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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 남짓

소요유 : 2009.09.03 16:02


한 7년 전쯤이다.
일이 있어 여의도를 겨우내 나들던 때가 있었다.
때는 한 겨울인데 순복음교회 앞자락 강변께엔 늘 모진 바람이 불어,
인도를 오종종 뛰어가는 이들을 닦달하듯 뒤쫓아 가며 엄습했다.

나는 가끔 순복음교회 앞에 있는 버스정거장 매표소에서 비둘기 모이를 사고는 했다.
당시 한 봉지에 2000원 했는데 지금은 얼마가 되었을까?
보나마나 중국산이거나 미국산 등외품 사료일 터인데,
한줌에 2000원이라니 엔간히 비싼 폭이다.
사람 먹는 쌀보다 더 비싸다.
집에서 불린 보리나 쌀을 가져다 줄 때도 있지만,
어떤 때 짬이 났으나,
맨손일 경우는 부득불 사지 않을 수 없다.

아침이면 비둘기들이 눈구덩이 위에 꼼짝 않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을,
그곳을 지나며 늘 보게 된다.
아무리 미련하더라도 바람 몰아치는 계단을 피해,
어디 구석진 곳에라도 있었으면 좀 나을 텐데,
언제나 정거장 옆 한강 둔치로 내려가는 시멘트 계단 위에,
고단한 생을 좌판 벌려 시위하듯 떨고들 있다.
모진 운명에 자해라도 하듯이, 그리 항거하는지도 모르겠다.
필시 한 밤을 그리 떨며 새웠을 텐 데 너무 안타가워 가슴이 매워온다.

저들을 볼 때면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도 저 위에서 보기엔 저리도 한참 미련하게 보이진 않을까 싶다.
여름 한철 잠깐 멋있게 날자고,
(뭐 알고 보면 여름이라 한들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닐 테지만, 인간 눈에는.)
그 추운 겨울 변변한 먹이도 없이 북풍한설을 맞으며 저리 인내하여야 한단 말인가 ?
모이를 주기는 주는데 잘하는 짓인지 가끔 회의가 들 때도 있다.
모진 추위를 못 이기면 못이기는 대로 명줄을 놓게 되면,
그나마 고생이라도 빨리 면하게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도 든다.
구차한 명을 한줌 모이로 더 늘인들,
결코 그 녀석들에게 덕이 되지도 않을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새삼 지난 일을 이리 되떠 올리는 까닭은 무엇인가?
요즘 고물할아버지네 집을 드나들며 엇비슷한 생각을 하곤 한다.

어느 때부터인가,
저들 비둘기들이 내가 나타나면 우르르 몰려와 지붕 위에 내린다.
얼추 20 마리 남짓 한 무리가 내가 들어선 마당가를 굽어본다.
강아지들 물그릇, 사료 그릇을 닦아 챙기고,
묵은 사료를 마당가에 죽 흩으면,
저들은 아귀다툼을 하며 마당가로 내려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저 아사리(阿闍梨) 판에서도 힘 센 녀석이 먹이를 많이 주워 먹는다.
나는 그중 비쩍 마른 녀석을 겨냥해 새로 사료를 꺼내 던져 주지만,
정작 그 녀석은 놀라 내쳐 날아가 버리고,
엉뚱하게도 겁 없이 달겨드는 배짱 좋은 녀석 차지가 되고 만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원래 아사리(阿闍梨)는 불교 용어로서,
제자에게 본이 되거나 의식을 전수해주는 승려를 말한다.
그러하니, 이는 곧 가르침을 펴는 위치에 있는 승려이니,
계를 내려준 수계사(授戒師) 즉 화상(和尙)과는 다름이 있다.

나에게 계를 내려 처음으로 문 안으로 이끌어주신 스승도 귀하지만,
가르침을 내려 깨우쳐 주시는 스승은 또 어찌 귀하지 않으랴.

어쨌건 이런 거룩한 승려를 이르는 말이 어찌하여,
‘아사리 깽판’이란 험한 말이 되어, 저잣거리 진흙 바닥으로 내리 앉아버렸는가 말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이란 말도,
원래는 각 이판과 사판이란 스님의 직분을 가르는 말이 아니었던가?
그런 것이 이 말은 이젠 막장에 다다라 엉망이 된 지경을 이르는데 쓰인다.
야단법석(野壇法席) 역시나 마찬가지다.
야외에서 펼쳐진 스님의 설법 자리가,
시장바닥처럼 왁자지껄하며 시끄럽기만 할 뿐.
감로(甘露) 법음(法音)은커녕,
불사(佛事) 독려, 기복(祈福) 구걸로 장터를 방불 한다.

속됨을 여의고 이름도 거룩한 성(聖)스러움을 추구하는 저들 집단의
아름다운 말들이 세간에 이르러서는 헤진 걸레짝보다도 더 못한 취급을 받고 있음이다.

이게 속인들 스스로 허물어져 자포자기 심정으로 어깃장 부려본 소이(所以)이어든,
출세간인들의 타락함에 근인(根因)이 있든,
승속(僧俗) 모두 엉켜 들여가는 세간사이니 모두 책임이 있지 않을까 싶다.
성속(聖俗) 모두 참회해야 할 노릇이다.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 하였음이니,
저 비둘기들의 먹이 다툼은 곧 불인(不仁)의 현장이다.
하지만 인간은 불인(不仁)하지 않다.
아니, 않으려 한다.
인(仁)을 추수(追隨)한다.

