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궁즉통(窮則通)

소요유 : 2008.08.06 11:50


궁즉통(窮則通)

궁즉통이란 말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말이다.
이 말의 출전은, 주역 계사하전(繫辭下傳)이다.
이참에 다시 되새겨본다.

神農氏沒 黃帝堯舜氏作. 通其變 使民不倦. 神而化之 使民宜之.
易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是以自天祐之 吉无不利.

첫째 줄의 내용은,
“신농씨가 죽은 뒤 황제, 요, 순 등이 변화의 이치에 통달하여,
백성들로 하여금 게으르지 않게 하고, 신묘한 이치로 변화를 이끌어,
백성들로 하여금 그 마땅한 바를 얻게 하였다.”란 뜻이고,

둘째 줄은,
“역(주역)은 사물이 궁극에 달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하고, 통하면 오래간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하늘로부터 돕게 되니, 吉하여 利롭지 않은 것이 없다.”란 뜻이다.

오늘 이 말을 다시 떠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는 최근 두 가지 문제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지난번 글에 등장하는 시베리안 허스키(☞ 2008/07/29 - [소요유] - 새벽 신음 소리),
그리고 고양이&강아지件(☞ 2008/08/01 - [소요유] - 복 받을 거예요.) 때문이다.
이들은 주인이 있건만, 삶의 처지가 너무 열악하다.
저들 처지를 어찌 도와 바꿔줄 수 있을까 나는 궁리를 이리저리 트곤 하였다.
하지만, 별 달리 뾰족한 대책이 없어 그저 하릴 없이 심사만 괴롭힐 뿐이었다.

그런데, 시베리안 허스키는 비교적 다행스런 상황에 놓여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얘기를 먼저 풀어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지나는 길에 먹이를 주려고 그 집 앞에 섰다.
대문이 잠겨 있으면, 허술한 담장 틈을 넘어 축대로 내려서야하기에 좀 성가시다.
대문은 닫혀 있었지만, 마침 집 안에 처음 보는 남자가 서있다.

그를 불러 대문을 열게 하고, 이리저리 말을 꿰맞춰보니,
그 집 아들이란다. 이전에 본 젊은 학생은 이 분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니, 나는 그 때 고물할아버지의 손자를 아들로 잘못 여겼던 것이다.

그 아들이란 사람은 휴가차 아버지 집에 들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이 휴가 마지막 날이란다.
내가 저 개에게 당장 급한 게 목욕이니,
함께 목욕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대형견인즉, 혼자 목욕을 시키기는 어렵다.
그 녀석이 목욕중 혹 날뛰기라도 한다면,
곁에서 한 사람이 붙잡아 주어야 한다.

그는 털이 뭉쳐 먼저 잘라내야하기 때문에 그 일을 먼저 해야 한단다.
이리저리 그가 떨군 말을 주어 꿰맞춰 정리하여 짐작하거니와,
사실 그는 털을 좀 잘라보았으나, 그게 그리 녹록하지 않음을 알았던 것이다.

진창에 방치된 채, 도대체 헤아리기 힘든 나날을 지냈으니 털이 뭉쳐도 보통 뭉친 게 아니리라.
하니, 좀 있다 외출할 예정이겠다, 그저 이쯤에서 포기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내가 목욕까지 시켜야 한다고 주문하자,
털 깎는 것을 핑계되며 상황을 면하려는 양 싶었다.

나는 말하길
“털 정리야 목욕시키면서 해도 되는 것이요.
설혹 털깎기가 여의치 않는다한들, 우선은 목욕이 더 중하다.
저대로 그냥 놔두면 필경은 피부병이 생겨 큰 문제가 된다.
하니, 목욕을 시키자.
내가 지금 어디 가는 중이지만 당신이 목욕을 시키겠다면,
집에 가서 준비하고 다시 오겠다.”

그는 주저한다.
바리캉이 있어야겠다느니,
샴푸가 있어야하겠다느니, 하며 이리 저리 말을 돌린다.
바리캉이 여느 집에 있을 턱이 없겠고,
대개 샴푸가 없는 집이 없을 터.
없는 것을 구태여 찾는다거나, 있는 것을 걱정할 까닭이 있겠는가?
그가 이리 흰소리를 함은 핑계거리를 찾고 있음이리라.

