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ngta      

명함 하나

소요유 : 2012. 10. 30. 11:50


어느 주차장 입구,
주차 관리원과 손님 간 시비가 벌어졌다.

손님은 술이 취해 길길이 날뛰는데,
여자 관리원은 속수무책 어찌할지를 모른다.
주차장 입구엔 그 자의 차가 서있고,
뒤따르는 차들이 그에 막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내, 근처를 지나다 이를 보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 직원이 급히 달려온다.
이 둘은 바로 엉겨 붙어 이내 주먹이 오갈 태세다.

내가 급히 그에게 이른다.

“제압만 하되 절대 주먹을 내지 마시오.
내 사단이 벌어진 형편을 다 알고 있으니 뒷일은 감당할 만 하리다.”
 
술 취한 인간은 제 아무리 덩치가 크고 힘이 세도 기실 허깨비에 불과하다.
잔뜩 상기(上氣)되어 기가 위로 치올라 가기 때문에,
하체는 벌려놓은 지게 작대기처럼 허술하기 짝이 없게 된다.
그저 슬쩍 딴지만 걸어도 허공중으로 댓번 공중제비를 돌며 나가떨어지게 된다.
게다가 관자놀이 부근 태양혈을 수도(手刀)로 톡 갈기기만 하여도,
껍질 벗긴 수수깡 부러지듯 툭 거꾸러지게 된다.
하지만 아무나 흉내를 내어서는 아니 된다.
자칫 흉사를 치러내야 한다.
 
남자 직원이 서툰 몸짓으로 용을 쓰며,
취한(醉漢)과 몸씨름을 한다.
잔디밭을 두어 번 맴돌더니만,
급기야 취한이 땅에 쓰러진다.
용케 엎어 치며 남자직원이 암록을 걸어 누르고 있는 형국이 되었다.
 
조금 후,
경찰이 도착했다.
 
만사휴의(萬事休矣)
취한의 하룻밤 꿈은,
뻐개진 석류알 되어 주차장 아스팔트 위를 낱낱이 떼구루루 구른다.

내 남자 직원에게 명함 한 장을 떨군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염려 말고 내게 의지하시오.
지켜보았음이니 전후 사정을 다 알고 있어외다.”
 
집에 돌아 와 쉬고 있는데,
경찰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것을 성실히 일러주었다.
 
***
 
세상은 검은 물처럼 험하디 험한 곳,
산다는 것은 가도 가도 첩첩이 막아선 산처럼 난사(難事)인 게라.

섣불리 남의 일에 참견을 하다간 자칫 예기치 않은 변을 당하고 만다.
허니 남의 일은 모른 척 지나침만 못하다.
이러한 가르침이 면면(綿綿)히 이어 내려,
우리의 가슴 속에 졸졸 개울물처럼 흐른다.
 
한즉, 명철보신(明哲保身)이 최선의 가치로 자리를 잡았다.
 
내 몸, 내 가족을 굳게 지켜내는 것 외,
나머지는 다 분수를 모르는 허망한 짓임이라.
 
보신 잘하는 게,
곧 세상 이치를 밝게 꿰뚫는 것이지,
세상의 의로운 이치가 따로 있음이 아닌 게다.
저 명철보신이란 말은 그래서 사뭇 비릿하다.
 
말인즉슨,
바른 세상 이치를 꿰어 몸을 보하자는 것이로되,
실상은 바른 이치대로 살면 곧잘 몸을 망치게 된다.
 
하니 명철이란 말의 마지막 끝은 불행하게도,
돌아가는 대세를 추수(追隨)하여, 강한 것에 붙고, 약한 것을 피하여,
요령껏, 약게 살아야 된다는 말로 나아가곤 한다.
 
제 손에 피를 묻혀 더럽힐 까닭이 없는 게다.
남의 손을 더럽혀 내게 이가 된다면,
이게 곧 득책이요, 보신책일 뿐인 것을.
 
모든 이가 이런 식으로 살면,
저 술책(術策)은 더 이상 유효한 득책이 되지 못한다.
 
가령 저 주차장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양 당사가 제 주장을 펴며 서로 옳다고 할 시,
증인, 증거가 없는 한, 딱히 그 시비를 가릴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옳은 이라 할지라도 고군분투 홀로 사실을 입증해내야 한다.
황야에 버려진 이리처럼 감당하기엔 실로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증인이 한 수 보태주면 사태는 수월히 수습이 될 수 있다.
 
저 주차장 사건은 기실 취한과 주차원 사이만의 문제로 치부될 수 없다.
어느 날, 어느 곳에서 바로 내가 그 사건의 주인이 될 때는 없을손가?
이 때 ‘지켜보는 이’는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된다.
열쇠의 역할 또한 모든 이에게 열려져 있다.
 
기실, 진짜배기 보신책이라면,
당장의 욕됨을 이기고,
열쇠 역을 누구라도 자임하는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내가 위험에 처하였을 때,
누군가 열쇠가 되어 내게 다가오는 것이 예견된 사회.
난 우리에게서도 그런 사회가 도래하길 꿈꿔본다.
 
형세 역전되어,
내가 그 사건의 현장에 있을 때,
고립무원,
혼자로 버려져 있기 일쑤이다.
 
하지만,
사건을 벗어나 있을 땐,
오불관언.
혼자 안전한 곳에 처해 외려 즐기기까지 한다.
 
삼악성(三惡聲)

세상에서 제일 듣기 싫은 흉한 소리 셋이 있음이니,
곧,
사람이 죽었을 때 곡하는 소리,
불이 났을 때 외치는 소리,
도둑이 들었을 때 튀기는 소리를 이른다.
 
과연 그러한가?

악성(惡聲)으로 들리는 것도 잠시 잠깐,

상갓집에 가선 고스톱 치고, 술 처먹고 가가대소(呵呵大笑)하지 않았음인가?

불이 났을 때, 곤히 자고 있는 동생까지 깨어 이웃 불구경 가자고 신나하지 않았는가?
 
이웃에 도둑이 들었을 때, 은근히 깨소금 맛이라며 털린 김에 더 털렸음 하지 않았음인가?
 
여기 우리의 비극이 있다.
타자를 대상화(對象化)하는 버릇.
 
사람이 익어간다는 것은,
남을 대상화(對象化)하는 것에서 차츰 벗어나,
사물을 나에게로 이입(移入)함을 늘려가는 것을 말함이 아닐까?

남의 입장,
곧 슬픔과 분노를,
삼백 예순 날 하루 같이 내재화하는 제례(祭禮)를 치러내는 것.
 
그 구극의 말씀이,
天地與我並生,而萬物與我為一。
(천지와 더불어 내가 병생하며,
만물과 내가 하나이다.)
이라 할 터인데 ...
 
참으로,
갈 길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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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유 : 2012. 10. 30. 11:50 :