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고전 역시 늘 깨부셔야 한다.

소요유 : 2012. 10. 31. 11:08


글이란 절대 가치 또는 뜻을 지니고 있지 않다.
말 역시 마찬가지로 화자(話者)나 청자(聽者) 불문,
그가 발하거나, 수용하는 때에 이르러 그 의미공간이 달리 설정되곤 한다.
 
같은 말이라도 화자의 필요 따라 얼마든지 다른 용도로 동원될 수 있다.
가령 어떤 이가 과유불급(過猶不及)을 꺼내 들고는,

‘과함은 모자름만 못하다.’

이리 은근히 주장했다고 치자.
그는 이 출처가 고전(古典)이라며 그 위광을 빌어,
사춤에 사뭇 어린 깃을 발려 곧추 세우기까지 한다.

그런데, 과연 과하고 모자름의 척도는 무엇인가?

난장이에겐 150cm도 커 보이고,
거인에겐 190cm도 작을 뿐이다.
 
장마철 마당가에 괸 웅덩이를 노니는 하루살이는 그게 세상 전체이지만,
하늘가를 나는 용에겐 남해 바다 전체도 작다.
 
하니 난장이가 말하는 과유불급과 거인이 말하는 과유불급이 어찌 한결 같으랴?
또한 하루살이가 자랑하는 웅덩이는 용에게 무슨 소용이 닿으랴?
 
가령 말이다.
난쟁이가 스스로의 처지를 아껴,
150cm 이상은 과하다며 나머지 사람들을 두고 어질지 못하다고 나무라며,
과유불급이란 말씀을 떡하니 꺼내들고는 뻐긴다고 하자.
 
‘과유불급’ 그 자체의 함의는 사뭇 그럴 듯하다.
하지만 난쟁이가 주장하는 과유불급은,
거인이 보기엔 가소롭기 짝이 없지 않겠음인가 말이다.
 
난쟁이 형편에,
선무당이 잡귀 쫓으려 옥추경 외우는 것도 아니고,
제 아무리 그가 꺼내든 것이 고전이라고 외친들,
비웃음만 사지 제 형편을 뒷받침 할 수 있으리요?
 
그러함이니,
정작은 과유불급이란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도대체가 과와 불급의 근량(斤量)을 어찌 잴 것이냐가 선결 문제인 것이다.
 
그러함인데, 과연 양(量)도 아닌 질(質)적 객체를 제대로 다룰 척도가 있겠음인가?
 
林林總總 千人千心. 萬人萬心. (임임총총 천인천심, 만인만심)
 
숲도 총총, 천인에 천 가지 마음이요, 만인에 만인의 마음일지니,
어찌 저를 만족시킬 수 있음인가?
 
그러함이니 남의 말을 인용 할 때는,
내가 그것을 동원하려 함은 아닌지 먼저 점검하여야 한다.
그리고 다시 자신에게 되물어야 한다.
이게 내 양심에 합당한가?
 
그 동원이,
다만 제 주장을 뒷받침하려고 단순히 그 뜻만 빌린 것인지,
더 나아가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억지를 부리는 것인지,
사리에 합당한지,
아니면 지금으로선 확정지을 수 없는 것인지.
 
진실과 양심을 거스르게 되면,
빌어 위세를 빌리려고 한 고전까지도 욕 뵈이게 된다.
아니 어떨 때는,
마치 밑품 파는 계집처럼,
고전이란 제 필요 따라 동원되는 욕망의 변용이 아닌가?
적이 이런 망측스런 의심마저 들고 만다.
 
기우도량을 베풀고 밤낮으로 용왕운우경(龍王雲雨經)을 독경한들,
밤새도록 계집질 한 팔난봉의 정성이 먹히우겠는가?
여전히 논밭은 거북등처럼 쩍쩍 갈라지고,
인심은 시랑 사갈처럼 흉흉할 뿐인 것을.

또한 한편으론,
혹여, 사안에 따라서는 앞일을 알 수 없을 경우도 있다.
나중에 결과가 나왔을 때,
세인들은 또한 필경은 이리 말하리라.
 
과하여 실패한 경우,
 
‘그것 봐 과유불급이야, 분수를 모르고 설치더니만 云云’
 
과하여 성공한 경우,
 
‘대담무쌍, 선견지명이 있어, 저자는 과연 영웅호걸이야’
 
....
 
도대체가 무엇이 과유불급인가?
 
과시 얄팍한 세태일지니,
결과에 따라 말이란 저리 동원되고 채색될 뿐이 아닌가?
 
헌즉 고전을 빌려 쓸 때에는,
자신이 호승지벽(好勝之癖)이 유난스러워,
짐짓 고전을 들춰내어 위세를 빌고 있음이 아닌가?
호가호위(狐假虎威)하고 있음이 아닌가?
먼저 점검함이 요긴하다 하겠다.
 
고전에 휘둘림을 당하면 아니 된다.
내가 주체적으로 해석하고 부려야 한다.
동원이란 주체적 해석이 아니라,
그저 폼 잡자고 꾸미는 것에 불과하다.
 
두텁 입술에 루즈 바른다고 양귀비가 될 터이며,
납짝 가슴에 뽕브라 찬다고 라퀠 웰치가 되랴?
계집이라면 뽕브라 벗어 재끼고 알몸으로 울어야 한다.
결국 사내녀석과 계집은 신혼 첫날 알몸으로 만나지 않음인가?
 
그러함이니, 고전 역시 늘 깨부셔야 한다.
또한 누군가에 의해 깨부셔져야 한다.
적나라(赤裸裸)라 하니.
 
이 때라서야 나를 어미로 하여 고전은 새롭게 피닉스처럼 부활하고,
내리 고전으로 살아남는다.
그게 아니고 동원하면,
종내는 게으름 피우고, 어리광 피우고, 뽐내고, 우쭐되게 된다.
사뭇 두려운 경계가 아니랴?
 
하기에 내가 가끔씩 말하는,
 
‘見神殺神 遇佛殺佛 逢祖殺祖’
 
‘귀신을 만나면 귀신을 잡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이게 그저 폼 잡기 위해 쓰는 것이 아니다.
난 명과 실이 부절 맞추듯 함께 하여,
현실에서 여여히 행으로써 입증되길 부단히 노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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