촛불을 들어야 한다고 우기거나,
촛불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 일부를 자전거 도둑과 비교하였다한들,
이를 촛불집회를 능욕했다고 발끈하는 편협함이야말로 정작 경계하여야 할 것 아니겠는가 ?
내가 보기엔 정선희가 촛불집회를 대놓고 직접 폄하한 것이란 증거는 없는 것 같다.
(※ 물론, 정선희의 전력이 이전부터 그러하다면, 이번 사건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해석할 수도 있겠거니와,
나는 그에 대하여 이번 건 말고는 아는 바가 전혀 없다.
하여, 이번 건에 국한하여 평하는 한계가 있다.
나중 자세한 정보를 얻게 되면 입장을 다시 정리하여 기록해두고자 한다.)
그 인용하는 함의만 취하는 여유조차 없는 저들이야말로,
그들이 까대고 있는 이명박의 또 다른 모습이 아닌가 ?
그게 아니라면, 얼마전 경제에 올인하겠다며 그를 찍은 저들은 또 무엇이며,
이제 와서 촛불 드는 사연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나 역시 마음에 촛불 하나를 종일 불 밝혀 들고 있지만,
그렇다한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짝 아닌가 하는 부끄러움이 없을손가 ?
앞전 노정권에서는 촛불 들고는 종내 까대고,
이번엔 표 찍어놓고는 촛불 들고,
도시 체면이 서지 않는 짓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이냐 ?
이 모두 내겐 도무지 생경스럽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곱게 화장하고 밭에 나서서는 이악스러이 푸성귀 몇 잎 따가지고,
콧노래 부르며 집으로 돌아갈 저 아낙네들이야말로,
이명박 대통령 모시고 함께 복락을 누릴 꿋꿋한 이 땅의 전사(戰士)일지니,
못내 이를 본받지 못하는 이내사 나야말로 천하에 변변치 못한 인사라 할 터라.
화면 왼쪽 밭이 두 아낙네가 있었던 곳이다. 그 밭은 제법 깔끔히 손질되어 있다.
하지만, 한 뼘을 벗어나지 않은 자기 밭두렁은 보다시피 깨진 도자기,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화면 가운데 골짜기는 작년에 내가 들어가 치어내기까지 하였다.
보이지 않지만, 화면 왼쪽으로 죽 내려가며 여러 밭이 조성되어 있는데,
역시 쓰레기가 제 멋대로 버려져 있다.
최근 조성한 밭 역시, 바로 주변엔 쓰레기가 그냥 방치되어 있다.
자기 밭은 길변까지 한껏 침범하여 돌무더기 울타리로 중무장되어 있다.
제 입에 들어가는 푸성귀 가꾸는 터전만 알뜰히 눈에 들어오지
단 한 뼘 바깥으론 손 하나 까딱하기 싫은 것이다.
이들을 탓하고 싶지 않다.
나로서는 진작 저들을 어찌 할 바 없음을 아는 즉, 새삼 탓할 심리적 단계를 지나버렸다.
나는 다만 이를 통해 적나라한 인심의 심천과 경중의 향배를 살펴 깨우침을 얻는다.
산 아래 동네에 살 때는 겪은 바, 이리 인심이 부박스러운지 몰랐다.
이제 여기 들어와 직접 거래하지도 않는 인심을 통해 그 실상을 외려 속속들이 알게 되다니,
나는 한참을 아무 것도 모른 채 살았나 보다.
***
덧붙이건데,
그런데 말이다.
동네 텃밭도 단 한 발 밖에 나서면 쓰레기가 놔뒹굴며 엉망인데,
천하의 인심이 이리 이악스러운 형편인데 ...
미국 소고기에 라벨 붙여 30개월 전후를 가린다고 처지가 달라질까 ?
법은 그대로 놔두고, 상인들 보고 자율적으로 지키라고 말한들 더 기대할 것이 있는가 ?
콩나물도 농약 치고,
두부도 횟가루 쳐넣는 형편이며,
생선 뱃속에도 납덩이 쑤셔박는 세상인데.
하물며, 바다 건너, 머나먼 땅에서 건너 오는 것에
딱지를 붙인들 그게 온전히 남아 있을 것이며,
500명 풀어 원산지 표시 감시한다고 한들 그게 지켜질 것인가 ?
연목구어(緣木求魚)라,
어디 누구로부터 무엇을 구하리요.
무릇 도적 하나를 지키는 이 열명이 당적할 수 없는 게 세상의 이치다.
개성 상인에게 전해오는 속담을 여기 되새겨 본다.
“일전을 보고 물 밑으로 오십리를 기어라.”
“하루에 십전을 벌기로 작정했는데,
구 전밖에 못 벌었으면 굶고, 십일전을 벌었으면 일 전어치만 먹어라.”
“한번 수중에 든 돈은 이문을 물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내놓지 말아라.”
“이익이 남는 장사를 하는데 손님이 열 번 밟으면 백 번 밟히는 시늉을 하라.”
“돈을 빌려 주지말고 차라리 마누라를 빌려주라.”
내 어렸을 때 초등학교 선생님께 들은 말이 생각난다.
개성 상인이 하나 있었다.
요기꺼리로 인절미를 사는데,
나중에 먹을 것인데도 몇 참 앞서 미리 사둔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먹을 즈음이 되면, 미리 사둔 게 살짝 쉬기 때문에,
부풀어 올라 양이 많아지고, 먹으면 잘 소화가 되지 않아,
조금만 먹어도 배가 부르니, 절약이 되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상인의 덕(德)은 리(利)를 그 본(本)으로 한다.
그런 상인 보고 의(義)를 기대하는 것조차 부질 없는 짓인데,
항차, 자율이란 미명하에 무엇을 더 권하겠다는 말인가 ?
이야말로 염치없는 짓거리 아닌가 ?
비릿하니 야살스러운 짓거리, 심히 흉커니 !
물론 상인의 이(利) 다툼에 대해 시비선악을 가리자는 얘기가 아니다.
다만, 상인의 마음보를 그 누구인들 통어(統御)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게다.
상인 출신 이명박은 그 이치를 남 보다 더 잘 알지 않을까 ?
하지만, 국민들인들 이를 모를까 ?
온냉자지(溫冷自知)
뜨겁고 차가운 것은 나이 먹으면 저절로 알게 된다.
혹, 이 뻔한 이치를 저만 알고 국민들은 모르겠지 이리 여기고 있는 것일까 ?
아득하니 길이 멀다.
참으로 부박(浮薄)스런 세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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