그는 토요일 주말에도 가끔 들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때라도 내게 연락하면 내가 도와주겠다.
하지만 오늘 하는 게 좋겠다.
저 개가 너무 힘들어, 새벽녘에도 신음소리를 낸다.
나는 이리 말꼬를 틀어 은근히 그를 압박한다.

다행히, 그는 혼자 해보겠단다.

“그럼 나는 가던 길을 다시 가겠다.
꼭 부탁한다.”

삼세번을 신신당부하며 그 집을 나섰다.
돌아오는 길 다시 그 집에 들르니,
시베리안 허스키 그 곰처럼 커다란 녀석이 훤해진 모습으로 나를 반긴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중에 주말에 들려, 또 목욕을 시키게 되면 내게 연락을 하세요.
나와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는 멋쩍은 듯이

“주인인 제가 더 고맙지요.” 이리 말한다.

나는 그 집을 나오면서 그에게

“오늘 고생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이리 말하고 물러나왔다.

요즘 그 집 주변엔 도토리가 쉼없이 떨어져 나뒹군다.
내가 도토리 땅에 툭 떨어지듯 뱉어낸 말,

“고맙습니다.”

이게 그의 마음에 낮달처럼 걸리지나 않을까?
만약 그 대신 나라면, 그 말이 물고기 비늘같이 허멀건 비수가 되어 가슴팍에 와서 심장까지 뚫었으리라.

산길을 한참 걸어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하지만, 목욕도 하지 않은 내가,
그 내가, 저 녀석보다 더 시원한 느낌이다.
염천지절 찬 골바람이 가슴 속까지 불어든다.

알고 보니,
그 개는 주인 아들이 임자였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고물 할아버지 혼자 힘이 부쳐 건사를 못할 형편만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다행인 것은 그가 제법 개를 좋아하는 양 보였다.
그래 저마다 사정이 있을 터, 그리 아버지 집에 개를 떠맡길 사연이 있을 것이리라.
하지만 주말에도 들리는 형편이었고, 손자도 있는데, 그처럼 개를 방치할 수 있을 손가?
( 문득, 나의 예전 글이 생각난다. love와 like의 異同
  ☞ 2008/02/21 - [소요유/묵은 글] - 진선미(眞善美) ↔ 이친호(利親好) )

나는 내심 저 개가 이번 삼복을 넘길 수 있을까 염려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주인이 나타났으니, 그럴 가능성은 일단 없어 보인다.
그렇다한들, 처음으로 목욕한 것 외에,
그의 처지가 더 나아질 사정변경이 새로 생긴 것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그는 말하길, 더 넓은 집으로 누가 데려간다면 그리 할 생각도 있단다.
그런데, 그 집도 마당이 좁은 편이 아니다.
할아버지, 손자는 상주하고, 아들은 주말 정도엔 들리는 환경 하에서,
지붕도 없이 저리 진창에 방치했던 저들.
나의 채근에 따라, 운 좋게 목욕을 했다한들,
다음 또한 기약을 할 수 있을까?
하여간 이리 길이 열리면 오래 갈 도리가 생기리라.
이게 변즉통(變則通) 통즉구(通則久)의 이치일런가?
즉 변화가 생겨 길이 열리고(通), 열린즉 오래 간단 이야기인가?

그런데, 얼핏 變則通 通則久라는 말은 약간 의심스런 점이 있다.
변즉통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통즉구, 즉 통한즉 오래간다라는 말씀은 조금 석연치 않다.
통한다한들 그만으로서 오래 갈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혹자는 이를 번역하길 오래가는 것은 ‘통한 것’ 그 상태가 오래감을 뜻하는 게 아니라,
그 '변화의 일반 법칙'이 오랜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새긴다.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변(變)하여 통(通)할 수도, 막힐(塞) 수도 있다.
즉 변즉통(變則通)이 아니라, 변즉색(變則塞), 변즉망(變則亡)인 경우도 있다.
그러하니 진실로 구(久)한 것은 통(通)도 아니요, 색(塞), 망(亡)도 아닌 변화 그 자체가 아닌가?

성주괴공(成住壞空)
우주 삼라만상이 생겼다, 머무르고, 허물어졌다, 공으로 들어가는 것인즉,
어찌 통(通)한 것만 오래 가리요.
머무름(住)이 통(通)한 것이라면, 허물어짐(壞)은 곧 색(塞)이라 할 터,
주괴(住壞), 통색(通塞) 모두 공(空)으로 들어가고 만다.