나는 이를 대(對)하여 인인(人仁)이라 말하고 싶다.
천지가 불인(不仁)하다 한들,
인간은 인(仁)하다.
그런 의미에서 천도를 거스르는 것이,
바로 인간의 도리일런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길을 걷는 것이 인간이 마땅히 좇아야 할 태도라고 생각한다.

도교(道敎)에서 도를 수행하여,
삼천갑자 동방삭처럼 수십만 년 살게 되었다 할 때,
이게 어찌 자연스러운 노릇이겠는가?
도교 역시 자연을 거스르고 사람의 길을 닦고자 하는 것임이라.
하늘을 거슬려 인간의 가능성을 무한히 시험해 보고자 하는 노력,
이게 도 닦음, 즉 수도(修道)의 본래 진면목이다.
자연(도리)을 좇는 것이 아니라,
인간 독존(獨存)의 의지를 하늘에 대극(對克)하여,
창처럼 꼰아 든 인간의 자존(自尊)의식,
나는 이 의식을 꿋꿋하게 시험하고 펴보는 것,
또한 인간의 처연한 숙명이라고 생각해본다.

이렇듯 도교에서는 수심연성(修心煉性)한다 하였다.
유교에서는 이를 일러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 하였고,
불교에서는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 하였음이지,
그저 노자에서 말하듯 추구(芻狗)를 대하듯 무심한 자연을 따르라고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아니 실인즉, 인인(人仁)은 천지불인과 함께 우주의 서로 다른 모습을 각기 드러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인은 인답게, 천지는 천지답게 나아가는 것,
이게 불인(不仁), 인(仁) 전체를 초월하는 우주의 참 모습이 아닐까?

(※ 天地不仁 以萬物爲芻狗 聖人不仁 以百姓爲芻狗 天地之間 其猶橐籥乎 虛而不屈 動而愈出 多言數窮 不如守中.)

비둘기들은 저 혼자 살겠다고,
강한 놈이 약한 놈을 궁박하여 쫓아낸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약한 이웃을 부축하여 일으켜 세우고,
또한 가난한 이를 보살펴 함께 손잡고 씩씩하니 웃음 지으며 거친 세상을 걸어간다.
전자가 천지불인의 실상이라면,
후자는 인인(人仁)의 길이다.

하늘을 향해,
올연(兀然)히 일어서서
사람의 길을 밝히고자 하는 태도,
당연 천지의 도를 거스를 수밖에 없다.
여기 천지와 인간의 대립이 있다.
인인(人仁)은 그러하기에 선한 의지가 작동하지만,
천지불인은 무심(無心), 무사(無私)할 뿐이다.
선악을 떠나 나는 이게 인간이 마땅히 가야할 길이거니와,
호오불문(好惡不問)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하늘의 길을 가고,
땅은 땅의 길을 가고,
사람은 사람의 길을 제 각기 걷는 것임을.
천도가 있다면, 이들 삼자를 전체로 아울러 일러야 마땅히 천도라 할 수 있지,
천지불인 이리 하나로 좁혀 천도라 이름할 까닭은 없다.

자연보호라는 것도 어느 것이 어느 것을 감히 보호해준다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존중해 주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너는 너의 길을,
나는 나의 길을 걸을 뿐인 것을.

혹자 중엔,
스스로 불인(不仁)하면서,
천지불인 천도를 따르고 있다고 우쭐거리는 치들이 있다.
가령, 염치 버리고 남의 것 빼앗고,
눈이 시뻘개져 마지막까지 쥐어짜 욕심껏 자연을 유린하면서도,
부끄러움도 없이 원래 자연은 그러한 것이라고 외친다.
인간 역시 자연의 일부니 그리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그들은 말한다.

천지불인은 어디 한 곳에 매인 바 없음이니, 천도무사(天道無私)하다.
삿됨이 없다.
그러하기에 공평하며,
만물이 생성화육(生成化育)한다.

하지만, 그 치들은 다만 사익을 탐하여 유의(有意)할 뿐인 것을,
어찌 천지불인의 무사무욕(無私無慾)함과 견줄 수 있으랴.
불인(不仁)은 그러하기에 달리 무위(無爲)라 불리운다.
유위(有爲)한 저 치들은 배움이 없고, 깨우침이 없는 어리석은 깡패와 다를 바 없다.
저들은 결코 불인(不仁)한 것이 아니다.
단지 천박하고 사악(邪惡)할 뿐이다.

저들은 결코 하늘의 길, 땅의 길을 좇음도 아니오,
인간의 길조차 제대로 걷지 못하고 있음이다.

***

비둘기가
지붕에 앉아,
스물 남짓 외로운 둥지를 튼다.

잠깐새,
마당가에 내린
외로운 이들 스물은 이내 뻘건 전사(戰士)가 된다.

은은한,
달빛 아래
천년 비의(秘義)를 내려주시던 아사리는 아니 계시다.

지금 거기
개판, 깽판, 아사리 깽판.
깨진 사금파리처럼 스물 남짓 '숨'이 아프게 나뒹군다.

지금 거기
나는 仁과 不仁,
그 갈래 길에 망연히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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