하니, 나는 통(通)하다라는 말을,
우리가 일상으로 사용하는 막힌 게 해결되었다라는 의미로 새기기보다는
열린다라는 뜻으로 새겼으면 싶다.
통하든 막히든 현재와 다른 변화가 생겨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다라는 말로 말이다.
이리 새기면 이제 통즉구(通則久)라는 말, 즉 통하여 오래간다라는 뜻이
그리 어색하지 않게 된다.

마찬가지로,
그러하니, 窮則變 變則通 通則久에서
앞 두 귀(句)를 줄여 궁즉통(窮則通)이라 흔히 사용할 때,
이를 어디 막다른 구석에 처해졌을 때, 차후 변화가 일어 좋은 방도가 생겨 해결된다라는 식의
자기위안, 또는 아전인수식 해석에 안주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궁(窮)이란 게 어디 막혀 곤란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뜻을 한정시킬 것이 아니라,
현재 놓인 상황, 처지가 막바지 끝에 이르른 상태를 의미한다고 넓혀 새기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 상황을 궁(窮)이라고 하는 것이다. -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극(極)에 이르른 상태.
그러니 이내 변화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게 좋은 방향이든 더 나쁜 방향이든 하여간 ‘변화가 일어난다’ 라는 가르침,
그것이 窮則變 變則通의 올바른 해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새옹지마(塞翁之馬)의 고사(古事) 역시 화복(禍福)의 반복무상(反覆無常)함을 말하고 있음이다.

사물의 이치가 이러한즉,
이런 상황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하였을 때,
짐짓 앞서 포기할 일도 아니요,
막연히 좋게 해결될 것이라고 기대할 노릇도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역(易)의 가르침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사태가 변화한다.’, ‘변화하고 만다.’라는 사실에 대한 믿음이어야 한다.
역(易)이라는 글자의 뜻 역시 변화라는 뜻이 아니던가 말이다.
이런 믿음 하에 나의 노력도 억지가 아니라, 정성으로 이행될 것이며,
조급함이 아니라, 담담한 인내로 미래를 겸허히 맞이하게 되지 않을까?
敬, 이란 이런 경지가 아닐까?

그런데, 미루어 두었다가 여기에 이르러서야, 다시 바르게 새기거니와,
실은 구(久)라는 말은 불변(不變)함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우리 동양사상에는 사실 불변(不變)이란 개념은 아예 없었다.
그러하니 구(久)인 것이다.
그것은 지속(持續)을 의미할 뿐인 것이다.
이 말은 영원히 변화하지 않는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만 현 상태의 지속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다.
이는 동시에 언제고 변화할 가능성에 대하여도 열려 있음이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순환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봄 다음에 여름으로의 변화 또한 여전히 일어난다.
이런 변화 가운데의 지속성을 구(久)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늘 오는 봄이지만, 새봄인 것을 아는가?
봄은 봄이되 새字를 덧붙여 새봄이라고 새기는 그 경지를.

그리 정확한 것이라 보증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마치 나선(螺旋)형의 모습과 유사하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순환하는 변화가 늘 되풀이 되나,
다시 돌아온 금년 봄이 지난해의 봄과 한결 같지는 않다.
나선형의 변화라는 것도 전개 방향 정면에서 보면, 그저 원에 불과하지만,
빗겨 틀어 옆에서 보면 직선 성분을 갖고 나아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노자(老子)가 말한 천장지구(天長地久)에서
구(久) 역시 그러한 뜻을 갖고 있다.

그러하기에 천장지구유시진(天長地久有時盡)이기도 하다.
즉 ‘천지가 장구(長久)하지만 다할 때가 있음’이다.

(※ 참고
天長地久, 天地所以能長且久者, 以其不自生, 故能長生.
하늘은 너르고 땅이 오래 갈 수 있는 까닭은,
자기 고집에 따라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래 살 수 있음이다.

不自生 → 長生, 이 구조가 나는 인상적이다.
長生인즉, 이게 通則久 다음에 이르는 久則生인 것이다.
自生은 노자, 장자의 일관된 경계의 말씀 즉 機心,
또는 내가 가끔 말하고 있는 조작질, manipulation과 맥이 닿아 있다.
만약 천지가 장구하지 못하고 망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조작질 때문일 것이다.
멀쩡한 국토 대운하 판다고 난리치고,
일변(一邊) 병든 소 만들어내고,
또 한편에선 아귀처럼 욕심 부려, 병든 소를 수입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이게 바로 自生의 모습이다.)

***

이제 고양이&강아지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앞선 사연 : ☞ 2008/08/01 - [소요유] - 복 받을 거예요.)
이야기가 길어졌은즉 사뭇 줄여 기술(記述)한다.

밖으로 내다놓은 이들(동물) 또한 내 등산길에 만나는 친구들이다.
어느 날, 이들에게 먹이를 주는데,
고양이 한 마리 눈이 이상해 보였다.
동작도 사뭇 굼떠 몸이 편치 않아 보였다.
한쪽 눈을 잘 뜨지 못한다.
자세히 보니, 한쪽 눈알이 거의 허물텅 물처럼 상해 있었다.
무엇에 찔린 것인지, 어디 감염이 된 것인지 대단히 심각해보였다.

그 날 밤 주인을 만나려고, 그 집을 찾아 갔으나, 집은 비워 있었다.
그 주인은 연립주택 2층에 산다.
나는 1층 이웃집에 들러 언제쯤 그 고양이 주인이 들어오나 물어보았다.
공교롭게도 1층 집 사람은 오늘 이사를 왔단다.

나는 그 다음날 출행 계획이 있었다.
이리저리 궁리하다, 이를 미루고 그 주인을 다음날 만났다.
그와 십여분 이야기를 나누었으나, 별무신통이다.
그 집 주인은 저들을 생명체로 인식하지 않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는 적절한 치료를 부탁하며 다짐을 구하였으나,
그의 태도는 도통 신뢰할 만한 구석이 엿보이지 않는다.

팬티 바람으로 문을 빠끔히 열고 응대하는 그를 보자니 내가 다 부끄럽다.
고양이만 아니라면, 저런 염치없는 인간을 내가 상대할 일도 없겠지만,
상대한들 이리 부탁을 구하듯이 예를 갖추며 마주할 까닭도 없다.
섣불리 그를 건드렸다가, 혹여 그 불똥이 저들 동물들에게 튀기면,
아니 만남만 못하다.
나는 꾹 참으며 그를 상대한다.
내가 이 나이 먹고, 팬티만 입고 손을 맞이하는 저 무도(無道)한 인간들을 상대함은
오로지 저들 가여운 동물을 구하기 위함이 아닌가 말이다.

간밤에 비가 억수로 내렸지만,
정오 가깝도록 바깥에 내둔 동물들에게 아직 밥도 주지 않고,
자신은 퍼질러 자고 있다니.
정녕 저들 혈관에 따뜻한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인가?
이런 위인들이 한때 사랑하겠다고 고양이 둘, 강아지 한마리를 집에 들였단 말인가?
아, 이것을 사랑이라 부른다면, 인간의 사랑이란 얼마나 끔찍하니, 허무한가 말이다.
그게 사랑인가? 욕망인가?

그래서 나는 말하고 있음이다.
"글도, 말도, 얼굴도 믿지 마라"
(참고 글 : ☞ 2008/02/22 - [소요유/묵은 글] - 링컨의 얼굴)

마침 집에 있던 약을 갖다가 먹였다.
생각하기엔 염증이라도 멈추게 하면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궁즉변이요, 변즉통이다.
아침저녁으로 동네 동산을 넘어 그에게 약을 공급했다.
첫날 밤 약을 주고, 그 다음 날 일찍 가서 보니,
녀석이 눈알이 다시 보이며, 몸동작도 아연 활기가 찼다.
그 약이 잘 듣는 징조다.
조심스러웠는데, 이 약을 계속 써도 괜찮겠다.

오늘까지 이리 거푸 약을 다섯 번 먹였다.
오늘 보니 눈알이 완전히 살아났다.
다만 속눈꺼풀이 약간(2% 정도) 물러 보인다.
흔적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우려했던 실명이 되지 않았음이니,
그의 발걸음을 관찰해 보면 좌우 균형을 제대로 잡고,
뛰는 모습 또한 유연하다.

입을 벌리고 약을 넣어주는데,
이 녀석이 발로 버티느라고 발톱에 찔렸다.
손가락에 피가 난다.

수년전 월정사에 만난 커다란 고양이가 생각난다.
멸치가 든 밥을 먹고 있던 그는,
갑자기 처가 안고 있던 우리 강아지를 향해 휙 점프를 하며 공격해왔다.
순간 아내는 몸을 옆으로 틀었다.
그놈은 겨냥이 틀리자 아내의 팔뚝을 죽 긁으면서 내려앉았다.
피가 뚝뚝 꽃잎처럼 떨어졌었다.

이 정도면 위험은 이제 다 지난 것이다.
게다가 먹성이 살아나 동영상에서 보듯 친구까지 밀치고 밥을 탐한다.
이 역시 궁즉통(窮則通)이다.
집에 돌아와, 집식구와 함께 모처럼 기분이 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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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기 전, 오른쪽 눈이 몹시 상한 상태다. 누워 있는 것을 찍으려니 사진이 이리 돌려 찍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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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거의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또 문제가 생겼다.
나는 비닐상자로 만든 그들의 집을 치우고, 나무로 새집을 짓기로 작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놓여 있는 산기슭은 고양이 주인이 살고 있는 연립주택 1층 창문과 같은 높이로, 붙어 면해있다.
1층으로 새로 온 주인이 창문 틈을 청소하느라 열심이다.
이제 그녀와는 구면이다.

그는 나를 보더니, 냄새가 심하다고 하소연이다.
나는 주인도 아니면서 주인보다 더 다급하여 열심히 변명하기 바쁘다.

"저 동물들이 냄새를 피우기보다는 채마밭 옆에 버린 쓰레기가 더 문제다."

실제 고양이 주인이 만든 채마밭 한쪽 구석엔 각종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그 주인은 채마밭을 조성하여 고추를 기른다.
손바닥만 한 채마밭임에도 불구하고 쓰레기를 치우지도 않고,
게서 고추를 따먹는 저들의 태평함은 나로서는 아연 놀라운 광경이다.

내가 주말마다 달려가는 밭에는
2년 전에 잠깐 빌려주었던 이들이 비닐을 함부로 버려 둔 것이 있어 아직도 나온다.
나는 허리에다 커다란 봉지를 차고는 눈에 띄는 대로 주어내고 있다.
등산길에서도 남이 버린 오물을 줍느라, 나는 지쳐가고 있다.

도대체가 사람들은
왜, 쓰레기를 버리고,
강아지를 유기하고, 고양이를 저리 방치하는 것인가?


다시 돌아와 새로 이사 온 1층 주인 이야기다.
그는 열심히 내게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 한다.
나는 나대로 저들 동물들을 변호하느라 바쁘다.
주인이 부재한 현장, 객들의 변설만 난무한다.
이것은 한마디로 희극이다.
그래 너무 어처구니없어 도리어 슬픈 희극 말이다.

1층 여인은 신고하고 말겠단다.
신고하면, 저들은 필시 불행해지고 말 터.
궁즉통(窮則通)이 아니라,
다시 궁즉색(窮則塞)이다.
그러하니 불변(不變)이 아니라, 구(久)인 것이다.

일방 타이르고, 일방 으르며,
그를 설득하였으나,
1층 여인 역시 피해자임이라,
그녀의 각오는 쉽사리 꺾이지 않는다.

나무로 집을 짓는 것은 잠시 보류다.
거기에 떡하니 정식 개집까지 갖다 놓으면,
1층 여인을 더욱 자극하는 일이 될 터,
아직은 한 여름이니, 겨울까지는 여유가 있다.
조금 하회를 더 기다려 보기로 한다.

***

또 하나,
고양이가 있는 곳을 지나, 선원(禪院)을 가로질러 넘어가면,
연립주택들이 고개 좌우로 산개(散開)되어 있다.
그중 하나, 연립주택 2층 턱 밑에 그물을 두르고 코카 한 마리를 밖에다 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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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녀석은 그래도 한결 낫다.
주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나는 주인이 그리 흉한 분이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물그릇에 물이 항상 채워져 있다.
사료는 현장에서 지켜보기 전에는, 바로 먹어버리기에 잘 주는지, 아닌지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물은 개가 다 먹는 게 아니기 때문에, 주인이 주었다면 조금이라도 남겨져 있다.

“물까지 챙겨준다”는 것은 사료를 잘 챙겨주고 있다는 확실한 방증이다.
무심한 사람은 그저 사료나 주고 말지 물까지 챙겨주지 않는다.
그러하니, 비록 방치되었다한들,
물그릇에 물이 채워져 있는 한,
아직 주인의 관심과 사랑이 떠나지 않았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 녀석을 처음 발견하고 나서부터,
나는 간간히 맛있는 것을 주어왔다.
어느 날, 울타리 안에 스낵 빈 봉지가 버려져 있었다.
그것을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었지만,
혹 목에 걸리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나는 그것을 건져내 버렸다.

그날이후, 이 녀석이 나를 보면 마구 짖어댄다.
자신의 장난감을 빼앗은 흉측한 인간으로 오인을 한 것인가?
그래도 막상 나를 보면 꼬리를 살살 흔든다.
한참 지난 일이지만, 아직도 그날 자신을 훼방한 것이 몹시도 서운했던지,
가끔 짖곤 한다.

저 녀석의 처지도 곤궁한 편이지만,
앞에 있는 녀석보다는 한결 낫다.

***

나는 한비자(韓非子)를 생각한다.
이사, 상앙 등 법가를 다시 동원하여야 한다.
법가의 남상(濫觴), 순자의 성악설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무지, 불선(不善)함은 역시 법으로, 힘으로 다스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인간 본성이 성악(性惡)이라면, 이는 필연 법가의 태동을 예비하고 있었지 않은가?
한비자의 분노, 슬픔은 바로 이 지점에 서있다.
나 역시 그러하기에 분노와 슬픔을 늘 얘기하고 있음이다.
(※ 여기 '한비자'를 검색어로 찾아보면 내가 적지 아니 한비자를 그려낸 바 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아는가?
진(秦)나라 천하통일의 초석은 바로 법가가 닦았음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시인 강은교는 그의 시 '사랑법'에서 이리 노래했다.
사랑이란 시인의 '큰 하늘처럼'
또한 위대한 분노와 슬픔 뒤에 오는 것이 아닐까?

만부득 저들의 불의함은 역시 강한 응징으로 대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나는 다시 힘, 무력에 의지하고, 이를 동경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별로 한 것도 없으면서, 지금의 현실에 다소 피곤하다.
인간들의 악행에 지쳐간다.

내가 동물보호운동 일선에 나선다면,
나는 무장한 이들을 이끌고 싶다.
동물에게 위해를 끼치는 사람들을 힘으로 응징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싶다.
나는 나를 안다.
나는 생각보다 성질이 아주 고약하다.
오늘의 이 분노와 슬픔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나는 기꺼이 전사(戰士)가 되고 싶은 것이다.

그 날, 내가 있음을 기억하라.
그대 더러운 영혼을 나는 기필코 단죄하리.
이리 나는 내게 외친다.

내 태도가 인간에 대하여 불손(不遜)한 것이라면,
기꺼이 불손함을 불사(不辭)하며,
나는 인간 존엄을 구하고자 한다.

불법을 펴기 위해 떠나는 제자가 부처한테 물었다. 
"만일 누군가가 못되게 굴면 그를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부처가 대답해 가로되, 
"일곱 번 용서해라."

일곱은 차별의 세계를 상징한다.
일곱 번의 용서란, 만물을 긍정하자는 태도다.
하지만, 한번의 징벌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다.
그러하므로서 한 번이란 곧, 차별의 세계를 넘어 만물이 평등하다는 것을 상징한다.

나는 지금, 일곱 번의 용서가 아니라,
단 한 번의 징벌을 말하고 있음이다.

부처가 일곱으로 천하를 구하려고 한다면,
나는 하나로서 천지에 보(報)갚음을 하려 하는 것이다.

※ 참고 글 :
RULE에 대한 내 생각의 일단(一端)
☞ 2008/02/15 - [소요유/묵은 글] - 기우(杞憂) → 댓글 [2/2] 봉타 (aranyani) 참조.

***

산에 오르다 계곡을 촬영했다.
아, 물소리가 홀로 청아하다.
얼마쯤이면 저리 맑은 은빛 춤을 추며,
마음 줄을 울리는 소리가 될 수 있을까?



동물보호잡지 ‘숨’ (☞ http://cafe.naver.com/mzsoom)
김효진 편집인의 말씀을 붙좇아,
산동네에서 내가 만나는 동물들 사진을 올려보았다.

광기에 싸인 이 땅에,
‘숨’은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처럼 홀로 절규한다.
때론, 문득 멈춰,
봄비같이 촉촉한 감동의 속삭임으로,
잃어버린 우리의 순수한 영혼을 되일깨운다.

‘숨’은 머지않아 2호가 출간될 예정이다.
그를 만나야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무엇인가를,
끝내 자신한테.

숨은 블로그도 운영하고 있다.
http://blog.naver.com/mz_so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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